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아제르바이잔 (1)
'아제르바이잔'의 기원은 무엇일까
학기 말이라 K-POP에 관한 글은 조금 지연되고 있습니다. 학기가 끝날 때까지는 대학원에서 제가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여 구독자분들과 나누는 글들로 찾아뵙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이 글도 생소한 나라인 아제르바이잔의 역사를 아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제르바이잔은 유럽과 중동을 가르는 경계선인 험준한 카프카스 산맥 남동쪽에 위치한 국가이다. 북쪽으로는 카프카스 산맥을 경계로 옛 지배자인 러시아와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아락스 강을 따라 중동의 대국 이란과 접경한다. 동쪽에는 에너지 자원의 보고이자 세계 최대의 호수인 카스피해가 펼쳐져 있고, 해로(海路)로는 북쪽으로 러시아 볼가강 하구의 아스트라한, 동쪽의 카자흐스탄 및 투르크메니스탄과 연결된다. 서쪽의 이웃 국가로는 ‘카프카스 3국’의 나머지 두 국가인 그루지야(조지아)와 아르메니아가 있는데, 여기서부터는 경계가 한층 복잡해진다. 일단 서쪽 아르메니아 건너편에는 본토와 연결되지 않는 월경지인 나히체반이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서 정말 희미하게 터키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다. 게다가 아제르바이잔의 국경 안에는 아르메니아인이 다수 거주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자리한 ‘아르차흐 공화국’도 있다. 과거 이 지역을 두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1992년과 2020년에 두 차례에 걸친 전쟁과 숱한 국경 분쟁을 거친 바가 있다. 나히체반과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이 지역의 어지러운 민족 분포와 강대국 지정학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본래 이란계 민족이 살았던 이 지역은 중세 시대 튀르크인이 유입되고, 몽골 제국의 침입까지 이어지면서 빠르게 튀르크화를 거치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의 튀르크인들, 혹은 ‘아제리인들’은 그중에서도 오구즈 일파로서, 현대의 터키 공화국 및 투르크메니스탄과 언어적으로 가장 가깝다. 하지만 종교적으로는 꽤 상이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 지역에서 발흥한 수피즘 및 시아파 계열의 유목민 군사 조직인 크즐바시(붉은 머리)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현대 이란의 기틀이 되는 사파비 제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초기 사파비 제국은 강력한 종교적 열정과 종파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제국을 운영했다. 새롭게 정비한 국가 권력을 바탕으로 순니파에 대한 강도 높은 억압이 이루어진 결과, 순니파가 우세하던 사파비 제국의 대부분 영토는 빠른 속도로 시아화 되었다.
이 무렵부터 아제리인들의 정체성이 터키와 이란의 교차로에서 상호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고 있었다. 사파비 제국의 우두머리가 된 아제리인들은 다른 정복 민족이 그랬던 것처럼 페르시아의 유서 깊은 문화에 동화가 되기도 했지만, 카프카스 남쪽을 거점으로 삼은 아제리인들은 페르시아 문화와 언어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튀르크 정체성을 유지했다. 하지만 아제리인들은 역시 페르시아 문화를 깊숙이 받아들인 튀르크인들이었으나 동지중해를 거점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하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과는 종파적, 문화적으로 구분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근대에 러시아의 정복과 석유 산업의 발전이 일어나기 전에 아제르바이잔의 중심은 타브리즈와 같은 유서 깊은 도시를 끼고 있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이었다. 오늘날 이란령인 이 지역에는 북부의 아제르바이잔 ‘본국’보다도 아제리 민족이 더 많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 이란의 최고 지도자(라흐바르)인 알리 하메네이 또한 아버지가 아제르바이잔 하마네(Khamaneh) 출신인 아제리계다. 터키인들은 근대에 민족주의가 이 지역에서 확산되면서 본격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한편 북부 아제르바이잔에는 아제르바이잔 현대사와 정체성의 지울 수 없는 요소를 제공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18세기 초에 사파비 제국이 붕괴되고, 북부 아제르바이잔은 여러 튀르크 칸국들로 사분오열 되었는데, 표트르 대제의 개혁으로 국력을 일신한 러시아가 그 틈을 파고들고 진출을 시작했다. 신생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1813년의 골리스탄 조약과 1828년의 투르크만차이 조약을 체결하며 아락스 강을 기준으로 두 제국의 경계를 정했고, 오스만 제국도 격파하면서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통제를 공고히 했다. 아락스 강 북쪽에 자리한 러시아령 아제르바이잔은 근현대 역사를 거치면서 오늘날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토대가 된다.
하지만 페르시아나 오스만과 달리 종교, 문화적으로 차이점이 많았던 러시아의 초기 지배는 아제르바이잔에 혹독한 면이 많았다. 러시아는 무슬림 제국들과 마주하고 있는 이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고자 현지 기독교인들의 힘에 많이 의지했다. 그루지야인과 아르메니아인은 아제리인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정부로부터 많은 지원과 혜택을 얻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카프카스 총독부가 이 지역에 대한 행정 장악력을 확고히 하면서, 많은 아제리인들이 국경을 넘어 이웃한 무슬림 제국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순니파 무슬림들이 주로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한 결과, 아제르바이잔은 확고한 시아파 지역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아제리인들이 떠난 토지는 인근의 기독교 민족, 특히 아르메니아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는데, 100년을 넘게 이어 갈 두 민족의 원한 관계의 출발점이었다.
별 볼일 없는 변방 지역이었던 아제르바이잔은 19세기 중반에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면서 상전벽해를 이루게 된다. 2차 산업혁명으로 석유의 수요가 폭발하는 가운데, 1870년대에 노벨 형제가 이 지역의의 유전을 개발하면서 바쿠는 세계 최대의 유전 지대가 되었다. 바쿠에서 출발한 송유관은 흑해 연안 그루지야의 바투미까지 뻗어가 전 유럽에 필요한 석유를 공급했다. 석유 시대의 개막은 카스피해 인근의 어촌이었던 압셰론 반도와 바쿠를 순식간에 국제적 도시로 만들었다. 대규모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바쿠는 인근 아제리인들은 물론이고, 남쪽의 페르시아인들과 서쪽의 아르메니아인들, 북쪽의 러시아인들을 끌어들이는 도시가 되었다. 이들은 자연스레 러시아에서 성장하기 시작한 격렬한 노동운동과 대중 투쟁의 연료가 되었는데, 제국 내에서 러시아 바깥 지역이 대개 산업적으로 낙후하여 노동운동의 기반이 미약했던 것을 생각하면 바쿠는 분명 석유로 인해 만들어진 독특한 사례였다.
하지만 아제리인들에게 떨어지는 부(富)는 많을 수 없었다. 대개의 이익은 외국계 회사들과 러시아 및 서유럽 국가에서 온 자본가, 기술자들, 정부 관료들이 차지했다. 그다음 순번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돌아갔다. 그들은 상인과 숙련공 집단을 형성하면서 바쿠 도시 경제의 중추를 맡았다. 아제리인들이나 페르시아 출신 이주민 노동자들은 비숙련공과 도시 하층민을 형성했다. 이러한 민족과 계급의 교차는 러시아 혁명기에 심각한 단층선을 만들어낼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소수의 아제르바이잔 민족 자본가들이 탄생했다. 유전 개발에 참여할 수 있었던 아제르바이잔 자본가들은 바쿠의 다른 민족에 전혀 뒤지지 않는 거부(巨富)가 될 수 있었다. 가난한 제화공의 아들로 자본가가 된 제이날랍딘 타기예프(Zeynalabdin Taghiyev)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리고 19세기 중후반을 거치면서, 이런 자본가들뿐 아니라, 러시아 제국이 제공하는 각종 교육 기회를 활용한 아제르바이잔 민족 지식인들도 부상하고 있었다. 민족 자본가들은 이런 민족 지식인들을 육성하고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서유럽으로 유학을 가는 데 필요한 장학금을 주거나, 신문 발행의 후원자가 되어주는 식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 지식인들이 아제리인의 발전을 위한 근대적 정치의식을 탐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아제르바이잔’이나 ‘아제리인’이라는 개념조차도 당대에는 생소한 것이었다. 러시아, 오스만, 페르시아라는 세 제국의 교차로에 위치한 아제르바이잔은 자신의 핵심 정체성을 이 세 제국 중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먼저 고민했다. 일단 러시아에서는 이들을 타타르인의 일파라 간주하면서 ‘카프카스 타타르’라고 불렀다. 흑해의 크림 반도에 위치한 ‘크림 타타르’나 볼가강의 타타르인들과 근연 관계라는 인식 하에서 나온 말이었다. 물론 이들 민족은 무슬림 튀르크라는 정체성은 공유했으나, 언어적으로 상당히 달랐기에 오류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타타르’는 실제 사실이 어쨌든 간에 상당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용어였다. 카잔을 중심으로 한 볼가강의 타타르인들은 러시아 제국에 일찌감치 참여한 무슬림 소수민족으로서, 제국의 동방 경영에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들은 러시아의 귀족으로 편입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중앙아시아나 카프카스로 이어지는 중개 무역에 나서면서 상당한 자본을 축적했다. 볼가 타타르인들의 젊은 세대에서는 일찌감치 근대적 교육과 이슬람 정체성을 조화시켜 자치를 보장받고 제국 체제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크림 타타르 출신의 교육 운동가였던 이스마일 가스피린스키의 열렬한 지지자였는데, 가스피린스키는 아랍어로 된 코란 암송에만 치중한 전통 교육 대신에, 근대적 방법론으로 이슬람의 메시지를 가르치고, 튀르크어와 각종 근대적 지식도 전수하는 ‘신교육(Usul-i Jadid)’ 운동을 주창했다. 이 교육 운동은 전반적인 이슬람 근대화 운동으로 확산되어 자디드 운동, 혹은 자디드주의로 불리게 되었다. 자디드 운동은 타타르인들의 주도 하에 크림에서 볼가, 투르키스탄까지 뻗어 있는 거대한 러시아 제국의 무슬림 공동체 전역으로 신속하게 확산되었고, ‘카프카스 타타르인들’도 당연히 이 운동에 참여했다. 자디드주의자들의 지향점도 물론 다른 사상과 운동만큼이나 다양했지만, 일단은 무슬림 공동체에게 서구 근대 문명을 가져다준 러시아 제국에 충성을 바치는 것을 기본 전제로 삼았다. 그들은 러시아 정체성과 튀르크 정체성을 바탕으로 무슬림을 근대적으로 계몽하고 러시아 제국과 움마(이슬람 공동체), 나아가 세계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드높이기를 원했다.
역시나 아제르바이잔 민족의 근대화를 추구했지만, 그 방향으로 북쪽이 아니라 남쪽을 바라본 이들도 있었다. 몇몇 아제르바이잔 민족 지식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은 페르시아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첫째로는 시아파라는 종교적인 공통점이 있었고, 둘째로는 아제르바이잔의 전통문화와 언어에 뿌리 깊게 남은 페르시아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미르자 파탈리 아훈자데는 특히 두 번째 이유를 옹호하며, 아랍과 그에 결부된 이슬람교마저도 가혹하게 비판한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남쪽을 바라본 지식인 중에서 더 주류에 가까운 쪽은 페르시아보다도 오스만 제국으로 향한 이들이었다. 19세기 후반, 술탄 압뒬하미드 2세가 제국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범이슬람주의를 내걸면서, 러시아령 중앙아시아나 영국령 인도 등 식민화된 상태의 무슬림들은 제국의 지배자들과 대별되는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한층 더 자각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위대한 이슬람 근대주의자인 자말 앗딘 알 아프가니(Jamal al-Din al-Afghani)의 사상도 소개되어 무슬림들의 정치적 각성과 근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가 널리 퍼지고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은 그중에서 오스만 제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언어적 차이도 거의 없는 민족으로서 오스만과 일찍부터 긴밀한 연결 고리를 형성했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을 거점으로 오스만의 근대적 지식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한 아제르바이잔 지식인들은 많은 수가 자신을 튀르크인, 오스만인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오스만 제국과의 동맹 내지는 합류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치적 비전이 되어야 한다는 급진적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런 오스만주의자 내지는 오스만과 결부된 범튀르크주의자들은, 러시아 제국을 지향하는 지식인들(여기도 범튀르크주의자가 많았다)과 논쟁을 벌이곤 했다. 후자는 오스만이나 페르시아를 러시아보다 뒤떨어지는 후진적인 국가로 생각하며, 러시아 문화를 받아들인 자신들이 더 개명된 존재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러 논쟁을 거치고 1880년대를 지나자 본격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카프카스 산맥 남동쪽에 위치한, 시아파를 주로 믿고 오구즈 튀르크어를 쓰는 이 집단은 분명 북쪽의 타타르인들과는 다른 이들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들이 오스만의 튀르크인들과 같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순니파와 시아파라는 서로 다른 종파를 따르고 있었고, 오스만과 러시아라는 서로 다른 제국에 속해 있었다. 한편 언어 기반의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페르시아와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세 제국에 교차로에 위치한 이 민족 집단을 ‘카프카스 타타르’나 ‘튀르크’ 말고 구체적으로 칭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을까? 이런 고민의 결과 ‘아제르바이잔’이라는 용어가 채택되어 지식인 위주로 점차 통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이라는 말이 카프카스 타타르를 대체하고 완전히 정착하기 위해서는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1905년에 거대한 대중 소요가 들불처럼 번지며 러시아 제국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카프카스에서는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의 대규모 유혈 충돌이 일어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충돌을 여전히 ‘아르메니아-타타르 전쟁’으로 불렀다.
1905년은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하여 남부 카프카스에 자리한 민족적, 계급적, 지정학적 단층선이 모조리 활성화된 기점이었다. 투르크만차이 조약으로 편입된 러시아의 남부 카프카스(혹은 ‘카프카스 너머’를 뜻하는 자카프카스)는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의 활발한 인구 이동, 점차 날카로워지는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 관계, 석유 산업의 발전으로 인한 계급 적대감이 모조리 얽히고설키며 거대한 화약고를 만들고 있었다. 1905년에 잠시 활성화된 이 단층선은 이 지역에서 다양한 정치적 결사체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은 1914년의 전쟁과 1917년의 혁명으로 제국이 붕괴하게 되었을 때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