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산업화를 찾아 드네프르와 자포로제로

소비에트 산업화를 찾아 드네프르와 자포로제로

브레즈네프의 고향과 스탈린의 댐 탐방

임명묵

이번 여행의 실질적 마지막 목적지인 드니프로. 오데사에서 꽤나 멀리 떨어져 있다(대략 550km). 키예프를 지나 헤르손까지 향하는 드네프르 강의 딱 중간 지점에 위치한 지역들을 보기로 했다.

이 일정이 끝난 다음에 곧바로 모스크바로 돌아갈 것이었어서 수도인 키예프는 보지도 못한 희한한 경로의 여행이 되고 말았다. ㅋㅋ

오데사에서 밤 기차를 타고 달려 드네프르 역에 도착. 우크라이나어로는 '드니프로'인데 소련 시절에는 드네프르페트롭스크였다. 그리고리 페트롭스키라는 볼셰비키 혁명가의 이름을 붙여서 꽤나 긴 이름이 되고 말았다. 소련 해체 이후에 많은 지역이 그렇듯이, 드네프르도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주의 이름은 여전히 드네프로페트롭스크 주이다. 그 이유인즉슨 행정구역 상 주의 이름과 목록이 헌법에 박혀 있어서 개헌을 하지 않는 이상 주 이름은 개명할 수가 없다. 근데 한국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우크라이나 정치판에서 개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될 리가..

드네프르는 도시 자체는 사실 거의 둘러보지 못했다. 같이 간 일행, 검은 땅의 경계인을 저술한 고광열씨가 곧 드네프르에 머물면서 문서고 조사를 할 것인데 자기는 그때 드네프르에 계속 머물 것이니까, 근처 지역의 흥미로운 곳들을 둘러보는 게 더 낫지 않겠냐는 전략적 판단이 있었다.

사진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가면 허름한 골목길이 있는데 거기에 위치한 '하타 호스텔'이라는 곳이 우리 숙소였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페트병에 생맥주를 담아 파는 술집, 보드카와 안주 거리를 파는 술집들이 있었다. 꽃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방치된 화단 위에 한 쪽에 개가 곤히 자고 있는데 그 옆 화단에 불곰 같은 배 나온 아저씨가 역시 술에 취해서 곤히 자고 있는 것을 보며 이것이 대소련의 위대함인가 감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하다.

그래도 드네프르 도시 설명을 하자면... 풍부한 수력과 에너지를 바탕으로 러시아 제국 말기부터 공업 중심지로 성장했고 소련 시절에는 아예 이곳에서 모스크바 중앙의 유력 정치인들이 대거 배출되어 '드네프로페트롭스크 마피아'라는 별명까지 나올 정도였다. 수많은 공장, 특히 그중에서도 유즈마시라고 불리는 로켓 공장이 유명해서 소련 시절에는 외부인의 접근이 어려운 곳 중 하나였다. 훗날 우크라이나에서 북한에 미사일 기술을 유출시키는데 아마 여기서 유출했을 듯...

1시간 쯤 버스를 타고 달려 카먄스케에 도착. 카먄스케도 소련 시절에는 인구 28만, 전쟁 직전에는 인구 23만 정도의 산업 도시다. 소련 시절 이름은 악명 높은 비밀 경찰 체카의 창립자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이름을 따서 '드네프르제르진스크'. 소련 해체 이후에는 카먄스케라는 옛 이름으로 돌아왔다.

러시아 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는 프로메테우스 기념상. 꽤나 높다. 레닌의 공산주의를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가져다 준 불로 형상화한 느낌.

그대들은 세계에 빛을 선물했다. 세계는 그대에게 불멸을 준다. 라고 써있다. 소련 어디를 가나 있는 제2차세계대전 참전 용사들 기념비다.

금속 공업이 발전한 곳이라 공장에서 뿜는 연기가 보인다. 그런데 여기도 우크라이나의 여느 도시가 그렇듯 인구가 줄고 퇴락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실로 반갑기 그지 없는 페페 개구리 발견.

건물들이 거의 관리가 되지 않는 느낌이 많은데도 성당만큼은 때깔이 좋은 게 신기하다. 소련 해체 즈음부터 시작된 종교의 부활을 우크라이나에서도 실감하며...

우크라이나의 민족 문인 타라스 셰브첸코 기념상.

만들 때는 그야말로 발전하는 소련 근대성을 칭송하기 위해서 때깔 좋게 만들었겠으나 소련도 망하고 우크라이나도 온전한 상태가 아닌지라 방치되는 이런 기념비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착잡했다.

네 이것이 우크라이나의 진면목입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 병합과 돈바스 전쟁이 시작되면서 우크라이나에서는 '탈공산주의법'이 발효되었고 기존의 공산주의 유산들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에 맞게 재편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그런데 대다수 도시에서는 여전히 거리 명패도 바꾸지 못하고 있었다. 오른쪽 벽면에 써 있는 명판은 '카를 마르크스 거리'라고 써 있는데 지도 상으로는 분명히 마르크스 거리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도시 전체에 있는 명판들을 바꿀 의지가 없는지 능력이 없는 것인지 우크라이나 어디를 가도 마르크스 거리, 리프크네히트 거리, 룩셈부르크 거리 같은 공산주의 이름들이 많이 보인다. 전쟁으로 어려운 지금도 아마 못 바꾸고 있지 않으려나.

쇠락해가는 인구 23만 제철도시에 굳이 온 이유는 사실 하나 밖에 없다. 우크라이나가 배출한 최고의 권력자(?)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의 고향이 여기이기 때문. 이 집이 바로 브레즈네프가 이곳에서 살았던 집이다..

브레즈네프는 금속공의 아들로 태어났고, 무학이었다. 러시아 자체가 대중교육이 활성화 되어 있지 않기도 했지만, 그가 8살 때 제1차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나라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 것 자체가 누구에게나 어려워졌었다.

1906년생인 브레즈네프가 20살 무렵이 되었을 때에 내전을 수습하고 안정된 소련 체제. 이제 사회주의 신세계를 건설해야하니, 체제에 충성할 새로운 인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브레즈네프 같은 한미한 배경의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교육 기회를 주고 엔지니어로, 나아가 당 간부로 뽑는 '발탁' 정책이 실시되었다. 브레즈네프도 혁명 덕택에 기술 교육을 받고, 공산주의청년단(콤소몰)에 가입하고, 최종적으로 당원이 되면서 커리어를 시작한다. 금속 산업 건설과 관리를 맡다가 능력을 보인 브레즈네프는 당의 정치 및 선전 업무를 담당하며 착착 승진했고, 최종적으로는 소련 공산당 총서기까지 오르게 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노동자로서 소련 최고 지도자까지 올라간 브레즈네프는 비대해진 국가 기구와 관료주의 인한 소련의 침체를 상징하는 인물이고, 동시에 소수민족과 하층계급을 엘리트로 만들어야 한다는 소련의 이념적 이상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 둘 다 소련의 모습이다..

구소련권의 건물을 보다 보면, "이 집에서 몇년부터 몇년까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누구가 살았음"이라는 기념판이 붙어 있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특히 모스크바 같이 유명인들이 많이 산 곳일 수록 더 그런데... 여기도 당연히 브레즈네프가 살았던 곳이라고 기념패를 붙여놨었다. 그런데 탈공산주의법 이후에 뗀 듯 싶다.

사진 업로드 순서가 꼬였는데 사실 카먄스케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들른 곳이 브레즈네프 흉상이 있는 곳이었다. 브레즈네프, 레오니드 일리치. 소비에트 연방 영웅, 사회주의 노력 영웅.... 자기 과시를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생전에 수많은 소련인들에게 브레즈네프가 또 훈장을 받았냐며 조롱 거리가 되고는 했다고.

탈공산주의법 하에서도 이 흉상을 철거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마 없어지지 않았을까?

카먄스케 박물관. 크게 특별한 전시는 없었고 코사크로 시작해서 19세기 말의 산업화와 소련 시절로 이어지는 표준적인 서사로 전시가 되어 있었다. 사진 찍으라면 돈 내라기에 사진은 안 찍었는데...

전시 막판에 실로 커다란 카자흐스탄의 국부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의 초상화가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건 안타깝게 사진으로 남가지 못했고 대신에 박물관 로비에 있는 카탈로그 같은 데서 발견한 나자르바예프 기념상으로 대신... 나자르바예프도 카자흐스탄 출신의 금속 엔지니어였나 그랬을텐데 여기서 젊은 시절에 산업 연수를 받으면서 엔지니어가 되어서, 훗날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된 뒤에 이것저것 기념을 했나보다.

박물관 로비에는 2014년부터 2019년까지 돈바스 전쟁에서 죽은 이 지역 군인들을 위한 추모 공간이 있다. "영웅은 죽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다. 이때만 하더라도 2022년의 전쟁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는데... 지금 보니 새롭게 다가온다.

도시는 상태가 영 안 좋아보였지만 식당의 음식들은 정말 맛있었다. 맥주 한 잔과 소련권의 감칠맛 나는 국물 요리인 솔랸까에 소고기 요리까지 이것저것 시켰다. 여긴 농업대국이라 그런지 음식값은 진짜 싸다...

19세기부터 시작된 산업화의 역사를 담은 공장들의 굴뚝을 보며 하루의 여행을 마치고 드네프르로 돌아온다.

터미널에 내려서 도시를 걷는데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한 지하철역 공사 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1981년에 시작된 드네프르 지하철은 소련의 경제난과 독립 후의 혼란 때문에 사실상 제대로 완성도 되지 못했다. 일부 개통된 노선은 시내 중심가에 닿지도 않고 있어서 지하철을 똑바로 연장하려는 공사가 계속 요청되는데, 예산과 행정 문제로 거의 준방치된 느낌이었다.

마트에서 이것저것 레토르트 음식과 술을 사고 여행을 마치는 술자리를 가졌다. 이때 상의를 벗은 우크라이나 남정네 둘이 우리한테 기웃 거리면서 자기들도 술 마시는데 안주 나눠먹지 않겠냐고 제안을 해왔다. 우리라고 비싼 안주 먹는 건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비싼 살라미(꼴바사)를 큼직하게 가져가고 자기들은 싸구려 안주 몇 개를 줬는데... 그래도 술과 음식은 나눠야 맛이 배가되는 것이니 기쁜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며 "우정을 위해!"를 외치며 술을 마셨다. 키가 큰 한 친구는 올레흐(올렉)라고 하는 경찰관이라고 하는데 왜 지네 집에는 안 있고 호스텔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다들 어디에 있을런지, 살아는 있을런지....

그 다음 날 향한 곳은 자포리자. 드네프르에서 1시간 반 정도 버스를 타고 가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맞아주는 "Work in Europe"... 게다가 우크라이나어도 아닌 아주 명확한 러시아어였다. 유럽을 지향하고 러시아를 거부하지만 여전히 유럽은 너무 멀고 러시아는 가까운 애매모하한 경계인이라는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미하일 글린카의 이름을 따서 지은 자포로제의 콘서트홀.

이때는 사실 강행군 여행이 너무 오래 지속되어서 다들 체력도 떨어진 상태라 부지런히 돌아다니지 못하고, 심지어 사진도 제대로 많이 못 찍었다. 그래도 어쨌든 자포로제의 역사에 대해서 잠시 소개를 한다면..

소련 시절에 인구 80만. 전쟁 직전 인구 70만이었던 우크라이나의 중심 산업 도시 중 하나다. 자포로제가 이렇게 큰 산업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계기는 역시 스탈린 제1차 5개년 계획의 상징적 프로젝트인 드네프르 댐의 건설이었다. 거대한 드네프르에 댐을 건설해서 막대한 전기를 생산하고, 가파른 산업화를 이룩하겠다는 스탈린주의 꿈의 프로젝트였다. 사실 일찍이 레닌부터 '공산주의 = 소비에트 권력 + 국가의 전력화(電力化)'라는 유명한 슬로건을 제시하기도 했다. 20세기에 전기는 그야말로 문명과 동의어였는데 어찌보면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크라이나 코사크 특유의 복식과 만주족의 변발을 떠올리게 하는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이다. 저 헤어스타일을 '하홀'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우크라이나인의 상징처럼 되어서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인을 비하하는 멸칭이 되었다. 반대로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인들을 '모스깔', 모스크바놈들이라고 비하한다. 양국의 비하발언이 넘쳐나는 러시아어권 인터넷은 지금 그야말로 하홀과 모스깔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리는 옛날에는 레닌 광장이었고 사실 저 기단 위에도 레닌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열심히 강변으로 걸어가면 나오는 자포로제 수력 발전소. 자포로제 도시 밑에는 이번 전쟁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에네르호다(에네르고다)도 있는데 다들 알다시피 거기는 원자력 발전소가 있다. 수력과 원자력을 바탕으로 생산된 전기가 철강과 기계 등 우크라이나의 산업 발전에 전면적으로 투입되었던 것.

댐 위를 걸어서 사진 찍기 좋은 곳을 탐색했다. 도보로 이 곳을 걸어가는 이상한 인간들은 거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아슬아슬한 도보를 열심히 걸으며..

드네프르 댐이 만들어낸 거대한 저수지가 그야말로 장관이다.

강을 건너가면 DNEPRO GES(드네프로 수력발전소)라고 써 있는 글씨를 볼 수 있다.

정말 엄청나게 큰 저수지. 하지만 얼마 뒤에 일본 제국이 이 댐보다도 거대한 댐을 건설하니 압록강의 수풍 댐이다... 20세기 댐과 개발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생기게 하는 풍경이다. 어마어마한 전기를 생산해내며 스탈린 산업화의 성공 신화를 시작한 이 댐은 훗날 독일군에게 점령되게 되는데, 소련군은 독일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700만의 대기근 아사자를 감수하면서 지은 이 소련 산업 시설의 금자탑도 눈물을 머금고 파괴해야만 했다. 하지만 전후에 다시 복구되었다..

저수지에서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고 있는 아저씨들. 가다보면 수영 금지, 다이빙 금지 경고문도 있는데 그 말인즉슨 꼭 누군가는 여기서 수영과 다이빙을 한다는 거겠지...

다시 돌아오면서 촬영한 댐의 전경. 자와할랄 네루가 '댐은 현대 사회의 사원(temple)이다'라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에서도 소양강댐을 비롯한 개발 시대의 웅장한 업적들을 좀 보러 다녀야할텐데....

보그단 흐멜니츠키의 동상. 흐멜니츠키는 17세기 자포로제 코사크의 지도자로서 폴란드에 맞선 봉기를 조직했다. 코사크가 폴란드와 맞서 싸운 가장 큰 이유는 종교적 정체성 갈등이었는데, 정교회를 믿는 코사크에게 폴란드는 가톨릭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흐멜니츠키 입장에서는 같은 정교회를 믿는 모스크바 공국이 훨씬 더 믿을만한 파트너로 여겨졌고, 모스크바에 신속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전 받기를 원했다. 이 시기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이 니콜라이 고골의 <타라스 불바>, 혹은 <대장 부리바>이다. 현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입장에서는 역시나 애매모호한 인물이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상징인 자포로제 코사크의 지도자이자, 실제 우크라이나인의 독립심을 상징하는 영웅이지만, 그 결과가 러시아로의 신속이라는 점에서 러시아로부터 벗어나려는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인물이기 때문. 소련 시절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우애를 상징하는 인물로 대폭 밀어줘서 더욱 애매했다.

사실 자포로제 댐을 보고 자포로제 코사크의 거점이었던 '자포로제 시치'도 방문했다. 걸어갈 거리라기엔 좀 멀었지만 그래도 여행 막판의 에너지를 쥐어짜서 걸어갔다. 그런데 중간에 핸드폰이 배터리가 다 나가서 사진을 하나도 못 찍었다...

시치는 드네프르 강에 있는 호르티차 섬에 위치해 있는데, 가히 양산박이라고 해도 좋은 곳이었다. 지주로부터 도망친 농노들이 알음알음 알려진 물길을 통해 섬으로 들어가서 도망 생활을 했고 거기서 자유인인 '코사크'로 거듭났다. 시치에 가보면 캠핑장 같은 곳도 좀 있었는데 인상적인 건 그야말로 진짜 코사크 민속촌이라고 할 수 있는 시치 관광지. 17세기 우크라이나에 있었을 법한 초가집 오두막들과 나무로 된 교회 같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진짜 시치의 내부는 그날 무슨 촬영이 있다고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서 애석하게도 방문하지 못했다.

처음에 마주쳤던 글린카 콘서트 홀 쪽에 가니 있는 글린카 동상. 이제 드네프르로 돌아가서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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