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파시즘 서평

미완의 파시즘 서평

일본은 왜 파멸적 전쟁으로 나아갔는가? 가타야바 모리히데의 <미완의 파시즘> 서평.

임명묵

제2차세계대전을 조금이라도 공부하게 되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나 스탈린그라드의 혈전보다도 일본군의 여러 기행이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온다. 당시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한국 입장에서는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이 한국 독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데, 그 전쟁에서 일본군이 보인 행위는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었기 때문이다. 압도적으로 국력의 차이가 나는데도 일본은 왜 중일 전쟁도 마무리 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과 싸움에 나선 것인가? 이미 패색이 만연한 상태에서 후퇴를 통해 병력을 보전하거나 지연전으로 상대방을 최대한 괴롭히는 합리적인 길이 아니라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돌격한 끝에 상대의 압도적 화력에 녹아버리는 ‘옥쇄’를 선택한 것일까? 이런 일화들을 접하다 보면 우리는 흔히 ‘황군은 광기의 집단’이고 일본은 나라 전체가 미쳐 돌아간 완전한 비합리적 주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아시아 유일의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 열강의 자리에까지 오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 업적을 이룬 일본이 왜 제2차세계대전 즈음하여 갑작스럽게 그렇게 ‘미친’ 것일까? 유명 작가 시바 료타로는 이에 대해서 일찍이 ‘러일전쟁 책임론’을 강조한 바가 있다. 막대한 손해를 입어가며 억지로 얻어낸 승리였고, 포츠머스 조약에서 얻어낸 게 많지도 않았음에도, 러일전쟁은 아시아 국가가 유럽 백인 제국을 이긴 쾌거로 칭송되었고, 기습 공격이나 203고지의 돌격 정신을 통해서 국력 차도 극복할 수 있다는 맹신이 퍼졌다. 그리하여 러일전쟁에서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폭주’한 일본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져 원자폭탄을 맞고 나서야 정지했다는 서사가 도출된다.

근대 아시아의 가장 상징적인 순간은 203 고지와 쓰시마 해협이었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가타야바 모리히데의 <미완의 파시즘>은 시바 료타로의 러일전쟁론을 비판하고 제2차세계대전과 군부 파시즘의 다른 기원을 밝히는 책이다. 가타야바는 군부 파시즘을 일으킨 주역들의 실제 행적과 발언을 보면 일반의 생각보다는 훨씬 더 사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들은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자살적인 전쟁과 광기 어린 옥쇄를 끌어낸 것인가?

이 책을 관통하는 개념은 ‘제1차세계대전’과 ‘갖지 못한 나라’이다. 대륙 반대편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제1차세계대전은 일본 전체로 보았을 때는 말 그대로 ‘강 건너 불구경’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유럽 제국이 전시 경제로 전환하면서 일본은 큰 폭의 산업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고, 전쟁이 끝나는 것을 더 두려워할 정도였다. 당대 지식인들은 벼락부자가 된 일본인들이 옛날과 같은 긴장감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군부는 일반 대중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미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청년 장교들은 협상국(영국, 프랑스, 러시아)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어 막대한 동원 능력과 기계화된 군사 장비들이 맞부딪히는 제1차세계대전의 전장을 실시간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대전, 나아가 미래전까지 눈에 담고 온 이들은 일본이 앞으로 마주할 전쟁 또한 마찬가지의 모습일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노장 가미오 미쓰오미가 주도한 독일령 청도(칭다오) 함락전은, 일본으로서도 상당한 화력 동원을 통한 ‘물량전’을 실험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장비의 빈약함을 돌격 정신으로 돌파하였던 노기 마레스케의 여순 203 고지 전투와는 너무나도 대비되는 새로운 방식의 전쟁이었다.

청도의 일본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하지만 청도 함락전을 성공시킨 일본군 지도부는 더욱더 큰 불안을 갖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현대전의 핵심은 물량전임을 제1차세계대전에서 입증되었다고 생각했고, 청도 전투의 승리도 극동에서 물량을 동원할 수 없는 독일을 일본이 힘으로 압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아주 정확한 분석을 내놓았다. 문제는 청도 수준을 넘어서 일본이 대영제국, 러시아, 미국과 같은 국가와 진짜 전면전에 들어섰을 때 과연 감당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었다. 여기서도 그들의 분석은 아주 정확했다. 일본은 국토, 자원, 인구 면에서 총력전 능력을 ‘가진 나라’를 이길 수 없었다. 일본은 ‘갖지 못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1차세계대전이 더욱 더 발전된 현대전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국제 질서가 제대로 회복되지 못하여 향후의 대전쟁의 씨앗을 여전히 남겨둔 상태에서 일본이 전쟁 대비를 안 하는 것도 말이 안 되었다. 즉, 제1차세계대전의 충격은 일본군에게 ‘갖지 못한 나라’로서 ‘가진 나라’와 싸워서 이긴다는 불가능한 과제를 고민으로 던져주었다. 그리고 갖지 못한 나라가 가진 나라를 이겨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태평양 전쟁이라는 파멸이 나오게 되었다.

전간기 일본의 대립구도를 상징하는 대표적 개념은 역시 황도파와 통제파다. 가타야바는 황도파의 대표인 오바타 도시로와 통제파의 대표인 이시와라 간지를 각각 분석하면서, 이 둘이 노선은 달랐음에도 ‘갖지 못한 나라’의 자구책이라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 두 노선은 모두 192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만난 밀약에서 시작되었다. 스위스 주재 무관인 나가타 데쓰잔과 러시아 주재 무관인 오바타 도시로, 유럽 출장 중이었던 오카무라 야스지는 바덴바덴에서 만나 제1차세계대전을 분석하고 일본을 새로운 총력전에 적응할 수 있는 국가로 탈바꿈시키고자 결의했었다. 바로 여기서 전시 일본의 국가 개조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바타 도시로는 러시아에 파견되어 있으면서 탄넨베르크 전투를 마주할 수 있었다. 오바타에게 독일군이 압도적 숫자를 지닌 러시아군을 단숨에 섬멸한 탄넨베르크는 그야말로 ‘신앙’과도 같은 전투였다. 왜냐면 물량이 부족한, ‘갖지 못한 나라’가 탄넨베르크의 신화를 재생산하면 ‘가진 나라’도 압도할 수 있음을 보여준 증거였기 때문이다. 당시 오바타 뿐 아니라 수많은 육군의 장교들이 유럽에 파견되면 탄넨베르크를 방문하는 일종의 ‘성지 순례’ 행렬도 이어졌다. 오바타는 게다가 러시아 혁명으로 제1차세계대전에서 러시아가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면서, 사회의 붕괴, 군주제의 철폐로 이어질 수 있는 총력전의 장기화는 어떻게든 피해야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신속한 섬멸전이야말로 오바타의 생각에 부합하는 최적의 전쟁 방식이었다.

오바타 도시로,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문제는 어떻게 숫자가 많은 적을 섬멸하냐는 것이었다. 오바타는 여기서 정신주의를 주창했는데, 황군이 예리한 정신력으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다는 변수를 고려하면 불가능할 것은 없다는 뜻이었다. 유능한 군인인 오바타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섬멸전과 정신주의를 주장했고, 그게 받아들여지기까지 했으니 일본군이 비합리적 행태를 계속해서 보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가타야마는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바타의 발언을 보건대 애초에 미국과의 전쟁을 상정하고 섬멸전 교리가 만들어졌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바타는 탄넨베르크에서 독일군이 질적인 면에서 러시아군보다 훨씬 우위에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사실 오바타 또한 숫자가 더 많은 군대를 제압할 수 있는 섬멸전은 마찬가지로 일본군이 상대방보다 장비, 조직, 훈련 정도 면에서 우위에 있다는 전제에서만 작동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공적으로 이야기를 할 때에 ‘황군은 이겨야만 한다’라는 일본의 합의를 깰 수가 없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일본보다 약한 상대와만 싸워야 한다’라는 본인의 뜻은 철저히 숨긴 것이다. 오바타 입장에서는 자신이 군 수뇌부가 되어서 정책 결정 권한을 가진다면 일본보다 강한 상대와 싸우는 것을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주적은 중국과 소련이었다. 러시아를 오랜 시간 관찰한 그는 소련군이 당분간 물량과 자원은 많을지라도 훈련과 조직 면에서는 일본보다 열위일 것이라고 분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오바타와 황도파는 밀려났고, 오바타의 ‘밀교’는 전해지지 않은 채, 정신력으로 섬멸전을 펼치면 아군보다 강한 군대도 제압할 수 있다는 섬멸전의 ‘현교’만 퍼지게 된다.

바덴바덴의 주인공 중 나가타 데쓰잔은 완전히 다른 방향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갖지 못한 나라’로서 ‘가진 나라’와 맞서는 방법은, 일본도 ‘가진 나라’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가타 데쓰잔은 이를 위해서는 군부와 관료가 주도하여 기계화된 전쟁에 대비할 수 있는 막강한 생산력을 구축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찍 죽었지만, 그가 만들어낸 통제파의 사상은 당대 일본에서 가장 기인이라고 할 수 있었던 이시와라 간지로 이어진다. 일본 불교 일련종 사상에 심취해 있던 이시와라 간지는 일련종의 가르침에 따라 지상에 왕도낙토를 건설해야만 하는 역사적 의무가 일본에 있다고 보았고, 말법의 세상이 ‘세계최종전쟁’으로 끝날 운명에 있다고 믿었다. 이시와라는 그 과정에서 서양에서는 미국과 독일이, 동양에서는 소련과 일본이 싸워서 끝내 서양 패도 문명의 대표인 미국과 동양 패도 문명의 대표인 일본이 문명의 결승전을 치를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 전쟁에서는 ‘폭탄 한 발로 도시 하나가 사라지는 가공할 신무기’와 ‘착륙할 필요 없이 바로 대양을 넘어가는 비행기’ 등으로 핵폭탄과 미사일을 예견하기도 했다. 문제는 동양 대표 문명으로서 소련의 안보 위협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이 ‘가진 나라’가 되어야 했는데 도저히 그 방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이시와라의 방책은 만주였다. 중좌(중령) 계급으로 1931년에 만주 사변을 일으킨 그는 만주국을 건국하고 만주를 일본 중화학 공업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과 우호 관계를 증진하면 동아시아 경제권이 유럽과 북미, 소련에 뒤지지 않는 최고의 권역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세계최종전쟁의 승리도, 그의 예언에 따르면 1960년대에 가능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일본은 일단 가진 나라가 되어야 한다’라는 이시와라의 본 뜻이 묻혀버리면서 당초 예상했던 방향과는 반대로 흘러가게 된다. 이시와라는 가진 나라가 되기 전에 자원을 계속해서 쏟아붓는 중일전쟁에 결사코 반대했고, 육군 주류와 의견을 달리한 결과 예편되게 된다. 중국이나 소련도 상대하기에 준비가 안 되었다고 생각한 그가 미국과의 전쟁을 회의적으로 보았음은 불문가지다.

이시와라 간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오바타나 이시와라처럼 무언가 강한 주장을 가진 이들이 본 뜻은 펼치지 못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태가 흘러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가타야마는 일본 특유의 정치 문화와 메이지 헌법을 이유로 꼽는다. 첫째는 ‘일본은 이러이러한 상황에서는 질 수도 있다’라는 것을 얘기하지 못하는 특유의 집단사고 문화다. 오바타의 경우가 대표적으로, 그가 자신이 생각한 것을 모두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면 미국을 상대로 한 정신주의적 섬멸전이 정식 교리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군이 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 결과, 일단 일본은 싸우면 무조건 이긴다는 공식이 표준이 되었고 무리한 전쟁을 막을 장치는 사라졌다. 둘째는 메이지 헌법 특유의 통치 구조다. 메이지 헌법은 명확한 통치 구조를 설정하지 않고, 메이지 유신 당시 원로들의 막후 협의를 통해서 정책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설계했다. 이는 원로들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매우 유용한 체제일 수 있었으나, 막상 원로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나자 국가 기구 사령탑이 부재한 상황에서 누구도 국가를 제대로 통수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일본 파시즘이 ‘미완의 파시즘’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강력한 지도자나 엘리트들이 파시즘이 필요하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기본적으로 분권형 체제를 지향한 메이지 헌법 구조를 뒤집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결국에 이런 상황에서 일을 맡는 사람은 ‘집단의 합의를 무난하게 따라가는’ 이들이 될 수밖에 없다. 가타야마는 도조 히데키가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보았다. 오바타나 이시와라의 말을 그럭저럭 따라가면서, 그들의 숨겨진 메시지는 굳이 건드리지 않고, 집단사고와 관성에 따라서 그냥 자신의 할 일을 하는 캐릭터. 그런 캐릭터가 무비판적으로 국정의 주도권을 잡은 상황에서 ‘갖지 못한 나라’로서의 자구책은 모두 ‘가진 나라와의 정면 충돌’이라는 방향을 향하게 되었다.

책의 거의 마지막인 8장에서는 나카시바 스에즈미를 중심으로, 일본군의 가장 기괴한 문화인 ‘옥쇄’가 어떻게 도출되었는지를 논한다. 여기서는 일본 불교에서 출발하여 일본 특유의 전체주의를 가능하게 한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사실 골자는 오바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정신력을 갖춘 이들의 무한한 공격을 통해서 일본은 미군에 단순한 물리적 전투력의 충돌보다도 더 큰 피해를 강요할 수 있다. 그런 전제 하에서라면 옥쇄는 합리적인 전술이 된다. 물론 이것 또한 ‘현교’였다. 나카시바는 실제로는 미국을 상대로 한 무한한 옥쇄가 정말로 전세를 뒤집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특유의 공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꺼낼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젊은이들을 자살 공격으로 내모는 근거가 되어주었다.

패색이 짙어졌을 때, 갖지 못한 나라로서 절망한 일본에서는 다른 방향의 자구책을 계속해서 내었다. 여성 노동력을 최대로 활용하면 생산력의 격차를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 일본인의 창의력을 통해 ‘결전 병기’들을 만들어낸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는 구호가 나왔다. 하지만 일본 파시즘은 여성의 역할을 미래의 신민이자 병사를 길러내는 훌륭한 어머니로서 한정했기에 여성 노동력 동원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창의는 미국에서 등장한 원폭에서 절정을 이루어 일본을 끝장냈다. 그렇게 ‘갖지 못한 나라’의 강박은 ‘가진 나라’의 대표인 미국과 소련에 의해서 분쇄되었다.

책을 읽다보면 당대 일본군 엘리트들의 식견과 분석력에 놀라게 된다. 일본군 엘리트들은 무책임하고 무모했던 것은 맞지만, 사태 파악을 아예 못하는 바보는 절대 아니었다. 그들은 현대전의 본질을 알았고, 일본이 현대전에 적합하지 않은 국가라는 것을 알았으며, 단기간에 현대전의 선두에 서 있는 국가들과 맞붙으면 진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당대 일본의 정치 문화, 천황제를 중심으로 설정된 종교적 합의, 새롭게 등장하는 전체주의 사상과 이러한 현대전 분석이 맞물리자 일본은 급속도로 파시즘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파시즘에도 미달한 일본의 체제는 끝끝내 현대전에 적응하지 못하게 된다.

옥쇄의 상징, 알류샨 열도 애투섬 전투. 후지타 쓰구하라 그림.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이들의 의의가 없지는 않았다. 옥쇄와 가미가제는 분명히 맥아더를 비롯한 미국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면서, 일본인들은 정말 서구인과는 다른 족속이 아닌가라는 이질감과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천황을 전범으로 처벌한다면 일본군 점령지에서 엄청난 반발이 발생하여 점령 비용이 폭증할 것을 우려했고, 천황을 용서했다. 막상 평범한 일본인들은 왜 전쟁의 최고 책임자인 히로히토가 처벌받지 않았는지를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말이다. 갖지 못한 나라의 몸부림은 일본 제국을 파멸로 몰아넣긴 했지만, 전혀 의도치 않게, 천황제만큼은 지켜내는 부수적 효과를 만들어냈다. 물론 그 효과가 전후 일본의 미래에 더 좋은 것이었을지는 여전히 논쟁적으로 남아있다. 게다가 GHQ의 정책과 그들이 안겨준 새로운 헌법은, 메이지 구체제를 일소하고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을 권력의 주류로 밀어올리면서, 파시즘 체제의 유산이 짙은 전후 체제의 기틀을 만들었다. 역시 그들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갖지 못한 나라의 몸부림은 역설적으로 전후 체제에서 꽃 피우게 되어 일본을 거대한 산업 대국으로서 굴기하게 만든다.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미완의 파시즘이 만들어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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