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은 한때 세계의 절반을 지배했던 초강대국,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무너진 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소련의 붕괴는 여러 의미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마침내 끝났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론을 바탕으로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건설을 외치던 좌익 사회주의 운동은 그 동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카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던 때로부터 약 150년, 혹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러시아를 최초의 혁명적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시키겠다고 선포한 때로부터 약 70년 동안 세계를 뒤흔들었던 사회주의의 전망은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역사의 일탈로 취급되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지의 도시, 농촌, 정글, 사막에 산재한, ‘새로운 미래’를 외치던 좌파 혁명가들은 순식간에 구닥다리 유물이 되었다. 그래서 소련의 잔해 바깥에 남겨진 좌파들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사라진 모스크바의 꿈을 뒤로 한 채 다른 곳에서 사회주의의 꿈을 안고 살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자유 시장이 주는 놀라운 생명력과 활기를 받아들일 것인가. 그러나 사회주의 몰락 이후 세계화, 혹은 워싱턴 컨센서스 같은 말들이 세계를 휩쓰는 상황에서 잔여 좌파들의 고민과 진로를 진지하게 살펴볼 사람들 따위는 없었다.
소련 붕괴는 한때 결정적인 지정학적 세력이었던 러시아를 세계 권력의 핵심 무대에서 끌어 내렸다는 점에서도 한 시대의 종언을 상징했다. 러시아는 그 특유의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일찍이 17세기부터 유럽과 극동에서 모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19세기에는 그 범위를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장했다. 지중해의 오스만 제국에서부터 중앙아시아의 사막과 오아시스, 만주의 평원까지 러시아 세력의 그림자가 드리웠고, 세계 패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영국은 러시아의 유라시아 장악을 막고자 최초의 대륙적 규모의 지정학적 경쟁인 ‘그레이트 게임’을 벌였다. 광대한 영토, 풍부한 인구와 천연자원을 지닌 러시아를 다른 유럽 국가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청산되지 못한 봉건적 유산과 무능한 정치 지도자들, 급증하는 사회 갈등 등 각종 내재적 문제를 관리하지 못하여 언제나 겉보기와 달리 취약한 강대국이었으며, 이런 약점은 끝내 제1차세계대전에서 러시아를 파멸시키게 된다. 그러나 근대화에 대한 신념으로 무장한 볼셰비키가 잠재력만 넘치던 낙후한 농업 국가인 러시아를 기계, 석유, 전기로 움직이는 산업 제국으로 변모시키면서, 러시아는 금세 옛 지위를 회복하는 것으로 모자라 그 이전에 누릴 수 없던 지구적 행위자로 부상했다. 해체 직전까지도 소련은 유라시아 어디든 투사할 수 있는 수백만의 육군과 오대양 어디에서든 작전할 수 있는 원양해군, 대륙과 대양 건너편을 자유롭게 타격할 수 있는 전략폭격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바탕으로 지구적 초강대국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소련이 15개 국가로 해체되고, 러시아가 체제 전환의 끔찍한 혼란을 겪으면서, 역시 150년이라는 시간 동안 키워온 지구적 세력으로서 러시아의 위상 역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소련의 두 가지 상징물, 즉 사회주의의 지도국이자 지구적 초강대국이라는 위상이 사라지자, 소련이 한 축을 담당했던 투쟁인 냉전 또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의 뇌리를 지배했던 하나의 시대가 그토록 빠르게 잊혀진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소련이 남긴 잔해를 둘러싸고 끔찍한 충돌이 벌어지는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 나머지의 세계는 이제 세계화 시대에서의 발전이나 세계로 뻗어 나가는 인터넷 네트워크를 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역사의 종언’을 축하하는 분위기는 소련 붕괴 이후 10년이 지났을 때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사그라들었는데, 여기에는 오사마 빈라덴이 이끄는 테러단체 알카에다가 자행한 9.11 테러의 역할이 몹시 컸다. 그러나 주된 안보 위협이 수백만 군대와 수만대의 핵무기를 보유한 제국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산자락에 은거하는 테러단체가 된 것은 분명 엄청난 변화임은 틀림없었다. 여전히 미국은 강력했고, 세계의 기술발전을 선도했으며, 역사의 올바른 길로 다른 국가를 이끄는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역설적으로 냉전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은 소련이 해체된 지 20년, 30년이 지나게 되면서였다. 21세기의 20년 동안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1990년대에 치솟았던 미국의 위상이 그 시기 동안 빠르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2008년의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는 세계적으로 미국이 가지던 카리스마와 자신감에 큰 손상을 입혔으며, 미국은 세계화와 정보화로 인해 생긴 국내의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분열에 직면해야 했다. 그와 반대로 중국은 미국에 맞먹는 대국이 되겠다는 자신감을 내비쳤고, 러시아 또한 자신의 영향권을 보장 받고자 미국 중심의 질서에 계속해서 도전했다. 미국의 상대적 지위 하락과 경쟁자들의 지위 상승은 아랍을 비롯한 각종 지구적 위기에서 미국의 대응 능력을 다시 저하시키면서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리고 2020년을 즈음하여, 마침내 중국이 본격적인 미국의 경쟁자로서 자리매김하면서, 사람들은 자연히 과거 미국이 가장 최근에 겪은 초강대국 경쟁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소련과 중국은 결코 같지 않고, 20세기와 21세기도 전혀 다른 시대지만, 또 그렇다고 두 사안이 완전히 별개라고 할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