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흐리르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아세프 바야트의 '혁명가 없는 혁명'을 읽고
신자유주의 도시에서 소외된 도시민들이 만든 '혁명가 없는 혁명'. 그리고 그 실패에 대하여.
“혁명에는 죄가 없고 반란에는 리가 있다(革命無罪 造反有理)”
- 모택동
"우리가 값싼 멜론이나 위해 혁명을 일으킨 줄 아는가?
우리는 이슬람을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
- 아야톨라 호메이니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언 이후, 아마 다른 많은 사람도 그랬겠지만, 내 일과에는 정치적 사건의 전개를 바삐 좇는 시간이 포함되었다. 이전까지 한국 정치를 둘러싼 모든 논의가 대통령 부부의 스캔들에 집중되면서 나는 한국 정치에는 관심을 거의 끊고,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을 둘러싼 중동 지정학, 트럼프 당선 이후의 미국의 동향을 주로 챙겨보았다. 하지만 나 자신의 나라가 거대한 격랑 속으로 들어가자 이것만큼 관심을 끄는 다른 주제는 있을 수가 없었기에 곧바로 이슈에 따른 정보와 논평, 분석을 공급해주는 여러 인터넷 채널을 체크했다. 나에게는 당연히 한국 최대 인터넷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가 그중 가장 중요한 정보 원천이었는데, 현재 한국에서 X와 함께 모든 논의의 최전선을 생성하는 화산이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엄 직후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완전히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여전히 보수를 지지하는 이들의 심리와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창구도 디시인사이드가 거의 유일했다. 단숨에 디시인사이드 내 유동 인구 1위로 올라선 국민의힘 갤러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며, 보수적 청년층의 논의와 정서가 어떻게 새로이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살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전에 볼 수 없던 기류가 나타났다. 서서히 광화문의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을 한 후기를 인증하는 글이 올라오더니, 빠른 기세로 거대한 집회 독려의 흐름으로 발전했다. 이는 박근혜 정부 시기에 민주당 지지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던 내가 한 번 피부로 느껴보았던 그 흐름을 연상케하는 것이었다. 집회 현장에 나가 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가족과 친구로 구성된 좁은 범위를 넘어서 더 넓은 시민의 연결망을 인식하며 고양되는 그 감동을 나누는 글이 계속해서 높은 추천을 받으며 게시판을 가득 메웠다. 이것은 보수 성향의 청년이 자체적으로 도시 시민 혁명의 순간을 만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 무엇보다도 생생한 증거였다. 베이싱어가 정의했듯이, 도시 시민 혁명은 권력 중추와 가까운 대도시의 상징적인 공간에서 기존 권력의 교체를 요구하는 대규모 군중을 드러내며 발생한다. 광화문이라는 서울의 가장 중요한 공간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모인 군중은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당을 점하고 있고, 그를 바탕으로 각종 제도와 기관을 장악하고 있으며, 자신을 지지하는 시민들을 동원해낼 수 있는 민주당을 권력으로 정의했다. 그 ‘민주당 권력’의 행사에 거부권을 선언하러 모이는 것이 광화문 집회의 ‘혁명적 순간’이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많은 논평가가 보수우파가 맞이한 이 혁명의 순간에 당황했다. 이 혁명적 군중은 기성 체제를 향해 보내는 불신의 상징으로 선거관리위원회와 부정선거를 꼽고 있었고, 트럼프가 곧 취임하면 친중 좌경 세력으로부터 한국을 구출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기존 한국의 좌우파 엘리트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내세웠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트럼프 시대부터 꾸준히 논해지던 알고리즘을 통해 형성된 미디어의 반향실 속에서 증폭되는 음모론에 관한 분석들이 빠르게 등장했다. 그러나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집회의 구성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과거 그러한 독립적인 미디어 네트워크 속에서 정보를 파악하며 거리에 나온 이들은 대부분 노인이었다. 그런데 광화문과 한강진, 서부지법 앞에서 펼쳐진 시위대의 물결 속에는 20대와 30대의 청년 인구가 상당한 비중으로 등장했고, 그들은 심지어 서부지법에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영장이 인용되자 분노하여 무력으로 경찰 병력을 뚫고 서부지법에 진입해 폭력을 행사할 정도로 급진화되어 있었다. 이 새로운 세대의 행동주의적 군중은 어디서 나타난 것이며, 왜 출현한 것일까? 여기에 관해서는 전광훈 목사로 대표되는 개신교 교회 세력과 신천지 등의 신흥종교를 사회적 원천으로 지적하는 설명이 많다. 하지만 그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었어도, 결코 집회에 나온 청년 인구의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종교적이지 않은 내 주변의 친구 중에도 집회에 다녀왔다고 소식을 보내오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집회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이 혁명적 에너지의 분출에 열광하며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환호하는 주변의 친구들은 훨씬 더 많았다. 내 주변이 전부 나와 같은 아류 지식인이나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는 아니고, 평소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독립하여 경제생활을 하는 친구들도 그러했다. 나 역시 그런 에너지의 실체가 무엇인지 현장에서 느껴보기 위해 한강진과 서부지법 앞의 집회를 찾았다. 그리고 그때 느낀 기이한 감각은 내가 당시 읽고 있었던 책이 다루는 사건, 2011년의 아랍의 봄을 떠올리게 했다. 생각할 수 없었던 혁명, 그러나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혁명, 그리고 훗날 실패할 수밖에 없는 혁명이라고 씁쓸한 평가를 받았던 튀니지와 이집트의 혁명.
21세기 중동을 형성할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랍의 봄은 2010년 12월에 튀니지에서 과일 행상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던 청년 모하마드 부아지지의 분신으로 시작되었다. 그 분신은 벤 알리 독재 치하에서 기회가 박탈당했던, 혹은 신앙을 억압받고 살아온 숱한 국민을 분노케했고, 튀니지는 곧 혁명의 물결을 마주했다. 튀니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알자지라와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글로벌 통신 네트워크를 통해, 언어를 공유하는 아랍 세계 전역으로 뻗어 나갔다. 튀니지 혁명에 자극받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군중은 호스니 무바라크 집권 이래로 30년, 나세르 혁명 이래로 50년 넘게 이어온 이집트의 세속주의 군부 통치를 종식시켰다. 혁명은 카다피 정권이 아슬아슬하게 안정과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리비아로, 수니파 왕가가 시아파 국민을 차별하는 바레인으로, 바트당 정권이 문명과 공포를 섞어서 국민을 다스리던 아사드의 시리아로, 종파, 부족, 지역 간 단층선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예멘으로 번져나갔다.
하지만 권위주의 정권이 무너지며 하위 국가 정체성이 국가의 주도권을 놓고 투쟁을 벌이고, 이 거대한 권력 공백 속에서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포착한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미국, 터키, 카타르 등 외부 강대국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투쟁은 내전과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아랍의 봄은 번영과 민주주의 대신에 내전과 인도적 위기를 낳았다. 하지만 정말로 아랍의 봄이 환멸로 끝나게 된 순간은 국내의 다양한 정체성 갈등이라는 요소가 적었고, 부패한 권위주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도시 시민 혁명으로 기대를 모았던 이집트와 튀니지의 실험이 실패했을 때였다. 이집트의 혁명은 선거로 선출된 무슬림 형제단 정부와 무함마드 무르시가 세속주의 성향의 도시 중산층과 갈등을 빚었고, 자신들의 헤게모니가 끝날 것을 두려워한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재집권하며 끝났다. 마지막 남은 아랍의 봄의 희망 튀니지조차도 민주정이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다는 회의만을 남긴 채 반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하자 사람들은 아랍의 봄이 가져온 환희의 기억을 외면하고,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벌이는 역내 패권 투쟁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러나 동시에 소수의 학자들은 아랍의 봄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한 그 때부터 과연 아랍의 봄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을 남겼는지 전면적인 재검토에 들어가며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란 출신의 사회학자인 아세프 바야트의 <혁명가 없는 혁명>도 바로 그런 책이다.
아세프 바야트는 1954년 테헤란 인근의 빈곤한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테헤란 대학교에 진학하며, 팔레비 샤 정권에 반대하는 다양한 학생운동 조직 간 펼쳐지는 치열한 논쟁과 사회 참여의 세계로 뛰어든다. 당대 이란 학생운동의 양대 계파는 이슬람주의와 사회주의였는데, 그는 마르크스와 레닌, 마오쩌둥을 따르는 사회주의 계열 조직에서 활동하며 호메이니와 알리 샤리아티를 추종하는 이슬람주의 학생 활동가들과 계속해서 현대 세계 속 이란의 위치와 방향에 대해 대화했다. 마침내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의 통치가 무너지던 1978년에 영국으로 박사 유학을 떠난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란 혁명의 나날들을 소재로 연구를 진행하며 세계적인 학자로 성장했다. 중동의 도시에서 빼앗긴 자들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가 되는가, 이슬람주의의 놀라운 성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란 혁명이 성직자들의 통치로 귀결된 것처럼, 정녕 이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와 불화하는가. 도시 공간 속 일상을 살아가는 인민의 실천과 정치, 새로이 등장한 청년 세대가 이슬람주의 대신에 발견해낸 ‘포스트 이슬람주의’에 주목한 그는 명실상부 현대 중동 사회연구의 거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란 혁명의 기억을 여전히 간직한 바야트는 아랍에서 터져 나온 저항을 관찰하며 환호했고, 또 동시에 다른 많은 이들처럼 실망했다. 그 환호와 실망의 원인과 의미를 분석한 책이 바로 <혁명가 없는 혁명>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랍의 봄에는 혁명가가 없었나? 정권의 불의에 항거하며 고문을 견뎌낸 운동가들이 있고, 거리에서 진압 병력과 대치하며 노래를 부른 시민들이 있지 않나? 하지만 바야트가 보기에 아랍의 봄에는 ‘진정한 혁명’에 필요한 대안적인 세계관과 프로그램, 그것을 수행할 조직이 없었다. 물론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광장에 모인 군중은 변화를 원했다. 그들은 수십년을 이어온 세속주의 독재 정권의 근대화 프로그램이 부패한 정실주의 정치로 퇴락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냉전이 끝난 뒤 사회복지를 제공해주겠다는 아랍 사회주의마저 신자유주의와 워싱턴 컨센서스에 의해 해체되면서, 그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졌고, 여전히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는 상향 이동의 기회도 열어주지 않았다.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더 나은 삶, 사회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그들의 열망은 아랍의 봄의 원동력이 맞았다.
하지만 실제 혁명이 시작되고 최종적으로 좌절되기까지의 흐름은, 그 변화의 열망만으로는 대안적인 질서를 구축할 수 없다는 게 증명되는 과정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정치경제와 체제의 문제, 계급 질서의 문제,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그 속에서 아랍 국가들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의 문제, 그 질서를 혁파하고 어떤 대안을 추구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들은 구체제의 엘리트를 대체할 신진 엘리트 자원을 보유하지 않았고, 신진 엘리트가 될 야망을 보이는 인물들도 없었다. 모든 것을 바꾸자는 광장의 혁명적 슬로건은 실제 구체적인 정책과 비전으로 들어가면 급속도로 공허해졌고, 단순히 국제 사회와 국내의 다양한 사회 집단으로부터 이견 없이 인정을 받기 좋은 선거민주주의만이 남게 되었다. 따라서 바야트는 아랍의 봄의 성격을 혁명(revolution)의 형태로 표출되었지만 내용적으로 개혁(reform)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레폴루션(refolution)’이라고 정의한다. 결국에 혁명을 통해 들어선 정부들은 튀니지나 이집트 사회가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과거의 안정을 원하며 구체제를 그리워하게 된 사람들과 더 급진적 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 사이에서 표류하다가 구체제 엘리트가 주도한 반혁명에 의해 침몰하게 되었다. 바야트의 질문은 이러한 현상 분석에서 더 나아간다. 왜 아랍의 봄은 이런 ‘레폴루션’으로 귀결되었을까? 그리고 혁명적 비전과 프로그램 없이 혁명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끝으로, 아랍의 봄은 결국 안 하느니만 못한 혁명이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바야트가 먼저 제시하는 것은, ‘혁명다운 혁명’이 일어났던 1970년대의 기억이다. 그 자신이 직접 참여자이자 관찰자로서 바라본 이란 혁명의 경험과 아랍의 봄을 비교하며 아랍의 봄의 진짜 성격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겠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생생히 기억하는 1970년대의 테헤란 캠퍼스 문화가 어떤 시대적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역사상 마지막으로 펼쳐진 위대한 사회 혁명이었던 이란 이슬람 혁명은 1960년대 냉전과 탈식민이라는 공기를 흠뻑 머금고 만개한 혁명이었다. 비서구 세계에서 냉전이란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하는 제국주의가 물러나고 발생한 권력의 공백 위에서, 미국과 소련이 제3세계에 더 나은 근대화와 발전 모델의 표준을 둘러싸고 벌인 쟁패였다. 신생 독립국에서 민족의 지도자를 자처한 이들은 미국이 지원하는 ‘근대화론’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소련의 노동자 조직화나 중국의 농촌 게릴라가 주도하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추구하느냐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를 통해서 전세계에 선포된 이 에너지는 베트남과 쿠바에서 소련의 의도를 뛰어넘는 반제국주의 혁명 투쟁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본격적으로 폭발했다. 모택동은 소련의 타협 노선과 패권주의를 비난하며 사회 혁명을 꿈꾸는 농촌 게릴라 운동의 사상적 기둥으로 떠올랐다.
60년대와 70년대에 증폭된 사회 혁명의 열망은 중동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1950년대는 나세르 혁명과 아랍 사회주의의 시대로,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에서 하향식 근대화를 추구하는 장교 집단이 주도하는 개발 프로그램이 시작된 시기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주축으로 한 왕정 국가들과의 소모적인 정쟁,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빚어진 군사적 패배, 초라한 개발 성적으로 빛이 바래고 있었다. 대신 1960년대에는 아랍 사회주의 진영 바깥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주의, 호치민과 카스트로, 체게바라로부터 영감을 받은 무장 투쟁 운동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진행된 오만의 도파르 혁명이 그러했고, 1967년에 아덴의 영국 제국주의를 몰아내며 중동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마르크스 레닌주의 정권을 수립한 남예멘 사회주의자들도 뒤를 따랐다. 그리고 중동은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이들이 있었으니, 야세르 아라파트가 지휘하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인 PLO였다. 이들은 베트남과 쿠바에서 영감을 받아 팔레스타인, 요르단, 레바논에 거점을 삼고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을 벌였으며, 리비아의 카다피를 비롯한 아랍 세계의 반제국주의 지도자들로부터 인적, 물적 지원을 받았다. 동시에 팔레스타인에서 등장한 혁명 전선은 중동 각지에서 제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급진주의자들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에서 함께 투쟁하며 무장 조직과 이념 선전의 기술을 배우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지에 관한 비전을 둘러싼 논쟁을 이어갔다. 사회주의, 민족주의, 이슬람주의가 얽히고설킨 팔레스타인은 중동에서 혁명가들의 거대한 학교로 변모했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정과 영미 제국주의를 향한 투쟁에 나선 이들도 당연히 60년대부터 펼쳐진 20년 간의 급진주의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소련이 지원하는 이란 공산당인 투데당은 노동자 조직화를 바탕으로 이란 사회와 정계에서 세력을 확대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냉전과 탈식민 급진주의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다른 이념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하미드 다바시가 ‘불만의 신학’이라고 말한 이란 이슬람 혁명의 사상들이었다. 이란과 이라크의 시아파 성소에서 서구 사상과 마르크스주의를 읽으며 시아파 교리와 조화를 추구한 성직자와 종교적인 지식인들이 등장했다. 이 중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 거인은 알리 샤리아티였다. 샤리아티는 압제자에 봉사하며 투항하기로 한 작금의 가짜 시아파 대신에, 시아파가 지닌 본래적인 혁명성을 추구하는 진정한 시아파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샤리아티는 프랑스에서 공부했는데, 그 시기 파리는 프랑스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제국 중심부와 식민지의 지식인, 활동가들이 모이는 탈식민 혁명의 지적 중심이기도 했다. 알제리와 베트남의 승전보,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 섬 출신으로 식민주의를 향한 인식론, 존재론적 저항을 외친 프란츠 파농의 저작이 샤리아티 사상에 스며들었다. 이를 통해 샤리아티는 압제자들에게 박해당할 것을 알면서도 투쟁에 나서는 것이 순교자 이맘 후세인의 행동이 뜻하는 바이며, 피억압자(모스타자핀)의 계급적, 세계적 연대를 통해 불의를 척결하는 것이 모든 시아파 신도의 의무임을 주장하게 되었다. 세속적인 정통 좌파 서클에서 활동했던 바야트는 자신들과 경쟁한 이슬람주의 학생 조직이 샤리아티를 가장 큰 사상적 원천으로 삼고, 빠르게 평등주의와 급진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도했다. 훗날 혁명 정부에게 숙청당하고 테러 활동을 벌인 인민 모자헤딘을 비롯한 이슬람주의 조직들이 60-70년대 급진주의의 영향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반 팔레비 투쟁에 나섰고, 지식인과 학생 활동가들은 메시아적인 평등주의의 비전을 널리 알리러 농촌, 공장, 빈민가로 떠났다. 팔레스타인에서 글로벌 투쟁의 최전선을 경험한 이들은 이 과정에서 중대한 역할을 해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사상과 혁명 이후의 국가 운영 비전은 통일된 것이 아니었고, 그로 인하여 1979년 혁명 이후 거리의 정치 폭력과 숙청의 물결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저항 세력이 공유하고 있던 혁명의 세계관은 이란 이슬람 혁명을 최후의 위대한 사회 혁명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것이 바야트가 박사 과정에 목격한 일상의 혁명이었다. 농민, 노동자, 도시 빈민이 제각기 혁명적 주체로 변신하여 일상의 영역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고자 혁명을 수행하고 있었다. 정권이 슬럼가의 팽창을 우려하여 허가하지 않던 시가지 확장 계획은, 샤가 떠난 이후 도시 빈민들이 황실 소유 토지를 압류하고 자율적으로 주택을 건설하기 시작하며 아래로부터 달성되었다. 우물부터 도로까지 팔레비 정권이 약속한 근대화 프로그램인 ‘백색 혁명’이 이행되지 않은 것에 분개한 농민들은 자체적인 건설대를 조직하고 토지의 새로운 분배를 추진했다. 노동자들은 연일 파업을 벌이고, 공장 위원회를 조직해 자신들을 억압한 관리자들을 규탄하고, 전쟁 수행을 위해 생산 안정화를 추구한 호메이니 정부에 혁명은 계속되어야 하지 않느냐며 도전했다. 비록 이란 이슬람 혁명이 약속했던 모든 것을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아래로부터의 혁명적 에너지는 분명히 호메이니가 이끄는 혁명 정부를 압박했고, 상당한 공감을 샀으며, 그로 인해서 이란 사회의 구성부터 실제 육안으로 보이는 경관까지 어마어마한 변화가 뒤따랐다.
그렇다면 왜 아랍의 봄을 겪은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이런 사회 혁명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바야트가 지적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지구적으로 펼쳐진 시대의 분위기였다. 이란 혁명은 중동에서 오만 도파르 혁명, 남예멘 혁명, 팔레스타인 투쟁의 영향을, 중동 바깥에서는 소련, 중국, 쿠바, 베트남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었다. 사회주의, 민족주의, 이슬람주의는 상호 경쟁하고 교류하며 급진적 사회 혁명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아랍의 봄이 발생한 2011년은 이미 냉전과 탈식민의 시대가 마무리되고, 워싱턴 컨센서스와 신자유주의, 효율적 시장과 공공 거버넌스의 언어가 지배하는 시대였다. 소련이 해체되고 20년간 이어진 워싱턴 컨센서스 속에서, 아랍 사회주의를 추구한 정권도 신자유주의를 따라 정부 구조조정에 나섰고, 정권에 불만을 품은, 교육받은 중산층도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하여 급진적 변화 대신에 ‘정상화’를 목표로 삼았다. 물론 정권의 신자유주의는 냉전기 중동의 근대화 정권의 실패만큼이나 혁명을 촉발시키는 주요 배경이 되었다. 정권은 구조조정을 추진하며, 방만한 규모로 유지되던 공무원 집단을 ‘효율화’했고, 자부심과 사회 안전망을 갖춘 대규모 인구가 사회적 하향 이동을 겪게 되었다. 경제 성장이 그런 불만을 흡수할 만큼 충분히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 결과 다수 인구의 불만이 임계점을 넘게 되자, ‘갑작스러워 보이는’ 혁명이 일어나며 정권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문제는 그 불만을 품은 인구도 피상적인 권리 요구와 자유 선거 실시 외에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냉전과 탈식민 속에서 혁명화되었던 이슬람주의자들은 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아랍의 봄은 어떤 의미에서는 세속주의 독재에 의하여 오랜 세월 억압받으며 급진화, 혁명화된 이슬람주의의 폭발이기도 했다. 실제 이란은 무바라크 정부가 무너지고 무슬림 형제단의 무르시 정부가 들어서자 아랍 세계가 이란의 길을 따라오고 있다고 상찬했다. 이슬람주의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들은 중동 내부와 서구 세계를 가리지 않고 아랍의 봄이 종교적 광신으로 끝나 근대 문명을 파괴할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나 바야트가 보기에는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한 이슬람주의가 아랍의 봄에서 차지하는 실제 비중은 다분히 과장된 것이었다. 바야트는 이전부터 아랍 국민들, 특히 청년층 다수가 과거의 전투적 이슬람주의를 진지하게 추구하지 않으며, 권리와 개인주의를 종교적 가르침과 융합한 새로운 삶의 지향인 ‘포스트 이슬람주의’로 이행했다고 주장해왔다. 실제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 혁명의 기운이 넘실대고 있을 때조차도,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은 이것이 과연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지게 될 혁명적 순간인지를 끝없이 의심했으며, 마지막에 가서야 혁명 대오에 참여했다. 광장의 시민들은 무슬림 형제단이 외치는 종교와 도덕 사회 건설에 대체로 시큰둥해했다. 이는 수많은 종교적, 사회적 급진주의들이 시민의 눈과 귀를 누가 독점할지를 두고 경쟁한 1979년 테헤란의 풍경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끝내는 무슬림 형제단이 다수 시민의 열렬한 지지 없이도 정권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랍의 봄이 갖는 ‘혁명가 없는 혁명’의 성격을 반영한다. 시민들은 정권에 무언가 다양한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와 광장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조직이 없었고, 혁명 이후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자신들이 원래 품었던 급진주의를 내려놓고, 무바라크 정권 퇴진이라는 최소주의 강령에 집중했다. 이후에 정권 퇴진이 이루어지고 선거 국면이 펼쳐졌을 때,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 군부가 약화시켜 놓은 시민사회 지형에서 전국적인 정당 조직과 모스크 네트워크를 지닌 유일한 정치 세력이 되어 매우 손쉽게 정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혁명가 없는 혁명은 혁명을 원치 않는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하여 ‘하이재킹’되었다.
이 이슬람주의의 변화는 바야트가 관찰한 1970년대와 2010년대의 중대한 차이점이기도 하다. 1979년의 양대 사회 혁명인 니카라과의 산다니스타 혁명과 이란의 이슬람 혁명에는 모두 사회주의와 결합한 종교 운동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쿠바 혁명의 열정과 라틴아메리카 훈타의 탄압이 맞물리며 가톨릭 교회의 급진화가 있었다. 그 결과 탄생한 해방 신학은 사회 혁명과 반제국주의를 가톨릭의 교리와 결합하며 라틴아메리카 각지의 게릴라 투쟁의 영적 자원이 되었다. 1970년대의 이슬람주의 역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주의와 경쟁 및 협력을 거치며 사회 혁명을 추구하는 급진화를 겪었고, 이란의 시아파 사상가들은 ‘이슬람의 해방 신학’이자 ‘불만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이란 혁명 사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탈냉전 20년을 거치며, 실패한 근대화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이슬람주의와 사회주의의 경쟁은 끝났다. 이슬람 혁명의 본국인 이란에서조차 포스트 이슬람주의가 부상하였고, 피억압자의 완전 해방을 추구하는 사회 혁명과 반제국주의 세계 혁명의 기세는 전후 재건과 세계화에 의하여 꺾였다. 혁명 국가가 아닌 다른 지역의 이슬람주의 역시 워싱턴 컨센서스의 공기 속에서 생존을 모색하며 변화를 겪었다. 효율화와 구조조정의 언어는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늘어난 이동성과 마케팅 기반 소비사회 속에서 파편화된 개인이 자력구제를 통해 상향 이동을 추구하는 것이 미덕이 되었다. 수니파 세계에서 이슬람주의 사상가들과 법학자들은 신자유주의와 소비 사회의 무슬림 청년층이 겪는 정체성 혼란과 도덕감의 상실을 우려하며 자신들의 메시지를 조정해갔다. 21세기의 이슬람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로서 자기계발을 함과 동시에 샤리아를 따르는 삶, 경제적인 워싱턴 컨센서스에 적응하되 문화적으로는 알라와 함께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이념이 되었다. 카이로의 알 아즈하르 대학 출신으로 무슬림 형제단과 긴밀한 연을 맺고 있는 이슬람 법학자 유수프 알 카라다위는 소비 자본주의의 천국이자 걸프의 전통적 문화가 공존하는 카타르에서 메시지를 발신하며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대표적인 예시다. 따라서 아랍의 봄이 일어날 무렵에 이슬람주의는 정치경제에 대한 고유의 비전을 상실하고, 자본과 사람의 흐름 속에서 무슬림의 문화적 순수성을 지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더는 해방신학이 아니게 된’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에서 다수 국민이 혁명을 일으킨 실제 원인에 가까운 정치경제 질서의 변화를 추동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실제 그들이 가진 프로그램은 문화와 정체성 영역에서 세속주의 시민이나 비무슬림을 강압하는 것으로 한정되었고, 이는 혁명에 참여한 다수 시민들에게는 환멸을, 반대파에게는 공포와 분노를 불러왔다. 그 결과 민선으로 선출된 무슬림 형제단과 무르시 정부가 최후에 군부 쿠데타와 반혁명에 직면하여 물러나게 되었을 때 시민들은 더는 그들을 지키러 나오지 않았다.
이슬람주의마저 70년대의 사회 혁명의 정신을 상실한 상태에서 혁명을 일으킨 이들은 누구였단 말인가? 바야트는 여기서 신자유주의 변화를 통해 새롭게 형성된 도시의 서발턴에 주목한다.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튀니스 등 대도시에 거주하지만, 세계화된 소비 도시의 주역으로 참여할 수 없는 소외계층의 누적된 불만이 아랍의 봄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스스로 분신하여 아랍의 봄이라는 화염을 일으킨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아랍 세계 도시 서발턴의 상징이다. 이들은 근대 국가가 제공한 교육을 받으며 넓은 세계에 대한 감각을 획득했지만, 아랍 사회주의가 제공해주던 사회 안전망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의해 해체되며 박탈감을 느꼈고, 자신의 삶을 더 낫게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찾지 못한 이들이었다. 특히 아랍 사회주의 체제에 의해 직장과 안전망, 자부심을 제공받던 공무원 집단이 구조조정을 통해 도시 서발턴에 대규모로 유입되었는데, 이 전직 공무원 집단이 사회적 하향이동 과정에서 느낀 모욕과 좌절, 이전에 달성한 높은 수준의 사회의식은 아랍의 봄의 주요한 연료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불만을 품은 도시 서발턴과 소외계층이 실제 도시 공간 속에서 어떤 구체적인 일상의 실천을 해나갔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갑작스러워 보인 아랍의 봄 밑에 깔린 저류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전환 이후 아랍 대도시는 공간적인 이중화를 겪게 되는데, 체제의 특권을 공유받는 상위 계층은 세계화된 소비 구역에서 성벽을 쌓고 나머지 사회와 결별을 선택했다. 그리고 상류층과 부유한 외국인들이 드나들 고층빌딩과 상업지구를 짓는 과정에서 기존 도시의 공공 영역은 강제 수용되어 사라졌다. 이 공공 영역이 고도로 시장화된 영역으로 변모하며 도시의 다수 인구가 국가 보조금을 통해 누릴 수 있는 도시 서비스에 접근이 어려워졌다. 대규모로 양산된 도시 서발턴이 일상을 실천하는 공간으로 채택한 전술은 시장화되지 않은 도시 중심부의 상징적 공간에 일단 모이는 것이었다. 정규적인 고용이 극도로 부족한 아랍 대도시에서 도시 서발턴은 남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주요 광장에 모여서 물담배를 피고 차를 마시며 소일거리를 했고, 여기서 국가와 시장이 주도하는 질서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신들만의 상호 부조 네트워크가 탄생되었다. 행상인들은 경찰의 단속을 피해 광장과 골목의 피난처를 바삐 오가는 기술을 익혔고, 도시 중심부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그날그날의 날품팔이 정보가 오갔다. 공식적인 정치 조직이나 시민단체와 연관이 없는 이 도시민 네트워크는 국가의 공식 담론과 질서에 냉소하는 자율적인 삶의 담론과 질서를 창출했다. 바야트는 도시 서발턴이 수행하는 이러한 형태의 저항을 ‘비운동(nonmovement)’로 정의했다. 그리고 도시 서발턴의 비운동이야말로 조직, 이념, 혁명가 없이도 아랍의 봄이 가능했던 비결이었다. 이미 비공식적인 저항 속에서 일상을 살아간 도시의 소외된 인구 집단은 정권을 향한 불신을 유통시키고 있었고, 공유된 불신은 곧 산발적인 저항을 이끌어내는 불만으로 점화되었다. 최종적으로 부아지지의 분신으로 그들의 불만이 임계점을 넘었을 때, 이미 그들이 오랜 기간 점유하고 있던 광장은 공권력이 침투할 수 없는 해방구로 전환하며 혁명의 에너지가 폭발한 것이다. 이후 도시 서발턴의 광장에 독재 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던 다양한 사회 세력들, 중산층, 자유주의자, 이슬람주의자, 여성 등이 계속해서 합류하여 대규모 반정권 연합이 만들어질 수 있었고, 그 결과 수십년을 이어온 독재자들은 도시 시민 혁명으로 무너졌다.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은 도시 서발턴의 비운동과 혁명이 연결되는 핵심 현장이었다.
이처럼 도시 서발턴의 비운동을 통해 일어난 혁명은, ‘일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 갑작스러운 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아랍의 봄의 한계도 동시에 거기에서 연유했다. 혁명을 하이재킹한 이슬람주의자들은 이미 사회 혁명의 정신과 프로그램, 정치경제 질서를 향한 관심을 내려놓았다. 도시 서발턴의 비운동은 국가와 시장이 연합한 신자유주의 도시(neoliberal city)에서 공공 공간을 거점으로 삼은 저항이었지만, 그것은 개인 차원의 생존의 기술이었지 구질서에 대한 자체적인 분석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새로운 질서의 창출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 결과 ‘혁명가 없는 혁명’에서 구정권의 어떤 부분을 도려내고, 어떤 비전을 가진 엘리트가 국가와 사회를 바꾸어내야 할지, 세계화된 경제 속에서 튀니지나 이집트가 어떻게 새로운 위치를 점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매우 미약하게 나타났다. 선거 민주주의가 국가를 정상화할 것이라는 믿음은 아랍의 봄을 구체적 내용이 없는 개혁을 추진하면서 혁명을 말하는 이율배반적인 ‘레폴루션’으로 만들었다. 이후 ‘절반의 혁명, 혁명의 부재(Half Revolution, No Revolution)’라는 환멸이 등장했다. 새 질서가 등장하지 않은 혁명은 광장과 거리에서 상시적인 불안정을 유발시켰고, 혁명의 주역인 도시 서발턴마저 혁명의 장기화가 자신들 생존의 공간을 위협하며 이탈해나갔다. 혁명의 혼란 속에서 구심점을 잃은 혁명 대오의 약화는 당연하게도 안정을 원하는 반혁명 세력의 결집을 유도했다. 이것이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아랍의 봄이 반혁명으로 끝나게 된 최종적인 경위였다.
그렇다면 아랍의 봄은 어떠한 유산도 남기지 못한, 안티테제로 뭉친 혼란의 경험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혁명가 없는 혁명의 한계를 내내 지적한 아세프 바야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랍의 봄이 아랍 사회에 중대한 흔적을 남겼다고 주장한다. 비록 견고한 대안을 구축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그 존재가 지워져 있던 서발턴들이 공적 공간에 등장하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새로운 삶을 위한 변화를 외친 경험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년 세대, 여성, LGBT, 도시 빈민은 무슬림 형제단이나 세속주의 독재자들이 독점한 의제 대신에 자신들의 의제를 혁명기의 광장과 온라인 공간에서 선전했고, 이는 튀니지와 이집트 사회에서 활발한 공적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신자유주의가 해체한 공동체 속에서 내던져진 개인들은 아랍 대도시에서 비운동을 통해 연결되었고, 아랍의 봄을 통해 ‘우리’로 거듭났다. 이 공공의 감각은 여전히 혁명의 순간을 기억하는 이들 사이에서 살아있고, 온라인 공간의 포스트와 담벼락의 그래피티로 살아있다. 비록 좌절로 끝났지만, 바로 그 급진적 희망의 경험은 아랍의 봄이 결코 영구적인 아랍의 겨울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통치자들을 압박하고 새로운 혁명의 비전을 탐구하게 하는 중요한 이정표로 남을 것임을 시사한다.
마크 베이싱어의 ‘혁명의 도시’를 읽으며, 나는 2016년의 촛불 혁명과 2024년 여의도의 응원봉 시위에서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과 유로마이단의 기운을 느꼈다. 유로마이단과 촛불 혁명 모두 서구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중산층이 주도하고, 급진적 민족주의를 추구하며 오랜 기간 거리의 투쟁에 단련된 이들이 힘을 더한 혁명이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그 주인공은 키예프의 중산층과 리비우를 중심으로 조직화된 스테판 반데라를 추종하는 극우 민족주의 세력이었다. 한국은 수도권에 자가 주택을 보유한 중년의 중산층들과, 1980년대부터 형성된 통일 운동의 자장 속에서 발전한 사회 운동 세력이 촛불 혁명을 주도했다. 그리고 두 혁명 모두 세계체제 속에서 불균등하게 이득을 얻는 중산층의 질서를 바꾸기보다는 그것을 더 강화하는 결말로 끝났고, 혁명에 반대한 이들과 중산층 시민 혁명 너머를 꿈꾸는 이들 모두를 소외시키며 정치 갈등은 더 극단화되었다. 두 혁명 모두 도시의 광장에 단기간에 군중을 집결시키고 가시화하여 정권을 압박하는 도시 시민 혁명의 전술에 충실했고, 그를 위해 정권 퇴진이라는 최소주의 구호를 채택했다. 과거의 독재라는 사슬을 끊고 서구 문명국에 합류하고 싶다는 열망과 중산층의 시민적 권리를 공고히하는 데 집중한 우크라이나와 한국의 혁명은 두 나라가 처한 실제 정치경제 구조의 문제를 은폐했다. 혁명 집단 내부에서도 급진적 변화의 목소리는 있었지만, 혁명이라는 급진적인 변화에 충격을 받은 반혁명 세력(우크라이나 동부의 친러시아 주민들과 한국의 보수 성향 시민들)은 혁명 정부를 증오하며 반대 투쟁에 돌입했다. 혁명은 냉소만을 낳았다.
베이싱어의 책을 읽으며 나의 이 문제의식은 더 선명해졌지만, 이런 불만은 이미 여의도에서 탄핵 집회가 8년 만에 재개되는 것을 보면서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여의도의 응원봉과 깃발, 선결제 문화를 지식인들이 상찬하고 있을 때, 나는 과연 노인들이 작금의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했다. 대다수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거쳐 한나라당, 새누리당, 국민의힘을 늘 지지해온 노인들은 6공화국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눈길도 준 적이 없는 소외된 이들이었고, 이들은 박근혜 탄핵 때도 광장에 모여 탄핵을 용납할 수 없다고 소리쳤다. 내가 보기에 8년 전에 헌정을 수호하고 민주주의를 공고히한다고 탄핵을 했지만, 노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는 물론이고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받아 마땅한 존중의 감각은 하나라도 개선된 것이 없었다. 다시 탄핵을 하고 또 다시 민주당 정부를 선출한다고 해서 노인 문제를 포함한 이 체제의 숱한 모순이 해결될 리가 없지 않은가? 바로 그 이유에서 나는 윤석열 탄핵에 시큰둥했고, 대신 노인들의 목소리를 더 듣고자 평소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다양한 정보 채널들을 찾아서 온라인 공간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곧이어 나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온라인 공간에 굉장히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주당의 헤게모니를 용납할 수 없다며 광화문으로 향한 보수 성향의 청년 남성들이 있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그곳에서 안쓰러운 노인들의 존재를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고백하는 글을 썼다. 노인들은 2016년부터 언제나 광장을 지켜오고 있었고, 이 추운 겨울에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국가를 지키겠다고 구부정한 몸을 이끌고, 주름진 손으로 태극기를 잡으며 탄핵 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광화문에 나온 청년 남성들은 그 노인들의 존재를 인지하며 무언가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민주화 세대인 60년대생과 70년대생의 중산층이 주도하는 현 체제를 더는 용납할 수 없다는 불만이 화산처럼 폭발한 것이다.
이와 같은 간증문을 게시판에서 수도 없이 마주하며 나는 동시에 읽고 있던 아세프 바야트의 ‘혁명가 없는 혁명’에서 묘사한 카이로의 풍경을 떠올렸다. 서울은 바야트가 이야기한 신자유주의 도시로서 카이로와 얼마나 다른가? 서울은 세계의 다른 대도시보다는 도시 내부 분리가 적은 편이라고 생각되지만, 아파트와 오피스텔이라는 잘 구획된 거주구역 및 전세계에서 오는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세계화된 소비구역은 보이지 않는 중산층의 성채이며, 안정된 소득과 암묵적인 문화 자본을 지닌 이들을 선별해서 받아들이는 공간이다. 이러한 ‘서울의 얼굴’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은 노인들이었다. 물론 부유한 노인도 존재하지만, 노인 다수를 구성하는 이들은 마땅한 소득과 사회적 연결망을 갖추지 못한 채 세계도시로 변모해가는 서울에서 자신의 영토를 상실하고 있었다. 트렌드를 좇는 청년층은 노인들의 공간을 낭만적으로 편집하여 자신들의 문화 소비 공간으로 전유했다. 공공 행정도 여기에 일조했다. 노인들의 중요한 만남의 장소이던 종로공원은 문화재 보호와 서울 경관 개선 차원에서 성역이 되었고, 종로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던 노인들은 돈을 내지 않고도 머물 수 있는 다른 장소를 찾아 이동했다. 그들은 교통 복지를 통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수도권 전철 네트워크를 통해서 종로 탑골공원을 자신들의 공간으로 점유했고, 이곳에서 공공근로 일자리와 동사무소의 복지 체계에 관한 정보를 공유했다. 도시 서발턴으로서 그들은 신자유주의 도시에서 일상의 전술을 익히며 나름의 비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비운동의 공간은 상호부조의 원리로 작동하는 사회 조직과 기구가 들어설 수 있는 좋은 토양이기도 했다. 그리고 민주화 세대의 언어와 의미 체계를 공유하지 않는 노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보수의 유일하다시피한 상호부조의 기구는 교회였다. 노인의 비운동 네트워크와 광화문과 종로를 중심으로 펼쳐진 노인 공간에서 존재감을 확대한 교회,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전광훈 목사의 사랑제일교회는 ‘다와(da’wah)’를 통해 복지를 제공하며 도시 서발턴에게서 지지를 확보하고자 한 아랍 대도시의 모스크들을 떠올리게 한다. 돌이켜보면 2016년 박근혜 탄핵 이후 물질적 빈곤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국가 공동체의 서사에 자신들의 상징이 모욕받은 것에 분개한 노인들이 종교 기구를 통해 정치화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카이로의 모스크 안뜰에 머물며, 광장과 거리에서 비운동을 전개한 도시 서발턴들이 페이스북과 알자지라에 의지했듯이, 대서울의 노인들은 전광훈 목사가 제공하는 도시락을 먹으며 유튜브를 시청하며 자신들을 배반한 체제를 향한 불만을 키워갔다. 40대와 50대의 민주화 세대가 노인들의 존재를 그들의 인식 속에서 지우고, 노인들이 품은 대한민국의 서사와 자부심을 ‘저학력과 빈곤이 만들어낸 극우화’로 치부하면 할수록, 광화문 광장은 점점 노인들에게 ‘마이단 앗 타흐리르’, 해방의 광장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세프 바야트는 튀니지와 이집트의 사례를 통해 장소를 점유하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체제에 저항할 수 있으며, 그 비운동의 공간에 다른 사회 세력이 합류할 때 혁명의 불길이 타오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한국에서 몹시 흡사한 사태 전개가 벌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한강진의 윤석열 관저 집회를 찾았을 때, 한국에서 가장 부유한 공간인 한남동에서, 높은 자산과 소득, 세계화된 문화 감각을 지닌 이들을 고객으로 상정하고 개업한 카페를 꾀죄죄한 등산복을 입은 노인들이 채웠고, 길가에는 그들이 피우고 버린 담배꽁초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전쟁의 폐허에서 성장하여, 고소득 국가 중산층의 교양을 쌓을 기회가 없던 늙은 서발턴들이 신자유주의 서울과 그것을 만들어낸 6공화국에 행하는 저항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점유를 통한 저항은 강력할 수 있었다. 마침내 8년 간의 기약없는 외침 끝에, 민주당 헤게모니를 인정할 수 없다는 청년 남성층이 광장으로 하나둘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 순간이 소외되고 모욕받았다고 생각한 노인들에게 어떤 감동으로 기억되었을지 나는 감히 가늠할 수 없다. 대통령 관저 앞을 지나가며, 서부지법의 시위대와 함께 걸어보며 나는 자외선에 까맣게 탄 주름진 얼굴을 한 노인들이, 새하얀 얼굴을 한 청년들 앞에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숱하게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오면서 이 대한민국의 건설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그리고 자신들로부터 대한민국을 인수받은 좌익 세력이 국가를 얼마나 내부에서 흔들고 있는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집회에 참석한 청년들은 노인의 손을 맞잡고, ‘파이팅’을 외치면서 윤석열 대통령을 함께 지켜내자고 했다. 그 광경에서 나는 불온한 혁명의 기운을 느꼈다.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중심으로 써낸 대한민국의 역사를 반공과 산업입국을 줄기로 다시 써내고, 중년 중산층의 정치경제적 지배력을 강화하기만 하는 이 체제를 뒤엎자는 혁명의 기운. 이것이 서부지법의 시위대가 여의도의 응원봉 시위보다 훨씬 더 강렬한 에너지로, 실제로 국가 기관을 향한 폭력까지 불사할 정도로 타올랐던 이유였다. 청년 남성들은 여의도의 시위에서 이 체제를 뒤흔든 윤석열을 끌어내리고, 구질서를 복구하자는 보수성을 느꼈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타락한 민주당의 중년 엘리트에 맞서, ‘진짜 민중’인 노인과 청년이 주도하는 우익 포퓰리즘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년이 광장에서 노인을 발견하고, 노인이 청년을 완연한 미소로 맞아주며 ‘촛불과 응원봉 혁명’에 맞서는 ‘태극기와 성조기 혁명’의 대오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타흐리르가 된 광화문은 바야트가 말한 ‘혁명가 없는 혁명’의 한계, 그리고 베이싱어가 주장한 도시 시민 혁명의 난점마저도 그대로 품고 있다. 태극기 혁명의 주체는 도시 서발턴을 형성하고 있는 노인들과 현 체제를 더는 용납할 수 없다는 정치적으로 활성화된 청년층이다. 이들은 단순히 민주정을 회복하고 압제자를 끌어내리자는 도시 시민 혁명을 넘어서, 6공화국 40년에 걸쳐 견고해진 자유주의적 중년 중산층 질서를 끝내자는 사회 혁명의 열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러시아 혁명부터 이란 이슬람 혁명까지 세계를 뒤흔들었던 위대한 사회 혁명의 비전이 없다. ‘탄핵무효’를 제외한 이들의 프로그램은 중국이 한국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으니, 냉전기 한국의 성공 공식을 따라 한미일이 함께하는 안보-경제 동맹을 공고히하고, ‘대륙 세력’으로부터 절연을 선언하고, 좌경 세력이 왜곡해놓은 보상 체계와 역사적 기억과 상징을 돌려놓는 것을 요체로 한다. 우리는 우크라이나나 이집트의 실패 사례를 통해서 이 상태로 혁명이 승리했을 때 발전적인 대안 체제를 건설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어쩌면 ‘탄핵무효와 윤석열 복귀’라는 최소주의적 구호 아래에서 태극기 혁명 대오가 유지된다면, 이 혁명은 성공을 쟁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성공은 순간의 성공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우선 윤석열 대통령이 현재 글로벌 환경의 급변과 기술 발전에 따른 사회 질서와 일상과 인식 전체의 격변에 적응할 수 있게끔 한국을 개조할 수 있는 사회 분석과 프로그램이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게다가 이 6공화국 체제에서 민주당과 공모하여 누구보다 큰 이익을 독점하며 자신들의 안락한 성채를 쌓아온 국민의힘 주류 정치인들과 제도권 보수 세력은 자신들의 표를 받아내는 자판기쯤으로 생각했던 노인들이 조성한 혁명적 분위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게다가 현재 한국의 기득권 질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독자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지정학과 기술이 교차하며 새롭게 펼쳐질 세계에 적응할 수 있게끔 돕는 장기적이고 도전적인 청사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충동적으로 수행되는 급진적 슬로건은 결국 아세프 바야트가 관찰한 ‘혁명가 없는 혁명’의 재난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태극기 운동을 주도하는 교회의 강경한 종교 정책에 다수 시민은 환멸을 느낄 수 있고, 저 거대한 중국의 존재로 인해 느껴지는 정당한 경계심은 통제되지 않는 혐중으로 이어지며 대외 관계에서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가할 수 있다. 어쩌면 그로 인해 초래된 환멸이 다시 강남의 중년 중산층이 주도하는 엘리트 정치의 회복으로 끝날 수도 있다. 모두 아랍의 봄 당시 이집트가 겪은 일이다. 70년대와 달리 사회 혁명의 정신을 상실하고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이슬람주의자들은 종교와 문화 정책에 집중하다가 철저한 반감만을 샀다. 나토,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터키 사이에서 현명히 운신하지 못한 무르시의 대외 정책은 터키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합심해서 반혁명을 지원하거나 묵인하게 만들었다. 사회 혁명의 비전 없이 급진의 혼란만이 이어지는 ‘혁명가 없는 혁명’은 국민 다수가 묵인하는 엘시시의 학살과 반혁명을 낳았다.
물론 아랍의 봄이 혁명을 경험한 주체들에 변혁을 향한 열망의 흔적을 남겼듯, 태극기 혁명이 실패하더라도 한국은 더는 6공화국의 정상성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유로마이단을 닮은 좌익의 혁명과 아랍의 봄을 닮은 우익의 혁명이 대치하는 광경을 보고 있다.
부패한 야누코비치를 몰아내고 서구적 정상성을 획득하자는 유로마이단 시위대는 베토벤 환희의 송가를 함께 부르며 혁명의 순간을 연출했다. 하지만 키예프 중산층과 민족주의자들이 소비에트 정권 하에서 산업화를 이루고 조국을 수호해낸 것에 자부심을 느낀 동부 인구를 모욕하며 혁명은 곧 내전으로 치달았다. 오늘날 응원봉을 든 민주화 운동가들은 박정희와 함께 조국근대화를 일군 전사들을 저학력의 극우 노인이라고 모욕하며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고 있다. 유로마이단 세력이나 한국 민주당이나 현재의 지속적 불안과 혼란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천한 분석을 공유하며, 민주주의의 회복이 모든 것을 치유할 것이라는 주문을 왼다.
아랍의 봄은 신자유주의라는 국가와 시장의 공모에서 설 자리를 잃고, 세계화된 도시 중산층들에 의해 존재가 지워졌던 도시 서발턴의 분노로 인해 촉발된 것이다. 그들이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을 점유하며 수행하던 일상의 실천은, 현 체제에 본능적 불만을 공유하는 다양한 집단이 타흐리르에 합류하자 혁명 운동으로 발전했다. 탑골공원과 광화문을 오가는 태극기를 든 노인들과 그들을 보며 정의의 감각을 불태우며 법원을 파괴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청년들은 서울을 카이로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타흐리르와 광화문에는 모두 기득권을 대체하여 어떤 대안적인 정치경제 질서를 건설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없다. 태극기 혁명은 이대로 간다면 어떤 형태든 간에 반혁명을 수행할 한국의 엘시시를 불러올 것이다.
유럽 광장(유로마이단)과 해방 광장(마이단 앗 타흐리르)이 부딪히는 한국은 어디로 향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