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브리즈에서 제국이 흥기한 아르다빌로
사파비 제국이 탄생한 이란의 북쪽 끝으로
계속해서 아하드 호세이니 미술관으로 이어집니다. The Chain of Misery라는 이름의 작품인데 아하드 호세이니의 대표작 중 하나인 듯. 표현이 무시무시하다.
아하드 호세이니씨가 일본 문화에도 관심이 좀 있으신지, 일본 속담/관용구를 소재로 한 작품도 몇 개 전시가 되어 있었다. 물론 우리에게도 다들 익숙한 것이다. 정저지와... 원숭이도 나무에 떨어진다도 있었다. ㅎㅎ
아하드 호세이니씨의 작품 <전쟁>
인종차별에 항거하는 반제국주의를 표현한 작품.
미술관 1층을 대강 둘러보고 2층을 보러 갈까 하는데 노인 한 분이 와서 유창한 영어로 혹시 일본인이냐고 물어왔다. 나는 한국인이라고 대답했는데, 자기가 바로 이 미술관의 주인 아하드 호세이니라고! 이 작품을 만든 분을 직접 뵈어서 영광이었다. 예술에 조예가 있다면 여러 질문을 더 많이 했을텐데 그러지는 못해서 아쉬웠다.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아 일본 속담을 소재로 작품도 만들었는데 그래서 혹시 일본인이냐고 물어온 것이라고 했다. 얼마전 자기 미술관을 개관한 이래로 처음으로 방문해준 동아시아인이라고. 나는 한국에서도 이 속담과 관용구들은 몹시 친숙한 것이라서 너무 반가웠다고 인사를 드렸다.
2층에는 아제르바이잔 역사의 주요 예술인들의 두상이나 흉상을 전시했다. 타브리즈 공성전의 주인공 사타르 칸은 물론이고, 오늘날 북방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서도 기념하는 퓌줄리, 니자미 간자비 등 여러 문인들도 있었다.
'시인들의 묘'라는 곳인데 시인뿐 아니라 타브리즈의 주요 정치인, 예술가, 명사들을 모신 판테온 같은 느낌의 장소다. 아하드 호세이니 미술관 바로 근처에 있다.
여기서 예상치 못하게 홍대에서 바로 튀어나온 것 같은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후드티를 입고 있는 20살 언저리의 젊은 여학생을 만나서 손가락 하트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ㅋㅋ
타브리즈는 이란의 경제 특구 중 하나인 '아라스 자유 구역'에 속해 있는 곳이다. 도시의 위상을 생각했을 때 아마 중심일 것이다. 러시아 제국이 남하하며 코카서르를 장악한 이래로 이란의 북쪽 국경은 아라스 강을 따라서 그어졌는데, 소련이 망한 뒤에는 아제르바이잔 및 아르메니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서로 국교가 단절된 상태지만 이란은 이 두 국가와 모두 교류가 있기 때문에, 아라스 강을 넘나들며 무역을 촉진할 중요성이 있어 경제 특구를 설치했다.
이런 연유로 최근 이란이 아제르바이잔과 관계를 대폭 개선하면서, 전임 대통령 에브라힘 라이시가 나히체반에 있는 아제르바이잔과의 국경 지대를 방문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돌아오는 길 헬리콥터를 타고 오다가 사고로 인해 사망하고 개혁파 마수드 페제시키안이 극적으로 당선되게 된다. 이때만 해도 전혀 알 수 없었던 일들...
아라스 자유 구역 사무실엔 뭐가 볼 거리가 있나 하고 들어갔지만 현재 닫은 상태라고 출입할 수는 없었다.
다음 목적지는 카스피해와 맞닿아 있는 길란의 라슈트이다. 지도의 오른쪽 바다에 면한 곳이다. 원래 여행 계획은 바쿠에서 남쪽 랜캐란(하트 표시)으로 내려와서, 아스타라의 육로 국경을 통과하고 바로 라슈트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 출국을 준비하기 며칠 전에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육로 국경이 기약 없이 여행객들에게는 폐쇄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이란에서 거의 3주 이상을 체류한 다음에야 라슈트를 방문하게 되었다.
문제는 역시 노루즈 신년 기간이라 대중교통 표를 도저히 구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 이럴 때는 보통 장거리 합승 택시를 이용해야만 하는데, 타브리즈 터미널에 가보니 라슈트까지 가는 택시가 하나도 없다.... 오직 인근의 60만 대도시 아르다빌로 향하는 택시만 하나 있었다. 그마저도 나 이외의 합승 승객을 도저히 찾지 못해서, 내가 3인분의 요금을 모두 내면서 이동할 수 있었다. 원래는 방문할 계획에 없던 아르다빌이고 여기서 무엇을 봐야할지 전혀 조사도 안 된 상태인데... 일단 하루를 묵고 아르다빌에서 라슈트까지 가는 교통 수단을 찾아보기로 했다.
험준한 산악지대지만 그래도 고원이라서 뭔가 탁 트인 풍경이 나온다. 3시간 반 동안 안 되는 페르시아어와 터키어를 쥐어 짜면서 택시 기사님과 환담을 나누며 이동했다.
중간에 들린 휴게소.. 지구본 모양의 기념물인데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가 바뀌어 있는 것이 실로 인상적이어서...
우여곡절 끝에 아르다빌에 도착. 도착하니 해는 이미 뉘엇뉘엇 넘어가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먼저 요기를 해야할 것 같아 케밥 집에서 케밥 두 개를 시켜 먹고 지하에서 물담배까지 해주며 숙소를 알아보았다. 역시 노루즈 명절이라 저렴한 숙박업소를 찾기가 너무 어려웠는데 그래도 간신히 하나 구하여 투숙에 성공.
아르다빌은 애초에 방문 계획도 없던 곳이고, 어디를 가야할지도 잘 몰랐지만 한 곳만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이곳에 온 것도 연이니 당연히 그 장소만큼은 방문해야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셰이스 사피 앗 딘 영묘와 모스크 단지"다.
셰이크 사피 앗 딘이 누구냐 하면은 16세기와 17세기에 이란 역사에서 가장 강성했던 제국 중 하나이자, 오늘날의 이란을 시아파 지역으로 만든 사파비 제국의 선조다. 사파비 제국은 본래 아르다빌과 타브리즈를 중심으로 형성된 아제르바이잔계 종교 집단인 사파비야 교단을 기원으로 한다. 당초 수니파 수피즘 교단이었지만 셰이크 사피 앗 딘이 시아파를 받아들이면서 교단 이름도 사파비야 교단이 된다. 교단이 세워진 건 아직 몽골제국 말기였던 1300년대였는데, 훗날 이 교단에서 페르시아 전토를 통일한 사파비 제국의 황제 샤 이스마일 1세가 등장한다.
이때만 하더라도 사파비 제국은 오늘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는데, 타브리즈와 아르다빌도 그러니까 북쪽으로 치우친 위치가 아니라 코카서스와 이란을 아우르는 중심지였던 셈이다. 이곳을 기반으로 페르시아를 통일한 샤 이스마일은 오스만과 항쟁을 벌이다 1514년 찰드란 전투에서 완패. 수도 타브리즈와 선조의 고향 아르다빌은 모두 오스만군에 의하여 약탈되는 굴욕을 겪게 된다. 그러나 후대 황제가 수도를 중심부의 안전한 이스파한으로 옮기면서 사파비 제국은 진정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란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제국의 창건자인 샤 이스마일과, 그의 선조이면서도 종교적으로도 카리스마적인 교단의 지도자인 셰이크 사피 앗 딘의 묘가 모두 있는 곳이라 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있고 많은 이란인들이 방문하는 주요 사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혼자서 영묘와 사원의 안뜰을 거닐고 있는데 아르다빌 지역 방송국 사람들에 붙잡혔다. 여기 홍보 영상 하나 찍을 건데 멘트 하나만 해달라고... 안 되는 페르시아어로 "저는 한국에서 왔고 아르다빌 너무 좋네요~"하는 국뽕멘트 날려주고 왔다.
영묘 옆에 있는 모스크이다. 처음에는 조촐한 묘지였지만, 제국이 흥성하면서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 아름다운 건물이 만들어졌다.
모스크 내부. 여기서 모흐센이라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중국어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는데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영어로 대화를 진행했다. 모흐센은 아르다빌에서 토목공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인데, 동시에 관광 가이드 자격증도 있어서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한다.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와서, 혹시 유학도 고려할 수 있으니 중국어를 차근차근 배우고 있다고. 자기가 곧 있으면 근무가 끝나는데 혹시 그때 밥이라도 같이 먹지 않겠냐고 제안을 해주었다. 따뜻한 환대에 반가워서 연락처를 교환하고 근무가 끝나면 연락 달라고 하였다.
이곳이 바로 제국을 일으킨 셰이크 사피 앗 딘의 묘. 사마르칸트의 티무르 묘에서 본 양식이랑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는데 그건 훗날 복원된 것이고 이건 진퉁이라고 생각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메카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인 미흐랍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사파비 제국을 건설한 샤 이스마일의 묘... 경건해진다...
방송국 사람들이 여전히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홍보 멘트를 열심히 따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젊은 여학생이 한국어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잠깐 누구랑 전화를 했는데 "어? 어디서 한국어가 들리네?"하면서 쭐래쭐래 왔다는 것... 테헤란 사람인데 노루즈라서 아르다빌로 가족여행을 왔다고 했다. 그러고보면 타브리즈의 지하 카페에서도 나보고 자기가 mukbang을 즐겨본다고 반가워했던 직원이 있었다..
아르다빌은 북쪽에 있다보니 카스피해와 코카서스 산맥을 따라 내려오는 바람이 무척이나 세찬 곳이다. 아직은 봄이 완전히 오지는 않아서 밤에는 진짜 강풍에 몸이 뒤로 밀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낮이 되니까 햇살이 내리고 포근해져서 다행이었다. 여기 인근 카페에서 모흐센을 기다렸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며 사진 한 장. 모흐센은 이 아름다운 아르다빌을 자기가 더 소개시켜 주고 싶은데 내가 라슈트로 바로 가야한다고 하니까 너무나 아쉬워 했다. 내가 터키어를 살짝 구사하니까 엄청나게 반가워하면서 터키어, 페르시아어, 영어를 섞은 남부 아제르바이잔식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반드시 자기 가족의 별장에 같이 가서 차를 마시고 좋은 시간 보내야 한다고, 꼭 아르다빌에 다시 방문하라고 해주었다. 언젠가 다시 꼭 모흐센을 만나러 오리라 다짐을 했다.
모흐센은 게다가 내가 라슈트로 가야한다고 하니, 자기 차에 나를 태우고 인근 터미널에 데려다주었다. 버스 표는 없었지만, 인근 합승 택시 사무실까지 방문하여 가격을 알아보고 바가지 쓰지 않도록 적정 가격까지 알려주었다. 마침 라슈트로 가는 합승 택시 하나가 손님 한 명을 더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라 운 좋게 탑승했다. 짧지만 강렬했던 모흐센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이제 정글의 고장, 카스피해 연안의 길란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