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에 관하여

파시즘에 관하여

파시즘이란 과연 무엇일까?

임명묵

일전에 <K를 생각한다>에서 386세대에 대한 챕터를 쓸 때 여러 전직 운동권 선생님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당대 운동권의 정서에서 이촌향도라는 기원을 발견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문재인 정부가 선진국 중산층을 주된 지지 기반으로 삼으면서도 여느 다른 서구 정당과는 다른 낭만적 감수성에서 기원한 분배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회주의라고 해도 납득이 잘 안 갔던 게, 내가 아는 사회주의는 원자력 발전소와 트랙터 공장을 무자비하게 찍어대는 국가 주도 산업주의와 동의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상화된 전통의 도덕 공동체에 대한 희구라는 렌즈를 통해 80년대 운동권을 보게 되면 많은 것이 설명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63년생이신 아버지를 통해서 70년대 한국 집성촌의 일상과 문화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작금의 대한민국보다는 옛 조선시대와 본질적인 차원에서 더 가깝지 않나 싶을 정도로 생경한 시공간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내 생각의 줄기는 다음과 같이 흘러갔다. 한국 전통의 농촌 사회에서 유래한 정서를 품은 이 농민의 아이들이 대학에 갈무렵에 형성된 어떤 정서가 여전히 작동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은가. 낭만화된 전통 과거와 현실의 농촌 빈곤, 열악하고 혼란한 도시 환경,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발생한 부의 격차가 사회주의와 전통주의의 비전을 섞은 한국 사회운동 정신의 토양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는 중동의 이슬람주의나 남미의 해방신학과 유사하게, 1950년대 탈식민화와 근대화 과정에서 탄생한 세대가 도시화를 겪으며 분출시킨 지구적인 에너지가 아닐까.

반면 나는 2020년, 2021년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 우파의 이념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고민을 기울이지는 않았었다. 나는 한국 우파를 볼 때 이념보다 경제와 개발을 생각했다. 그들의 지휘 하에 어떻게 한국이 후발국가로서 신속한 경제 추격에 성공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런 관심으로 재니스 미무라의 <제국의 기획: 혁신 국가와 일본 전시 국가>와 한석정 교수의 <만주 모던>을 읽었는데, 이때도 국가의 사회 동원과 자원 재배치, 자본에 대한 우위 확보 측면, 즉 발전 국가의 역사적 뿌리라는 관점에서 정보를 받아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개발시대 한국을 '강압을 통한 효율적인 물적 근대화 추진'과 '격렬한 사회 변동에 대항하는 이념적 사회 운동'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훗날 구해근 교수가 정리한 '강한 국가, 갈등 정치(strong state, contentious politics/society)'를 접하면서 과연 개발시대 한국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겠구나 생각을 했다. 아마 나는 당시 시장 자유주의나 우익 포퓰리즘을 제외하고는 우파의 이념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다(포퓰리즘도 '이념'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성격이 다르기도 하고).

하지만 이후에 뻗어나간 다른 관심사는 한국 우파의 이념과 연결되고 있었다. 나는 판카지 미슈라가 쓴 <분노의 시대>를 읽으며 볼테르로 대표되는 자유주의/계몽주의/능력주의의 계보와, 그에 대한 루소의 반발로 시작된 집단주의/낭만주의의 계보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미슈라는 대서양 자유주의에게서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며 발흥한 여러 사상들, 집단적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그 부활을 꿈꾸며, 그를 위해 동원과 폭력을 불사하는 반란의 사상들을 훑어준다. 그의 책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 민족주의, 시온주의, 이슬람주의, 힌두트바에 이르기까지 동서를 아우르는 계보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때도 이미 신오스만주의, 이슬람주의, 힌두트바, 러시아의 신유라시아주의 등이 아시아에서 거대한 역사적 조류로 꿈틀대고 있었고, 서구에서도 트럼프로 상징되는 우파 포퓰리즘이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역사를 인식해야 현대 세계를 이해할 실마리를 얻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연스럽게, '동아시아에는 무엇이 있나?'라는 의문이 들었고 그 과정에서 또 아시아주의에 관한 책도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지적인 꼬리물기는 필연적으로 파시즘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

용어로서 파시즘은 두 가지 극단을 오간다. 가장 널리 퍼진 건 정치적 욕설로서의 파시즘이다. 좌파가 국가주의, 집단주의 우파에게 파시즘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일은 전세계 어디서나 흔한 일이고, 특히 거리의 행동주의 우파가 있다면 더욱 그렇다. 물론 반대로 우파에서도 좌파에게 파시즘의 딱지를 붙인다. 공산주의나 파시즘이나 사회의 기본 구성 단위인 개인을 부정하고 집단을 숭상한다는 것이다. 이 두 관점은 냉전 시기에 미소 관계가 반파시즘 동맹에서 냉전 경쟁으로 전환되면서 널리 퍼졌고, 파시즘이라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관한 학계의 논쟁과도 이어졌다. 좌파에서 파시즘은 특정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들이 처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반동 세력과 정치적 제휴를 맺고 대내외 모두에 폭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로 한 체제다. 반대로 우파에서 파시즘은 스탈린주의를 포괄하는 더 상위 개념인 ‘전체주의’의 일종이고, 파시즘 운동 초기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의 역할에 더 주목한다. 자유시장경제를 향해 널리 퍼진 사회의 불만과 환멸이 파시즘이라는 전체주의 충동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정치적 욕설로서 ‘파쇼’와 ‘전체주의’를 사용하면 실제 역사 속 파시즘이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알기란 불가능해진다. 모든 것을 지칭할 수 있다면 아무것도 지칭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파시즘 연구자들은 정치적 욕설의 의미를 배제하고, 전간기 유럽에서 등장한 구체적인 운동으로서 파시즘을 분석하고자 집중한다.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의 해부>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연구들에서 파시즘은 철저하게 독일과 이탈리아, 아무리 넓혀도 헝가리, 루마니아, 오스트리아, 혹은 스페인 등 전간기 유럽의 극우 대중운동으로 한정된다. 이런 시각에서는 파시즘이 실질적인 체제 운영을 짧으면 10년, 길어도 20년밖에 하지 못했기 때문에 체제의 이념으로서 성격이 명확하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관심사는 파시즘의 이념과 비전이 아니다. 그보다 민족의 고귀함과 부활에 대한 강박적 집착이라는 파시즘의 정동 측면, 그 목표를 위해 조직된 대중운동의 등장과 폭력 사용에 적극적인 준군사조직의 합류라는 운동적 측면, 거리의 폭력과 의회 선거 참여를 결합한 권력 획득의 전술적 측면, 지도자 숭배와 전체주의 미학의 확립이라는 스타일적 측면이 더 강조된다. 즉, 이 관점에서 파시즘은 제1차세계대전이라는 유례가 없던 총력전을 겪었고, 베르사유 체제에 국내외적으로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으며, 동시에 대중운동이 등장하고 의회 정치가 기능할 정도로는 성숙했지만, 마찬가지로 그것이 뒤집힐 수 있을 정도로 취약한 사회에서 등장하는 일종의 병리 현상이다. 당연하게도 전간기 유럽이 아닌 다른 시공간은 이런 조건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파시즘으로 분류하는 것은 개념의 남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 역시 실제 파시즘 연구가 진전되면서 한계를 노출하게 되었다. 전간기 파시즘의 연원을 찾자면 19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등장한 원파시즘(proto fascism)이 등장한다. 즉, 파시즘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의 혼란 위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현상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정치와 지식인의 동향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뿌리 깊은 이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파시즘의 실제 집권 기간이 짧았다고 하지만, 10년 이상 운영된 파시즘 체제는 제2차세계대전으로 파시즘 정권이 일소된 이후에도 전후 유럽의 복지국가, 산업, 금융 등 각종 제도 면에서 커다란 유산을 남겼다. 게다가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하는 자유주의 질서를 정면으로 강타한 파시즘 운동은 라틴아메리카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아시아의 일본, 태국, 중국과 같은 국가들에게도 민족을 재생할 수 있는 도구로서 엄청난 영감을 주었고, 전후에도 상당 부분이 살아남아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동,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지의 피식민 민족 운동에도 마찬가지로 파시스트 분파가 생겨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들과 경쟁한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관점이 꾸준히 발전하여, 현재는 파시즘을 단순히 대중운동을 발판 삼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전체주의 집단의 출현으로 보는 게 아니라, 상당히 구체적인 이념적 지향과 비전을 갖고, 초국가적인 연결망을 통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고유의 정치경제와 사회문화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20세기 역사 내내 존재감을 발휘한 실체로 보자는 연구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역사적 파시즘 연구는 오늘날의 글로벌 극우 연구와도 접점을 만들기도 한다. 비서구 지역에서 공동체 전통을 강조하는 권위주의 성향의 포퓰리즘 정권이 등장하고, 이를 뒤따라 서구에서도 우익 포퓰리즘 정당이 약진하고, 당장 미국에서는 정치 질서 자체가 변동하는 쓰나미가 발생하고 있다. 실제 역사의 파시즘과 포퓰리즘의 관계는 명확할 때도 있고, 모호할 때도 있다. 특정 그룹은 전간기 유럽에서 활동한 파시스트 집단과 지식인, 정치인과 명시적 연관 관계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가장 민감하고 극단적인 나치를 추종하는 극우 집단은 대체로 반문화나 컬트 수준에서 머물지만, 더 넓은 범위의 파시스트들의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러시아 혁명과 내전을 피해 서유럽으로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들은 파시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연방에서 재발굴된 바가 있다. 푸틴 정권이 높이 사는 백계 러시아인 지식인인 이반 일린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탈리아 파시즘에 참여했던 율리우스 에볼라는 영미권 인터넷에서 밈을 통해서 확산될 정도로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고, 스티브 배넌과 알렉산드르 두긴 같은 글로벌 극우 지식인들에게 무수한 영감을 주었다. 반면 형태적으로만 파시즘과 유사한 우파 포퓰리즘 운동도 있다(많은 반대자가 파시즘을 추종한다고 단언하지만). 파시즘과 포퓰리즘은 모두 엘리트와 국가 기구를 향한 대중의 공격을 높이 사고, 종족, 혈통, 문화 등 집단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사고의 기본 단위로 삼으며, 이 공동체를 해치는 내부와 외부의 위협 세력을 헌법 질서나 국가 제도를 넘어서 공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대체로 대중이 공동체 구원의 상징으로 여기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지닌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극우 정치의 발흥을 둘러싼 여러 설왕설래가 오가고 있다. 위에서 정리한 파시즘에 대한 네 가지 접근법을 고려하면, 현재 한국 사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로 두 번째와 네 번째 접근법이 주로 다뤄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파시즘을 정치적 욕설로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첫 번째 접근법이 여전히 광범위하게 채택되고 있다. 그러나 첫 번째 접근법에서 주로 활용되던 방법론이 자본주의 위기 속 계급 역학 관계의 변동임을 고려하면, 마르크스주의 경향이 빠르게 퇴조한 한국에서는 큰 인기를 얻기 어려운 분석이기도 하다. 정치적 욕설이라는 측면을 유지한 채 더 인기 있는 분석틀이 되는 것은 파시즘을 전간기 유럽의 민주정치 위기라는 맥락 속에서 바라보는 두 번째 접근법이다. 이를 대표하는 로버트 팩스턴의 책이 한국에서 파시즘 이해를 위해 읽어야만 하는 고전이라는 것도 큰 이유일 수 있겠다(나는 아직 안 읽었다). 요컨대 민주정의 위기 속에서 민족의 소생을 위해 대외적 팽창과 대내적 정화가 필요하다는 정동을 동원하는 권력 획득의 기술로서, 한국 극우 운동과 유럽 파시즘을 비교하는 것이다. 근자에는 글로벌 우파 포퓰리즘과 파시즘을 연결하는 네 번째 접근법을 차용한 글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는 2024년에 도널드 트럼프가 이루어낸 화려한 귀환에 힘 입은 바가 매우 크다.

그러나 반대로 세 번째 접근법, 즉 파시즘을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를 지니고 있고, 20세기에 글로벌하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근대성과 산업주의에 대응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 채택되었고, 파시즘, 유사 파시즘, 혹은 비(非) 파시즘 국가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체제로 보는 시각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이 접근법은 내가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인 접근법이기도 하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를 일컫는 관전기(transwar period)는 포디즘이라는 새로운 생산 체제의 등장,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활성화된 대중 정치, 교통 및 통신 기술과 관료제와 행정 기술의 발전으로 전례없는 규모로 자원을 동원하며 고도화된 통치성을 투사해내는 국가의 강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는 19세기와 제1차세계대전 시기를 주름잡은 영국, 프랑스 제국주의와 러시아, 중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등 유라시아 육상 제국들에게도 엄청난 제국적 도전(imperial challenge)을 안겼으며, 국제 질서의 변동에 적응하여 총력전과 지구전 수행을 위한 지경학적 권역을 둘러싼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뉴딜, 소련의 스탈린주의는 가장 대표적인 적응 방법론으로서 제2차세계대전 이후 냉전의 쟁패를 이끌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매우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동아시아의 사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관전기에 활동한 유라시아의 제국으로서 일본에 관심이 가게 되었다. 재니스 미무라의 <제국의 기획>은 일본 제국이 이 격변에 적응하기 위해 어떻게 전시, 나아가 전후에도 지속될 체제 변화를 이루어냈냐를 다룬다. 총력전 대응을 위한 ‘고도국방국가’의 건설을 위해서는 중화학 공업, 수직계열화, 경영 전문화, 산업 합리화가 필요했다. 이 문제의식에 공감한 신흥 엘리트들, 즉 통제파 장교들과 상공부 혁신관료, 신재벌이라는 군관재 연합체는 이시와라 간지가 건국한 만주국에서 실험을 하고, 내지(內地)로 돌아와 그 실험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작고하신 아론 무어의 ‘동아시아 건설: 전시 일본의 기술, 이념, 제국, 1931-1945(Constructing East Asia: Technology, Ideology, and Empire in Japan’s Wartime Era, 1931-1945)‘도 이러한 미무라의 논지를 일본의 제국 건설과 그 비전에 연결시키는 저작이다.

그런데 미무라의 책을 읽을 당시에는 주목하지 않았던 용어가 있다. 미무라는 관전기 일본의 국가 혁신 사상을 ’테크노-파시즘‘이라고 정의한다. 전문가와 관료층이 주도하여 하향식으로 파시즘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국가 혁신과 사회 재조직을 해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무라가 여기서 말하는 파시즘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미무라의 주장이 학계의 파시즘 논쟁, 나아가 일본 파시즘/천황제 파시즘 논쟁과 직결되는 테마임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지정학적 경쟁과 대중사회, 2차 산업혁명에 적합한 체제 건설 차원에서 관전기 일본의 정책이었는데, 사실 당연하게도 이것은 어떤 가치에 따라서 공동체가 조직되어야 하며, 개인은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에 관한 상당히 명확한 이념을 통해서 표현된 것이었다. 그리고 미무라는 그것을 파시즘의 일종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전시 일본 연구에서 이런 주장이 중요한 이유는 전시 일본이 파시즘 국가였는지 아니었는지가 매우 뜨거운 논쟁거리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서구 학계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대중운동과 준군사조직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민주정치를 후퇴시키는 양상을 파시즘의 기본 요건으로 보기 때문에 전시 일본은 파시즘 체제가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전간기 유럽의 민주정에 비하면 독일 제2제국에 더 가까운 제한적인 대중 정치였다. 그렇기에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역진과 군국주의의 발흥도 대중운동이 아니라 군부 엘리트에 의해 철저히 하향식으로 이루어졌기에 파시즘의 기본 요건이 결여된 것이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존재와 대중의 숭배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도 일본이 파시즘 체제가 아니었다는 또 다른 증거로 여겨진다. 쇼와 천황이 형식적으로는 무솔리니나 히틀러와 유사한 이미지를 획득했다고는 할 수 있어도 그 실권의 제약은 엄청났고,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실질적 통치자들은 실권은 있었다 할지라도 대중의 숭배를 얻어내는 카리스마가 부재했고, 권력 기반도 약했다. 반면 일본 학계에서는 전시 일본도 파시즘의 일종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다. 특히 전시를 살아간 일반 대중들이 파시즘 사고방식을 내면화하면서 국가의 전쟁 기획과 사회동원에 능동적으로 참여했고, 군국주의로의 전환 자체도 메이지 말기부터 본격화된 대중 소요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 활성화된 대중 정치에 반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많은 마르크스주의 계열 학자들은 전간기 일본 국가와 자본이 처한 위기와 일본에 남은 봉건사회의 유제가 상호작용하여 파시즘이 부상했다는, 유럽 파시즘 분석에도 일찍이 활용된 방법론을 도입하여 일본 파시즘을 설명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재니스 미무라의 테크노-파시즘론이나, 역사적 파시즘을 다루는 최근의 연구 동향은 다소 다른 접근법을 통해 전시 일본의 파시스트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대중운동과 준군사조직, 카리스마적 지도자 숭배의 유무, 선거를 통한 집권 등 유럽 파시즘을 통해서 만들어낸 기준표 대신에, 파시스트들의 사회 인식과 가치 체계, 국가와 공동체를 향한 비전을 통해서 파시즘을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사실 이는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방식일 수 있다. 세계적으로 해당 이념을 주도한 국가에서 그것이 어떻게 부상했는지는 그 이념이 다른 국가와 사회로 전파되고 전유되는 더 넓은 역사 속에서는 그 중요성이 다소 떨어진다.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본질적 요소까지는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러시아 혁명이나 중국 혁명 같은 무산계급 유혈혁명이 없더라도 사회주의 체제를 채택한 국가는 많다. 소련 붉은 군대에 의하여 사회주의 체제가 이식된 전후 동유럽 국가에는 레닌과 마오쩌둥, 적위대와 홍군이 없었지만 폴란드인민공화국이나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사회주의 체제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이념의 주도국에서 권력 획득의 방식과 양상에만 주목하면 개념의 일반화 자체가 불가능해지기도 한다. 자유주의의 경우, 영국의 명예혁명과 점진적인 참정권 확대는 프랑스가 경험한 대륙적 혁명 전쟁과 공통점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는 파시즘 연구에서는 심하면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만 파시즘이고 독일 나치도 파시즘과는 무언가 다른 독자적인 집단으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당연히 추상화와 일반화를 이정도로 거부하는 완고한 태도는 정보의 나열을 제외한 그 어떤 설명도 불가능하게 만들어 실제 역사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게 한다. 당대인의 직관적 인식과 괴리되는 것은 물론이다. 예컨대 냉전기 동구 국가들, 혹은 전후 일본의 55년 체제의 성립은 사회주의나 자유주의의 모범적 수립 과정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두 체제 모두 공동체 비전과 실제 정책, 다수 사람들의 인식 등 다양한 측면에서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요건에 부합한다.

그렇다면 파시즘의 이념은 무엇인가? 파시스트들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어찌보면 이 질문이 역사적 파시즘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일 수 있고, 실제 독일과 이탈리아를 넘어서 파시즘 정치를 추구한 세계 곳곳의 다른 사례들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이 파시스트적 인식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들은 그들이 뿌리내리고 있던 사회의 개별적 맥락 속에서 유사 파시즘 운동을 발전시켰고, 그 과정에서 독일과 이탈리아라는 유럽 파시즘의 종가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했다. 이렇게 세계관을 공유하며 유럽 바깥으로 뻗어나간 글로벌한 파시즘 네트워크는 제2차세계대전으로 추축국이 패망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다른 이념에 흡수되어 자리 잡거나, 파시즘 색채를 지우거나, 소수의 컬트 형태로 남아 버티는 등 계속해서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즉, 파시즘은 단순히 민주정을 위협하는 특정한 광인들의 일시적 일탈을 넘어서, 지금의 우리 세계, 나아가 우리 공동체와 개개인에도 불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사적 현상으로서 인식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현재로서는 역사의 실제적 이해에 가장 부합하는 시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파시스트 세계관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근대성에 대한 반응(혹은 반동)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구체적으로는 전간기, 혹은 관전기의 맥락이 더해져야 한다. 파시즘은 공간적으로는 주로 후발 국가에서 맹위를 떨쳤는데, 이 국가들은 영국, 프랑스로 대표되는 서구의 식민제국과 그 체제를 인수하여 자유주의 질서로 재편하고자 한 미국과의 경쟁에 직면하여, ’갖지 못한 나라‘, 혹은 ’프롤레타리아 민족‘이라며 스스로를 인식하고는 하였다. 뒤늦게 추진한 산업화로 노동계급 정치가 발흥하고, 대중소요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고, 인쇄매체의 발달로 확산된 민족주의는 국가의 주류민족과 소수민족 모두를 격동시키고 있었다. 이런 대내외적 압박을 돌파하여 국가를 구해내고자 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는데, 자유주의자들은 영국, 프랑스, 특히 미국을 모델로 한 자유주의 제도의 심화를, 사회주의자들은 레닌의 무산계급 혁명과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을 처방전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 두 모델은 모두 이성을 신봉하고 물질적 발전을 최우선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계몽주의의 갈래라고 할 수 있었으며, 자연스레 계몽주의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모두에 만족할 수 없었다. 독일 낭만주의,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 동유럽 공간에 만개한 민족주의,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의 보수주의 등에 영감을 받은 이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정신적 요소에 더 집중했고, 이성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민족 전통의 본원적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즉, 개인을 우선시하는 자유주의나 계급을 우선시하는 사회주의나 모두 민족과 국가, 또 그것을 묶어내는 정신적 유대를 경시하기 때문에 사회 혼란과 타락을 방조한다. 그 결과 구성원 간의 갈등이 통제되지 않은 채 확대되어 민족은 필연적인 위기를 맞이해 쇠락에 대처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공동체 민족정신(volksgeist)의 보전을 추구하던 반동적이고 수동적인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제국주의, 사회주의가 얽히고설키는 전간기 위기 속에서 더욱 급진적인 파시즘 사상을 발전시키게 된다.

이 반동적 보수주의는 사회다윈주의와 사회유기체설을 흡수하며 더 급진화되었고, 마침내 이념으로서 파시즘과 그 이념에 입각한 정책을 수행하고 주체를 만들어내는 체제로서의 파시즘으로 도약했다. 다윈주의는 당대 최신 과학으로서 세계인의 인식을 뒤흔든 지적 혁명이었다. 국가와 민족이 단순히 개개인의 합으로 환원되는 허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독자적 실체를 가진 유기체로서 존재한다는 인식도 매우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각 민족이 멸종하지 않고 번창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그 경쟁은 한정된 지구의 육지와 자원을 둘러싸고 일어난다는 사회다윈주의도 이 두 인식틀을 갖추면 출현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 귀결이었다. 사회다윈주의는 계급 역학을 세계 구성의 기초로 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제외하면, 무수히 많은 국가에서 광범위한 공감을 얻었는데, 이는 18세기와 19세기를 걸쳐 빠르게 확대된 유럽 제국주의라는 부인할 수 없는 ’다윈주의적 현실‘이 버젓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간기 유럽의 반동적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느낀 위기의식으로 인하여 이 사회다윈주의와 사회유기체설을 단순한 여러 인식틀 중 하나가 아니라 세계관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전간기 유럽 대륙에는 영국, 프랑스, 미국에 비하면 국가의 발전 수준이 보잘 것 없기에 일상적으로 민족적 모멸을 감내해야 한다는 굴욕감과 유대인, 폴란드인, 헝가리인, 혹은 독일인까지 국가 내부의 소수민족이 유기체로서 민족의 단합을 해쳐서 다윈주의 경쟁에 민족이 적응하기 어렵다는 불만이 매우 팽배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명확했다. 고대부터 존재하여 미래에도 영속해야 마땅한 민족은 마땅히 부여받은 국토 위에서 생활공간을 확보해야만 했고, 그 공간에 거주하는 모든 인간 및 비인간은 민족정신의 창달을 위해 유기적으로 조직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주류민족과 소수민족, 자본가와 노동자, 남과 여, 혹은 정치가, 기업가, 군인, 성직자, 대중 등 모든 사회 구성원은 국가라는 유기체, 혹은 신체를 구성하는 단위로서 더 큰 전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했다. 이 중대한 사회다윈주의 경쟁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 않는 내부 반대자들, 혹은 민족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은 억압되어야만 했고, 최악의 경우에는 제거되어야만 했다. 한편 근대의 새로운 기술들이 쏟아지며 산업주의적인 미래 사회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국가는 과학기술을 무분별하게 수용하기보다 ’민족적 과학기술‘을 장려하여 사회유기체의 고도화와 진화에 동원해야 했고, 동시에 근대화 속에서도 민족정신을 잃지 않도록 원시적, 전통적 가치를 담은 농촌 사회를 민족의 근본을 담은 표준 이미지로 계속 제시해야만 했다. 사회유기체설과 사회다윈주의를 바탕으로, 민족을 세계의 기본적 구성 단위로 인식하며, 그 유기체 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단결과 동원, 배제와 제거를 추구하는 ’반동이자 혁명‘이 파시즘 세계관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상기한 바와 같이 이런 인식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거치며 유럽에서 매우 일반적이 되었으며, 제국주의 시대에 유럽의 세계관을 지역적 맥락에 따라 수용한 비서구에서도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사회다윈주의는 중국의 양계초, 그리고 양계초의 영향을 받은 신채호를 통해서 널리 수용된 상태였고, 민족의 근대화를 통한 우승열패 세계에서의 생존은 모든 자강 운동가들이 추구하는 목표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전간기에 등장한 파시즘은 장개석의 중화민국 정부와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 두 국가는 기존의 자유주의 열강이나 신생 소비에트 연방보다는 전간기 유럽에서 파시즘을 채택한 국가들과 훨씬 더 많은 유사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민족적 굴욕감은 두 나라 엘리트와 대중 사이에 팽배했고, 민족적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자본가와 노동자들이 국가를 혼란하게 만든다는 불만이 군인들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었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동양인에게 적합한 동양 전통을 해체하며 도덕적 타락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우려했다. 동시에 제1차세계대전을 통해서 세계가 총력전에 대비해야만 하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으며, 신과학기술이 인류 문명을 전인미답의 영역으로 이끌고 있다는 기대와 불안도 공존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장개석은 유교에 기반한 파시즘 운동을 통해 중화민국을 부흥시키고, 아편전쟁 이후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중국의 쇠퇴와 반식민지 상태를 반전시키고자 하여 ’신생활운동‘을 추진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파시즘 세계관을 실제 체제 운영 원리로 흡수한 나라는 단연 일본이었다. 당시 일본은 전간기의 광범위한 위기의식을 공유한 국가였지만, 성공적 근대화를 통해 상당한 국가 역량과 자본을 축적하고 제1차세계대전에서 승전국 지위까지 얻어낸 점에서 자신감이 넘치는 국가이기도 했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고자 한 신세대 엘리트는 일본 체제에 불만을 느끼는 민중의 묵인과 지지를 바탕으로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성립된 기존 체제를 전복하고자 각종 파시즘 운동을 일으켰고, 그중에서 통제파 군인들이 주도한 1931년의 만주사변과 황도파 군인들이 일으킨 1936년의 2.26 사건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들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군인을 넘어서는 사회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파시즘 참여, 그중에서도 특히 지식인들이 주도한 토착적 파시즘 사상의 개척도 중요했다. 반제국주의를 교량으로 좌익 마르크스주의에서 우익으로 전향한 당대 일본의 최고 지식인들은 문명사부터 과학기술에 이르는 지적 영역에 파시즘의 색채를 부여했다. 오카쿠라 텐신을 통해 대중화된 아시아주의자들은 일본의 팽창 기획을 일종의 문명사적 사명으로 확장시켰고, 교토학파의 세계사학자들은 여기에 역사철학적 기반을 제시해주었다. 미키 기요시는 특유의 협동주의와 형성설을 통해서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대립적인 철학을 아시아적 방식으로 종합해내고자 했으며, 아이카와 하루키는 기술을 통해서 유기체적인 사회 관리와 동아시아 전체의 공간 재조직을 바탕으로 전면적인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설계했다. 이런 다양한 지적 실험은 모든 아시아인의 정신적 구심점이며, 1억 일본인을 합일하게 만드는 신이자 아버지로서 천황의 광휘 아래 세계를 조직하고자 했던 전시 일본의 국가 이념, 국체론과 불가분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파시스트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전간기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다른 국가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는데, 미국의 뉴딜과 포드주의, 소련의 스탈린주의 이상으로 영감을 준 것은 무솔리니의 영도 아래에서 새로운 로마 제국 건설을 시도한 이탈리아와 히틀러를 따르며 일치단결하여 대륙의 지리, 산업, 기술, 나아가 세계질서 전체를 재편하고 있던 독일이었다. 일본 파시즘 사상가들은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의 부상과 양국의 정책을 연구하며, 일본의 현실과 부합하는 일본만의 파시즘을 창조하고자 했다. 이 현상을 분석한 연구서들의 제목처럼, 이탈리아가 만든 ’파시스트 효과‘이자 독일이 만든 ’초국적 나치즘‘이었다.

물론 파시즘은 분쇄되었다. 공포와 영웅심을 조합한 스탈린의 소련, 파시즘과 자유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항일투쟁을 지속한 장개석의 중국은 추축국의 승리를 가로막았고, 여기에 대양 건너편 미국의 어마무시한 자원이 더해지자 유럽과 동아시아 파시즘 체제는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장개석 정권마저도 전쟁 과정에서 부상한 모택동의 홍군에게 쫓겨나 좁은 대만섬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세계는 프롤레타리아트 세계 혁명을 외치는 사회주의자들과 대서양 헌장의 정신을 지킨다는 자유주의자들의 경쟁으로 점철되는 냉전 시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냉전 시대에도 파시즘의 유산은 보이지 않은 곳에서 활약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파시즘의 시대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이전 추축국은 그 잔재를 단절할 수가 없었다. 최소 10년, 최대 20년에 걸쳐서 국가의 최고 엘리트가 파시즘을 통해서 세계를 인식하며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최적의 정책들을 개발하고 있었다. 추축국 본국 대부분을 지배하기 시작한 미국은 반공을 위해 파시스트 정권 엘리트의 복권을 암묵적으로 묵인하기 시작했고, 무수한 전직 파시스트들이 원래의 직위로 차츰차츰 복귀할 수 있었다. 파시스트 정권에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동조했던 대중도, 일부는 철저한 반성을 외쳤지만 다수는 과거의 의도적 망각 내지는 미화를 원했다. 그리고 전후 패전국 엘리트들은 미국의 세계 패권 속에서 자유주의로 색칠한 파시즘 정책을 추진하면서 눈부신 경제 기적을 이루었다. 사실 이 파시즘 정책들은 외견으로만 보자면 미국의 뉴딜 정책과 전후 케인즈주의 질서와 충돌하지 않았으며, 현대의 가장 위대한 창조자라고 할 수 있었던 헨리 포드의 반자유주의 비전과는 직접적으로 닿아 있었다는 점에서 미국 패권과 알게모르게 부합하는 것이었다. ’유기체로서 민족의 창생을 위한 사회 각 계층의 협력‘이라는 파시즘의 거창한 슬로건은 노사정 협력 테이블이라는 밋밋한 이름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민족의 유전적 건전성과 사회 위생을 위한 보건 정책‘은 ’사회 복지를 담당해야하는 국가의 공적 책임‘으로 바뀌었다. 파시스트들이 강조한 낭만화된 전통 문화와 전원 생활의 이미지는 빠르게 발전한 항공여객운송에 힘입어 승전국의 중산층이 즐기는 관광 상품이 되었다. 그리고 자유의 친구로 재포장된 파시스트들의 노력에 힘입어 패전국 독일과 일본의 산업은 승전국인 미국의 노동계급을 모조리 실직자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일대약진하여 전후 브레튼우즈 질서와 미국 뉴딜 정치 질서를 유지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추축국의 군대가 지나갔던 곳에서도 파시즘의 유산은 지속되었다. 프랑스는 보불전쟁 이래로 독일을 한 번도 압도하지 못하고, 최종적으로는 치욕적 패배를 당했다는 굴욕감에 휩싸여 독일 점령 당국이 남기고 간 파시즘 유산을 승계하기로 했다. 전후 프랑스 사회는 자유주의 프랑스가 정치 갈등으로 국가 역량을 낭비했기에, 중앙 정부의 지도 하에서 강력한 국가 재건 드라이브가 필요하다는 신속한 합의를 이루었다. 비시 프랑스의 산업 정책이나 사회 복지 정책은 전후에 드골이 주도한 지도주의(디지리즘)에 그대로 반영이 되었으며, 히틀러의 군홧발에 짓밟힌 여타 유럽 국가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본 제국의 황군이 머물렀던 곳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펼쳐졌다. 1945년에 일본은 인도네시아를 네덜란드 식민 통치에서 해방해주고 대동아공영권에 합류하게 해준다는 명목으로 독립준비위원회를 발족했는데, 일본은 신생 인도네시아 국가의 헌법 철학에 서구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아시아적인 가치를 넣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국체론을 모델로 제시했다. 일본군에 협력했던 수카르노를 비롯한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은 일본 국체론에 영감을 받아 오늘날에도 인도네시아 국가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는 다섯 가지의 원칙인 판차실라(Pancasila)를 만들어냈고, 이는 수카르노의 탈식민적 기획과 수하르토의 냉전 권위주의 기획에 제각기 다른 의도로 동원될 정도로 중요했다. 역시 일본을 모델로 삼은 입헌군주 파시즘을 도입하고자 했던 태국의 플렉 피분송크람은 1932년에 전제왕정을 전복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화교의 영향력을 억압하고 ’태국 민족‘의 발전에 주안점을 둔 파시스트 정책을 밀어붙였고, 최종적으로는 인도차이나의 실지를 되찾겠다며 프랑스와 전쟁까지 벌이며 대동아공영권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역시 냉전기 미국의 묵인 하에 피분송크람 체제는 1957년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지속되었는데, 피분송크람은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일본으로 망명해 1964년에 가나가와에서 죽었다.

여기까지 공부하니 당연히 다음 의문이 미치지 않을 수 없는데, 일본의 군홧발에 짓밟힌 것을 넘어서 35년의 통치를 받고, 일본이 부분적 자유주의 질서를 도입했다가 파시즘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전부 겪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어떤 유산이 남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역시 다양한 연구들이 이루어져있고, 유명한 일화와 증언들도 남아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북한의 주체사상이다. 북한을 극우 국가라고 규정하는 연구가 있을 정도로, 주체사상과 그에 입각한 북한 체제는 천황제 파시즘과 형태적이나 내용적으로나 매우 유사한 것이 사실이다. 남한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조금 더 복잡하다. 하지만 이시와라 간지가 건국한 만주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박정희가 대한민국을 20년 가까이 통치하였다는 것은 보통 진보 진영에서 한국 우파가 파시즘의 뿌리가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로 제시되고는 한다(물론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을 강조하는 팩스턴이나 여타 파시즘 연구를 준거로 삼는 이들은 박정희 정권이 파시즘의 성격을 결여한 단순한 군사독재였다고 하는데, 이는 일본 파시즘을 둘러싼 논쟁의 한국 판본이라고 할만 하다). 하지만 파시즘이 그 죄업 때문에 분석해야 하는 역사적 현상보다는 다분히 정치적 욕설로 쓰일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는 한국 체제의 파시즘적 성격을 객관적으로 이야기하기는 꽤나 어렵다. 한국 우파의 뿌리에서 역사적 파시즘을 일정 정도 발견하고자 한 시도는 대부분 진보 진영에서 이루어졌고, ’귀태 논란‘에서 드러나듯이 이는 한국 우파의 정치적 시민권을 아예 박탈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함의로 이어지고는 했기 때문이다(80년대 운동권의 세계관에서 마르크스주의 혁명론과 반제국주의 통일관을 발견하는 작업이 좌파의 정치적 시민권 박탈과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과 거울쌍이다).

그래도 한국 현대사에서 세계사적 맥락에서 역사적 파시즘과 연결고리를 발굴하는 시도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개발시대 한국과 만주국의 유사성을 비교하며 박정희가 ’만주 정신‘을 계승했다는 한석정 교수의 <만주 모던>은 이를 밝혀내고자 한 흥미로운 시도 중 하나로, 어느 정도의 대중적 반향도 얻었다. 후지이 다케시 교수의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또한 해방공간과 제1공화국을 풍미한 안호상과 이범석을 유럽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장개석 파시즘과의 연결을 통해서 분석한 중요 저작이다. 카터 에커트의 <박정희와 근대 한국: 군사주의의 뿌리>는 강화도조약부터 일본 제국의 패망까지, 구한말 조선에서 군사주의가 부상하여 일본의 상무 문화와 습합되고, 그 토양 위에서 자란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서 일본 파시즘을 수용하는 주체가 되는 과정을 묘사했다.

일단 이 정도까지 공부를 한 이후에도 나는 파시즘의 역사와 동아시아에서의 수용과 지속에 관한 일정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탐구를 한 다음에는 다른 공부를 하느라 잠시 접어두고 있는 주제이기도 했다(그래도 유라시아 지역의 신전통주의와 최근 서구의 우파 포퓰리즘의 부상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데는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급변하는 정치 상황은 다시 한 번 이 주제에 대해서 무언가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집어든 책, 아니 박사논문이 하버드 대학교에서 나온 양성익 선생님의 <한국의 파시스트 순간: 해방, 전쟁, 남한 권위주의의 이념>이었다. (원제: Korea’s Fascist Moment: Liberation, War, and the Ideology of South Korean Authoritarianism, 1945–1979) 이 논문을 다 읽으며, 구한말과 일제시대에서 파종되어, 해방공간과 미군정 시기에 만개한 한국 반공 민족주의가 이승만, 박정희를 거치며 완성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기까지 읽고 저 논문이 ‘역시 한국 우파는 파시스트야!’라고 마음껏 낙인 찍을 수 있게 해주는 도구라고 착각하시지는 말아주셨으면 한다. 논문에 따르면, 남한에 형성된 반공 민족주의는 구한말과 일제시대로 소급되는 뿌리를 지니고 있고, 1979년까지 남한 사회에 헤게모니를 지닌 채 광범위한 사회적 동의를 얻어냈다. 한국 좌파 역시 우파가 완성한 ‘초월적 민족주의(transcendantal nationalism)’에 상당 부분 동의하고 있었으며, 그 동의 덕에 우파의 민족주의를 좌파의 민족주의로 전유해내어 반우파투쟁을 성공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G7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서방의 자유민주 선진국이라며 자연스럽게 자부심을 표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대한민국은 일본 제국에서 해방된 아시아의 신생 독립국으로서 제2세계와 제3세계, 나아가 추축국 사상까지도 소용돌이 쳤던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말이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여전히 파시즘의 유산 위에서 살고 있으며, 심한 경우 우리가 누리는 풍요조차도 파시즘이 지구상에 뿌린 악과 피, 눈물에 빚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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