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대성당 에치미아진
예레반 근교의 에치미아진과 즈바르노츠 유적
그 다음 볼 거리는 예레반의 거대한 중앙역. 예레반에는 1902년에 기차가 들어왔고, 러시아 제국 시기와 이후 소련 시기에도 인접한 터키, 이란과 교통이 오가는 요충지로 성장했다. 1956년 흐루쇼프 시기에는 그 상징성을 담아 예레반역을 멋들어지게 신축했다.
역 앞에는 예레반의 또 다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순치 다비트(Sasuntsi Dvait) 기념상이 있다. '사순의 용사'라는, 아랍의 침략을 격퇴한 천년도 더 된 서사시의 주인공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기념상이다. 사순의 용사 서사시 1천주년을 맞이하여 예르반드 코차르라는 조각가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외국에 나가 있다 돌아온 예술가답게 스탈린 시기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가지 못했다. 코차르는 투옥되고 동상도 철거되었는데, 다행히 죽지는 않고 2년 만에 석방되었고, 스탈린 이후 시기에 동상을 다시 건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멋진 역 건물과 동상과 달리 실제 역은 너무나 초라하다. 저 커다란 역에서 운용되는 기차 노선도 그루지야 쪽으로 나가는 노선 하나밖에 없다. 원래는 터키와 이란, 아제르바이잔으로 향하는 국제적 철도 교통의 중심지였으나, 1992년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과 국교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주요 철도 노선이 모조리 끊기게 되었다. 인구 100만, 아르메니아의 수도 중앙역에 있는 버스 터미널 상황이 이렇다...
공화국 광장 흐라빠락에서 박물관을 마지막으로 봐주고 슬슬 다시 술마시러.. 이 흐라빠락에서 어떤 젊은 애엄마가 우리보고 어디서 왔냐고 영어로 묻길래 코리아라고 답했었다. 영어 쓰길래 관광객인 줄 알고 당신은 그럼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자기는 레바논에서 왔고, 원래 아르메니아계라고 했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 자행된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본래 아르메니아인들을 시리아, 레바논 지역으로 강제이주 하는 계획이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이 죽었지만 그래도 일부는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 같았다. 레바논은 인구의 약 4%인 15만 6천명이 아르메니아계라고 한다.
실크로드의 상징은 비단과 함께 역시 향신료 아니었을까? 대항해시대 유럽인들을 끌어들였던 온갖 향신료가 가득 들어차 있는 모습을 보자니 실크로드 한복판에 있음이 실감난다.
이날 원래 코냑 한 병을 비우고 끝냈어야 하는데... 뭔가 모자라다고 둘이서 만취한 상태에서 보드카 한 병을 더 사버렸다 ㅜㅜ 거의 사실상 인사불성 상태였는데, 내가 이때 무슨 깡이 생겼다고 나가서 택시를 잡고 다시 공화국 광장으로 갔나보다. (기억이 거의 중간중간 끊겨서 설명이 잘 안 됨)
예레반 시민들이 모두 나와 선선한 여름밤 아래에서 분수쇼를 즐기고 있었다. 맥주 같은 걸 사고 삼삼오오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던 것 같다..
어쩌다가 만취한 상태에서 그냥 아무 아르메니아 사람 붙잡고 말을 걸었던 것 같은데.. 만취한 조선놈 하나의 술주정을 받아준 이 40대 아르메니아 선생님에게 아직도 무한한 죄송함과 감사를 느낀다. 자기 이름이라고 기억하라며 적어주었는데 뭐라고 쓰셨는지는 모르겠다.. ㅋㅋ
숙취로 심신이 초토화가 된 상태에서도 여행은 계속된다. 이번에는 버스를 타고 예레반에서 20km 정도 떨어져 있는 바가르샤파트에 가기로 했다. 대충 서울시청에서 과천까지 거리다.. 가다가 본 곳은 우리가 노이를 방문하는 대신에 들리지 못했던 아라라트 코냑 공장.
바가르샤파트는 사실 '에치미아진'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데, 이 도시에 있는 세계 최초의 기독교 성당 이름이다. 1995년까지는 실제로 도시 이름도 에치미아진이었다고 한다. 성당 자체는 무려 1700년 전인 300년대에 지어졌고, 파괴와 재건을 거쳐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건물은 대략 1550년 전쯤인 483년. 훗날 이슬람 세계가 아르메니아를 정복하면서, 또 러시아 제국이 아르메니아를 다시 차지했을 때도 성당은 늘 수난을 겪어왔다. 하지만 이 성당은 아르메니아 대학살 당시 피난을 온 아르메니아인들의 피신처 역할도 했으며, 소련의 종교 억압 속에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앙을 지켜온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 문화유산으로 인정되어 폭파와 철거를 면한 에치미아진은 독립 아르메니아에서 부활하였고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가장 큰 신앙 중심지 중 하나로 인정 받고 있다.
에치미아진 성당 입구에 위치한 대천사 교회. 2011년에 완공된 신축 건물이지만 아르메니아 교회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대천사 성당 옆쪽 저 건물은 아르메니아 교회의 신학교다.
구글 지도에 따르면 "S. Vardan and S. Hovhannes Baptist chapel-baptistry"인 거 같고 리뷰를 보자하니 이것도 현대 건물인 것 같다. 삼삼오오 주로 중년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모여서 관광을 하고 기도를 드리는 모습도 인상적.
이 성당은 특히나 채광이 아름다웠고, 또 소리 울림도 굉장히 느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필이면 이때 에치미아진 성당이 보수 공사를 하고 있어서.. 막상 가장 중요한 1500년 된 성당 건물 내부를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건물을 볼 수 없었다 치더라도,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가장 유서 깊은 성지의 그 분위기와 아름다운 교회 건축을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방문할 가치는 충분하다.
아르메니아 어디를 가나 우리를 맞이해주는 음수대인데 40도 더위가 오죽 더웠으면 개도 나와가지고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있다. 너무 귀엽네 ㅎㅎ
당연하게도 에치미아진 성당에는 박물관이 있다.
아르메니아 교회의 여러 성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인데.. 솔직히 우리 같은 현대사 공부하는 조선인 관광객이 교회사를 어찌 알리옵니까만..
그 화려함과 경건함만큼은 잘 전달된다.
사실 이거 보러 온 거다. 롱기누의 창 조각. ㅋㅋㅋ..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롱기누스의 창이 바로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 옆에 있는 건 내가 기억하기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달았던 바로 그 십자가 조각 일부를 보관하는 함이라고 하는데... 물론 진위여부는 모르고(높은 확률로 아닐 것이고) 사실 중요하지도 않다.
사실 에치미아진에는 노아의 방주 조각도 있다고 해서 불을 켜고 찾았는데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에치미아진의 주요 유물 목록을 알려주는 위 사이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유물이 노아의 방주 조각을 보관하는 함이라고 한다. 혹시라도 가실 분이 계시다면 한 번 찾아보시길... 노아의 방주가 아르메니아 민족의 영산인 아라라트 산에 닿았으니 조각은 어쩌면 진짜일지도 ㅎㅎㅎ
수도원을 다 구경하고, 밖에 나와서 맥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인다. 숙취로 몸이 죽을 것 같았어도 에치미아진의 1550년 성스러운 기운으로 다 회복된 것인가?
한편 여기서 우리끼리 주문을 하려는데, 원래 아르메니아에서도 어지간하면 러시아어를 쓰고 다녔다. 그런데 이번에는 깔끔한 수염이 멋지게 난 젊은 아르메니아 남자 웨이터가 우리에게 먼저 오더니 영어로 주문을 받았다. 뭐 여기는 국제적 관광지고, 잘 오지 않는 동양인들이 오니까 그럴 수 있겠지 싶었는데 갑자기 이분이..
"Excuse me, Are you Koreans?"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아 예, 우리 코리안 맞습니다. 하니 자기는 사실 케이팝 팬이라고 한다. 코로나로 케이팝이 진정 지구적 광풍으로 도약한 2020년 바로 전인 2019년임을 기억하자. 그러면서 어떤 그룹 좋아하냐 물으니 트와이스랑 G-IDLE 좋아한다고 한다. 아니.. 트와이스야 이때 최후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지만, 아이들은 LOL의 k/da 프로젝트 아니면 진짜 한국에서도 아는 사람 별로 없는 그룹이었는데 어떻게... 나 역시 저때는 케이팝에 관심이 0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냥 신기한 현상이려니만 했다. 그러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예레반으로 돌아가는 길, 마지막으로 방문할 곳이 있으니..
바로 즈바르노츠 성당 유적지다. 600년대에 세워진 아르메니아의 주요 성당이었는데, 320년 정도 유지되다가 10세기에 추정컨대 지진으로 파괴된 것 같다고 한다. 20세기 초에 발굴이 이루어졌고, 현재는 에치미아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지도에서 보면 알다시피 오른쪽에 공항 표시가 있는데 저기가 바로 예레반의 관문이자 우리도 사용해본 "예레반 즈바르노츠 국제 공항"이다.
택시타고 들리기 딱 좋은 위치에 있다. 이게 이렇게만 보면 뭔가 싶은데..
저런 부지 위에 이런 형태의 큼지막한 성당이 있었던 것이다.
캅카스 산맥에서 화려하게 꽃 피웠던 아르메니아 왕국의 흔적... 이슬람과 러시아 사이에서, 총력전과 혁명과 제국의 해체를 모두 견뎌가며 어쩄든 아르메니아 공화국으로 재탄생하는 데 성공한 것이 놀랍다.
이때 예레반 행에서는 아르메니아 학살 박물관을 안 간 것이 후회되었다. 2015년에 중국 남경에 갔을 때도 남경대학살 박물관은 가지 않았는데 어째 이런 중요한 곳만 항상 빼먹을지..
즈바르노츠의 돌무더기를 뒤로하며 예레반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드디어 예레반을 떠날 준비를 한다.
정말 아르메니아에 오면 무조건 먹어야만 하는 '아라라트 과일 주스'. 코카서스가 원래 햇살이 쨍한 곳이라 여행하기 쉽지는 않아도 과일은 진짜 너무 맛있다. 물론 내가 과일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과일 주스마저 싫어하진 않는데.. 이날 아침 숙취에 고생할 때도 이거 먹으면서 원기를 회복했고 결국 이날에도 술먹으면서 또 마셔주지 않을 수 없었다. 보드카를 타먹었나 안 타먹었나 긴가민가하다..
예레반 슈퍼마켓에서 산 최후의 샤슬릭과 라바시, 맥주와 코냑을 마시며 예레반 여행 마무리. 다음 도시는 이제 아르메니아 제2의 도시 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