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언제부터 잘못되었을까?” 이 질문은 소련 체제의 위기가 가시화될 때마다 등장한 질문으로, 러시아 혁명과 소련 체제 자체를 바라보는 답변자의 시선을 가늠케 해주는 질문이기도 했다. 전체주의론에 입각한 시각에서는, 혁명의 주체인 볼셰비키와 그들의 이념은 볼셰비즘에 내재한 전체주의적이고 폭력적 성향으로, 10월 혁명은 시작부터 독재와 테러, 전체주의를 가리키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혹은 혁명의 잔혹함과 스탈린 독재가 러시아 민족이나 역사의 권위주의적, 폭력적 성향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런 시각에서 소련이라는 기획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었고, 당연히 소련의 실패는 그 뿌리가 되는 레닌주의, 볼셰비키, 러시아 전통 등에서 원인을 찾아야 하는 문제였다.
러시아 혁명, 정확히는 10월 혁명을 긍정하는 다른 시각에서는 문제가 사뭇 복잡해진다. 이 시각에서는 10월 혁명은 노동 계급의 민주적 열망이 상당히 반영된 혁명이었고, 볼셰비키는 전쟁, 토지, 노동 등을 둘러싼 문제에서 ‘아래의’ 열망을 가장 충실히 따른 정치 집단이었기에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0월 혁명에서 보였다는 혁명의 민주적 성격이나 아래로부터의 의지를 강조할수록, 이런 요소들이 대체 어떻게 스탈린 시대에 전개된 위로부터의 대대적 동원, 사회를 향한 폭력, 테러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생겼다. 10월 혁명부터 스탈린 혁명 사이의 많은 사건이 그러한 결정적 분기점으로 제시되곤 했다. 대표적으로 내전기를 주목하는 이들은 볼셰비키가 백군과 서방 간섭군의 위협으로 얻게 된 피포위 의식(siege mentality)과 그로 인해 정당화된 극단적 조치들이, 역사적 평가를 별론으로 하고서라도 이후 소련 체제에 큰 유산을 남겼음을 지적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결정적 분기점으로서 신경제정책(NEP)를 둘러싼 당내의 논쟁과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내전의 극단적 혼란을 수습한 레닌과 볼셰비키는 NEP를 통한 온건하고,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의 발전을 추구했으며, 만약 소련이 당내 ‘우익’이라 부르는 이들의 노선을 계속해서 따라갔다면 스탈린 혁명과 같은 막대한 폭력과 사회적 손실을 감수하지 않고 더 높은 성과를 보였을 것이라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대표하는 학자 스티븐 코언은 당내 우익의 주요 지도자라는 니콜라이 부하린을 주목하며, 우익의 권력 투쟁에서의 패배와 부하린의 숙청으로 ‘부하린 대안’이 좌절된 것이 소련 체제의 비극을 만들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좌절된 부하린 대안론’은 볼셰비키 혁명과 내전의 경험을 인정하면서도 이후 소련 체제의 억압과 종국적 실패를 설명하는 매력적 가설로서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 해체 시기에 큰 인기를 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