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 에커트의 박정희와 현대 한국 (1)

카터 에커트의 박정희와 현대 한국 (1)

카터 에커트의 "Park Chung Hee and Modern Korea: The Roots of Militarism, 1866–1945" 같이 읽기.

임명묵

1969년, 바로 얼마 전에 석사를 마친 미국인이 한국에 도착했다. 소련과의 냉전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미국은 개발도상국에 인도적 원조를 제공하는 각종 기관을 설립했고, 평화봉사단은 그중 하나였다. 이 젊은 학자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이제 막 전면적인 근대화에 몰두하고 있는 한국에 도착한 터였다. 카터 에커트라는 이름의 남자는 한국 근대화의 가장 결정적 순간이었던 1977년까지 평화봉사단으로 일하며 한국을 관찰했다. 미국으로 돌아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한국사로 박사를 취득한 그는 1985년부터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한국사를 연구하고 있다. 에커트의 대표작은 한국의 자본이 일제 식민지 시기 조선총독부와의 연계 속에서 성장했음을 밝힌 <제국의 후예>였다. 그리고 2016년에, 그는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박정희 시대의 한국을 밝히는 책의 첫 권을 출간했다. 바로 <박정희와 근대 한국: 군사주의의 뿌리>이다.

카터 에커트. 이미지 출처: 하버드 대학교

부제에도 잘 드러나듯, 그가 주목하는 박정희 시대 한국, 혹은 그 시대를 이끌었던 박정희 개인의 면모는 ‘군사주의’이다. 근대화, 산업화, 친일, 독재 등 여러 용어를 동시에 상징하는 박정희라는 인물을, 사회의 군사화에 의하여 조형되고, 그 자신이 사회의 군사화를 추진했던 인물로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실제 박정희는 단순히 무력을 통해서 정권을 잡은 군인 독재자를 넘어서, 그의 동료와 부하 군인 집단을 한국 근대화의 지휘자들로 사회 곳곳에 배치하고, 군사적 용어와 방법론으로 국가를 통치했기에 진정으로 ‘군사주의적’ 지도자였다. 에커트는 이러한 박정희 근대화의 네 가지 특성을 제시한다. 첫째는 군이 국가를 주도할 권리와 책무가 동시에 있다는 ‘군사주의’다. 둘째는 사적 이익에 휘둘리는 자유방임 자본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군과 국가가 경제를 계획하고 통제해야만 한다는 사상이다. 셋째는 일종의 정신주의와 돌격 정신이다.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아무리 큰 난관이 닥쳐도 결국에는 이겨낸다는, ‘하면 된다’라는 유명한 문구가 이를 상징한다. 넷째는 국가와 사회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강제되는 강력한 규율의 강조였다. 박정희 근대화의 이 네 특징은, 정부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부침이 있을 수는 있어도 언제나 일관되게 표현된 ‘박정희 정신’이었다.

에커트는 박정희의 군사주의를 더 넓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자 했다. 널리 알려져 있는 박정희 정신의 기원은 그를 훈련시킨 만주사관학교와 일본 제국군이다. 에커트는 자신이 박정희 산업화의 설계자이자 집행자였던 김정렴과 오원철에게 박정희 통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그들은 모두 주저없이 “일본 제국 사관학교”라고 답했다고 한다. 에커트는 이 책에서 박정희의 동기생들을 인터뷰하고, 각종 자료를 분석하면서 1940년대 만주의 환경, 그리고 신분 상승을 위해 군문을 두드렸던 조선인들이 겪은 경험을 총체적으로 재구성한다.

하지만 에커트가 보기에 만주와 일본군의 경험은 박정희가 살아온 시대를 상징하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기는 해도, 전부는 아니었다. 에커트는 한국이 기나긴 ‘군사화의 세 물결’을 겪었으며, 1940년대 박정희의 경험은 그중에서도 대동아전쟁과 연관된 두 번째 물결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의 세 번째 물결은 당연하게도 한국전쟁과 냉전, 군부정권을 거쳐 박정희 본인이 한국 사회에 이식한 그 물결이다. 에커트는 도쿄에 있는 박정희의 동창들과 인터뷰를 하다가, 일본군에 관한 추가적 연구를 위해서는 한국군을 보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한국군에는 여전히 ‘일본 제국군’의 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물결에 영향을 준 첫 번째 물결은 무엇인가? 에커트는 꽤 색다른 이야기를 제시한다. 그는 무를 천시하고 문을 숭상하는 500년 조선 왕조의 전통이, 제국주의의 도전을 맞이하여 큰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외침에 대비하기 위하여, 조선 국가는 제도를 바꾸고, 새로운 무기를 도입하고, 무인들을 국가의 전면에 등장시켰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조선 역사 전체로 보면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였다. 극단적으로 문을 숭상하던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군사력과 신체적 강인함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었고, 이는 제국주의가 아니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변화였다. 바로 이러한 첫 번째 군사화의 물결 덕분에, 1917년에 태어난 박정희는 두 번째 군사화의 물결에 부담 없이 올라탈 수 있었다.

책의 서문에서 에커트는 박정희를 다루는 논자들이 반드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질문도 짚고 넘어간다.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한 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후의 시대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답게, 한국에서 박정희만큼 민감한 인물은 아직도 없고, 그의 업적과 과오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를 않는다. 어쩌면 박근혜 탄핵 이후에는 박정희도 점점 역사 속의 인물로,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간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공과에 관한 논쟁이 한치라도 진전된 것은 아니다. 에커트는 박정희 개인을 숭배하거나, 그의 과오를 고발하는 목적으로 책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한국 근대화를 형성한 박정희를 ‘국가와 사회의 군사화’라는 맥락으로 더 복합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이 책을 쓴 것이다. 그의 말을 직접 빌리면, “박정희가 한국 근대화의 거미줄을 짠 거미였다면, 그 거미줄은 군국주의와 군대에서 차용한 전투 구호 및 언어와 맞물려 있는 것이었다.” 시대를 형성한 인물을 볼 때에는, 그 인물을 형성한 시대도 함께 보아야지만 인물에 대해 온전히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에커트는 군사주의적으로 진행된 박정희 근대화가 양면적인 면이 있었으며, 당연히 거기에는 군대에 기본적으로 따라오는 강력한 억압과 폭력, 고통이 수반된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이러한 억압적 성격은 박정희 체제가 위기에 처했던 말기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놀라운 경제적 성과는 낙관적이고 생산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창출된 것이며, 여기에는 군사적 언어와 ‘돌격 정신’이 분명히 큰 영향을 끼쳤다.

카터 에커트는 다음과 같이 서문을 마친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한국의 제도적, 문화적 진화, 권력과 변화에 관한 것이다. 이는 박정희 개인의 삶에서 가장 생생하게 드러나지만, 박정희의 동시대로 국한되지 않는, 그 이전과 이후를 살았던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심지어 오늘날을 살아가는 한국인도 여기서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피츠제럴드의 상징적 인물인 개츠비처럼, 정치와 다른 영역들에서 사람들은 ‘과거로 되돌아가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승리와 비극은 많지만, 역사가의 눈을 무엇보다 사로잡는 것은 아마도 이 이야기의 이중적인 아이러니일 것이다.

박정희의 뒤에서, 그리고 한국의 근대적 전환의 심장에 서있던 군대는, 전통적 형태로는 수 세기 동안 국가의 엘리트들에게 경멸의 대상인 제도였다. 동시에 근대적 형태로는, 40년 동안 한국인을 속박했던 바로 그 일제의 굉장한 영향 속에서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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