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개략 (2)

냉전 개략 (2)

간단한 냉전 2편.

임명묵

4. 완화된 미소 대립: 데탕트

쿠바 미사일 위기로 절정에 달했던 냉전 위기는 베트남 전쟁과 체코슬로바키아 위기로 지속되면서 1960년대를 특징 지었다. 하지만 1960년대는 동시에 1970년대에 짧게나마 꽃을 피울 데탕트의 조건이 마련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소련이 빠르게 핵 능력을 따라잡게 되면서, 상호확증파괴(MAD) 상황에서 소련에 대한 절대적 우위를 점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미국은 자신에 막대한 전비와 사회적 갈등을 강요한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69년에 새로 취임하게 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냉전 대립을 완화하고,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초강대국으로서 소련을 온건한 방식으로 관리해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의 외교, 전략 문제 조언가인 키신저도 마찬가지 입장을 갖고 있었다.

데탕트의 설계자 헨리 키신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소련 지도부도 마찬가지로 데탕트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소련은 쿠바에서는 다소 굴욕을 감수하며 철수하긴 했지만, 미국과의 핵 격차를 좁히고, 베트남 전쟁에서 의도치 않게 미국을 수렁에 빠트리게 되면서 소련이 미국과 어느 정도의 세력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이는 소련이 미국과 동등한 지위의 초강대국으로서 세력권을 인정받고, 미국과 평화 공존을 통해 세계를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비전을 확산시켰다. 이런 인정은 소련 국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소련은 자국의 산업을 현대화하는 데 있어서 더 발전한 서방 기술에 접근하고자 했다. 게다가 소련은 국민들이 더 풍요로운 생활을 요구하게 되면서 식량을 비롯한 다양한 물자를 국제 무역에서 구매해야만 했고, 수입품을 결제하기 위한 경화를 더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 시장, 특히 서방 시장에서 자국의 에너지 자원을 판매해야만 했다. 당시 소련의 지도자를 맡았던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서기장 또한 데탕트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전쟁의 경험이 강하게 각인되었던 그는 핵전쟁은 물론이고 소련을 전쟁의 참화에 밀어 넣을 모든 상황을 꺼려했다. 브레즈네프는 데탕트를 자신의 통치를 상징하는 업적으로 삼고자 했다. 종합하였을 때, 소련의 상대적 지위 상승과 미국이 겪었던 전략적 난관, 그리고 미소 양국 지도자들의 성향이 데탕트의 조건을 만들어냈다.

데탕트의 시작을 알린 사건은 1969년에 시작된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이었다. 3년의 협정을 거친 끝에 닉슨과 브레즈네프는 1972년 모스크바에서 만나 협정을 타결시킬 수 있었고, 양국은 전략 무기 운반체를 동결시켰다. 이는 핵무기를 쌓아두고 대치한 두 초강대국이 인류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때는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수 있었다. 양국에 감돌기 시작한 데탕트의 분위기는 냉전의 주전장인 유럽에도 훈풍을 불게 했다. 이 훈풍의 주인공은 1969년에 집권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였다. 그는 동방정책을 추진하겠다 공언하며, 동유럽 국가들과 소련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며 동서 긴장 완화에 공헌했다. 특히 폴란드에 귀속된 구 독일 영토의 영유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1945년에 결정된 국경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독일 보수파에게서 매우 많은 비판을 불러왔지만, 철의 장막의 주요한 대립 요소 하나를 제거한 업적이었다. 동독과 서독 또한 조약을 체결하며 상대편의 정당성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독일 자본 또한 동유럽과 소련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960년대에 건설되기 시작한 소련-서유럽 간 드루지바 가스 파이프라인.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데탕트의 절정은 1975년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체결된 헬싱키 협정이었다. 미국과 소련을 포함하여 35개국이 서명한 이 협정에서 서유럽과 동유럽 각국은 1945년에 설정된 국경과 양측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기로 했고, 어떤 일이 있어도 양측이 무력 사용을 하지 않으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하기로 약속했다. 사실 미국의 보수파 측에서 헬싱키 협정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소련이 자국군의 군홧발로 공산주의를 강요한 동유럽의 부당한 정권을 인정하는 것은 과한 양보였다. 협정을 주도한 키신저는 대신에 사상, 양심, 종교, 신앙에 대한 기본적 인권을 존중하는 것을 모든 정부의 의무로 삼았다고 이야기했다. 소련 측에서는 이러한 조항이 향후 미국 측의 공격 빌미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지만, 동유럽 세력권을 인정 받을 수 있다는 더 중요해보이는 전망 때문에 양보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헬싱키 협정에 불만을 품은 보수파들의 존재, 그리고 헬싱키 협정이 심어 놓은 인권이라는 폭탄은 80년대에 ‘2차 냉전’이 시작되고 종국적으로 동구권의 연쇄적 위기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1975년의 헬싱키 협정,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5. 데탕트의 종식과 2차 냉전

닉슨과 키신저가 데탕트를 통해 소련에 일정 부분 양보의 제스처를 취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럽 바깥의 전선에서 미국은 소련을 봉쇄할 수 있는 기존의 전략을 더욱 적극적으로 채택하여 추진했다. 핑퐁 외교로 일컬어지는, 1970년대 미국과 중국의 화해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1972년 미중 정상회담과 1979년 미중 수교까지 이어지는 흐름은 데탕트의 종식보다는 아시아에서 새로이 펼쳐지는 데탕트의 연장이었다. 20년 전 한국전쟁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양국은 소련이라는 공동 위협에 대응해 손을 잡을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소련과 완전히 틀어진 중국은 북쪽에서 중국을 강하게 짓누르는 소련의 존재감에 맞서기 위하여 일본, 미국을 비롯한 서태평양 세력의 지원이 필요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의 패배로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손실을 입었고, 이 지역에서 입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소련에 맞설 추가적인 우호국이 필요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소련을 봉쇄하는 차원에서 그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미중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소련은 그에 대응하여 베트남과의 협력을 공고히 했고, 이는 1979년의 중월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동아시아 바깥 지역의 갈등은 데탕트를 최종적인 위기로 몰아넣었다. 데탕트 시기부터도 이미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1973년에 소련의 우호국인 시리아와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합동 공격하면서 시작된 4차 중동 전쟁은 중동에서 미국과 소련의 의도치 않은 대리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갈등을 원하지도 않았지만 또 패배를 원하지도 않았던 양국은 자신의 피후견국들에 무기를 지원했다. 이스라엘의 반격이 성공하면서 전쟁은 소련의 위신에 손상을 입히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데탕트에도 손상을 입혔다. 미국은 아랍 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에너지 지정학에 매우 중요한 이 지역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침해한다고 불만을 표했다.

석유파동과 현대 경제의 시작을 알린 욤키푸르 전쟁.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워터게이트로 데탕트를 이끌었던 닉슨이 사임하고, 포드 행정부를 거쳐 민주당의 지미 카터 행정부가 출현했을 때, 마침내 데탕트는 끝나게 되었다. 카터가 처음부터 데탕트에 회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인권에 대한 그의 이상주의적 접근은 소련을 확실히 자극했고, 양국의 신뢰에 큰 타격을 입혔다. 게다가 키신저의 후임이 된 전략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소련에 훨씬 더 원칙적이고 공세적인 입장을 강요하고자 했다. 제3세계에서의 갈등은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포르투갈의 이전 식민지인 앙골라에서 벌어진 독립 투쟁은 소련이 후원하는 MPLA의 승리로 이어지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남아프리카가 개입할 조짐을 보이자 소련은 쿠바와 함께 앙골라에 대대적으로 개입하여 앙골라의 공산화를 이끌어냈다. 에티오피아에서도 군주정을 폐하고 공산주의적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는데, 이 과정에서 소말리아와 벌어진 전쟁에 소련은 다시 한 번 개입했다. 아프리카에서 갑작스럽게 커진 소련의 존재감은 미국에 세계 적화의 공포를 다시 일깨워줬다. 미국이 보기에 소련은 유럽에서 데탕트를 얘기하고 평화 공존을 얘기하지만 그 뒷면인 제3세계에서는 세계 혁명 수출에 여념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소련은 자신들이 이미 미국과 동등한 초강대국으로 인정을 받은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산이 전혀 달랐었다. 소련측이 보기에 이 정도 개입은 미국도 자신의 세력권에서 늘상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러한 양자의 인식 차이, 특히 미국에서 점증하는 소련에 대한 반감과 데탕트에 대한 회의감을 알아차리지 못한 소련의 오판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폭발했다.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이 시도한 대대적 개입은 아프간인들의 저항으로 인하여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제3세계에서 소련의 세력 확대를 불안하게 주시하던 카터 행정부와 미국의 소련에 대한 인내심은 이미 바닥이 나 있던 상황이었고, 데탕트는 마침내 종식되었다. 그 후 ‘냉전 전사’인 로널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냉전의 초기 국면처럼 양대 초강대국의 갈등은 다시 심화되었다. 그렇게 1979년부터 1984년까지의 다시 높아진 긴장 수준을 일컬어 ‘2차 냉전’이라고 부른다. 전략무기감축협정의 진전은 중단되었고, 양국은 다시 한 번 군비를 확충하고 핵 대결을 시작했다. 1980년 폴란드에서 시작된 자유노조 운동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야루젤스키의 계엄령도 유럽 대륙의 긴장을 크게 높였다. 미국은 인권 문제를 통해 소련에 대한 공세를 본격화했고, 소련으로 향하는 미국 제품의 수출을 대폭 줄였으며 소련과 경제 협력을 중단하도록 서유럽 국가들과 일본을 압박했다.

6. 소련의 몰락과 냉전의 해체

하지만 2차 냉전은 1985년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면서 빠르게 사라졌고, 이는 아예 냉전 체제의 해체로 이어지게 되었다. 고르바초프의 문제의식은 40년에 걸친 냉전 기간 동안 소련이 서방에 심각하게 뒤쳐졌다는 데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겉으로 보이는 상황은 달랐다. 1970년대에 서구 자본주의는 석유파동의 충격과 신자유주의 도입으로 인한 정치, 경제적 혼란에서 여전히 갈피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반면에 소련은 데탕트를 통해 마련된 에너지 수출 경로 덕택에 막대한 돈을 벌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군비를 확충하고 소비 수준을 높일 수 있었다. 문제는 혼란해보이던 서구 자본주의가 1970년대에 추진한 대응을 통해서 1980년대에 일신했다는 데 있었다. 포스트포디즘, 유연 생산, 정보화 등의 키워드가 1980년대에 논해지기 시작했고, 서구 자본주의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은 점점 에너지 수출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유가 변동에 몹시 취약해졌다. 자원 동원과 투입을 통한 소련식 성장 모델은 소련 경제가 이미 일정 수준의 현대화를 달성하면서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1985년에 유가가 대거 하락하면서 소련은 경제적 곤경을 맞이하게 되었다. 정치 구조도 문제였다. 1964년부터 1982년까지 18년을 집권한 브레즈네프 시기는 침체의 시기로 인식되었고, 브레즈네프와 같은 세대의 후임들인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각각 1년 가량의 재임 기간만 거치고 연달아 죽으면서, 노인들이 통치하는 크렘린으로는 어떤 발전도 이룰 수 없다는 위기 의식이 확산되었다.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젊은 피’로 각광받은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를 공표하고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다. 동시에 고르바초프는 스위스 제네바와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레이건과 정상회담을 진행하면서, 핵전쟁의 공포로부터 세계를 구하고 동서 대립을 끝내자고 손을 내밀었다. 바야흐로 냉전이 끝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경제 개혁은 소련이 처해 있던 구조적 어려움과 고르바초프의 미숙함, 잘못된 개혁 정책들로 인해서 위기를 훨씬 더 증폭시켰다. 특히 1987년의 글라스노스트와 1989년의 선거제 정치 개혁은 소련의 민족 분규를 폭발시켰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와 갈수록 격해지는 아프간 전쟁, 회복될 기미가 없는 유가도 경제적 압박을 가중시켰다. 소련의 이런 어려움은 동유럽 국가에서 공산당 정부를 향한 광범위한 시민 저항을 촉발시켰다. 동유럽 위성국을 지원할 여력도 없고, 그러할 의지도 없었던 고르바초프는 동유럽의 정치적 격변에 1956년이나 1968년처럼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 결과 동독에서 루마니아에 이르는 드넓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정치적 혁명이 일어났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독일 통일은, 독일 분단에서 시작된 냉전이 마침내 끝났다는 상징이기도 했다.

냉전의 끝. 그리고 역사의 끝?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동유럽 혁명과 소련의 붕괴는 전지구적으로 전개된 냉전 전체를 끝냈다. 소련이 지원하는 공산주의 국가들은 아시아의 일부 국가와 쿠바를 제외하고는 모두 체제 전환을 향한 험난한 여정에 나섰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를 두고 역사의 종언이라는 새로운 시대가 펼쳐졌다고 선언했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여럿 생존한 아시아에서는 냉전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세계적인 사회 혁명의 비전으로서 공산주의의 생명이 끝났고, 그를 지원하는 유라시아 초강대국의 시대도 끝났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유럽 근대성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지구적 초강대국으로 경쟁한 미국과 소련의 45년에 걸친 쟁투는 끝났다. 그렇게 냉전은 역사가 되었고, 역사학자들이 들춰보는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냉전은 어떤 시대였나? 냉전의 경험은 오늘날의 우리를 어떻게 형성하고 있는가? 앞으로의 미래에 냉전 시대의 유산은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에 초점을 맞춘 기존의 냉전 연구가 아니라, 더욱 광범위한 시각을 갖춘 ‘신냉전사’가 수행하게 될 것이었다.

참고문헌: The Cold War: A Very Short Introduction by Robert J. Mcmah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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