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boratory of Socialist Development 서평

Laboratory of Socialist Development 서평

후기 소비에트 ’남부‘에 대한 다층적 복원

임명묵
Artemy Kalinovsky, Laboratory of Socialist Development: Cold War Politics and Decolonization in Soviet Tajikistan, Cornell University Press.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과거 소련의 구성원들이었던 탈소비에트 지역은 단지 소련의 한 지역이 아니라 독자적인 국제 정치의 새로운 무대로 떠오르게 되었다. 특히 중앙아시아는, 9.11 테러 이래로 미국이 정치적 이슬람(Political Islam)과 테러리즘과 대립하고, 나아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시작하며 더욱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의 초점은 새롭게 등장한 독립국에서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갖는 영향력, 혹은 특질을 밝히는 것으로 맞춰졌다. 중앙아시아 각국의 빈곤과 사회적 불안정이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성장으로 이어질지, 중앙아시아의 권위주의 정권들이 성공적으로 이슬람주의 반대 세력을 억압할지, 민족적 정체성의 핵심으로 부활한 이슬람이 여성 인권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등에 관한 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슬람이 아니더라도 각국에서 권력의 향방을 파악하기 위해서, 중앙아시아의 오랜 전통으로 제시된 ‘파벌 정치(clan politics)’가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고 그 근원은 어떤지 탐구하는 등, 초점은 근대 이전으로 소급되는 중앙아시아 사회 고유의 ‘전통’에 항상 놓여 있었다.

자연스럽게 중앙아시아 5개국의 직접적인 전사(前史)로서 소비에트 시대의 경험과 기억은 상대적으로 잊히거나, 주로 신생 민족 국가의 민족사 만들기의 논거로서 탐구되는 경우가 많았다. 민족사 서사에서는 모스크바의 식민적 권력과 중앙아시아의 전통이 대립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대체로 중앙아시아 이슬람 사회의 전통이 스탈린 시대의 잔혹하고 식민주의적 공격을 받아 억압되었다가, 통제가 느슨해진 후기 소비에트 시대에 다시 부활하여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만개하고 독립까지 이어지는 서사가, 이 지역의 현대사를 이해하는 전형적인 틀로서 받아들여지고는 했다.

중앙아시아 현대사를 이해하는 틀은 당연하게도 전반적인 소련사를 이해하는 시각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 시대는 기본적으로 독재적인 정치 권력이 사회를 공격하고 해체하는 시대로 인식되었기에, 중앙아시아적 맥락에서는 스탈린이 행한 이슬람에 대한 공격, 여성들로 하여금 베일을 벗게끔 독려한 반(反) 베일 운동, 유목민 정착화 정책이 카자흐스탄 스텝에서 초래한 대대적인 기근이 스탈린 시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제시되었다. 스탈린 이후 시기 또한 마찬가지다. 아직 이 시기에 관한 연구가 충분히 진척되지는 않았지만, 스탈린 이후 시기는 대규모 동원과 이데올로기적 열정이 지배했던 이전 시기와는 달리, 일종의 탈정치화, 탈이데올로기화된 시기로서 인식되는 듯하다. 긍정적으로 인식하든 부정적으로 인식하든, 소련 체제를 형성하는 대표적 이미지인 이데올로기가 영향력을 상실하고, 인민들은 소비 사회의 다양한 욕구, 종교를 비롯한 전통적 삶에 대한 관심,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과 시민 사회의 ‘등장’ 등, 소련이 여타 ‘서구 선진국’과 수렴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시기는 경제가 침체되고 체제의 약속이 구현되지 않으며 인민들이 공식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당내에서는 부패가 증대하고 사회 통제력이 약화되며 소련 해체의 씨앗이 본격적으로 뿌려진 시기로도 인식된다.

소련 중앙아시아를 향한 시선도 후기 소련 전반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는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이 모스크바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서, 자율성을 증대한 시기로 이해된다. 브레즈네프의 정치적 동맹들이 브레즈네프와 마찬가지로 장기간 개별 공화국의 제1서기 자리를 차지하고,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자신의 지역적 파벌을 중심으로 사실상 왕과 같은 권력을 휘둘렀기에,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이 지역에서 반러시아 감정과 독립 정서가 신속하게 확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즈벡 공화국의 제1서기인 샤로프 라시도프가 주도했다가 안드로포프 서기장 시기에 밝혀진 유명한 부패 사건인 ‘목화 스캔들’은 후기 소비에트 중앙아시아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한편, 중앙아시아의 전통적인 사회 구조, 특히 씨족을 중심으로 한 가족 구조는 집단화를 거치고도 살아남아 콜호스의 행정 경계 내에서 재생산을 이루었고, 모스크바는 이들에 대한 실질적 통제력을 달성할 수 없었기에 이슬람의 부흥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소련이 탈이데올로기화되고, 중앙의 정치적 통제력이 약화되며, 경제적 침체가 이어지면서 중앙아시아는 지역 정치와 지역 사회 차원에서 동시에 소비에트의 공식 권위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스탈린 시대에서 브레즈네프 시대를 거쳐 소련 해체로 이어지는 이 같은 서사는 간단한 구도로 소련사의 전개 방향을 명확하게 알려주기 때문에 몹시 매력적이다. 이데올로기적 열정, 모스크바의 강한 정치적 통제, 사회에 대한 억압과 동원이 지배하던 스탈린 시대의 체제가 점차 이완되며, 특히 지역에서는 민족 문제와 결부되어 소련의 궁극적 해체로 이어졌다는 서사의 기본적인 골격은 여전히 소련의 전반적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문서고 개방 이후 소련을 바라보는 관점이 여러 혁신을 겪고, 다양한 역사학 연구 방법론 또한 수용하면서 기존의 단순한 서사만으로는 소련사를 다차원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워지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오랜 기간 관심의 초점이었던 스탈린 시대는 여러 새로운 연구의 축적으로 이미 과거의 단순한 서사가 힘을 잃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만으로는 볼 수 없는 스탈린 시대의 일상사적인 모습, 혹은 이데올로기가 진심으로 사회에 수용되는 모습, 완벽히 짜인 전체주의 통제 국가 이미지의 허구성 등이 대표적으로 새롭게 제시되어 온 스탈린 시대의 모습들이다.

한편으로는 스탈린 이후 시대, 그리고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시차를 두고 새로운 관점의 이야기들이 점차 등장하는 듯하다. 침체의 시대라고 불린 브레즈네프 시대의 전형적 이미지에 대한 재고, 여전히 사회에서 작동 중이던 소비에트 체제의 약속에 대한 신뢰, 냉전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수렴 현상들, 글로벌 질서 속에서 소련이 다층적으로 맺은 여러 관계와 상호작용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들은 침체, 탈이데올로기화, 냉전과 고립, 사회의 이완과 궁극적인 지지 상실로 특징되는 전통적 이미지의 적합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비러시아 지역에 관한 연구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바람을 맞이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민족 지도자들이 소비에트 체제에 어떻게 참여하고 모스크바 중앙이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비러시아 민족 문화를 어떻게 지원하였는지, 사회 단위에서 그런 정책들이 실제 어떤 반응을 얻고 수용되었는지 탐구하는 여러 연구가 주로 혁명기나 스탈린 시대를 중심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아르테미 칼리놉스키의 Laboratory of Socialist Development: Cold War Politics and Decolonization in Soviet Tajikistan은 소련사 영역에서 주된 관심사라고 하기에는 어려웠던 후기 소비에트 시기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소련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펼쳐낸다. 칼리놉스키는 후기 소비에트 시기에 추진된 타지키스탄 개발 사업, 그중에서도 누렉 댐 개발을 중심으로 후기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나아가서 후기 소비에트 시기 전체가 통상적인 이미지와 상당히 다르게 작동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는 후기 소비에트 타지키스탄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모스크바에 보관되어 있는 각종 문서고들과 타지키스탄 두샨베의 당 문서고, 정부 문서고, 누렉 시 당 문서고 등을 광범위하게 참조했고, 후기 소비에트 시기의 새로운 세대를 형성한 타지키스탄 주요 인물들의 회고록, 무엇보다 당시의 경험을 기억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한 구술 기록을 통해서 딱딱한 정치, 경제, 제도적 역학을 넘어서는 생생하고 풍부한 이야기를 더했다. 이렇게 다층적인 자료를 동원한 것은 칼리놉스키가 주장하고자 하는 이 책의 핵심적인 주제와 큰 관련이 있다. Laboratory of Socialist Development은 후기 소비에트에서 냉전과 탈식민화라는 국제적 배경과 국내적인 개발 사업의 상호작용을 다룬다. 그 상호작용은 중앙의 거시적 계획 기구가 지역의 실제적인 지식을 수용하면서 이루어졌다. 중앙에서는 개발을 통해 중앙아시아에도 근대적 주체(subject)를 만들어내고 농촌의 말단까지도 교양(kul‘turnost‘)이 있는 인구를 창출해내고, 기계화와 전력화를 통해 복지국가의 풍요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사업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반제국주의, 인간 평등, 탈식민화 등으로 대표되는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였다. 이데올로기를 다들 외연의 치장 용으로만 사용하게 되었고, 실제로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냉소가 확산되었다는 후기 소비에트에 대한 일반적인 상과 달리, 중앙과 지방 모두 실제로 소비에트식 개발 프로젝트를 통해서 이데올로기적 목표를 실제로 달성할 수 있었다고 진지하게 믿었다. 이 이데올로기는 소련이 국제무대에서는 도덕성과 효율성을 모두 입증할 수 있는 근거였으며, 나아가 소련의 해체 자체가 그 이데올로기적 목표 달성에 대한 회의가 확산된 결과물이었다는 것이 칼리놉스키의 주요 주장이다. 광범위한 구술 자료는 실제 누렉 댐 사업이 타지크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으며, 중앙의 의도가 실제 현장에서 어느 정도로 구현되고 또 굴절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자료였던 셈이다.

책은 시기적 차원에서 후기 소비에트 시기라고 할 수 있는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를 관통하고, 공간적 차원에서는 국제적 차원에서 지역적이고 개인적 차원으로 내려가는 구조를 통해서 다층적으로 후기 소비에트 시기 타지키스탄을 복원한다. 1장에서는 냉전과 국제적 수준에서 소련이 정립한 새 위치가 어떻게 중앙아시아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고, 2장과 3장에서는 연방과 지역의 관계가 어떻게 재편되는지를 지식인과 경제학자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그 뒤 책은 현장으로 이동하여 4장에서는 누렉의 개발 계획과 현장에서 개발 작동의 논리를 묘사한다. 5장과 6장, 7장에서는 구술 자료를 통해서 누렉 도시 공간의 형성, 도시에서의 근대적 주체의 형성, 농촌 근대화 프로그램과 한계를 차례로 보여준다. 8장과 9장은 다시 국제적, 연방적 차원으로 시야를 넓혀서, 소비에트 체제의 타지키스탄 개발 기획이 냉전 시대에 가졌던 의미와, 대내적으로 그 기획이 실패했으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판명났을 때 왜 소련 체제 전체에 위기가 왔는지를 논한다.

누렉 댐.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1장에서는 소련이 새로이 직면하게 된 냉전과 탈식민화, 제3세계의 부상이라는 국제적 맥락에서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소비에트 남부‘가 어떻게 소련 내부 정치에서도 중요성을 획득하게 되었는지를 살핀다. 소련이 제3세계에서 반제국주의를 홍보하고, 낙후된 사회를 서방보다 효과적으로 개발할 수 있다며 선전하는 것은 중앙아시아 내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중앙아시아의 당 간부들은 소련이 제3세계 해방과 개발을 선전하고자 한다면, 먼저 중앙아시아를 소련의 유럽 지역, 러시아와 동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사업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제3세계를 향해 중앙아시아를 ’개발의 전시장‘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실용적인 목적을 넘어서, 소련 체제에 여전히 내재해 있는 식민주의적 모순을 극복하는 도의적인 차원에서 제기된 주장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영국, 프랑스와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지의 관계를 소련 내부의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관계로 치환하여 중앙을 비판하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목화 같은 지역 상품만 제때 공급받을 수 있다면 지역 하부 단위까지 깊게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기존의 무관심과 방치 대신에 중앙아시아에도 산업화, 도시화를 촉진하고, 농촌의 사회와 경제를 현대화시켜야 한다는 요구는 소련의 당조직과 정부 기관을 통해 수용되었다. 칼리놉스키가 ’소련사의 두 번째 탈식민 국면‘이라고 표현한 대대적 개발 프로젝트의 시작은 주로 유럽 지정학에 몰두해야 했고 모스크바에서 사안을 해결하던 스탈린에서, 지구적 초강대국으로서 이미지를 신경 써야만 했고, 소련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어느 정도는 대중 정치에 참여해야 했던 흐루시초프와 브레즈네프로의 변화도 반영하는 일이었다.

타지키스탄의 지도.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2장에서는 중앙아시아 개발 정책의 배경이 되어주는, 후기 소비에트 시기 일어난 이 지역의 각종 사회적 변동과 발전을 개괄한다. 그중에서 저자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중앙아시아 지식인 집단의 성장이다. 스탈린 시기 전개된 광범위한 문화 혁명은 이 지역에서도 체제의 수혜를 입은, 노동자와 농민 출신의 엘리트들을 만들어냈다. 콤소몰, 공산당 등의 조직은 러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에서도 체제의 수혜자들이 자신의 야망과 비전을 펼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고는 했다. 중앙아시아 엘리트, 특히 지식인들은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국가적 재난과 비극을 통해서 러시아 본토와 긴밀히 통합되고, 진정으로 ’소비에트-민족 지식인‘이 될 수 있었다. 많은 중앙아시아인들이 훈련을 받고 전선으로 투입되거나, 후방의 생산 기지로 재배치 되었는데, 이 과정을 통해서 중앙아시아인들은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러시아인, 아르메니아인 등 연방을 구성하는 각종 민족과 연방 차원의 애국심,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 특히, 전시와 전후에 기회를 잡아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등지로 나아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엘리트들은 민족 지식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곤 했는데, 소련의 최고 중심부에서 여러 핵심적 인사들과 결성한 네트워크가 그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시야와 기회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타슈켄트와 두샨베를 바쁘게 오가는 중앙아시아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발화하고 소련의 주류에 유통할 수 있는 통로로 기능했다.

3장에서는 전후에 등장한 신세대 중앙아시아 지식인들, 그중에서도 경제학자들의 역할을 살펴본다. 이들의 역할은 말 그대로 개발이 무엇인지 정의(defining)하는 일이었다. 전후 소련에서는 본격적으로 사회과학과 지역학이 태동하면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도식보다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지식들을 수집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중앙아시아도 마찬가지로, 인류학자, 사회학자, 지리학자,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는 사회를 분석하면서, 유럽의 경험으로 일반화할 수 없는 이 지역의 여러 특징들을 기술했다. 그들이 이런 ’지역적 지식‘을 생산하는 것은 중앙아시아의 특수한 사회 구조나 문화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 혹은 발전론과 어긋나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함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소련 중앙에서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개발 논리를 넘어서, 중앙아시아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맞는 적절한 정책들이 고안되고 추진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총론에서는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지지하되, 각론에서 더 섬세하고 지역의 사정에 맞는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보편적이었던 “오두막 노동(가구의 사적인 부업 활동)”이나, 아동 노동 문제, 도시로의 이주나 산업 노동자로의 전직에 대한 망설임, 대가족 구조 등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내놓았고, 소련의 연구소 및 대학 기관, 혹은 정책 당국의 위계적 구조를 통해서 자신들의 연구 성과와 주장을 전달해 설득시킬 수 있었다. 이주를 망설이는 농촌 노동력을 위해서 산업 시설을 농촌에 더 가깝게 건설해야 한다거나, “오두막 노동”에 대해 조금 더 수용적으로 나와야 한다거나, 산악 지역 농민들을 효과적으로 재정착시키거나 하는 주요 프로젝트들이 대표적인 예시였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프로젝트는 타지크 공화국에서 제출한 누렉 댐 프로젝트였다. ’중앙아시아‘로 일반화하기 힘든, 공화국 간의 알력 구도가 분명히 소련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고, 타지크 공화국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인근 우즈벡 공화국에 대해서도 저발전 상태라는 의식이 강하게 공유되고 있었다. 누렉 댐을 건설하고 거기서 생산하는 막대한 에너지를 통해 타지키스탄에 기술 집약적인 산업 단지를 유치할 수 있다면, 소련에서도 가장 낙후하고 고립된 공화국인 타지크 공화국도 충분한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누렉 댐 프로젝트의 추진 동력이 되어주었다. 타지크 지식인들과 당간부들은 마침내 타슈켄트를 제치고 모스크바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누렉 댐 프로젝트와 알루미늄 제련소 건설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타지키스탄의 주요 산업으로 남아 있는 타지키스탄 알루미늄 회사.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4장에서 저자는 인류학자 브루스 그랜트(Bruce Grant)의 논의와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Albert Hirschman)을 빌려와 누렉 댐 개발 사업을 비롯한 소련 개발 사업의 특징을 논한다. 저자는 처음에 누렉 댐을 지을 당시 발생할 수몰지의 이주민들로부터 이 사업의 환경적, 사회적 충격에 관한 이야기를 수집하고자 했으나, 공식 기록이나 구술 기록에서 댐 건설에 대한 반감을 찾을 수 없었던 데 주목했다. 오히려 댐 건설이라는 건 모스크바 중앙에서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면서 현지인들에 제공한 ’선물(gift)‘로 인식되고는 했다. 이런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저자는 그랜트가 관찰한 러시아 제국과 피지배 민족의 관계를 인용한다. 그랜트에 따르면 팽창이 군사적 수단으로 이루어졌지만, 러시아는 캅카스의 제민족들에게 각종 ’선물‘을 제공했고, 그 선물의 대가로 피지배 민족으로부터 제국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 캅카스 통치의 안정성을 보장해주었다. 선물은 제국의 중심과 주변 사이에서 상호 의무(obligation) 관계를 엮어내는 수단이었다. 칼리놉스키는 그랜트의 선물과 의무라는 틀을 누렉 댐을 비롯한 소련의 개발 사업 전반으로 확장시킨다. 앨버트 허시먼의 ’숨겨진 손(hiding hand)‘ 개념은 제국 시대의 호혜 관계를 20세기 후반의 현대적 개발 사업에도 투영할 수 있게 해준다. 허시먼은 모든 개발 사업은 계획에서 상정했던 것보다 실제 집행 시에 항상 더 많은 자원이 투입되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당초 계획에서 생각한 비용과 실제 집행되는 비용 사이의 차이는 어디론가 증발하는 것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변수의 개입으로 계획이 확장될 때, 그 차액은 개발 사업의 대상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흘러 들어간다. 예컨대 누렉 댐 건설 노동자들의 임시 숙소는 ’모범 도시‘ 계획으로 확대되고, 각종 도로 신설 사업은 초기에 계획했던 것보다 더 필요한 것으로 드러나며 교통 인프라에 추가적인 개선을 가져다주는 셈이다. 이처럼 중앙아시아 개발 사업들은 중앙의 선물과 지역의 강력한 지지라는 상호 의무 수행의 결과였으며, 제국 시절 관행들의 현대적인 변용이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런 상호 의무 수행이 소위 ’리틀 딜(little deal)’로 칭해지는 탈이데올로기화되고 물질적 풍요에 초점을 맞춘 정권과 사회의 거래 관계로만 정당화된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누렉 댐 사업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개발 서업들은 냉전과 탈식민화, 민족 평등의 약속이라는 정치적이도 이데올로기적인 수사를 통해서 정당화되었다. 한편 저자는 4장의 말미에서 계획의 추가적인 비용 집행이 자연환경과 생태계에 대한 충격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으며, 이러한 환경적 부담은 사업 당시에는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나 훗날 소련 체제를 위협하는 문제로 부상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5장부터 저자의 시선은 누렉 댐 사업의 현장으로 내려간다. 5장은 그중에서도 누렉 도시 건설에 관한 이야기다. 근대화를 추진하는 많은 정권은, 평평한 땅 위에 잘 계획된 근대적 도시 공간을 건설하는 것을 핵심적인 국가적 프로젝트로 삼고는 했다. 새로운 도시는 과학적으로 계획, 조직되었기에 국가가 약속하는 이상적인 도회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임과 동시에, 이상적 공간을 생산할 수 있다는 체제의 우월성과 자신감을 드러낼 수 있는 전시장이기도 했다.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에서 그런 역할은 본래 우즈벡 공화국의 수도 타슈켄트가 맡곤 하였고, 타지크 공화국의 수도인 두샨베(과거 스탈리나바드) 또한 새로운 사회주의 도시로서 재편되어 중앙아시아에서 근대적 도시 공간의 생산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야 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러한 계획은 실제 계획과 일상의 삶 사이에서 부딪히는 모순으로 인해서 차질을 빚곤 했는데, 중앙아시아에서 그러한 긴장은 주로 문화적인 면에서 오고는 하였다. 대가족 구조를 유지하고자 하고, 이슬람의 종교 활동을 수행하고자 했던 이들에게, 세속화된 유럽식 핵가족을 표준으로 상정한 러시아식 도시는 이질적이고 불편한 공간으로 다가오고는 했다. 충분히 근대적이면서도, 또 충분히 ‘타지크적’인 도시 공간을 창출하여 타지크인들의 도시화를 이끌어내고 그들을 산업 노동력으로 흡수할지는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당초 계획에 없었던 누렉 시 건설은 이제 타지키스탄에 주어진 사회주의 모델 도시이자 타지크인들 또한 편히 거주할 수 있는 민족적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물론 소련 체제의 방점은 전자에 훨씬 더 많이 찍혀 있었다. 도시 건설 당국은 여러 ‘문화 클럽’, 공연장, 의료 기관 등을 구비하여 타지크인도 다른 지역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근대적 도시 공간의 산물을 누릴 수 있게끔 의도했다. 하지만 문화 클럽을 모스크로 전용하는 등, 실제 건설 현장에서 타지크인들은 당국의 계획을 자신들의 문화적 맥락에 맞게끔 전유하고자 하는 시도도 나타났다. 누렉을 둘러싼 농촌 마을에서는, 소비에트 체제가 의도하는 근대적 도시 공간의 삶에 대해서 무관심한 반응을 주로 보이기도 하였으나, 누렉 시의 발전상을 보며 도시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각종 기술에 대한 접근성을 농촌도 유사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누렉 도시 건설 프로젝트 또한, 후기 소련이 탈이데올로기화되었다고 단정하기에는 어렵다는 여러 증거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화, 발전, 사회주의, 국제주의 등의 공식 이데올로기는 도시 공간 건설을 둘러싼 다양한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바라는 바를 요구하는 언어로 기능했고, 도시 건설 현장은 체제의 공식 이데올로기의 언어들이 경합하는 협상의 장이 되었던 것이다.

6장은 도시 공간 속의 사람들의 경험을, 회고록 및 구술 자료를 통해서 생생하게 증언하는 장이다. 소련에 전면적인 근대화 프로그램이 추진되었던 스탈린 시대에 체제는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개인들을 ‘근대적 주체(modern subject)’로 전환하고자 노력했다. 우랄 산맥의 철강 도시 마그니토고르스크에서 이러한 근대적 주체 형성 노력을 분석한 스티븐 코트킨의 Magnetic Mountain은 이 주제를 선구적으로 다룬 대표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체제가 누렉에서 마그니토고르스크와 마찬가지로, ‘봉건적’이고 ‘낙후된’ 삶을 살고 있다고 간주된 타지크인을 근대적인 소비에트 주체로 훈련하고 전환하고자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스탈린 시대와 마찬가지로 개인이 체제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과정이 온전히 이데올로기적인 각성의 과정도 아니었으며, 전적으로 사적 이익의 전략적 추구라고만 볼 수도 없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개별 주체들이 자신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서 체제의 레토릭을 동원함과 동시에, 실제로 체제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자신의 주체성에 자부심을 느끼고 체제가 제공한 기회와 경험을 귀중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를 보여주기 위하여 주마굴 나자로바, 시린굴 아예조바와 같은 최초의 타지크 여성 크레인 운전수들이나, 사파르 사미예프나 무하바트 샤리포프, 마흐람과 같은 모범 노동자이자 당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이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저자의 분석에 생생함을 더한다. 물론 갑작스럽게 ‘양치기에서 건설자로’ 변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가족과 절연해야 했고,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터의 시선과도 싸워야 했다. 상대적으로 온건히 개발 사업에 참여할 수 있던 이들 또한, 무슬림으로서, 혹은 아내와 어머니로서 자신에게 기대되는 역할과 자신이 느끼는 정체성을 ‘호모 소비에티쿠스’적인 삶과 어떻게 조화시킬지 고민했다. 물론 누렉에서 교육과 노동을 통해 얻은 사회적 상향 이동, 근대적인 가족생활과 기술에 대한 이해, 여러 민족과의 국제주의적 교류 등을 경험하는 과정은 충분히 보편적이지 않을 수 있었고, 타지크 공화국 전체로 확장한다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충실한 당원들과 모범 노동자들이 형성되어 오늘날까지도 타지크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누렉 프로젝트의 유산이었다.

타지키스탄의 수도 두샨베.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7장은 도시 공간에서 벗어나서 콜호스를 중심으로 타지크의 농촌 사회를 개발하고자 했던 소련 체제의 노력을 살핀다. 농업과 농촌 문제는 해체 시점까지 소련을 괴롭힌 문제였다. 소련은 농업 기계화를 통해서 영농을 근대화하고 생산력을 진작하고자 했으나, 실제 농업 현장에서는 지속적으로 노동 집약적인 방식이 유지되었고, 생산성의 급격한 신장은 일어나지 않았다. 후기 소비에트 시기에는 이런 상황에 더해서, 도시와 농촌 간에 벌어진 상당한 생활 수준 격차를 해소하고 복지 국가로서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다. 소련은 농촌에 여러 투자를 통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는데, 중앙아시아에서는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여러 지역적 특수성이 추가적으로 작용했다. 첫째는 이 지역이 소련 경제 전체를 위한 목화 생산지로서 너무나 큰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었다. 중앙에서 할당한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서 각 지역에서는 아동 노동, 청소년 노동까지 동원해야 했고, 이런 노동력 동원은 교육 시간을 침해하여 중앙아시아 인적 자원 발전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둘째는 특히 타지키스탄에서 산악지대에 산개한 마을들에게 적절한 종류의 교육, 의료, 행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당국은 스탈린 시대에 비해서 강제력을 훨씬 덜 동원하고, 대신 합리적 계획과 투자를 통해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목화 경작과 수확을 효율화하기 위해서 각종 농기계들이 콜호스로 분배되었고, 전력망을 대폭 확충하여 각 마을들이 근대적 생활을 누릴 수 있게끔 지원했다. 산악 지역의 마을들은 재정착 프로그램을 통해서 합리적으로 설계된 새로운 정착지에서 효율적으로 행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프로그램들의 성과는 대부분 좋지 않았다. 농촌의 기계화와 전력화는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전후방 인프라가 훨씬 더 긴밀해야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음이 드러났다. 수리할 수 없고 부품을 교체할 수 없는 기계는 방치되기 일쑤였고, 그 빈자리를 다시 아동 노동력 동원으로 채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전기는 발전량의 증대가 곧바로 마을로의 송전 및 마을에서의 전기 활용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재정착 프로그램은 주민들의 비협조나 탈출로 인하여 안 하느니만 못한 사업이 되고는 했다. 하지만 이런 사업이 전혀 효과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저자는 콜호스 지도자였던 타지크 여성 맘라카트와 그의 가족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농촌에서 추진했던 개발 사업이 도시와 마찬가지로 여러 근대적 주체를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소련이 타지크 및 중앙아시아 농촌과 맺은 약속이 기대했던 목표를 실현해주지는 못했지만, 소련에서 복지 국가의 이상이 다양한 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의의를 남겼음을 보여줄 수 있는 사례였다.

8장에서 저자는 1장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으로 돌아간다. 소련의 캅카스와 중앙아시아 개발은 냉전과 탈식민화라는 국제적 맥락 속에서 소련 내부의 정치적 요구가 조응하면서 이루어진 사업들이었다. 이 사업들은 그렇다면 그 국제무대 속에서 실제로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소련은 냉전 시대 공산권과 제3세계에 제공한 막대한 국제 원조와 개발 지원 사업들을 자국의 중앙아시아 개발과 겹쳐서 인식하였다. 중앙아시아를 성공적으로 개발해낸다면, 소련식 모델을 통해서 여타 비서구의 신생 독립 국가들도 빠른 발전을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타슈켄트는 이슬람 세계와 아시아 각국의 외교관, 유학생, 지식인들이 소련이 중앙아시아에서 수행하고 있는 근대화의 성과를 보여주는 전시장이 되면서 국제적 중심지로 기능했다. 하지만 이런 비전 자체는 1960년대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퇴색될 수밖에 없었는데, 신생 독립국들이나 제2세계로 편입된 국가들은 소련 공산당과 같은 사회 장악력을 지닌 정치 조직, 행정 조직이 등장하지 못한 상태기에 온전히 개발 사업을 추진할 수 없다는 여론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중앙아시아에서 훈련된 각종 지식인, 전문가, 엔지니어들은 그 이후에도 소련의 원조 및 개발 외교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신생 독립국의 빠른 근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훨씬 더 손쉬운 증거들이었다. 러시아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발전을 인도하는 ‘형’으로서 역할을 부여 받았듯, 중앙아시아 전문가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마찬가지로 ‘형’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서방의 전문가들이 제기하는 회의론에 맞서면서 자신들이 그런 회의론이 설득력 없다는 증거임을 역설하면서 소련의 국제적 이미지 형성에 기여하고자 했다. 그중에서도 타지크 전문가들은 특히 지리적으로 인접해있고 언어, 문화적 공유 정도가 큰 아프가니스탄 사업에 주로 참여했다. 물론 그들은 반대 방향으로의 영향도 받았다. 제3세계의 도시에서 소련보다 풍요로워 보이는 소비재 상황은 소련 체제에 대한 회의감을 심기도 했고, 인도를 비롯한 여러 국가의 전문가들과 진행한 교류는 중앙아시아를 제3세계로서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만들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다수의 원조, 개발 사업이 제대로 성과를 내기는커녕, ‘전통의 부활’이라는 역물결을 낳고 있는 것을 보며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는 소련의 국제 원조 사업에 대한 회의는 점점 증대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타지크 전문가들은 소련이 수행하는 전쟁을 경험하며 체제의 공식 선전을 의심하기도 했고, 몇몇은 아프가니스탄 전사들의 영향을 받아 심지어 체제에 대한 반감까지 품게되는 경우도 있었다.

9장에서는 바로 그 회의감이 국제 무대를 넘어 소련 내부에서 확산되었을 때, 종국적으로 소련의 해체까지 이어지는 위기를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브레즈네프 사후에 후기 소비에트 시대를 지탱했던 각종 정치, 사회적 합의가 흔들렸는데, 중앙아시아 개발 사업들의 저조한 성과 또한 마찬가지 맥락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중앙아시아 사회와 문화에 관한 연구들은 과거에는 중앙아시아에는 특수한 개발 사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뒷받침 해주는 논거였지만, 이제는 해당 사회는 어떠한 노력을 해도 성공적으로 근대화에 다다를 수 없다는 본질주의적인 회의론의 논거가 되고 있었다. 한편으로, 언론을 통해 목화 스캔들과 같은 중앙아시아 지역당의 부패 실상이 알려지고, 중앙아시아 농촌 지역에서 만연한 아동 노동이 고발되기 시작하면서, 중앙아시아에 대한 회의감이 대중적인 차원으로 퍼져 나갔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는 지역 차원에서도 소련 개발 사업에 대한 불만을 널리 퍼트렸는데, 주로 소련식 개발이 지역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다는 비판과, 러시아인의 우월한 지위가 갈수록 강화되고 소수 민족 문화의 입지는 줄어들고 있다는 소외감이 불만의 주를 이루었다. 피해의식은 민족 정체성을 따라 단층선을 만들어냈고, 각 민족과 공화국들은 모두가 연방 체제 속에서 손해만 보고 있다는 서사를 빠르게 내면화했다. 1990년에 아제르바이잔인과의 갈등을 피해 피난 온 아르메니아 난민들에게 수많은 대기자들에 앞서 아파트를 준다는 소문으로 발생한 두샨베의 시위는 대표적인 위기 징후였다.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본토의 자원을 중앙아시아에 ‘의미 없게’ 퍼붓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여론이 널리 퍼졌다. 연방 체제를 유지시켰던 보편주의적 가정에 입각한 근대화 서사가 무너지자, 경제적 침체와 민족적 갈등에 동시에 직면한 소련 체제는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붕괴하고 말았다.

결론에서 저자는 소련의 중앙아시아 개발 계획과 실패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양한 차원에서 논의한다. 먼저, 후기 소비에트 시대 중앙아시아는 단순한 침체와 사회의 냉소로 묘사할 수 없는 시기였다. 이 시기는 냉전과 탈식민화가 소련 내부에서 공명하고 상호작용하는 시기였고, 소련 안에서 자체적으로 ‘두 번째 탈식민’이라고 할 수 있는 국면을 만들어냈다(첫 번째는 러시아 혁명, 세 번째는 소련의 해체와 독립). 하지만 이 두 번째 탈식민 국면에서 중앙아시아인들은 냉전, 탈식민화, 개발, 근대적 주체 형성, 농촌의 복지 서비스 접근성 등의 다양한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고, 모스크바 중앙은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한 요구를 만족시켜주기 위한 여러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런 요구 사항들은 게다가 중앙아시아에서 형성된 새로운 전문가들과 인텔리겐치아들이 생산하고 유통한 ‘지역적 지식’이 소련의 공식 제도를 통해서 중앙으로 유통된 결과물이었다. 후기 소비에트 중앙아시아는 이념에 대한 냉소와 체제 중앙으로부터 이탈이라는 단순한 서사로 그리기에는, 이념적 열정과 중앙과의 새로운 관계를 통한 결속이라는 서사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한편으로 독립 이후의 타지키스탄은 어떻게 되었을까? 애석하게도, 소비에트의 개발 계획이 타지키스탄에서 목표한 바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소련의 해체가 그렇다고 타지키스탄에 번영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번영보다는 재앙에 가까운 경제적 붕괴, 내전과 지역 갈등,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둘러싼 논쟁과 극단주의의 침투, 숙련된 유럽인 인적 자원은 물론이고 타지크인도 포함하는 전문 인력의 대대적인 이탈 등 어두운 뉴스가 타지키스탄을 지배했다. UN과 세계 은행이 주도하는 개발 계획은 거의 성과를 내지 못했고, 타지키스탄의 국민 소득은 상당수가 러시아에서 보내오는 이주노동자들의 송금액으로 채워지고 있다. 이는 후기 소비에트 시기 타지크인 노동력을 러시아로 이주시켜 개발을 촉진하자는 제안이 다시금 반복되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는 타지크 공화국의 경계 내에서 개발을 촉진해야 한다고 비판했던 타지크 경제학자들과 그들의 제안을 수용해 추진된 여러 개발 프로젝트들이 존재한다. 타지키스탄에서 소련의 개발 프로젝트를 어떤 의미에서 대체, 혹은 계승한 것은 중국이 벌이고 있는 공격적인 인프라 투자 사업들이다. 하지만 이런 사업들은 중국의 사업적 이익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소련이 당초 목표했던 각종 사회적 개발은 거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저자는 소련의 방법론이 최고이자 최선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것이 가졌던 연대와 보편성, 국제주의적 이상을 놓치고서 지구적 개발이라는 중요한 문제에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Laboratory of Socialist Development는 누차 강조했듯 냉전이라는 거시적이고 국제적인 맥락에서, 실제 누렉 댐 개발 현장에 참여했거나 타지크 민족 지식인으로 성장한 개인들의 증언을 통합한다는 차원에서 후기 소비에트 시기의 중앙아시아, 나아가 후기 소련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도와준다. 저자는 타지키스탄의 사례를 통해서 후기 소련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기존의 도식화된 서술을 넘어서, 여러 차원에서 소련이 처한 상황과 내외부적으로 겪고 있던 경험들을 유기적으로 통합한다. 냉전이라는 지구적 패권 경쟁부터 모스크바의 정책 결정자들과 두샨베의 경제학자, 댐 건설 노동자의 인생사를 통합할 수 있게 하는 핵심 키워드는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였다. 발전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이상은 대외적으로는 제3세계를 중심으로 급증하고 있던 탈식민 운동과 결부되었으며, 소련의 새로운 대내 개발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해주었다. 모델 도시의 건설, 복지 국가의 이상, 도농 격차의 해소 같은 각종 쟁점들 역시 소련 체제가 대내외적으로 내걸었던 슬로건, 예컨대 인민 평등, 물적 풍요, 기술적 차원과 의식적 차원 모두에서 근대화의 달성 같은 것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것들이다. 후기 소련 중앙아시아라는 공간에서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작동했다는 사실은 이 시기, 그리고 비러시아 공화국이라는 공간이 소련 체제에 냉소적이었으며 이데올로기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기존의 도식에 강력하게 도전한다. 물론 그렇다고 저자가 이 시기가 스탈린 시대를 방불케하는 혁명적 열정의 시대라고 하거나, 중앙아시아가 러시아 핵심부와 같은 수준으로 소련 체제에 통합된 지역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콤소몰이 사회적 상향 이동과 근대적 주체화를 가능하게 하는 기관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음과 동시에, 문화사가 알렉세이 유르착을 인용하면서 일상적 차원에서 지루함과 형식성이 지배하는 공간이었음도 이야기한다. 개발이 실제 현장에서 문화적 차이로 인하여 좌절하는 현실은 책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양면적인 성격이 양립 불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체제의 기획 속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양한 정체성 사이에서 고뇌하고 자신의 사회적 역할과 기대를 조율해야 했던 후기 소련인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이데올로기가 소련 후기나 비러시아 공화국에서 여전히 상당한 힘을 발휘하였고, 그 이데올로기에 열렬히 참여한 이들에게 실망이 빠르게 공유되면서 소련 체제에 위기가 찾아왔다는 저자의 서술은 한편으로 소련이 결과적으로 ‘해체할 수밖에 없는’ 체제였다는 기존의 시각에도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체제에 찾아온 위기를 넘기며 공식 이데올로기를 부분적으로 변용하고, 소련의 사회 계약을 새로운 방식으로 갱신할 수 있었다면 소련 체제는 충분히 지속 가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반사실적 가정을 충분히 가능하게 할 만큼, 칼리놉스키는 기존의 단순화된 서술과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다차원적이고 풍부한 역사 서술을 독자들에게 제공해주고 있다.

소련 국내적 차원을 넘어 국제적 차원에서 이 책의 두 번째 기여는, 냉전 시대 제2세계와 제3세계의 위치를 온전히 잡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미국과 소련의 외교 정책 당국자들의 선택을 분석하는 데 집중한 종래의 냉전사 연구는 점차 냉전을 지구적 맥락에서 벌어지는 다차원적 사건을 형성하는 공통 배경으로서 이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되고 있다. 제3세계의 탈식민화와 국제 개발 사업의 유행 또한 냉전이라는 맥락 속에서, 미국과 소련의 개발 모델 경합과 탈식민화의 비전 제시라는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소련의 경험보다는 냉전의 승자인 미국의 경험, 그리고 미국식 개발의 성과나 실패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아직까지도 훨씬 익숙한 이야기다. 그러나 소련식 개발 모델은 미국식 개발 모델만큼이나 상당한 매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매혹했던 모델이었다. 소련식 모델은 반제국주의와 탈식민 운동을 지원하는 국가로서 소련이 가졌던 도덕적인 면모나, 강력한 정치 조직의 주도 하에 사회를 동원해서 신속한 개발을 이끌어 낸다는 효율성의 면모에서 모두 매력적인 것으로 보였다. 중앙아시아와 같은 소련의 낙후 지역, 혹은 소련이 주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제2세계와 제3세계의 국가들에서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단순히 GDP 지표로 환원할 수 없는 여러 성취를 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렉 댐 사업이 기대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이 댐은 여전히 타지키스탄의 전력 수요 대부분을 충당하는 전기를 생산하고, 소련이 설치한 알루미늄 제련소는 타지키스탄의 주요 산업 중 하나다. 하지만 소련이 주도한 국내, 혹은 국제 개발 사업들은 소련이 냉전의 패배자이며 종국적으로 해체할 수밖에 없던 체제를 가졌다는 선입견 때문에 공정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 에티오피아, 앙골라, 이라크, 시리아, 중국, 인도 등지에서 소련 전문가들과 그들의 지원이 어떤 성취를 만들어냈고 또 어떤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는지 더 공정하고 면밀한 탐구가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제3세계 사업에 관여한 소련 전문가들이 새로운 시야를 얻고 소련에 돌아왔다는 저자의 관찰대로, 제2세계와의 교류가 제1세계와 제3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어 지금의 우리 시대를 형성했는지 연원을 추적하는 작업 또한 유익할 것이다.

책의 명백한 장점에 비해서 아쉬운 점을 찾는 것은 꽤나 어려운 것 같다. 다만 칼리놉스키의 연구를 통해 추후 연구의 과제들이 몇 가지 제시될 수 있는 것 같다. 먼저 스탈린 시대 저발전 지역의 개발 문제가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재검토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저자는 스탈린 시대에 중앙이 중앙아시아나 캅카스 같은 낙후 지역을 개발하는 것이 우선 순위에서 다소 밀렸음을 언급하고, 스탈린 시대와의 주요한 단절로서 후기 소비에트 시기를 주목한다. 그러한 단절은 스탈린 시대에서 탈스탈린 시대로 넘어가면서 지도자의 성격과 소련 사회의 성격이 모두 변하고,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 또한 스탈린 시대에 대한 다소 도식적인 이해에 기초한 것일 수 있다. 첫째, 투르키스탄-시베리아 철도에 대한 매튜 페인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비러시아 공화국들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저발전 민족을 신속히 근대적 주체로 훈련시키는 것은 스탈린 시대 제1차 5개년 계획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였다. 페인은 투르키스탄-시베리아 철도 계획이 입안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중앙아시아 당간부들이 반제국주의 수사를 통해서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주었고, 카자흐 민족 노동력을 일터의 차별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주체로 훈련시켜서 체제의 선전을 실현시키고자 했는지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칼리놉스키는 스탈린 시대 민족 정책의 결과물이 대숙청 시기 민족 지식인들의 대대적 숙청과 제거였다고 언급했는데, 오히려 그는 2장과 3장에서 스탈린 시대가 교육을 통한 사회적 상향 이동과 참전 경험을 통해서 오늘날 중앙아시아 지식인 사회의 기초를 형성한 시기였음을 명확히 이야기하고 있다. 게다가, 소련의 지도부가 ‘냉전’을 대외관계에서 본질적으로 새로운 현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의문이 생긴다. 오히려 레닌 시대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이전 시대까지 소련 지도부는 소련을 일관되게 제국주의 세력과 대결하는 기지로서 인식했고, 냉전은 영국과 프랑스 위주의 구제국주의에서 변형된 미국 주도의 새로운 제국주의와 경쟁하는 국면으로 이해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스탈린 시대와 스탈린 이후 시대에서 반제국주의가 갖는 위상이 소련 지도부 사이에서 본질적으로 달랐을지 의문이다. 물론 당연히 스탈린 시대와 그 이후 시대는 명백히 다른 특징들을 보여주며, 그것은 칼리놉스키의 분석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그 차이가 단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질적 차이였는지, 혹은 연속에 가까운 양적 차이였는지를 밝히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 스탈린 시대의 여러 공화국들의 경험을 새로운 시각에서 복원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편 타지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개발 사업들에 대한 역사적 탐구는, 이 경험을 냉전 및 탈냉전 시대의 다른 경험과 비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먼저 미국의 경험은 어땠을까? 저자는 미국에서 주로 나오는 논의에서는 개발이 ‘비정치적’ 혹은 ‘탈정치적’인 현상으로서 이해되었던 반면, 실제 소련의 현실에서는 개발이 몹시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현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는 것은 반대로 미국의 개발 논의에도, 미국에서 포착하지 못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면모와 정치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시장 이데올로기, 인종 이데올로기, 주와 연방 정치의 특수성 같은 것은 실제 미국이 자국에서, 또 냉전 시기 신생 독립국에서 수행했던 프로젝트를 어떻게 규정했는가? 그리고, 하이모더니즘과 개발 이데올로기, 계획의 수행과 괴리라는 측면에서 미국과 소련이 수렴했다는 단순한 관찰을 넘어서, 이념적 수사가 만들어내는 냉전 시대 양대 진영 프로젝트의 실제적 차이는 무엇이었나? 더하여, 저자가 결론의 끝 부분에 언급한 중국과의 비교가 있다. 중국은 칼리놉스키, 혹은 다른 관찰자들이 상정하는 것만큼 ‘탈이념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세력일까? 하지만 후기 소비에트에 대한 재평가는 체제의 공식 이념과 수사가 갖는 힘과 그 지속성을 조명한다. 어떻게 본다면 중국 공산당 또한 마찬가지로, 그들이 표방하는 비동맹이나 반제국주의, 사회주의적 슬로건과 수사가 각종 개발 프로젝트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을까. 소련이 타지키스탄 개발 사업을 대외 원조 사업의 근거이자 모델로서 활용한 것처럼, 중국은 신장 위구르 지역 개발 사업을 일대일로 사업의 근거이자 모델로서 세계에 내놓고 있다. 민족 탄압, 강제 노동, 수용소 등 서방에서 제기하는 비판을 넘어 이 지역에서 중국이 자신들의 정당화 언어로 실제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소련의 중앙아시아 및 냉전 시대 국제 개발의 경험은 더욱 광범위하고 깊이 탐구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소련을 구성하는 각 공화국들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복원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칼리놉스키의 Laboratory of Socialist Development는 소련 내에서도 가장 외지고 가난한 공화국인 타지키스탄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후기 소련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제공한다. 하지만 타지키스탄이 갖는 경험은 단순히 중앙과 타지키스탄의 일대일 관계를 넘어서, 다양한 공화국 간의 관계를 포괄하는 더욱 넓고 복잡한 맥락의 일부분으로 위치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저자는 타지키스탄이 우즈베키스탄에 비해서도 불리한 여건에 있으며, 타지크 지식인들이 이 점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중앙아시아 5개 공화국들은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고 또 어떤 인식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을까? 카스피해를 마주 보고 있는 캅카스, 특히 같은 무슬림-튀르크 세계의 일원이었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은 어떻게 교류했을까? 극동이나 발트 공화국, 북극 지역과 중앙아시아의 교류는 어느 정도로 존재했을까? ‘소비에트 남부’를 이루었던 개별 공화국들은 냉전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국제적인 연결을 만들어 그들의 탈식민적 개발의 비전을 홍보했을까? 이런 질문들을 떠올리다 보면 타지키스탄을 다룬 칼리놉스키의 저서만으로는 전체적인 그림을 채워 넣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림의 내용물을 ‘어떻게’ 채워 넣을지 윤곽을 잡아주는 청사진으로서, Laboratory of Socialist Development는 두고두고 참조되어 마땅한 값진 연구임에 틀림없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또 감동적인 부분은 제6장 "양치기에서 건설자로"에서 저자가 직접 채록한 누렉 댐 건설자들의 이야기다. 폭력과 압제로 흔히 비추어지는 소련 근대화 프로젝트와 그 이상이 실제 사람들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몇 가지 구술 작업을 번역하여 첨부한다.


마흐람의 이야기.

누렉의 이데올로기 서기였던 마흐람은, 대조국전쟁기에 두샨베와 누렉 사이에서 오르막이 시작되는 오르조니키제아바드라는 소도시의 집단농장에서 태어났다. 나의 인터뷰에서 그는 전쟁 직후의 몇년이 특히나 어렵고 배고픈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그의 어머니는 마흐람이 어렸을 때 남편과 세 자녀를 남겨두고 세상을 떴다. 마흐람은 그럼에도 11년 간 학교 교육을 마칠 수 있었고 타지크 공화국의 물리학 대회에서 금상을 타기까지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그의 학습의 끝인 것만 같았다. 마흐람이 설명했듯이, 그의 아버지에게는 마흐람이 대학 입학 시험을 치게끔 두샨베까지 보낼 돈조차 없었고, 아들이 공부를 하는 이유도 막연하게만 다가왔다.

"저희 아버지는 종교적인 사람이었죠. 어머니는 일찍, 제가 12살일 때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께서 돈도 없고 학교에 갈 필요도 원래 없는 거라고 그러시더군요. '넌 왜 공부하려고 그러냐? 그 시간에 목동이 되어서 강가로 소나 몰고 가는 게 나을 거다. 뭘 하려고 공부 같은 걸 하겠다는 거냐?' 그래서 아버지에게서 도망쳤어요.

공산주의청년단(콤소몰)과 러시아 친구 덕택에 마흐람은 아버지가 설정한 한계를 넘을 수 있었다. 누렉은 그에게 변신을 완료할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주었다.

"예제게노프라고 벌을 치는 러시아 친구가 있었어요. 우리한테 꿀벌을 갖다 주곤 했어요. 왜 나한테 대학에 가지 않았냐고 묻더군요. 저는, 뭐, 대학에 갈 방법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가 무슨 수단? 이라고 묻길래, 글쎄, 도로나 뭐 여러 가지. 라고 했죠. 게다가 난 이미 대학 가기에도 너무 늦기도 했고... 그가 말하기를, 지역 콤소몰 사무실에 가서 누렉으로 보내달라고 하라더군요. 그래서 가봤습니다. 그들이 뭐가 필요하냐고 묻길래, 누렉에 가야합니다, 라고 말했어요.

그 사람들이 저를 알더군요. 제가 물리학 대회에서 상을 탔던 걸 기억한 겁니다. 그들은 '기꺼이 보내드리지!'라고 말했고 저한테 푸초프카(여행 허가증)를 써줬어요. 콤소몰 노동자가 나한테 10루블을 줬고, 내 러시아 친구도 10루블을 줬습니다. 그래서, 누렉에 도착했는데, 딱히 직업은 없었으니까 일단 콤소몰 사무실 앞에 앉아서 기다렸어요. 4일째가 되니까 댐 건설에서 짐꾼으로 일할 사람을 찾더라고요. 그게 1963년이었습니다. 한 달에 80루블을 받았고 꽤 좋은 돈이었어요. 생계를 꾸리고 저축을 해서 결혼을 한 게 1965년이죠. 1964년에는 교육 기관에 합격했습니다.

대학이나 여타 교육 기관에 등록한 많은 직장인들처럼 마흐람은 40일은 휴일 없이 학교에 나가고 나머지는 우편으로 공부하면서 교육을 마쳤다. 1968년에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기 시작한 그는 콤소몰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경력 사다리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당의 강사로 진급했고, 타슈켄트의 당 학교에 6개월 간 파견되었으며, 누렉의 당 조직 서기까지 임명되었다. 나중에 열린 재판에서 마흐람은 "콤소몰이 저를 누렉 수력발전 댐의 공사장으로 보낸 것은 제 행복입니다. 짐꾼에서 도시 당의 제2서기까지 올라간 건 순전히 내 노력으로 이룬 거에요. 누구 하나라도 저를 한 번에 올려주려고 도와준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마흐람은 우리 대화에서 지역 주민들을 위해 자신이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데 큰 자부심을 표시했다. 마흐람에게 있어서 변화는 그가 한 때 그러했던 것처럼 타직인을 위해 일할 수 있음을 뜻했다. "저는 모든 정치-계몽 작업을 책임 졌습니다. 그 모든 질문들, 학교들, 인프라, 교육까지. 좋았어요. 바로 저, 농부의 아들, 양치기의 아들을 위해서 아닙니까. 저는 인민에게서 나왔고 인민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이 말은 마흐람이 여러 번 들려준 후렴구였다.

인민에 봉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마흐람은 도시의 모든 측면, 특히 댐과 그 건설의 기술적 세부 사항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말했다. 그보다 더는 아닐지라도, 댐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는 못 해도 그만큼 중요했다. 댐은 사람들의 물리적 환경과 그들의 세계관을 동시에 변화시킬 수 있었다. 마흐람이 보기에 그의 업무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그들 자신이 겪었던 변화가 필요한 것임을 깨닫게끔 하는 것이었다.

"당신에게 빛이 있다면, 모든 게 있는 겁니다. 열이 있는 거고 다른 모든 게 있는 거요. 누렉 덕분에 사람들이 발전했어요. 사람들은 다른 민족들과 상호작용하기 시작했어요. 국가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들의 세계관이 달라졌습니다. 그런 순간이 정말 많았지요. 어린 남자애가 학교를 마치고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허락을 안 하는 겁니다. 왜 공부를 하냐? 이런 말들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에게 가서, 이야기하고, 설명하는 게 일인 겁니다. 우리는 항상 대화를 했지요."

마흐람과 다른 활동가들은 국제주의와 계몽뿐 아니라 열망의 고양이라는 차원에서도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타가이 소비로프는 옛 삶을 "너무 졸린 것"이라고 보았다. 마흐람은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이 사람들은 집에 앉아서 일도 잘 안 하고, 전반적으로 이해를 결여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을 하고 빵, 차, 설탕을 찾고,  소나 돌보는 겁니다." 거듭해서, 마흐람이 말하는 변화의 서사는 그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게 들렸다.

"사람들은 목동이었다가 지도자가 되지요. 공적 지도자 말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이해는 완전히 다른 게 되어요. 그들은 사방에서 왔는데, 짐꾼이나, 뭐 다른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 교양 있는 사람들이 되는 거요."

마흐람은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과, 타직인들과 연결되어 그 자신이 선택한 길로 동료 타직인들을 데려갈 수 있는 능력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근시안적인 부모들과 누렉과 소련 전체가 제안했던 더 나은 삶을 원한 그들의 자녀들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왔다.

"어느 날은.. 집을 떠난 뒤로 많은 세월이 흘렀을 때였어요. 제가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손님을 맞이하는 날이 있었는데, 누가 찾아온 겁니다. 마지막 사람이 1시 쯤 들어왔다 나가고, 아직 기다리는 사람 있냐고 물었어요. 다른 이들이, 저기 터번을 쓰고 덧신을 신은 노인이 계속 앉아 있다고 그러더이다. 나가서 봤는데 제 아버지였어요. 아니 아버지, 왜 거기 앉아계셔요? 왜 안 들어오셨어요? 이따 저희 집에 가셔서 좀 쉬셔요.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난 쉬러 온 게 아니란다.

난 네가 손님을 계속 맞이하는 날이 있다길래 와 봤다. 나는 여기 앉아서 한 번 사람들이 뭐라 말하나 들어나 보자 싶었단다. 사람들이 불행하다면, 너에 대해서 뭐라 말할지... 그런데 대부분 그 사람들은 행복해 하더구나. 자신들 상관을 찾을 수 없을 때 네가 그 사람들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하더구나.

'아버지에게 점심이나 같이 하지 않겠냐고 여쭈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여기에 점심 먹으러 온 것도 아니라고 그러시더군요. 그래서 "그럼 아버지 여기 왜 오신 겁니까?"라고 물었어요.

아버지께서 입고 계신 찢어진 타지크식 가운을 제게 보여주더군요... 터번도 보여주시고, 덧신도 보여주셨죠. 그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아버지가 보이냐? 너도 나 같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왔지.. 이제 너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얻고 있구나. 네가 이런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런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만 한다. 사람들이 너를 믿고 있잖니. 넌 지금 어릴지라도 네가 지금 그 사람들의 아버지야. 넌 그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건 죄나 다름 없어! 너는 앞으로도 나 같은 사람을 섬기게 될 거다.'"

1988년에 열린 마흐람의 재판에서 그를 변호하는 사람 중에는 마흐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누렉 공사장에서 크레인을 운전한 최초의 타지크 여성 중 하나인 시린굴 아예조바가 특히 그러했다. 시린굴은 마흐람을 자신의 '선생님이자 멘토'라고 칭하며, '마흐람이 아니었다면 저는 크레인 운전사도 못 했을 거고, 어디서 주부나 했을 거에요. 마흐람 덕분에 전 기술 대학에서 배울 수 있었단 말입니다.'라고 했다.


'최초의 타지크 여성 크레인 조종사'였던 시린굴의 이야기

"그때 저는 일하고 싶었고, 공부하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댐 공사장으로 일하러 갔을 때 오빠는 저녁에 공부했고 저도 지하실에서 아버지 몰래 공부했어요.. 그땐 어렸고 미숙했죠. 다블라트 자몬이라고 학급 친구가 있었는데, 아마 그 친구가 '시린굴, 이쪽으로 와서 좋은 일자리나 찾아보자'라고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당 활동가인 마크람이 저희 아버지한테 왔어요. 저희 아버지가 제 성적표를 보고, 성적이 잘 나온 걸 보더니 그래, 딸도 공부 시키고 일 시키자, 라고 하더라고요. 저녁에는 기술학교에 갈 수 있었어요.

제 아버지는 불도저 운전수였어요. 아버지는 불도저를 탔고 저는 크레인을 탔죠. 아버지가 자갈을 준비해 오면 저는 27입방미터의 크레인으로 그걸 집어 들었고, 공사장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집어서 떨어트려 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일하는 걸 반대하지 않았고 저는 열심히 일했어요. 오빠도 저를 지지해주었고요. 저희 가족은 노동자 가족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오전 일 때문에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집으로 점심 먹으러 돌아갈 때 옷을 갈아입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바지를 입고 갔는데 두 남자가 자기 아들들하고 같이 있었어요. 저를 나쁜 이름으로 부르는데.. 누렉시 콤소몰의 제1서기인 루키아 아토예브나가 저보고 왜 울고 있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저를 이렇게 저렇게 불렀다고 얘기했어요. 제가 나중에 시간이 좀 흘렀을 때, 인력담당위원회에서 일하게 됐는데, 산사태가 나가지고 저희를 마을로 불러서 사람들 상태를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은 일이 있어요. 그때 저를 불렀던 남자를 다시 만났어요.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끄럽지 않으세요? 당신이 저한테 그런 나쁜 말을 해서 1주일 간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내가 무슨 나쁜 일을 했다고. 난 열심히 일 했고, 좋은 가족을 만들었고, 그때는 어렸던 두 아들도 키웠어요.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그럽니까?' 그가 저보고 애원하더군요. '자매여, 용서해주세요, 시린굴, 용서해요. 용서해줘요..."


건설 현장 감독으로 일했던 사파르 사미예프의 이야기

"사파르 사미예프는 누렉의 강 건너편 마을인 키빌에서 태어났고, 2013년에도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었다. 손자들이 근처에서 노는 동안 그는 마당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사미예프는 누렉 이전부터 '소비에트인'이었다. 그의 인격은 부모가 죽은 후 5년을 보낸 고아원과 장교로 복무한 대조국전쟁을 통해 형성됐다. 1941년 9월 18일, 사미예프는 타지크의 아들들에게 전쟁에 참여하라는 스탈린의 요청에 응해서 전선에 나갔다고 말했다. 아슈하바드에서 장교 훈련을 받은 뒤 그는 전선에 나서 벨라루스, 폴란드를 거쳐 독일로 진격했다.

사미예프는 최전선에서 당에 합류했다. 2013년에 그는 사람들이 이제 당을 비판하고 더이상 존중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타지키스탄의 현재 문제의 근원은 강력한 당지도부의 부재였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입당 결정을 설명했다.

'보시오, 열명이 담배 한개비를 핍니다. 그게 우정이 아니요? 열명이 차 한 잔을 마십니다. 사단의 모든 장병들이 같은 주전자에서 마신단 말입니다. 그게 우정이 아니요?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16개 공화국들이 형제적 도움을 주고 받았단 말입니다.

전선에서 러시아인들과 나란히 서서 싸웠고, 댐 공사장에서도 그랬어요. 루뭄바 민족우호 대학교에서 온 자원자들도 있었소. 모두가 일했고 모두가 공부했단 말이지. 서로 손에 손을 잡고.

당활동가로서 내 역할은 건설 현장의 품질을 관리하는 거였는데, 당을 모독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개입해야 했던 거요. 그 규정을 자꾸 어기는 우크라이나 노동자가 하나 있었는데... 단열재를 제대로 안 쓰고 콘크리트를 붓더라고. 걔 이름이 비토힌이라는 놈이었는데, 일을 자꾸 서둘렀어요. 내가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들이나 서둘러 달린다'. 좀 더 느리게 해도 되고, 대신 일을 더 잘 하면 되는 거다. 비토힌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니미 좆까!' 내가 공산당에 보고할 거라 하니까, '당? 좆이나 까잡숴'라고 하더이다. 내가 중앙위원회에 보고할 거라 했고... 그렇게 계속 이어졌지. 그래서 수석 엔지니어 사무실로 갔는데, 담당자 모두가 모였어요. 12명 중 10명이 공산당원이었소. 내가 비토힌한테 당신이 말한 거 이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말하라고 얘기했습니다. 당의 존엄성과 도덕적인 관리 덕분에 소련이 강도 높은 지진에도 견디는 댐을 지을 수 있었던 겁니다.

1962년에 모스크바에 갔을 때는 아랍어 사전이랑 문법책을 사서 저녁에 독학했어요. 직장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건 자랑스런 일입니다. 언제는 라마단 기간에 러시아인 관리자가 단식을 하면 고된 일을 할 수 없지 않냐고 그러더이다. 단식이 타지크인을 약하게 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려고 그 관리자를 이길 때까지 씨름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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