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에서 보낸 나날들: 혁명은 그저 열병이었나

테헤란에서 보낸 나날들: 혁명은 그저 열병이었나

테헤란은 싸움을 원하는가?

임명묵

여행 일정 상 아제르바이잔을 먼저 얘기하는 게 맞겠지만, 최근 세계의 이목이 이란에 집중된 만큼 이란 얘기를 먼저 하는 게 맞겠다. 나는 이란에서 3월 7일부터 4월 11일까지, 한달하고 일주일 가량 더 머물렀다. 이 기간은 꽤 특별한 시기이기도 했는데, 봄과 새해를 맞이하는 이란의 최대 명절인 노루즈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올해는 특이하게도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이 딱 3월 초부터 4월 초까지 겹쳐서, 페르시아 최대 명절과 이슬람 최대 행사가 동시에 겹치는 진귀한 때이기도 했다. 낮에는 라마단 때문에 어디 커피라도 한 잔 마시기가 어려웠지만 밤에는 도시 곳곳이 명절이자 축제 분위기로 흥겨웠다. 그러니까 외부에서 흔히 생각하는, 무시무시한 혁명 수비대와 미사일이 행진하는 이란은 전혀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도시 중심가는 새벽에 돌아다녀도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안전했다. 이점은 내가 덩치가 좀 큰 남성인 것도 작용했겠지만.

테헤란 시내 중심의 팔레스타인 광장. 이번 이스라엘 공습으로 사망한 코드스군 사령관 모하마드 레자 자헤디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다. 위에 글이 히브리어로 적혀 있어 이스라엘에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조명은 팔레스타인 국기 색깔로 밝혀놓았다. 
팔레스타인 광장은 한적했지만 라마단이 끝나가는 축제 현장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이란 곳곳의 민족을 표현한 민속 의상과 탈을 쓰고 춤을 추는 사람들.

게다가 내가 여행 중 만난 대부분의 이란 젊은이들은 정말 뉴스나 글로 접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세속적이고, 정부에 대한 반발심이 큰 사람들이 많았다. 어쩌면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중산층들이라서 특히 더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이들 대부분은 2년 전에 있었던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으로 촉발된 히잡 시위에 한 번이라도 참여하기도 했었다. 이스라엘은 인도주의적 이유로 대부분 혐오하지만 이란이 미국, 이스라엘과 대결하느라 국내에 더 시급한 사회,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는 이들이 많았다.

'이슬람 혁명 거리'에 위치한 한 만화책방. <아키라>와 같은 고전부터 <나혼자만 레벨업> 같은 한국 웹툰까지 온갖 만화가 빼곡하다. 일본 만화가 이 책방을 찾는 젊은 학생들에게는 혁명이었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이 시리아에 위치한 이란 대사관을 공습하여 혁명수비대 코드스군 사령관 중 하나인 모하마드 레자 자헤디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 나는 테헤란에 머물면서도 이런 사건이 발생한 줄도 몰랐다. 친구들이 뉴스를 보내와서 그제서야 알게 되었고, 테헤란에서 사귄 친구들에게도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봤는데 대부분은 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흔히 정부와 관계된 피곤한 국제 뉴스 정도로만 생각했다. 어떤 학생은 나에게 "이슬람 공화국은 '공포탄'이나 다를 바 없어. 소리만 크지, 그들도 전쟁을 두려워 해. 체제가 취약한 것을 아니까."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서 나도 주변인들에게 "사람들은 별 관심도 없어요. 북한 도발 때 우리가 별 신경도 안 쓰는 거랑 비슷한 듯?"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79년 그 유명한 인질극 사건이 벌어졌던 테헤란 미국 대사관의 담장. 지금은 '미국 간첩 활동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있다. 직원이 나에게 '너 아르고 봤어? 그 영화와는 다른 얘기를 들려줄게'라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위 사진들처럼 체제의 위용과 혁명의 역사를 전시하는 공간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 대사관 담장 바로 근처에는 내가 머물던 숙소가 있었는데, 그 숙소 바로 옆에 "락 카페"가 있어서 온갖 미국과 영국의 락밴드 굿즈를 전시해놓고 있었다. 이제는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들과 팔짱을 낀 그들의 남자친구들이 "미국에 죽음을"이 써있는 대사관 담장을 거닐고, 성스러운 미사일을 신경 쓰지 않고 전철역과 공원으로 향한다. 마치 혁명이란 것은 원래 없던 것처럼, 그냥 잠깐 앓고 지나간 열병 같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란-이라크 전쟁의 기억을 전시하는 "이슬람 혁명과 성스러운 조국 방위 전쟁 박물관" 앞뜰에 전시된 이란제 미사일들.
테아트레 샤흐르(시립 극장) 전철역 주변의 더네시주 공원(대학생 공원). 따사로운 봄의 햇살을 즐기는 시민들을 보며 사진 한 컷을 찍으려 하자, 이란 친구가 웃으며 귀띔해준다. "여기가 테헤란 LGBT 커뮤니티의 중심이야."

테헤란의 마지막 며칠 동안 들렀던 물담배 가게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이 나라를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물담배를 피면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책을 보고 있었는데, 건너편 자리에서 무언가 정치 얘기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페르시아어가 짧은 관계로 중국, 이스라엘, 러시아, 시리아 등의 고유명사만 들었지만 종종 '무샥', 미사일이라는 단어도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나 하면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싱긋 눈웃음을 지어온 이 두 청년들과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하고 이란의 현실과 국제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형적인 보수파이자 '혁명 충성파'인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내가 그동안 들었던 반정부 성향의 자유주의자들의 이야기와는 전혀 달랐다. 대화 주제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문제로 흘러가자, 그들은 나에게 "알렉산드르 두긴 알아?"라고 물어왔다. 나도 놀라서 "당신들 두긴 알아?"라고 역으로 물어보니, 한 친구가 이렇게 답했다.

"두긴 그 사람 테헤란에도 왔었어!"

나와 동갑인 다른 친구가 그러다가 "너 이드 알 피트르 알지?"라고 물어왔다. 이드 알 피트르는 라마단이 끝나는 날을 기리는 이슬람권 최대의 명절 중 하나다.

"당연히 알지!"라고 답하니 이렇게 물어왔다.

"너 하메네이랑 예배 해볼 생각 없어?"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누구 이름을 들은 것인가. 듣자하니 매년 이드 알 피트르 때마다 최고 지도자인 하메네이가 모살라 이맘 호메이니라는 대기도원에 나와서 예배를 주도하고 기념사를 한다고 한다. 이란에서 사람 많은 곳은 가급적 가지 말고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런 흥미로운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바로 제안을 수락했다. 6시에 호텔 앞에서 만나 친구의 오토바이를 타고 모살라 이맘 호메이니로 향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이란에서 마주칠 일이 없었던 무수히 많은 인파가 하나둘 씩 모여들고 있었다. 아빠 위에 무등을 타고 신나하는 어린 딸,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가는 노인, 자녀 셋에게 간식을 하나씩 쥐어주며 흐뭇하게 웃는 부부들이 빼곡하게 모여들었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하메네이를 먼 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는 모살라 이맘 호메이니 안뜰까지는 들어가는 것도 힘들었다. 면적으로만 보면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인데도 그랬다. 어린 딸을 데리고 온 다른 친구는 딸을 데리고 너무 혼잡한 데는 들어갈 수 없겠다며 기도원 바깥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그곳에도 엄청난 인파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보안검색대에서 기다리는 게 지치니까 사람들이 갑자기 무어라 외치기 시작한다. 친구가 통역해주기를 "우리는 최고 지도자를 보고 싶어하는 이들의 군대다!"라는 뜻이란다. 그러더니 누군가 "마르그 바르 에스러일!"을 연호한다. 밀고 밀리는 인파 속에서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한 마음으로 구호를 외쳤다. "이스라엘에 죽음을!"이라는 그 악명 높은 구호다.  

마침내 모살라 이맘 호메이니에 들어가니 수많은 인파가 도열하여 '라흐바르'와 '마르그 바르 에스러일'을 외쳤다. 8시가 되자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가 나타났다. 그는 높은 단상 위로 올라가지 않고 평신도들과 같은 위치에서 이드 알 피트르를 기념하는 기도를 주재했다. 그 뒤 연단 위로 올라가서 그가 입을 열기 시작했고, 나는 먼 발치에서도 정말이지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말 하나하나를 전세계 시아파 공동체는 물론이고 그의 수십년 된 적들도 주목할 것이었다.

연단 위의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바로 라흐바르,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다.

갑자기 헤이다르! 헤이다르! 하는 구호가 커다란 함성으로 군중들 사이에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나를 데려온 친구에게 이 뜻이 무언지를 물었다.

"헤이다르는 사자라는 뜻이고, 이맘 알리를 가리키는 별칭 중에 하나야. 이맘 알리는 예언자 무함마드 시절 카이바르 전투에서 유대인을 선봉에서 무찔렀지. 우리는 그 역사적 기억을 소환하는 거야."

그 뜻을 알게 된 뒤 더는 이전처럼 "여기 안전해, 이스라엘 공격 같은 거 아무도 신경 안 써."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었다. 이슬람 혁명은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실재했고 곧 행동으로 다시 표현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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