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인민위원회와 신경제정책의 운명
왜 소련은 스탈린주의로 향할 수밖에 없었는가?
“소련은 언제부터 잘못되었을까?” 이 질문은 소련 체제의 위기가 가시화될 때마다 등장한 질문으로, 러시아 혁명과 소련 체제 자체를 바라보는 답변자의 시선을 가늠케 해주는 질문이기도 했다. 전체주의론에 입각한 시각에서는, 혁명의 주체인 볼셰비키와 그들의 이념은 볼셰비즘에 내재한 전체주의적이고 폭력적 성향으로, 10월 혁명은 시작부터 독재와 테러, 전체주의를 가리키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혹은 혁명의 잔혹함과 스탈린 독재가 러시아 민족이나 역사의 권위주의적, 폭력적 성향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런 시각에서 소련이라는 기획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었고, 당연히 소련의 실패는 그 뿌리가 되는 레닌주의, 볼셰비키, 러시아 전통 등에서 원인을 찾아야 하는 문제였다.
러시아 혁명, 정확히는 10월 혁명을 긍정하는 다른 시각에서는 문제가 사뭇 복잡해진다. 이 시각에서는 10월 혁명은 노동 계급의 민주적 열망이 상당히 반영된 혁명이었고, 볼셰비키는 전쟁, 토지, 노동 등을 둘러싼 문제에서 ‘아래의’ 열망을 가장 충실히 따른 정치 집단이었기에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0월 혁명에서 보였다는 혁명의 민주적 성격이나 아래로부터의 의지를 강조할수록, 이런 요소들이 대체 어떻게 스탈린 시대에 전개된 위로부터의 대대적 동원, 사회를 향한 폭력, 테러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생겼다. 10월 혁명부터 스탈린 혁명 사이의 많은 사건이 그러한 결정적 분기점으로 제시되곤 했다. 대표적으로 내전기를 주목하는 이들은 볼셰비키가 백군과 서방 간섭군의 위협으로 얻게 된 피포위 의식(siege mentality)과 그로 인해 정당화된 극단적 조치들이, 역사적 평가를 별론으로 하고서라도 이후 소련 체제에 큰 유산을 남겼음을 지적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결정적 분기점으로서 신경제정책(NEP)를 둘러싼 당내의 논쟁과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내전의 극단적 혼란을 수습한 레닌과 볼셰비키는 NEP를 통한 온건하고,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의 발전을 추구했으며, 만약 소련이 당내 ‘우익’이라 부르는 이들의 노선을 계속해서 따라갔다면 스탈린 혁명과 같은 막대한 폭력과 사회적 손실을 감수하지 않고 더 높은 성과를 보였을 것이라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대표하는 학자 스티븐 코언은 당내 우익의 주요 지도자라는 니콜라이 부하린을 주목하며, 우익의 권력 투쟁에서의 패배와 부하린의 숙청으로 ‘부하린 대안’이 좌절된 것이 소련 체제의 비극을 만들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좌절된 부하린 대안론’은 볼셰비키 혁명과 내전의 경험을 인정하면서도 이후 소련 체제의 억압과 종국적 실패를 설명하는 매력적 가설로서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 해체 시기에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소련의 해체 이후, 학자들이 그간 접근할 수 없었던 문서고 자료들을 확보하게 되면서 1920년대의 소련과 이후 스탈린 시대를 바라보는 종래의 관점에 대대적 수정을 가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문서고가 보여주는 증거들은 1920년대는 물론이고 스탈린 시대에도 소련이 결코 당 중앙의 전체주의적 통제로 일사불란하게 작동하는 체제가 아니었으며, 러시아 사회의 고질적 후진성, 광대한 지리적 크기에서 오는 행정상의 난점, 지역, 부처, 민족 등에 산재하는 다양한 정체성 간의 갈등, 사방에서 제기되는 지정학적 위기와 국제적 고립에 대한 공포, 사회 계층 간에 선명하게 놓인 단층선 폭력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혁명적 열정의 지속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혼란한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이런 그림에서 NEP는 현실적으로 지속 가능한 선택지가 될 수 없었고, 오히려 스탈린 혁명이 일개 독재자의 권력욕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당시 소련이 처했던 상황과 볼셰비키 지도자들과 일반 당원들의 세계 인식, 열망을 반영하여 전개된 사건에 가까웠다.
제임스 하인젠의 Inventing a Soviet Countryside: State Power and the Transformation of Rural Russia, 1917–1929 는 위의 맥락에서 NEP의 퇴조와 스탈린 혁명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1920년대 소련의 상황을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RSFSR) 농업인민위원회(Narodnyi Komissariat Zemledeliya, Narkomzem)를 중심으로 그려낸 역사서이다. 하인젠은 모스크바의 중앙 당, 정부 문서고, 펜자 주의 지역 당, 정부 문서고와 1920년대에 간행된 다양한 신문, 보고서 등을 종합하여 1920년대 NEP의 타협기를 상징하는 부처로서 농업인민위원회의 모습을 포착했다. 이 책을 관통하는 큰 주제는 그래서 NEP 자체의 정치적 부침을 통해 드러나는 농업인민위원회의 베돔스트벤노스치(vedomstvennost’, 부처성)이라고 할 수 있다. 베돔스트벤노스치는 구체적으로 각각의 관료 기구가 갖고있는 고유한 특성, 인식, 자기 이익 추구 등을 뜻한다. 당국가 체제에서 정부 부처가 단순히 당의 명령을 수행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당 기구와 활발히 상호작용하며 당의 정치적 결단에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그 자신도 사건의 전개에 영향을 끼치는 정치적 행위자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용어인 셈이다.
하인젠은 1920년대를 관통하며 농업인민위원회가 겪은 정치적 부침과 비전, 농업을 둘러싼 갈등을 보여주며 농업인민위원회 고유의 베돔스트벤노스치를 묘사한다. 1장과 2장은 제국의 유산과 혁명과 내전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이러한 베돔스트벤노스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보여준다. 이어지는 3장과 4장에서는 농업인민위원 알렉산드르 스미르노프를 중심으로, NEP가 고조되었을 때 농업인민위원회가 무엇을 추구했는지를 살펴본다. 5장과 6장에서는 각각 지역의 농업 전문가들과 중앙의 당이 NEP 및 농업인민위원회 정책의 지속을 용납하지 않고 어떤 과정을 거쳐 농업인민위원회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이루어지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책은 러시아 제국의 후진적 농업 상황, 전쟁, 혁명, 내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농업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지를 둘러싼 러시아의 농업 전문가들의 고민으로 시작한다. 18세기 서유럽이 농업 혁명을 거치며 빠르게 생산성을 개선했던 것과 달리, 러시아는 여전히 ‘중세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농경 문화를 갖고 있었다. 농노제는 오래전에 없어졌어도 미르라는 이름의 농민 공동체가 농촌을 규율하고 있었고, 농지는 비효율적인 삼포제로 경작되고 있었다. 농민들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기다란 지조를 따라 경작했고, 많은 마을 토지와 재산은 공동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국제 무역과의 빈약한 연결망 및 국내 시장의 미비로 상업 및 산업 작물의 재배는 성장 중이었으나 여전히 미비했다. 1905년의 스톨리핀 개혁은 러시아 농업의 후진성을 극복해보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시도 중 하나였다. 스톨리핀 개혁 하에서 농민은 미르에서 분리되어 개별 농가를 형성하는 것이 권장되었다. 한편 농업 지원을 담당한 젬스트보와 실무 전문가들은 미르의 공동 농업의 생산성을 개선하는 데 역점을 두고 근대적 지식 및 장비를 보급하는 데 힘을 썼다. 제정 말기 농업 전문가들의 이런 노력은 전쟁과 내전에도 불구하고 신생 소련의 농업인민위원회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러시아 혁명 후, 차르 정권의 농무부는 볼셰비키의 인민위원회 회의(Sovnarkom) 산하의 농업인민위원회로 재편되었다. 혁명과 내전으로 상당한 전문가 계층이 나라를 떠났지만, 그럼에도 잔존해있던 상당수 전문가들은 신생 정부의 관료 조직에서 다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인력을 볼셰비키가 즉시 대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농업인민위원회는 차르 시절 훈련된 전문가들과 농민 문제에 큰 관심을 표했던 사회혁명당 당원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하게 되었다. 구체제로부터 대부분 요소를 상속받아 내키지 않은 형태로 운영하는 것은 1920년대 대부분 정부 기관에서 나타난 일반적인 모습이었는데, 농업인민위원회는 이 점에서 특히나 두드러지는 부처였다는 점에서 이후 이 기관을 둘러싸고 드러날 긴장과 갈등을 예시하고 있는 셈이었다. ‘부르주아 전문가들(Burzhui spetsy)’이라는 달갑지 않은 호칭으로 불리었던 이 전문가들은 ‘전문성 하위 문하(subculture of expertise)’를 형성하며,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터였다.
농업인민위원회의 전문가들이 처음으로 맞닥뜨렸던 도전은 내전이었다. 농업의 안정적 발전에 몰두할 수 있게끔 해주는 정치적 상황이 도저히 마련되지 않는 가운데, 볼셰비키는 내전의 승리를 위해 거대한 군대와 굶주리는 도시를 먹여 살리기 위한 식량 조달에 필사적이었다. 이 임무를 맡은 부서는 식량인민위원회(Narodny Commissariat Prodovolstviya, Narkomprod)였는데, 이들은 농촌 각지에 파견되어 식량을 강압적으로 징발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농업인민위원회는 식량인민위원회 업무를 보조하며, 효과적인 식량 징발과 미래 사회주의 농업을 위한 집단 농장 건설을 추진하라는 은근한 압력을 받기도 하였다. 농업인민위원회는 자신들이 목표하는 업무를 수행하기에 극히 불리한 조건 속에서 수동적인 일만을 해야했고, 부처의 자체적 영향력은 극히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전이 마무리되고 볼셰비키가 자신들의 가장 위급한 순간을 그럭저럭 돌파하면서, 농업인민위원회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내전 직후의 파멸적인 농업 상황을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시키고, 번창하는 현대적, 사회주의적 농업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는 임무가 바로 그것이었다. 특히 당시 수백만을 죽음으로 몰고 간 1921-1922년의 대기근은 농촌의 회복과 온건하고 안정적인 식량 조달을 주창한 농업인민위원회가 강압적인 징발을 선호한 식량인민위원회보다 정치적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기근은 농업인민위원회 내부에서도 농촌을 향한 국가의 강력하고 지도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도 큰 설득력을 부여했다.
농업인민위원회의 전문가들은 30년 전쟁의 폐허를 뒤로 하고 근대적인 농업 경제의 발전을 이룬 18세기 독일의 사례를 바탕으로 소련 농업을 재건하고자 노력했다. 농민에게서 지지를 얻고 농민을 체제의 동맹으로 포섭하기 위해 농촌과 국가(도시)의 스미치카(smychka,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정책이 입안되었다. NEP 시기 토지법을 고안할 때 농업인민위원회에서는 농민에게 토지의 형태부터 노동력 고용에 이르기까지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시도들은 정치적 논쟁을 촉발함과 동시에 농업인민위원회에 가해지는 정치적 불신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스미치카의 일환으로 시도된 ‘발탁’ 정책은 농업인민위원회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적인 모습이었다. 볼셰비키는 노동자 계급의 정당을 표방했고 그들이 그리는 미래상은 명백히 도시적이었지만, 어쨌든 농민, 특히 빈농 또한 볼셰비키가 대표한다고 이야기하는 사회 계급 중 하나였다. 볼셰비키는 마을에서 신뢰할 수 있고 유능한 농민들을 정부 요직에 승진시킴으로써, 농민을 체제의 중심으로 포섭하고 도시와 농촌의 계급적 유대를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농민 발탁 정책은 그런 의미에서 스미치카 정책의 가장 상징적인 부분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많은 농민이 모스크바의 농업인민위원회 사무실에 자리를 얻었고 다양한 직책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예 농업인민위원을 맡았던 바실리 야코벤코의 사례는 농민 발탁 정책이 갖는 한계를 매우 잘 보여주기도 했다. 중농 출신으로 내전기 서부 시베리아의 파르티잔 지도자였던 야코벤코는 ‘농민의 혼’을 안다는 이유로 순식간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나라의 농무부 장관이 되었다. 야코벤코의 임명에는 농업인민위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인 테오도로비치의 의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테오도로비치는 누가 보아도 러시아 농민처럼 생긴 야코벤코의 외모를 통해 농촌으로부터 친숙함을 통한 지지를 얻고자 했지, 농업 업무를 이해할 전문성이 전혀 없는 야코벤코로부터 구체적 정책에 대한 토론, 조언, 결정권 등을 나눌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이후의 농민 발탁자들도 야코벤코와 마찬가지로 전시성 자리에만 머물러야 했다.
그런 와중에 농업인민위원회는 안팎으로부터 다양한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고질적인 자금 부족 문제, 농업에 대한 당의 형편 없는 대우로 인해서 갈수록 농업 업무에서 이탈하고자 하는 전문가들, 농민과 부르주아 전문가 양자 모두에게서 정치적 충성심을 의심하는 볼셰비키의 습성이 겹쳐 농업인민위원회는 계속해서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악재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전문 지식을 동원하여 국가 주도로 러시아 농촌을 현대화시켜야 한다는 농업 전문가들의 비전은 농업인민위원회를 계속해서 사로잡았으며, 부처의 이러한 분위기는 농업인민위원회의 볼셰비키 당원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농업인민위원회 특유의 베돔스트벤노스치를 형성했다. 1923년에 농업인민위원으로 임명된 알렉산드르 스미르노프는 그런 경향성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사실상 이 책의 주인공과도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스미르노프가 원래 농업인민위원회의 대척점이었던 식량인민위원회에서 근무했던 것은 소브나르콤이 어떤 의도에서 스미르노프를 선택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내전기에 단련된 볼셰비키적 규율을 부르주아 전문가 및 농민을 다루는 데 사용하여 농업인민위원회에 질서를 부여할 것을 기대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스미르노프가 농업인민위원으로서 처음 시작한 일들은 자신의 부처에 군사적 언어로 규율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스미르노프는 금세 농업인민위원회의 베돔스트벤노스치에 융화되어 갔다. 농업인민위원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직 내의 부르주아 전문가들에 대한 정치적 보호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스미르노프는 지역 당 조직이 지역의 부르주아 전문가들의 정치적 신뢰도를 비판하고 그들을 통제, 공격하려 하는 시도를 무마시키고자 인사에 관하여 모스크바 중앙 부처의 권한을 강화했다. 스미르노프는 또한 그 자신이 당의 중앙 위원으로서 리코프, 부하린, 제르진스키와 같은 당내 우익과 동맹을 맺고 중앙 당의 공격으로부터 부르주아 전문가들에게 보호를 제공해주는 후견인을 자처했는데, 중앙 당의 정치인과 그가 거느리는 부르주아 전문가들의 후견-피후견 관계는 NEP 시대의 일반적인 관행이기도 했다.
정권의 농업에 대한 무관심과 불신 속에서 스미르노프는 농업인민위원회가 더 많은 예산을 할당받고 더 양질의 직원을 거느릴 수 있도록 힘을 써야만 했다. 게다가 그와 동시에 스미르노프는 볼셰비키의 농민에 대한 불신을 무마시키고 농촌과 우호적인 관계가 왜 농업 정책에서 중요한지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볼셰비키는 부르주아 전문가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농촌과 농민을 신뢰하지 않았다. 볼셰비키에게 농촌은 하루빨리 사라져야 하는 구시대의 유물로 가득한 후진적 공간이거나, 쿨라크라는 이름의 부농들이 사적 임금 노동을 통해 빈농을 착취하는 계급적 갈등의 공간이었다. 어느 쪽이든 척결의 대상이었지 포용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스미르노프와 농업인민위원회의 전문가들은, 볼셰비키의 농업 이해에는 과학적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각종 통계와 수치와 농업 전문 지식을 동원하여 당의 공격에 저항했다. 전문 지식을 통제하는 전문가 집단이 독자적 정책과 담론을 추구하며 다른 행위자들의 간섭을 막아내는 활동은 ‘전문성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 일종의 정치적 관행이었다.
하지만 스미르노프의 이런 노력은 위원회를 둘러싼 끊임없는 논란을 만들었다. 정부 기구에 대한 감사 기능을 맡은 노동자농민감독국(Rabkrin, 랍크린)은 농업인민위원회의 터무니 없이 낮은 당원 비율, 비당원 관료들 간에 강하게 남아 있는 유대 관계와 혁명 전 그들이 보였던 몹시 의심스러운 정치적 행보 등을 지적하며 농업인민위원회에 상당한 수준의 인적 교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스미르노프의 전문가 보호에 불만을 느낀 농업인민위원회 내부의 당원 중에서도 마찬가지 불만을 가진 이들이 있어, 적극적인 비판 투서를 보내 스미르노프를 내부로부터 압박했다. 스미르노프는 당 중앙에서 그가 가진 위상, 조직의 장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인사권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어떻게든 유능한 전문가들을 농업인민위원회의 우산 속에서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여기에는 출신 성분이 불리한 인사들의 계급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기타’라고 모두 표시하는 일이라든가, 핵심 인력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적 인력을 희생양으로 제공해준다든가, 불만을 제기하는 직원들을 먼 지방으로 전근시키는 일 등이 포함되었다.
계급 정체성과 출신 성분 문제는 무산 계급의 국가를 선언한 소련에서 특히나 중요한 문제였다. 부르주아 전문가, 쿨라크, 사회혁명당 당원, 성직자 등 체제에 이질적이고 적대적 계층으로 분류된 이들은 체제로부터 항상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낙인이 찍힌 채 살아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낙인을 희석하고 체제에 순조롭게 녹아드는 것은 신체제의 혼란 속에서 살아남는 유용한 기술이 되어주었다. 스미르노프는 그런 정체성 조작의 기술을 탁월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스미르노프는, 농업과 농촌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15살까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서 농촌에 살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농민적 배경을 강조했다. 농민적 배경의 수사를 썼지만 이미 근대적 정치나 관료제 업무에 숙달되어 있었던 스미르노프는 그런 문제에 관해 정말로 아무런 경험이 없었던 ‘진짜 농민’인 전임자 야코벤코와 대조되는 인물이었다. 스미르노프는 이런 종류의 정체성 조작을 전문적 업무에 적합하지 않은 농민 승진자들을 의무적으로 발탁하여 할당을 채우라는 당의 요구로부터 자신의 조직을 방어하는 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하인젠이 보여주는 쿠지마 사브첸코의 사례는 상당히 흥미롭다. 1873년에 태어나 1898년부터 당 활동에 참여했고 수감까지 되었던 그는 전형적인 볼셰비키 직업 혁명가였다. 하지만 자신의 출신을 기재할 때 그는 대장장이인 노동자라고 답변했다. 이는 혁명기의 유동적인 정체성 상황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사브첸코는 청중에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내세울 수 있었다. 어렸을 때의 경험을 살려 자신을 농민이라 말할 수 있었고, 대장장이로서 일한 경력을 내세워 프롤레타리아트라고 정의할 수도 있었으며, 슬루자시(sluzhashchi, 사무원)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다. 복수의 정체성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은 사브첸코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인데, 노동자 사브첸코는 당원 승진, 교육, 고용 등에서 특전을 받을 수 있었고, 관료 사브첸코는 배급 우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며, 농민 사브첸코는 스미치카 정책의 수혜로 더욱 중요한 승진 혜택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피츠패트릭이 강조했던 초기 소련에서 “계급 정체성의 의식적 창조”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시다. 명성이 드높았던 경제학자이자 사회혁명당 출신인 니콜라이 콘드라티예프를 ‘쟁기에서 온 교수’라며 농민적 기원을 부여해주고 당의 압력을 회피한 것은 또 다른 예시였다. 하지만 이런 정체성 조작을 통한 회피 시도가 성공할수록, 당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할 수밖에 없었고, 궁극적으로는 전문가 보호의 성공 자체가 스미르노프 기획이 붕괴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농업인민위원회의 전문가들은 어떠한 농업 정책을 원했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농업 전문가들은 18세기 독일에서 진행되었던 농경 혁신, 즉 윤작, 상품 작물의 재배, 가축 및 기계의 적극적 도입, 과학적 영농 지식의 보급 등을 우선적인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이런 혁신을 어떤 형태로 확산시키는지는 경작 방식과 토지 활용 행태 등 촌락의 실제 사회적 관계에 따라 달라질 것이었다. 즉, 농업인민위원회는 촌락의 사회적 관계, 촌락과 국가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재조직해야 할지 선택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과제에서 농업인민위원회의 답은 스톨리핀식으로 마을 코뮌에서 자영농을 분가시키는 것도 아니었고, 볼셰비키가 선호한 국가 통제 하의 국영농장이나 집단 농장 모델도 아니었다. 그들은 현재 마을의 사회적 구조인 코뮌을 존중하고 코뮌을 기반으로 농경 현대화를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코뮌 중심의 접근은 몇 가지 난점을 만들어냈다. 생산성 높은 자영농들이 내전기의 토지 재분배로 다시 코뮌에 흡수되면서,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농가 대신 비효율적이고 파편화된 소농들이 농촌의 절대적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농업인민위원회가 겪은 기계, 비료, 종자, 인력 등 자원의 절대적 부족은 코뮌을 통해 단번에 소련 농업을 개선하려는 시도를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당은 계속해서 소련 농업이 대도약을 하기 위해서 집단화가 필요하다고 압력을 넣고 있었다. 스미르노프를 포함한 당내 우익들 모두가 언젠가는 소련의 농업은 집단화를 향해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속도와 수행 방식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있었다.
하지만 스미르노프와 농업인민위원회는 코뮌을 선호할 여러 이유가 있었다. 농업인민위원회의 제한된 인력과 자원을 고려했을 때 개별 농가를 상대하는 것보다 코뮌과 소통하는 것이 지역의 농업 업무를 처리하는 데 다소간 편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코뮌 형태일 때 농업인민위원회가 토지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기가 훨씬 쉬웠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정치적 의심을 받고 있는 농업인민위원회가 보기에도, 개별 농가를 독려하는 것보다는 코뮌이라는 형태의 사회적 소유를 옹호하는 것이 더 ‘진보적’으로 다가왔다. 이런 이유에서 스미르노프는 개별 농가의 독립을 지원하던 스톨리핀 개혁을 역전시켜서, 가급적 능력 있는 농민을 다시 코뮌의 틀 속으로 포섭하고 그들을 지원하는 방안으로 농업 정책의 틀을 짰다.
그런 유능한 농민들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대상이기도 했다. 쿨라크 문제는 농업을 바라보는 당과 농업인민위원회의 시선이 얼마나 극명하게 차이나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갈등 요인이었다. 윤작을 비롯하여 집약적 경작으로 전환을 촉구하면서, 농업 전문가들은 코뮌 안에서 부유하며 농경 혁신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인 농민들과 주로 제휴하였다. 문제는 이들이 농업 전문가들이 제안한 새로운 경작법을 적용하기 위해서 농번기에 일꾼을 고용할 필요성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적 고용 관계의 확산은 구체제를 일소한다는 볼셰비키의 이상주의를 정면으로 배격하는 것이었고,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을 선호하는 이들은 착취 계급으로서 쿨라크를 비호하는 일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스미르노프를 비롯한 농업 전문가들의 대응은 이번에도 정체성의 모호한 규정을 활용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쿨라크를 극히 협소하게 정의하면서 그들은 쿨라크로 분류될 수 있는 대부분의 부유한 농민들을 보호하고자 했으며, 농업인민위원회는 쿨라크가 아니라 ‘번영하는(zazhitochinyi)’, 혹은 ‘강한(krepkii)’ 농민을 지원할 따름이라고 반박했다. 농촌의 사회적 현실을 계급 간 착취 관계의 시선으로 보고자 했고, 그에 맞선 계급 투쟁을 고취하고자 했던 당의 주류는 농업인민위원회의 줄기찬 비호를 보며 역시나 위원회를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강화하게 되었다.
스미르노프는 그렇게 코뮌의 옹호와 정체성 조작을 통한 전문가 및 부농 보호를 통해 자체적인 부처 이익(베돔스트벤노스치)을 추구했다. 이는 스미르노프 주변에 포진한 측근 당원들과 농업인민위원회의 전문가들의 생각과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NEP가 순항하면서 농업인민위원회는 제도적 규모와 자원, 권한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농업인민위원회는 이 같은 성공을 누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속히 무너지면서 격렬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무엇이 농업인민위원회를 위기에 빠트렸을까? 하인젠은 5장과 6장에서 지역과 중앙에 내재되어 있던 위기 요인을 그리고 그것이 1928년과 1929년에 어떻게 폭발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농업 전문가라는 집단을 규정할 때 놓치면 안 될 것은 근무지와 직책에 따라서 이들의 업무 환경이 천차만별이었다는 사실이다. 스미르노프와 그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한 모스크바의 사무실은 농경 혁신과 농촌 근대화를 위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다양한 정치적 기교를 고민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농민과 실제 마주하는, 지역의 농업 전문가들은 전혀 다른 업무를 해야 했다. 그들은 너무나도 광대한 땅을 떠돌아다녔고, 극히 제약된 자원, 낮은 급료와 농민들의 불신 속에서 일해야 했다. 그들은 산업 분야에서 일하는 다른 전문가들이 누리는 생활 환경의 이득, 주거나 배급에서 오는 특전 같은 것을 누리지도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열악한 환경 때문에 농업 전문가들은 숱하게 다른 분야로 이직했으며, 어떻게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남고자 하는 처절한 분투를 하기도 했다.
현장의 농민들과 부딪히며 겪는 고충도 컸다. 대부분의 경우 농민들은 농업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근대적 농경 지식에 완고히 저항했다. 농업 전문가들이 날씨를 조절하거나 밀을 호밀로 바꾸는 마술을 부릴 수 있어야 한다고 기대했던 러시아 농촌의 상황에서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농업 전문가에게 가장 큰 실망감을 안겨준 사례 중 하나는 농민들이 삼포제가 삼위일체의 현현이라는 이유로 윤작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모습이었다. 전문가들에게 주어진 과다한 서류 업무는 안 그래도 도전이 많은 현장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역을 순회할 때 지역 당의 지도자들이 농업 전문가들을 자신들의 사업, 심지어 사적인 일에까지 강제로 동원하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우랄의 한 지역에서 집행위원장의 술자리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농업 전문가는 ‘반사회 분자’라는 이유로 기소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 같은 열악한 환경은 지역의 농업 전문가들로 하여금 당 중앙이 제시하는 집단화의 이상을 몹시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집단화는 사회주의 농업의 수립, 농촌 계급의 척결, 국가의 곡물 장악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대대적인 기계화를 수반한 농업 현대화 비전이기도 했다.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마치 제조업처럼 운영할 수 있는 현대화된 농업은 농업 전문가들에게 산업 분야에서 일하는 그들의 동료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위상과 역할을 부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다. 집단화를 앞두고 모스크바에서는 지역의 농업 전문가들을 농촌의 현대적 전환을 집행할 훈련된 인력이자, 후진적 농민과는 구분되는 유능하고 도시적인 인력으로 추켜 세워주는 다양한 발언이 등장했다. 이런 발언은 지역의 농업 전문가들을 고무시켰으며, 그들이 스미르노프와 모스크바의 농업인민위원회 사무실이 추구하는 노선을 저버리고 집단화의 지지자이자 수행자가 되게 독려했다.
당 중앙에서 붕괴하기 시작한 NEP의 기반은 스미르노프와 농업인민위원회에게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위기를 만들어냈다. 복수의 위기가 소련 지도부로 하여금 NEP의 지속은 불가능하다는 합의를 만들어냈다. 온건파 지도자의 거두인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급사는 중앙 정치에서 우익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영국의 단교 선언과 중국 혁명의 좌절은 소련이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언제든지 외국 침략자로부터 국가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공포를 강화시켰다. 위기감은 소련 지도부에게 국가의 신속한 발전과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형성하게 했다. 농업 자체의 현대화는 물론이고 공업화를 위한 재원으로서 곡물에 대한 장악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극단적 조치들이 요구되었다. 그러던 차에 계속해서 코뮌을 통한 점진적 접근을 옹호하는 농업인민위원회는 부르주아 질서를 옹호하고 농민에 끌려다니는 정치적으로 불온하고 무능한 부처로서 격렬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928년 1월에 발생한 곡물 조달 위기는 스미르노프 산하의 농업인민위원회는 물론이고 NEP 자체의 종언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국가의 곡물 수매 가격을 따르기 거부한 농민들로 인하여 도시와 수출 시장에 공급할 곡물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당국은 이 위기의 근원이 농민에 온정적인 농업인민위원회 관료들과 국가에 협조하기를 거부하는 쿨라크에 있다고 간주했다. 스탈린은 내전기의 경험을 되살려 ‘우랄-시베리아 방식’이라고 하는 강압적 징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농업인민위원회는 당의 노선 전환에 저항하고자 했으나, NEP를 향해 시작된 광범위한 공격을 버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스미르노프는 농업인민위원에서 해임되었으며, 그의 당원 측근들인 테오도로비치, 스비데르스키도 같이 해임되었다. 정치적 후견인을 잃은 부르주아 전문가들은 보호막을 상실함과 동시에 책임 있는 직위에서 신속하게 제거되었다. 반면 스미르노프의 후임으로 임명된 니콜라이 쿠뱌크는 쿨라크와 코뮌에 대한 당의 일반적인 견해에 훨씬 더 동조하는 인물이었다.
1928년의 샤흐티 사건은 부르주아 전문가들의 운명에 치명적인 사건이 되었다. 돈바스의 광업 엔지니어들이 소련 경제를 제국주의 세력의 지시에 따라 내부에서 파괴하려 들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이들이 공개 재판에 회부되면서 전국적으로 부르주아 전문가들에 대한 공세가 이어졌다. 1928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랍크린, 중앙통제위원회, 통합국가정치국(OGPU)의 공조로 농업인민위원회의 ‘이질적’ 분자들의 가면을 벗기고, 정치적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다. 숙청 대상자들은 출신 성분이 의심스러운, 공산당에 이질적인 사람들, 혹은 무능하고 부패하여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과업을 달성하기에 부적합한 사람들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조사 기관들은 숙청을 한다면 어느 수준까지 숙청을 해야 할 것인지, 두 기준이 명확하게 구분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 계속되는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이런 혼란을 이용해 농업인민위원회의 숙청 대상자들은 스미르노프가 활용했던 여러 기술들을 다시 동원하여 숙청을 회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스미르노프 체제에서 농업인민위원회 내부의 당 조직에 누적되어 있던 불만이 터져 나오면서 금세 무위로 돌아갔다. 한편 모스크바로 상경하여 한직에만 머물던 농민 발탁자들도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랍크린은 농민 발탁자들이 행정 및 전문 업무를 다룰 역량이 전혀 없는 데다가 책임 있는 직위마저 주어지지 않은 것을 파악했다. 그들은 농업인민위원회가 이 문제를 잘못 다루었음을 지적했지만, 모스크바에서 남은 시간을 과음으로 보낸 알콜 중독 상태의 농민 발탁자들 또한 부적절한 인력들이라는 것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1928년에 시행된 조사는 부르주아 전문가와 농민에 대한 볼셰비키의 오랜 불신을 확인시켜주는 듯 했고, 이는 1929년에 시행된 숙청으로 이어졌다.
농업인민위원회, 스미르노프, 콘드라티예프를 비롯한 부르주아 전문가들의 운명은 모두 비극으로 끝났다. NEP 정책 기조를 수행하고자 노력했던 RSFSR 농업인민위원회는 이제 집단화를 담당하는 새로운 기관인 USSR 농업인민위원회에 주도권을 넘겨줘야만 했다. 많은 부르주아 전문가들은 1930년에 소련 체제를 흔들고자 음모를 꾸몄다는 ‘산업당 사건’에 연루되어 수용소에 가거나 처형되었다. 스미르노프는 이 시기에는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정치적 위상을 사실상 상실했고, 1937년 대숙청 기간에 체포되어 1938년에 처형당했다. 그 사이 소련은 농민과의 어색한 제휴 관계를 종료하고 농촌을 통제하기 위한 대대적 공격, 집단화에 착수할 것이었고, 집단화는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갈 기근에도 불구하고 완수될 것이었다.
Inventong a Soviet Countryside 는 확고한 문서고 자료 및 당시 언론 기록을 바탕으로 NEP 시대를 상징하는 중추적 기관의 구체적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독자들에게 전해준다. 하인젠의 서술을 따라가면 ‘NEP를 지속시키는 온건파’, 혹은 ‘부하린 대안’이 당대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지속되기 몹시 어려웠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인젠이 결론에서 이야기하였듯, ‘근대화’와 ‘계급 정치’를 모두 추구하는 볼셰비키 입장에서 부르주아 전문가와 농민이라는 이질적 계급들과 타협하는 것보다는 전면적인 사회적 공세와 동원을 일으키는 것이 훨씬 더 매력적이고 논리적인 선택지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계급 정치의 원동력이 되었던 혁명적 열정이 계속해서 NEP를 공격하는 힘으로 작용한 것은 주목할만 하다.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키고 내전에서 승리를 이끈 그러한 열정은 계급 질서의 일소와 국가의 전면적 발전이라는 비전을 추구했다. 이런 비전 속에서 부르주아 전문가들의 높은 위상과 결정권, 코뮌과 같은 ‘후진적’ 형태의 생산 관계, 무엇보다 쿨라크로 대변되는 농촌 내 ‘착취 질서’의 지속은 다시금 혁명적 열정을 동원하여 분쇄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신생 소련 정권의 구호와 당원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던 이 같은 정서를 생각하였을 때, 소위 ‘부하린 대안’이 채택되고 정치적으로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을 기대하기는 몹시 어려워 보인다. 1930년대의 집단화와 스탈린 혁명이 인민들이 보여온 ‘아래로부터의 의지’가 납치당한 결과물이며, 스탈린의 독재적 의도로 소련이 ‘잘못된 궤도’로 들어갔다는 주장은, 러시아 혁명과 내전에서 발견되는 ‘아래에서의 의지’의 논리적 귀결로서 농업인민위원회의 몰락을 보았을 때 설득력을 갖추기 어려운 것 같다. 그 점에서는 아예 러시아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사관이 조금 더 일관성을 갖추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책에서는 짤막하게만 언급되지만, 영국 및 중국에서 겪은 국제적 위기 또한 NEP와 같은 온건한 타협책의 존속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점도 중요했다. 혁명과 내전을 통해 형성된 피포위 의식과 소련을 둘러싼 국제 관계의 난맥상이 상호작용하며 스탈린 혁명이 등장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아마 또 다른 서술이 필요할 것이다.
이 책이 제기하는 또 다른 문제는 전문가와 전문성의 문제이다. 근대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의 발전은, 명확한 기준과 방법론, 목표를 제공해주는 전문 지식을 자연, 사회, 개인 등에게 적용하는 공학적 접근법을 세계 각지에 보편화시켰다. 20세기는 전문성에 기반을 둔 접근법이 국가 기구의 막강한 힘과 결합하여 대규모로, 또 아주 미시적인 단위까지 침투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했다. 이 같은 막대한 변화는 변화를 수행한 전문가들, 그리고 전문성과 전문 지식은 정치, 사회적 권력 관계로부터 단절된 객관적 요소들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이래로 전문가와 전문성 또한 일정 부분은 사회적 구성물이며 다양한 정치, 사회, 문화적 관계망 속에 있다는 주장이 등장해 큰 설득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하인젠의 책에서 나타나는 ‘전문성의 정치’나 ‘전문가 하위 문화’, 그리고 그를 둘러싼 당의 공격은 전문성과 권력의 관계를 둘러싼 이후의 논쟁을 미리 예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농업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업무에 큰 자부심을 느끼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농촌과 농업 발전의 비전을 사회에 적용하려 했는데, 농업인민위원회의 부처 이익은 농업 지식만큼이나 중요한 정책 결정의 동기가 되어주었다. 볼셰비키 당은 농업, 그리고 1920년대 전문가들을 부르주아 전문가들이라 부르며 차르 체제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은 그들이 자신들의 전문 지식을 구체제의 부활, 혹은 사회주의 건설의 방해 목적으로 활용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런 차원에서 소련이 확보하고자 했던, 정치적으로 신뢰 가능한 전문가 집단의 부상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은 것은 다소 아쉽다. 내전이 끝나고 국가가 안정화되면서 소련은 노동자와 농민층을 승진시켰으며 그들에게 근대적 기술 교육과 훈련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구체제의 유산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붉은 전문가들’은 부르주아 전문가들을 공격하며 그들의 자리를 대체해갔다. 농업 전문가들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하인젠이 언급한 티미랴제프 농학교와 같은 기관은 NEP 시기에 ‘붉은 전문가’들을 훈련시키지 않았을까? 그들이 바라보는 농업과 그들이 형성한 전문성은 어떤 모습을 띠었을까? 책에서는 농업인민위원회 중앙 부처로 승진한 농민들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들의 개별적인 이야기도 상당히 소략하게 나올 따름이다. 소련이 자체적으로 훈련시킨 농업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1920년대 농업인민위원회의 전문가 정치에 대한 더 풍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줄곧 언급하였듯 농업인민위원회는 1920년대 소련이 직면했던 계급적 긴장과 혁명적 열정, 그리고 정치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이질적 집단의 존재로 지속되기 어려웠던 NEP의 운명을 상징하는 기관이었다. 농업인민위원회 자체의 운명 또한 1929년 농업인민위원회에 대한 대대적 조사와 숙청으로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농업인민위원회 숙청을 둘러싼 전체적인 이야기는 훗날 1937-38년에 펼쳐질 대숙청을 예시하는 듯 보인다. 전문가들은 자신들에게 찍힌 체제의 부정적 낙인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사회 급변기에 발생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성공적으로 이용했었다. 그들은 복수의 정체성을 내세우고, 자신의 사회적 출신을 숨기며 생존부터 출세까지 다양한 이득을 추구했다. 같은 방법론은 농업인민위원회가 보호하고자 했던 농촌의 부농들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신생 소련 체제가 겪고 있던 막대한 혼란과, ‘근대적’이라고 보기 어려웠던 권력의 자의적 남용, 외국 세력의 끊임없는 위협과 소련이 처한 국제적 고립을 생각했을 때 이러한 정체성 조작의 기술은 아마 체제를 위협하는 제5열이 사회 곳곳에 즐비하다는 편집증적 인식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아마 이 같은 혼란은 체제에 대한 악의와 단순한 무능함이라는 상이한 숙청 기준이 자주 혼용된 이유였을 것이다. 농업인민위원회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베돔스트벤노스치를 수행했다는 이유로 두 혐의를 모두 받아야 했다. 하지만 부르주아 전문가들에 대한 낙인, 정체성 조작, 감사와 숙청은 같은 방식으로 당성이 넘친다는 당원들과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번질 수 있었다.
하인젠의 책은 그 자체로 완결성 있는 훌륭한 서사를 제공하지만 추가적인 의문 또한 제기한다. 이는 책의 결점이라기보다는 후속 연구들을 바탕으로 보완할 수 있었으면 하는 문제들이다. 먼저, 베돔스트벤노스치의 문제가 있다. 하인젠은 농업인민위원회의 베돔스트벤노스치로 농민과 부르주아 전문가에 대한 온정적 태도와 부처 이익으로서 코뮌의 옹호를 들었다. 하지만 하인젠은 제도나 기관이 처한 전체적 그림을 보여주기보다는 알렉산드르 스미르노프라는 핵심적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농업인민위원회를 묘사한다. 물론 이는 제도화 수준이 낮은 대신 후견-피후견 관계로 대표되는 인적 영향력이 막대했던 1920년대 소련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적절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 스미르노프의 행보와 그를 둘러싼 당과 정부의 역학에 집중하는 것으로 당대 농업인민위원회의 전반적 모습을 파악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미르노프를 넘어 더 나아가고자 한다면 아마 농업인민위원회의 다른 요소들에도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RSFSR 농업인민위원회가 포괄했던 다양한 지역들(볼가, 중앙 흑토 지대, 캅카스, 시베리아, 우랄, 극동 등)의 농업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었고 이런 상이한 지역들에 대하여 농업인민위원회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러시아 바깥의 다른 민족 공화국들의 농업 상황과 RSFSR 농업인민위원회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예컨대, 또 다른 중요한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의 농업은 RSFSR 농업인민위원회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었는가? 아제르바이잔이나 우즈베키스탄으로 하여금 곡물 생산 대신 면화 경작에 집중하게 하고 러시아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곡물을 수송하여 식량 공급을 제공하는 계획은 농업인민위원회의 제도적 틀 속에서 어떻게 논의되었는가? 농업인민위원회와 다른 부처의 관계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는 식량인민위원회와의 갈등이 주로 묘사되지만, 농작물을 가공하거나 농기계 등 자재를 공급하는 다른 산업인민위원회와는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았을까? 그리고, 당시 지역 당들이 수립하고 있었던 자체적인 발전 계획들과 농업인민위원회, 나아가서 소브나르콤은 어떤 상호작용을 했을까? 베돔스트벤노스치를 더 온전하게 재구성하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당대 소련의 행정 및 경제 관계에 대한 더 큰 그림과 관계망 속에 개별 부처를 위치시키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소비에트 농촌을 발명하기: 국가 권력과 농촌 러시아의 전환”이라는 제목과 달리 책에서 농업, 농촌, 농민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은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하인젠의 책은 물론 명백히 농업인민위원회에 관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농업인민위원회는 농촌을 다루는 전문성 있는 기관, 자체 부처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관, NEP의 부침을 상징하는 기관으로 제시된다. 5장에서 하인젠은 지역 농업 전문가들의 업무를 보여주며 그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과 집단화 비전을 논하지만, 아쉽게도 모스크바 중앙의 정치적 동학과 연관되는 책의 주된 내용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분량만 할애되었을 따름이다. 사실 이 책은 농업사 연구서라기보다는 정치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농업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없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목과 내용의 괴리는 분명 존재한다. 책에서 다루는 1920-1929년의 시기에서 소련 농촌은 발명되지 않았고, 농촌 러시아는 전환되지 않았다. 발명과 전환은 오히려 농업인민위원회가 저항했던 대대적 집단화를 통해 이루어질 터였다. 부르주아 전문가와 NEP의 퇴조라는 주제를 살려 제목을 지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한다.
물론 농업 이야기는 농업인민위원회라는 제도의 역사, 나아가 당대 소련이 처했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하다. 농업 이야기를 보강할 수 있다면 1920년대 농업인민위원회, 나아가 NEP와 집단화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1920년대 소련 농업의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서술할 수 있을까? 우선 근대 국가의 행정 권력이 농촌에 침투하는 지구적 과정 속에서 소련의 경험을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 도시에 근거한 국가 권력이 교통과 통신의 발전, 관료 기구의 확장에 힘입어 자신의 힘을 농촌 구석구석에 투사하는 과정은 20세기 세계 각지, 특히 저발전 지역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야기였다. 이 과정에서 농촌과 국가 사이의 역학, 개별 농촌 내부의 사회적 관계, 국가 권력의 정치적 구성, 지도자들이 공유했던 비전, 농촌 재편에 영감을 주는 외국의 선전 등의 상호작용은 각국의 역사적 경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의 부르주아 전문가들은 18세기 독일에서 영감을 얻었다. 집단화 아이디어의 중요한 연원은 미국에서 시도되고 있던 대규모의 기계화된 영농 혁신이었다. 따라서, 농촌과 국가 권력 사이의 힘겨루기라는 맥락 속에서 다른 국가는 어떻게 대응했는지, 또한 과학적 영농의 비전이 어디서 어떻게 발전하여 소련의 집단화로 이어지게 되었는지 탐구하는 것은 집단화를 인간의 사적 이익 추구 동기를 무시하는 유토피아적 공산주의가 만들어낸 재앙이라는 단순화된 서술을 넘어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며, 소련이 당시의 맥락 속에서 채택할 수 있었던 더 나은 대안적 모델이 있었는지 검토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국가 권력의 확장과 농촌 근대화라는 틀은, 미국과 소련이 자신들의 근대화 경험을 제3세계에 투사하였던 냉전이라는 맥락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부르주아 전문가를 대체하고 자신이 육성한 대안적 전문성을 통해 성취한 스스로의 근대화 경험을 통해 소련은 대안적 발전 경로를 제3세계 탈식민 국가들에게 제공해줄 수 있었다. 사회주의권이 확산되고, 비동맹 국가들도 소련의 원조와 기술 고문단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상황에서 1920-30년대 소련 농업의 경험은 어떤 유산을 형성하고 어떻게 작용했을까? 마지막으로 지리와 국토 공간에 대한 비전 등 지리적 측면이 있다. 농업은 토양, 기후, 생태계와 그를 활용하는 인간의 기술 및 문화가 상호작용하며 헝성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농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농업을 구성하는 두 축인 자연환경, 생태계 및 기술에 더 많이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1920년대 소련의 지리적 환경은 어떠했고 농업 기술은 어떠했는가? 하인젠의 책에서는 쟁기, 가축, 기계 등 생산 인프라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여전히 전체적 그림을 그리기에는 한계가 있다. 생태 환경과 산업, 그리고 국토 공간의 유기적 재조직이라는 당대의 비전은 부르주아 전문가들이나 이후 소비에트 전문가들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 인식되었을까? 이런 측면들을 종합하였을 때, 농업인민위원회를 둘러싼 이야기는 아직도 후대인들에게 많은 탐구 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듯하며, 아마 ‘1920년대의 온건하고 민주적이었던 대안’을 계속해서 찾는 것보다는 필시 더 생산적인 결과를 안겨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