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해를 거쳐 우크라이나로
그루지야 바투미에서 우크라이나 오데사로 향하는, 48시간에 달하는 흑해 항해.
바투미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배표를 수령 받은 뒤에 항구로 향했다. 기억하기로는 오후 5시쯤에 출항하는 일정이었던 것 같은데 바투미 시에 남아 있어봤자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항구에서 대기하기로 결정. 그래도 나름 흑해의 주요 항구인데 승객들을 위한 항구 터미널 같은 것이 있겠지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소나기가 내렸는지 무지개 다리가 하늘에 걸쳐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터미널보다는 동네 간이 버스 정류장 수준의 대기장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주변에는 음료수 정도나 사먹을 수 있는 점빵 밖에 안 보였다. 승객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지만 전기 콘센트도 없어서 핸드폰 배터리 충전도 안 되고 하염 없이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두 세 시간 정도 기다리면 승선할 줄 알았는데, 해가 저물어갈 무렵에 모습을 드러낸 배는 무슨 일인지 승선하라는 말도 없이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커다란 래브라도 리트리버를 데리고 히치하이킹 여행을 하고 있다는 체코 커플과 짧게 얘기를 했다. 이런 대형견을 데리고서는 기차나 항공기를 탈 수 없어서 대부분 히치하이킹을 하면서 돌아다니는데 배에는 개를 데리고 갈 수 있어서 이번엔 배로 이동한다고.
가장 재밌게 얘기했던 이는 토니 여브스라는 영국인 대머리 아저씨였다. 영국인다운 블랙유머가 정말 수준급이었다. 내가 말이라도 걸어보려고 "Can you speak english?"하고 물어보니, 어깨를 으쓱하며, "Well, I am english."라고 답을 해주셨다. 50대 후반쯤 되는 나이로 작은 인테리어 사업 같은 걸 했는데 지금은 은퇴하고 세계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주로 개도국의 작은 소도시나 마을에서 영어 원어민 선생으로 봉사활동을 한다는데 이라크 쿠르디스탄도 가볼 정도로 이곳저곳 쏘다니는 양반이었다. 우크라이나는 예전부터 자주 왔다갔다 한 곳이었다고. 남는 시간 토니와 함께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 시간을 죽였지만 승선 대기는 떨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드디어 승선한다...! 항구에서만 10시간 가까이 기다렸던 것 같다. 어휴..
이 배는 1988년 독일에서 건조된 그라이프스발트라는 배인데 지금은 파나마 해운사 소속으로 오가는 것 같았다. 그루지야의 바투미에서 우크라이나의 초르노모르스크로 향한다.
초르노모르스크는 소련 때 일리쳅스크였는데, 블라디미르 레닌의 가운데 이름인 '일리치'를 딴 것이 분명했다. 일리쳅스크는 1958년에 오데사 항구의 확장 일환으로 오데사 인근에 세워진 신항이었다. 흑해의 주요 항구로 번창하면서 많은 이주민이 높은 소득을 보고 일을 하러 와 도시로 확장되었다. 소련 해체 이후에도 일리쳅스크라는 이름을 유지하다가 유로마이단 이후 '탈공산화법'에 따라 초르노모르스크로 이름을 바꾸었다. 초르노모르(체르노 모례)는 우크라이나어/러시아어로 '흑해'라는 뜻이다.
항로를 보면 바투미에서 크림 반도 세바스토폴을 거의 스치다시피 할 정도로 가까이 지나가서, 운이 좋으면 세바스토폴의 모습이라도 멀찍이서 보겠구나~ 했는데 아마 우리가 자고 있는 밤 사이에 지나서 못 봤던 것 같다. 항로 거리는 대략 1000km를 조금 넘는데, 꼬박 48시간 동안 가야 한다고 했다. 원래 오후 출항이던 게 밤 12시 출항으로 바뀌었으니 거의 이틀 반에 가까운 시간을 이동하는 데만 쓴 것..
일단 흑해에서의 첫 밤을 축하하는 차원에서 미리 마트에서 사두었던 그루지야 와인을 까고 잠에 들었다. 이때 굉장히 후회했던 게... 알고보니 술을 9병 정도는 사왔어야 했다...
항구를 낀 유흥 도시답게 카지노나 관람차, 호텔의 불빛이 현란하게 바투미 해안가를 밝히고 있었다. 일단 술 먹었으니 푹 잔다.
숙취와 함께 자고 일어나서 배 바깥으로 나가보았다. 승선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화물 트레일러들이 보인다. 나중에 배 안에서 잠깐 친해진 알렉산드르라는 트레일러 운전사 아저씨와 함께 저기까지 내려가 보기도 했다. 알렉산드르가 트레일러에서 뭘 점검하려고 간 거였는데, 자기 트레일러에는 그루지야 와인이 잔뜩 실려 있다고 한다. 이제 이걸 우크라이나로 수송해서 판매하는 것..
갑판에서 탁 트인 바다를 보면 정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바닷 바람까지 맞으면 너무 좋다. 물론 딱 거기까지다... 인터넷도 터지지 않고 갑판에 너무 오래 올라와 있으면 햇빛이 꽤나 따갑다. 바다를 한참 보다 지루해지면 책을 꺼내 읽지만 책도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역시 술을 박스째로 사서 들고 와서 진탕 마셨어야 하는데... 대체 대서양 항해나 아프리카 희망봉 돌아가기, 태평양 횡단 같은 거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했던 것일까. 모든 뱃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 샘솟는 경험이다..
오전 8시, 오후 1시, 오후 6시에 시간 딱딱 맞춰 제공되는 식사는 그래도 이 여행의 얼마 안 되는 낙이다. 책과 바다만 보는 가운데 나름의 신선한 재미를 준다.
아침 식사로는 전형적인 소련식.. 우유 곡물죽 까샤를 비롯한 간단한 아침밥..
푸른 빛의 바다를 향해 카메라 찰칵. 혹시라도 핸드폰을 놓칠까봐 벌벌 떨면서 찍었다..
한참을 또 뒹굴거리다가 점심밥 먹으러 왔다..
소련식 감자 퓨레에 소련식 닭고기, 소련식 샐러드.. 아 도시락 라면이라도 좀 사서 챙겨왔어야 하는데..
결국 남는 건 술이다. 얼마 간 챙겨온 현금으로 선내의 바에 가서 술과 안주를 샀다. 뭐 말이 바라고 하지만 진짜 동네 구멍가게만도 못한 처참한 상품 구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저 흘레브나야라는 보드카는 정통 소련식으로 냉동고에서 꺼내서 젤리처럼 꾸덕꾸덕하게 흐르는 것이라서 기대를 했는데, 진짜 살면서 먹어본 술 중에서 가장 쓰레기 같았다. 저 여행 후에 5년이라는 세월이 더 지났지만 저 술보다 끔찍한 술은 아직까지도 접해보지 못했다. 알콜 역한 냄새가 확 올라오는 게 얼굴을 찌푸리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그리고 미친 듯한 짠 맛을 자랑하는 소련식 건어물을 안주로 어떻게든 술에 취하고자 노력했다..
이 날이었는지 다음날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아마 다음날이었던 것도 같다), 선내 바에서 혼자 앉아 있는 우락부락한 아저씨가 옆자리에 앉아보라고 하면서 나한테 이것 저것 물어보았다. 보드카 혹시 마시냐면서 한 잔을 주문한 다음에 설탕을 뿌린 레몬도 안주로 주었다. 보드카는 역시 알콜 역한 내가 팍 올라오는 흘레브나야였고... 내가 한 잔을 털어넘기고, 얼굴을 찌푸리며 "크으~~~"를 하는 걸 보며 껄껄 웃었다. 그는 이런 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너무나 편안하게 한 잔 쭈욱 마시고, 사나이다운 중저음으로, 자기가 나이가 너랑 비슷한 아들이 있는데, 걔도 보드카 먹을 때 항상 "크으~~"하면서 호들갑을 떤다고 웃었다. 나보고 우크라이나에서 어디를 갈 것이냐고 해서 드니프로에 갈 것이다라고 답하니, "드니프로! 모이 고로드!"라고 했다. 드니프로, 나의 도시!라는 뜻이다. 대화할 때는 우크라이나어 발음이 섞인 러시아어를 썼는데 우크라이나로 향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만나서 즐겁게 시간을 보낸 우크라이나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드네프르의 알렉산드르 부자가 무탈하기를 바란다.
저녁밥까지 먹고 토니와 음주를 시작. 토니가 선물 받아서 들고 왔다고 하는 폴란드 보드카를 같이 마시자고 꺼내들었다. 주브로프카라는 보드카인데, 색깔도 녹색이고 놀랍게도 맛도 녹색이다! 향이 나는 허브 같은 걸 넣어서 맛이 이렇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제일 좋아하는 술이었다고 한다. 주치의가 건강 생각해서 술 먹지 말라고 해도, 어떻게든 하루에 한 잔은 꼭 마실 정도로 좋아했다고. 브레즈네프의 고향이 여행지이니 만큼 나름 운명적이었을지도?
여기서도 공개 못할 만취 상태의 사진들이 있는데... 하여간 이 때 진짜 엄청나게 마시고 간신히 객실로 들어가서 곯아떨어졌다.
출항한 지 약 36시간 정도 지날 때 찍은 사진이다.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거의 사망 상태였다. 그런데 심지어 어제까지 너무나도 평화롭던 흑해의 바다가 다음날이 되자마자 파도가 넘실대는 무시무시한 바다로 변신했다. 바닷물이 검은 빛을 띄는 게 그야말로 흑해다. 나름 큰 배인데도 종종 흔들렸는데 숙취로 고생하는 상황에서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정말 웅장하고 멋있는 풍경이다. 이 바다의 패권을 쥐고자 움직였던 수많은 세력이 떠오르는.... 건 나중 일이고 이때는 그냥 숙취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해장에 좋은 보르쉬가 나와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해가 넘어갈 무렵이 되니 이제 정말 육지가 보인다! 지금 와서 쓸 때는 즐거운 추억인데, 저때는 정말 이놈의 항해는 대체 언제 끝나나, 지루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쯤되니 사람들이 갑판에 나와서 혹시 육지에서 인터넷 신호가 잡히는지 확인해보려고 애썼다.
육지가 육안으로는 보이지만 정말로 해안선에 닿아서 입항하기까지는 그 뒤에도 몇시간이 계속 걸렸다.
결국 해가 다 저물어갈 무렵에 입항 성공. 원래 일정표에 쓰인대로 출항했다면 지금은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을 오후였겠으나, 출항 자체가 워낙 느려져서 배에서 내릴 때는 사실상 밤이 되고 말았다.
흑해의 입구 오데사가 코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