
2016년 터키 쿠데타의 이해 (1) - 간략한 터키 정치사
세속주의-이슬람주의 대결로 환원할 수 없는 터키 역사
어느 날 터키 대사관 측에서 연락이 왔다. 혹시 7월 13일부터 19일까지 시간이 되냐는 것이다. 석사논문을 마무리하고 딱히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은 있었다. 어떤 이유냐고 묻길래 터키에서 행사를 여는데 이때 참석해줄 수 있냐고 말해왔다. 행사 제목은 2016년 7월 15일, 페툴라 귈렌 테러리스트 조직(FETO)에 의한 폭력적 쿠데타 시도를 진압한 일을 기념하는 ‘민주주의와 국민 통합의 날 9주년 행사’였다. 2016년에 나는 23살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쿠데타 소식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항공료와 숙식비를 공짜로 제공해준다는 데 이런 좋은 기회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앙카라에 거하신 에르도안 각하께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으로 승낙을 하고 출국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귈렌파가 일으킨 음모라는 조사 결과와 이어진 터키 정부의 귈렌파 대숙청, 귈렌 송환을 둘러싼 트럼프와 에르도안의 갈등 정도밖에 몰랐다. 터키 외부에서는 이를 두고 에르도안의 독재적 통치 공고화를 위한 수작, 심지어 자작극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국내 숙청과 미국과의 갈등으로 인한 정치적 자유의 후퇴와 경제난까지도 많이 논해졌다. 물론 언제나 이런 시각을 삐딱하게 보는 나로서는 터키 정부의 입장을 어느 정도 반영하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글을 읽으며 나의 기준으로 사건을 판단한 뒤에 행사에 참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현대 터키 정치 전문가인 하칸 야부즈가 편집한, 유타대학교 출판부의 “7월 15일 쿠데타, 무슨 일이 벌어졌고 왜 일어났는가”라는 논문 모음집을 부랴부랴 읽었다. 단지 쿠데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귈렌 운동과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 정부를 둘러싼 역학과 터키 정치, 사회의 더 넓은 맥락까지 알 수 있는 귀중한 독서였다.

우선 귈렌 운동이란 무엇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사실 터키 공화국 정치사 전반의 흐름을 파악하고 시작해야만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터키 공화국은 1923년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하여 세속주의 국가로 건국되었다. 군부는 유럽의 문명화를 터키 민족이 지난 세월 겪은 고난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자강의 길로 여겼고, 세속주의를 문명화의 필수 조건으로 여겼다. 신앙의 자유는 허용하지만, 종교는 철저히 개인 내면과 사적 영역의 문제가 되어야만 했다. 케말주의에는 또한 국가 주도 경제(etatism)도 있었다. 서구식 교육을 받은 관료와 전문가 층이 주도하여 수입대체산업화를 이루어내야만 한다는, 1920년대의 정신을 흡수한 경제 노선이다. 케말주의는 아타튀르크가 재임하던 1930년대와 제2차세계대전을 근거로 그의 심복인 이스메트 이뇌뉘가 다스리던 1946년까지는 이견을 제시하는 게 불가능한 패권적 사상이었다. 터키가 존폐의 위기를 겪던 제1차세계대전 패전 직후의 상황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아나톨리아와 이스탄불을 지켜낸 민족 영웅 아타튀르크의 유지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50년대부터 터키에서는 케말주의에 대한 경쟁 이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조류는 종교와 경제에서 등장했는데, 이슬람을 공적 영역에서 더 자유롭게 표현해야하며, 나아가 국가 통치에 이슬람 도덕 가치를 도입해야 한다는 이들, 그리고 국가 주도 경제가 아니라 자유 시장 경제로 이행해야 한다는 이들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보수적인 지주 계층과 농민의 지지에 힘입어 이들은 터키 정치의 우파를 형성했다. 본래 공산당을 탄압하던 케말주의자들은 이슬람과 시장경제에 친화적인 우파에 대응하기 위하여 주로 공기업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 노동자와 공무원, 관료를 기반으로 좌회전을 시작했다.
케말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면서 터키 선거에서는 우파의 구조적 우위가 항상 나타났다. 서부 지역의 소수 엘리트를 제외하고는 터키 인구의 대다수는 아나톨리아 농촌에 거주하거나, 농촌에서 갓 도시로 이주해온 도시 하층민들이었다. 이들은 이슬람이 제공하는 생활 문화를 공기처럼 받아들이며 전통적 삶과 가치에 익숙한 계층이었다. 케말주의 국가 주도 경제가 경제 성장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종교적 보수층은 케말주의가 서부의 유럽화된 엘리트에게만 부를 몰아준다는 경제적 불만까지 함께 품게 되었다. 선거에서 이 우파의 불만을 최초로 동원하여 선거에 승리한 이는 아드난 멘데레스였다. 하지만 멘데레스의 위세가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우려한 군부는 터키 공화국 역사상 최초의 쿠데타를 일으켜 멘데레스를 처형했다. 이후 군부는 케말주의 유산을 지키고 국가를 정치적 분열에서 구한다는 명분으로 1960년, 1971년, 1980년, 1997년에 정치에 개입했다.

그런데 이 쿠데타의 역사에는 세속주의와 이슬람의 대립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60년 쿠데타와 1997년 군부의 최후통첩에는 분명 이슬람 정치에 대한 반감이 큰 동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1971년과 1980년은 맥락이 조금 더 복잡하다. 멘데레스 쿠데타 이후에 터키 정치에서는 중도좌파 성향의 케말주의자들과 중도우파 성향의 정의당이 경합하는 구도가 나타났다. 하지만 이 시기는 도시화, 경제 불안, 국제 문제 등이 겹치면서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흡수하지 못하는 다양한 비주류, 혹은 급진 세력들이 급성장한 때이기도 했다. 좌파에서는 냉전 시대 소련과 중국의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 운동이 있었다. 이들은 때로는 소수종파인 알레비나 소수민족인 쿠르드와 결합하기도 했다. 우파에서는 이슬람을 강조하는 이슬람주의자들과, 파시즘에 준하는 튀르크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강경 민족주의자들이 등장했다. 1971년과 1980년의 쿠데타는 이 극좌와 극우 집단들이 광장과 거리에서 벌이는 상호 폭력이 너무 극심하자 군부가 민선 정치인들이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데 책임을 물으며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1980년에 케말주의 군부는 이슬람주의자들과 강경 민족주의자들과의 제한적 동맹을 추진했다. 냉전이 최고조에 이르던 당시 상황에서, 우파들에게는 터키의 진짜 위협이 공산주의자들과 알레비파와 쿠르드인의 ‘연합’이라는 시각이 팽배했다. 지정학적으로도 그러했다. 터키 북쪽에는 소련이 있었고, 서쪽에는 소련의 위성국들은 불가리아와 루마니아가 있었다. 그리스는 같은 나토 소속이었지만 키프로스 문제로 전쟁까지 불사한 숙적이라 믿을 수가 없었다. 남쪽의 시리아와 이라크도 친소 성향의 아랍 사회주의 국가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같은 미국의 동맹국이던 이란의 팔레비 왕정도 혁명으로 전복되었다. 터키 군부는 국내외 사회주의 세력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는 차라리 이슬람과 극우 민족주의를 포섭해야겠다고 판단하여, 튀르크 민족과 이슬람의 종합(Turk-Islam sentezi)이라는 이념을 만들었다. 케난 에브렌 장군이 일으킨 1980년 쿠데타를 기점으로 이슬람 도덕을 이야기하는 일이 튀르크 민족의 올바른 정신에 부합하는 것으로 서서히 용인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동시에 신자유주의가 터키에 상륙한 때이기도 했다. 케난 에브렌이 정국을 안정화시킨 뒤에 엔지니어와 관료 출신인 투르구트 외잘이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총리로 내치를 이끌었다. 외잘은 케말주의의 국가 주도 경제가 초래한 비효율이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다고 판단, IMF와 세계은행의 처방을 대폭 수용하며 경제 자유화 정책을 이끌었다. 물론 이는 케말주의가 제공하던 복지 네트워크의 축소를 불어오며 사회 불안을 야기했지만, 적어도 기존에 소외되어 있던 아나톨리아 내륙의 중소 자본이 유럽 등 새로운 수출시장을 발견하여 능동적으로 팽창하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며 터키 경제는 안정화될 수 있었다. 또한 68혁명 이후 자유주의적 인권 담론이 중요하게 작동하는 상황에서 터키 군부는 정치적 탄압을 언제까지 고강도로 지속할 수도 없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냉전이 끝날 조짐이 보이며 터키 정부는 언론, 출판, 교육 등 다양한 면에서 자유를 확대해주며 민주주의로 다시 복귀를 추진했다.

1990년대에는 자유화를 통해 마련된 공간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 약진했다. 아나톨리아의 중소기업은 이제 케말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공기업보다 강력한 경쟁력을 가진 수출기업으로 발돋움해 ‘아나톨리아 호랑이’로 불리고 있었다. 이 자본가들은 종교적 도덕과 소비 자본주의가 조화될 수 있음을 논하며 모스크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회단체를 후원했다. 급증한 도시 빈민가에서 모스크의 복지 네트워크에 소속된 이들은 이러한 신흥 자본과 연계를 통해 더 나은 교육 기회와 취업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신흥 중산층 엘리트로 성장해 케말주의 엘리트에 도전했다. 냉전이 끝나며 케말주의 유형의 강력한 동원, 억압 이데올로기의 적용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1970년대부터 비주류 우익 성향의 네즈메틴 에르바칸이 이끄는 복지당이 1996년 선거에서 승리하여 멘데레스 이후 이슬람의 정계 진출도 가시화되었다. 에르바칸은 이슬람의 가치를 공적 영역에 더 노출하고, 이슬람 도덕에 입각한 경제 개혁을 주창하고, 터키의 외교 정책 방향도 아랍과 이슬람 세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급진적 공약들을 내걸었다. 하지만 이에 위협을 느낀 군부는 1997년에 다시 한번 에르바칸의 사임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 민선 정부를 무너뜨렸다.
레젭 타입 에르도안은 에르바칸 정부 시기에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된 인물이었다. 그 역시 이슬람주의를 내건다는 의심을 받으며 재판 끝에 1999년에 징역 생활까지 했었다. 그러나 터키 정치의 기본적 구도는 1997년 쿠데타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케말주의 경제 정책은 실패했고, 이슬람을 향한 다수 국민들의 믿음은 흔들림이 없었으며, 자유주의 중산층의 성장으로 군부의 통제는 더는 작동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타성에 젖은 케말주의 공화인민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2002년 터키 총선에서 정의개발당을 이끈 에르도안은 지지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군부의 반발을 사지 않을 절충 전략을 개발했다. 그는 이슬람과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를 조합했다. IMF 경제 개혁안을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외자를 유치하고, 인프라 투자를 통해 개발되지 않았던 터키 내륙 경제를 세계 시장으로 끌어들였다. 아나톨리아 수출기업들이 급성장하고, 소외되었던 중앙과 동부 아나톨리아의 생활 수준도 빠르게 현대화되었다. 한편 그는 이슬람을 성급하게 공적 영역에 소환하기보다는,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공적 영역에서 이슬람을 표현할 수 있게 자유를 줘야 한다는 입장을 세웠다. 이는 케말주의자들 중에서도 서구식 자유주의를 수용해야 한다는 신세대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정책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걷히지 않는 군부와 강경 케말주의자들의 의심은 유럽연합을 통해서 해결했다. 에르도안은 동유럽으로 확장하기 시작한 유럽연합 가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국내의 정치, 문화 자유화가 유럽연합이 내세우는 가입 조건과 연동되고 있음을 역설했다. ‘유럽으로의 합류’가 케말 본인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후대 케말주의자들의 숙원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는 반박하기 힘든 주장이었다. 그렇게 터키는 에르도안이 집권한 2003년부터 GDP를 3배 가까이 늘리고, 이슬람과 자유민주주의가 조화되는 모범적 이슬람 국가로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2001년 9.11 테러와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미국과 이슬람의 ‘문명 충돌’이 매일 논해지던 시절에 터키의 존재는 많은 서방인들과 터키의 자유주의자들에게 서구 근대와 지역 전통의 조화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칭송을 받았다. 그러니까 집권 10년차, 2013년에 게지 공원 시위가 발생하며 사태가 급격히 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이 에르도안 1기에 터키 국내와 세계 전역에서 가장 엄청난 지위 상승을 경험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페툴라 귈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