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샤이델의 <불평등의 역사>

발터 샤이델의 <불평등의 역사>

역사 속에서 불평등이 실질적으로 해소된 사례에 대한 광범위한 종합

임명묵

오스트리아 출신 로마사학자, 스탠포드 대학교 교수인 발터 샤이델.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원제는 The Great Leveler, 의미를 살리며 번역하기 힘든데, '거대한 평등화의 기수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고대 로마사를 연구하는 발터 샤이델 교수가 인류사에서 불평등이 어떻게 확대되었으며, 가장 결정적으로 어떻게 불평등이 해소되며 사회가 더 평등해졌는지 메커니즘을 밝히기 위해 쓴 대작이다.

돌이켜 보면 책이 출간된 시점에서 불평등이라는 이슈는 정말 '핫'했던 것 같다. 2013년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나오면서 불평등이 학계의 주된 관심사로 부상하고(그 이전에는 2008 금융위기와 2011 월가 점령 시위도 있었다), 2014년에는 라즈 채티 교수가 미국의 사회이동성에 관한 책을 냈고, 2015년에는 로버트 퍼트넘이 <우리 아이들>을 출간했다. 이미 발 빠른 사람들은 세계화로 인해 선진 사회에서 나타난 거대한 경제적 양극화가 세계에 중대한 의미를 띠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결국에 불평등은 2016년에 브렉시트와 트럼프 등 우익 포퓰리즘이 반세계화 의제를 통해 큰 인기를 끌면서 공론장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가 되었고, 한국은 2017년에 등장한 문재인 정부의 야심찬 격차 해소 정책으로 이 대열에 합류했었다. 물론 이후에는 지정학, 문화전쟁 등 다른 이슈가 더 전면에 부상했지만, 바이든이 노조를 다시 지지 연합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한 것도 그렇고, 2010년대에 부상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불평등'이라는 화두는 2020년대에도 여전히 생명력이 있다고 하겠다.

나도 그 당시에 불평등이라는 주제에 꽤나 천착을 했었고, 그 당시의 문제 의식을 담아서 <K를 생각한다>에서도 불평등과 격차 얘기가 꽤나 많다. 그리고 그 즈음에 읽었던 책이 2017년에 출간된 이 <불평등의 역사>이다. 인류 사회의 여명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계에 등장한 숱한 사회에서 불평등은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고, 이 불평등이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해소된 적이 없으며 오직 '평등화의 네 기수'가 종말과 묵시록을 선사하며 해소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은 몹시 설득력이 있었다. 이 책 덕택에 나는 이후에도 이상론적인 정책들로 이 세계사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의심의 눈초리를 품게 되었다.

책 자체가 워낙 방대하고 읽기에도 정보량이 너무 많기에, 학부 시절의 패기가 아니었다면 쉽사리 읽지는 못했을 것 같은 책이다. 오랜만에 책 내용을 챕터별로 정리한 옛 글을 보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어졌다.


01 불평등의 탄생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농경이 시작되며 축적 및 상속 가능한 재산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 불평등은 시작되었다. 저자는 농경뿐만 아니라 유사 불평등 사회를 건설한 수렵채집 사회, 특히 어족자원 의존 공동체를 검토한다.

02 불평등의 제국

로마 제국과 한 제국을 비교 분석하며 농경 제국의 정치적 고도화가 어떻게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 했는지 보여준다. 경제성장과실의 차별적 분배는 자본소득의 집중과 정치적 권력의 접근권한을 경제적 과실로 전환하면서 심화된다. 특히 과세 기반을 확대하고자 자영농을 육성하려는 국가권력의 시도는 광대한 땅의 지방 권력자와 중앙 귀족들에 의해 번번히 무산된다. 고대 세계 가장 거대한 첨단 제국이었던 로마와 한은 마침내 몇백만 단위의 정치체에서 추출하던 부를 몇천만 단위로 전환하면서 불평등의 신기원을 세운다.

03 불평등의 기복

가장 철저히 연구가 된 유럽의 불평등 추이를 보여주면서 본론을 시작한다. 로마 시대까지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불평등은 로마가 멸망하며 어느샌가 곤두박질 친다. 영국의 주택 크기 변화 연구와 이탈리아 각지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소개된다. 중세 성기를 거치면서 유럽은 다시 회복되는데 이 기간 압착되었던 불평등은 착실히 늘어났다. 그러나 흑사병의 여파로 다시 불평등은 곤두박질 치고, 이후 제1차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계속해서 늘어만 간다. 무역의 세계화와 상업자본의 진출, 이후 산업자본의 형성과 제국주의는 자본/자원을 추출할 수 있는 풀을 확대하며 소수에게 더 많은 부를 집중시켰다. 저자는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불평등의 급속한 하락을 주목하며, 거대한 대규모 재앙만이 오직 의미 있게 불평등을 줄여 왔다고 이야기 한다. 이것이 바로 평등화라는 묵시록을 불러오는 네 기수, 근대적 총력전, 공산주의 혁명, 국가 붕괴, 대유행병이다.

04 총력전

일본의 사례를 통시적으로 설명해나간다. 이후 다른 평준화 동력을 분석할 때도 저자는 알기 쉽고 가장 대표성 있는 예시를 먼저 든 뒤 더 애매모호한 사례들을 추가적으로 검토한다. 에도 시대 쇄국과 인구증가로 인해 이례적으로 낮게 유지되던 불평등은 개항과 함께 꾸준히 성장했다. 그러나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전시 동원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전쟁 수행을 위해 부자들의 재산은 징발되었고, 고정자산은 파괴되었으며, 폭발적 인플레이션으로 임대소득은 증발했다. 이후 미국의 군정은 토지소득과 노동조합 합법화 등 뉴딜주의적 개혁을 통해 일본의 불평등에 마지막 한 방을 날린다.

05 대압착

저자는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이 불평등에 미친 영향을 하나하나 검증한다. 우선 제2차세계대전은 주요 참전국들 어디든 간에 막대한 불평등 감소 효과를 발휘했다. 소득세, 자산세 모두 엄청나게 확대되었고, 인플레이션과 전시 징발, 자산 파괴 등 모든 압착 동력이 작동해 부자들을 말 그대로 갈아버렸다. 제1차세계대전은 효과가 좀 더 애매하다. 영국은 효과적으로 부자들의 재산을 전시에 징발해갈 수 있었다. 독일은 상류층의 고통을 짜내기 보다는 대외채무를 통해 전시 자본을 조달하려 했는데 이는 혼란을 전간기로 미루는 효과밖에 되지 않았다. 프랑스도 이 경우 독일과 유사했다. 상류층들은 전시 부당 이득을 취하면서 불평등을 심지어 늘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저항에도 불구하고 참전국들의 어마무지한 자원 동원 요구는 결국 압착을 달성 해냈다. 캐나다, 오스만 제국 같은 나라들뿐만 아니라 제2차세계대전 기 식민지 인도에도 이런 효과가 발견되었다. 반면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참전국들을 향하는 수출에 집중한 아르헨티나와 같은 국가들은 불평등이 오히려 늘었다.총력전과 이후 공산주의의 위협은 서구 국가들이 대압착을 대감압으로 풀어버리지 못하도록 강제했다. 심지어 소련의 상대적 군사력이 불평등과 반비례 관계를 보인다는 연구도 소개된다. 제1차세계대전 러시아의 사례는 애매하다. 러시아는 독일보다 더 심하게 상류층들이 전쟁 부담을 회피해가려 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러시아의 상류층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묵시록의 두번째 기수가 대기 중이었기 때문이다.

06 산업화 이전의 전쟁과 내전

산업화 이전의 전쟁과 내전에서는 총력전만큼의 효과가 거의 관찰되지 않는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원시적 형태의 총력전이었다. 남부의 불평등은 실제로 대대적으로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 부는 거의 북부의 산업자본가로 향해 들어갔고, 남부의 경험은 전근대에 패배한 국가들의 엘리트가 겪는 경험과 더 유사했던 듯 하다. 저자는 남북전쟁을 한 발은 전근대에, 한 발은 근대에 걸친 전쟁으로 묘사한다. 프랑스 혁명과 뒤이은 나폴레옹 전쟁 또한 국민동원을 처음으로 보여준 전쟁이라는 점에서 평준화 효과를 어느 정도 낸 듯 하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근대적 총력전에 비하면 그 효과가 심히 미미하다. 둘째는 프랑스 혁명 당시의 숙청과 재산몰수(두번째 기사로 간주 가능한 요인)와 맞물려 있기에 인과관계를 분리하기 애매한 측면이 있다. 저자는 8장에서 프랑스 사례를 더 다룬다.

그 뒤 저자는 전근대 대중동원 사례로 넘어간다. 대다수 전근대 전쟁의 동원률은 국가 능력의 한계로 그렇게 높을 수가 없었다. 몇 가지 예외 사례가 존재한다. 중국의 전국시대, 로마 제국,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여전히 불평등에 미치는 효과는 다소 모순적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오래 지속되는 전쟁은 평민 중 상위계층의 부를 더 높은 귀족층으로 이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유일한 예외는 아테네다. 아테네는 전근대에는 이례적으로 자본집약적 + 대중동원 군대로 패권을 추구했다. 부자들을 겁박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위업이었고, 아테네의 불평등은 이후 상당한 수준으로 억제되었다. 중장보병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았던 스파르타는 과거 평등사회에 대한 이상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 효과는 불평등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힘으로 점차 부식된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이상으로 삼았던 고대 평등사회의 정체는 이후 묵시록의 세번째 기사로 다시 등장한다.

전통적 전근대 전쟁과 내전은 거의 대체로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 바가 없다. 승자든 패자든 이는 모두 엘리트 간에만 부의 이동을 촉진시켰고, 승자의 부를 더 크게 해주어 불평등을 확대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내전은 달랐다. 엘리트들의 부를 대폭 파괴하는 내전은 근대에 등장하게 되고, 그것이 평준화의 두번째 기사다.

07 공산주의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직관적인 기사다. 레닌, 마오쩌둥, 폴 포트로 대변되는 공산주의 혁명가들은 말 그대로 모두를 가난하게 만들어서 평등을 성취했다! 그리고 책 내내 반복되는 저자의 요지 자체가 사실 그것 빼고는 지속적 평등을 성취할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 총력전과 공산주의는 함께 가는 기사라는 점이 흥미롭다.

08 레닌 이전

산업화 이전의 전쟁과 총력전을 비교했던 것처럼, 레닌 이전의 봉기와 계급 전쟁의 사례를 다룬다. 여기서 다뤄지는 사례는 첫째로 프랑스 혁명과 태평천국의 난이다. 프랑스 혁명은 부자들의 목을 치는 데 있어서 확실히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나 근대 공산주의 수준의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태평천국의 난은 거의 성과가 없었다. 그 다음에는 라틴아메리카 농민 봉기, 중세 자크리의 난 등등의 숱한 농민 봉기, 그리고 도시의 폭동 등의 사례들이 나온다. 몇몇 폭력적 농민봉기는 토지개혁을 강제하면서 성과를 냈으나, 대부분의 사례에서는 더 큰 유혈진압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 폭동도 마찬가지였다.

주목할 예외는 중국의 대규모 농민 봉기이고, 기록도 많다. 그러나 많은 경우 왕조 교체급의 봉기는 일반 농민 봉기를 뛰어넘어 묵시록의 세번째 기수를 깨웠다. 바로 국가 실패와 체제 붕괴다.

09 국가 실패와 체제 붕괴

처음 불평등의 확대를 논할 때 이야기 되었듯이, 불평등은 안정적 자본소득과 정치 권력에의 접근성으로 확대된다. 그런데 국가가 붕괴하고 안정적 치안이 사라지게 되면, 자본 소득의 기반과 정치 권력도 신기루처럼 없어진다. 바로 이 때문에 대규모 국가 실패와 문명의 붕괴는 불평등을 크게 떨어트릴 수 있다. 장안의 귀족들을 모조리 학살한 황소로 초래된 당제국의 붕괴, 서로마 제국의 붕괴, 콜롬버스 이전 아메리카 사회의 붕괴(특히 마야 문명), 기원전 12세기 고대 청동기 문명의 붕괴, 인더스 문명의 붕괴, 고대 근동의 국가 실패, 마지막으로 현대 소말리아의 사례가 다뤄진다. 소말리아는 일반적 내전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지나치게 역기능적이었던 국가가 총체적으로 붕괴해버려서 오히려 불평등을 줄이고 심지어 몇몇 복지지표를 향상시키기까지 했다. 저자는 약탈 국가는 하나같이 똑같으나, 붕괴마다 고유의 평준화 방식을 가진다고 톨스토이의 유명한 "안나 카레니나 법칙"을 뒤튼다.

10 흑사병

마지막 기수는 흑사병이다. 이것도 공산주의와 맞먹을 정도로 설명할 필요가 없이 유명한 사례다. 계층 막론하고 모든 인구를 30~40%를 불살라버린 흑사병의 충격은 불평등을 엄청나게 감소시켰다. 흑사병 이후 자본 대 노동 가치 균형이 변했기 때문이다. 비숙련 노동자들은 우월한 임금 협상력을 가지게 되었고, 귀족들은 높아진 임금을 지불하느라 빚에 쪼들리게 되었다. 먹는 입이 줄어서 토지에서 나오는 귀족들의 농산물 가격은 하락했고 이는 수입 하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성과는 특정한 정치, 경제 제도 하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혹은 특정 제도 하에서는 불가능했다). 도시가 권력의 평형추 역할을 하기엔 미약했고, 귀족의 힘이 훨씬 강했던  동유럽, 부재 지주와 농민 사이에서 중개 마름들이 대규모 노동력으로만 관리할 수 있는 관개 경작지에서 소출을 추출하던 맘루크 이집트에서는 그런 불평등 평준화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확힌 그런 조짐이 잠시 보였는데 정치 엘리트들이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자본 대 노동의 가치와 수요 공급 효과를 억제하며 중단되었다.

11 대유행병, 기근 그리고 전쟁

흑사병만큼 풍성한 기록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다른 전염병 사례들이 검토된다. 콜롬버스 이후 아메리카 문명의 붕괴는 자료의 부족으로 모습을 재구성해내기 힘드나 최근 멕시코의 실질임금 자료를 통해 대략의 얼개를 그려볼 순 있게 되었다. 초기 아메리카 원주민 제국들의 강제노역 전통이 에스파냐 정복자들에게 이어지면서, 동유럽이나 맘루크 이집트에서 벌어진 일이 나타났다. 인구는 대거 줄었으나 임금은 최저생계선에서 제자리걸음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인구가 진짜 너무 엄청나게 줄어들자 임금은 차츰차츰 오르기 시작했는데, 늘 그렇듯이 인구가 회복되자 이 평준화 효과는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임금 통계만으로는 전체적인 불평등의 모습을 재구해내기는 힘들기 때문에 결과 해석엔 신중할 필요가 있단다.

중세 초 유스티니아누스 역병과 로마 말기 안토니우스 역병도 유사 후보로 들어갈 수 있으며, 흑사병과 비슷한 효과를 냈음이 어느 정도 추론된다. 셰브켓 파묵 같은 경제사학자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의 파급효과가 8세기~11세기의 "이슬람 황금시대"를 열었을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흑사병 이후 유럽에서 르네상스가 태동한 것처럼 말이다.

대규모 기근은 저소득층 인구를 대거 소모시킨다는 점에서 전염병과 비슷한 후보로 간주될 수 있으나, 아일랜드 기근, 흑사병 이전의 14세기 초 "대기근" 등의 사례를 검토한 결과 기근에서 평준화 효과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20세기 가장 극적인 기근은 주로 공산주의 혁명, 총력전과 관련 있기 때문에 사례로 적절하지 않다. 저자는 두 기수, 대유행병과 전쟁이 합쳐진 사례로 17세기 아우크스부르크를 이야기 한다. 실제 역사에서 묵시록의 네 기수들의 작용효과를 정확히 분리하는 것은 힘드니만큼, 생생한 역사적 사례를 보여주면서 문제의 복잡함과 재앙의 극적 효과를 드러내려는 것 같다. 흑사병 이후 불평등이 빠르게 늘어난 아우크스부르크의 지니계수는 무려 0.89였다. 그런데 30년 전쟁이 시작되고 황제군, 스웨덴군이 주둔하면서 상류층의 자산은 죄다 점령비용으로 징발되었다. 주둔군은 전염병을 퍼트려 주로 하류층을 저승으로 끌고 갔다. 이 모든 건 아우크스부르크의 불평등을 압착했다. 안전한 투자기회도 사라지고, 부동산의 가치는 증발했고, 높아진 노동력 수요는 자본수익을 압박했다. 아우크스부르크의 지니계수는 압착 이후에도 0.75의 높은 수준을 유지했지만, 어쨌든 17세기 내내 유지되었다.

12 개혁, 불황 그리고 대의권

저자는 12장에서 다른 좀 더 평화로운 사례들을 검토해본다. 후보는 토지개혁, 채무 면제와 노예해방, 불황, 민주주의다. 토지개혁은 폭력적인 위협에 노출될 경우에만 효과를 봤다. 대부분의 토지개혁은 공산주의 운동과 깊은 관련을 맺기에 두번째 기수와 분리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가장 가까운 사례는 무가베 치하의 짐바브웨다. 7세기 일본의 다이카 개신은 유력한 후보인데 이 또한 당나라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압박 속에 전개되었다. 크림 전쟁의 위협, 이후 러일 전쟁의 효과로 진행된 러시아의 토지개혁은 별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몇십년 뒤 러시아의 지주들은 그 빚을 이자까지 쳐서 제대로 갚게 되지만 말이다.

한국, 대만, 남베트남의 토지개혁은 공산주의와 총력전의 위협이 가져다주는 평준화 사례의 예시다. 그리고 한국은 남은 불평등마저도 한국 전쟁으로 다 털어먹었다. 부자들의 모든 자산이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몰수로 인해 날아간 것이다. 농민 채무 면제는 대다수의 경우 큰 의미가 없었다. 노예 해방은 평화적일 경우 오히려 퇴행적 분배를 초래했다. 영국의 경우 간접세에 대부분의 세금을 충당했는데 노예를 해방시킬 때마다 보상금을 준 것으로 그런 이전을 조장했다. 프랑스령 카리브 제도의 노예 반란은 역시 폭력의 개입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경제위기는 대다수의 경우 불평등을 악화시켰다. 유일한 예외는 전간기 대공황인데 이 또한 미국을 벗어나면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그 제한적 효과나마 다시 반등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를 꺾어버리고 대압착을 시킨 건 총력전의 여파였다.

민주주의는 불평등을 줄이는데 그 자체로는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13 경제 발전과 교육

저자는 여기서 쿠즈네츠 모델, 경제성장기에 불평등이 상승했다가, 다시 분배가 개선되며 불평등이 감소하는 그 유명한 역 U자 그래프를 검증한다. 경제학 이야기가 많아서 지식이 부족한 나는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장이었다...

14 만일 이랬다면?: 역사로부터 반사실로

저자는 폭력적 평준화가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야 우리 시대의 불평등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전염병과 국가 붕괴 없는 전근대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대신 근대의 역사 전개에서 개연성을 좀 무시하면, 다소 억지로 총력전과 공산주의 없는 20세기를 상상해볼 수는 있다고 한다. 여기서 저자는 라틴아메리카의 예시를 든다. 유럽과 동아시아에 비해서 엄청나게 높은 라틴아메리카의 불평등은 극단적 폭력의 분출을 겪지 않은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전반적 경험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4가지 가능 시나리오가 존재한다고 본다. 첫째는 별 기복 없이 불평등이 1913년의 최대치에서 쭉 유지가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근대적 좌파 운동이 평화적으로 전개되어서 불평등을 우리 시대의 그것처럼 낮춘다는 것이다. 이건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보는 듯 하다. 셋째는 우리 시대만큼은 아니지만 완만하게 낮췄을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극단적 폭력이 멈추게 만든 세계화의 수레바퀴도 불평등을 밀어올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 이조차도 가능성은 적다. 가장 개연성이 높다고 생각되는 네번째는 사회민주주의와 대량교육을 만나 불평등이 잠깐 감소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평화로운 세계화와 기술발전의 개연성, 폭력적 분출의 부재 등을 고려하면 불평등은 훨씬 높은 수준에서 다시 재형성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왜냐면 그게 80년대부터, 안정된 국제안보와 세계화, 기술발전이 맞물려서 열린 우리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자는 우리 시대로 넘어간다.

15 우리의 시대

마침내 세계화와 정보화의 시대가 열리며 불평등은 돌아왔다. 대압착은 끝났다. 세계화를 통해 확대된 시장, 높아진 기술 프리미엄, 동류혼 경향 증가, 여전히 강력한 정치 권력의 지대(rent), 조세회피처의 존재 등 모든 것은 불평등의 증가를 가리킨다. 민주주의는 정치에 참여할 능력이 있는 상류층 시민을 과대대표 하면서 평준화 효과를 상실했다. 노조, 노동시장, 이민 등등 모든 것이 불평등을 끌어올리는 시대다.

16 우리의 미래는?

일단 저자는 정치적 실현가능성 때문에 몇몇 논자들이 제기하는 평준화 정책 담론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자본소득에 세금을 더 부과하고, 토빈세와 상속세를 추가하고 기본소득을 주고 뭐 그런 것들.. 저자는 가장 강력한 대압착 사회를 건설하여 지금까지도 막대한 재분배 체계를 통해 유지하는 유럽의 미래를 전망한다. 고령화는 복지부담을 늘릴 것이고 중동과 아프리카로부터의 대량이민도 정치적 부담을 엄청나게 늘릴 것으로 보인다. 유럽마저도 이러면 미국은 뭐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희망(?)인 기사들은 어떤가? 저자는 현실적으로 네 기수가 다시 오지도 않을 것이라고 본다. 대중동원 총력전은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 이미 최대의 총력전에 속해있던 태평양 전쟁에서 향후 전쟁은 대규모 보병전에서 기술집약적 군대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민간사회와 유리된 첨단기술군의 등장, 핵무기로 인한 전쟁억제 효과는 총력전을 잠재웠다. 물론 무제한 핵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강의 체제붕괴를 보여주겠지만 그마저도 가능성은 희박하다.

공산주의는 뭐 말할 것도 없다. 공산주의와 비슷할 정도의 폭력적 비전도 안 나오고 있다.

체제붕괴 또한 그렇다. 현대 국가는 너무 견고해졌다. 국가 붕괴는 중동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대규모 전염병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 유전자 편집 기술과 고도로 통합된 세계 인구 이동 네트워크가 유례 없는 판데믹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고도의 기술과 인적 교류는 대응책마저도 빠르게 진화시킨다. 붉은 여왕 효과가 작동하는 것이다. 1918년~1920년 세계 인구의 5%를 죽인 스페인 독감이 평준화에 심한 영향을 미쳤을까 생각하면 의심스럽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는 비숙련 노동자가 대거 죽으면 그냥 그 자리를 로봇으로 채우려 하지 않을까 싶다고 한다.미래에는 유전자 강화, 인간-기계 통합 등으로 트랜스휴먼이 등장하고, 불평등이 종적 차원으로 극대화될 수도 있다. 그런 자원에 먼저 접근 가능한 건 당연히 상류층이기 때문이다. 대신 더 나아가면 슈퍼 유기체로 인류의 정신이 통합되어 불평등이 완전 사라지는 깜짝 반전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현실적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미래의 영역이다.

"그러나 모든 실질적 평준화의 유명한 일화 뒤에는 언제나 한 가지 큰 이유가 있었다. 왜 한두 세대 뒤에 존 록펠러는 그의 최고 부자 동료들보다 실질적으로 완전히 한 자릿수만큼 더 부유해졌는지, 왜 텔레비전 드라마 다운튼 애비 속 영국이 보편적 무료 의료 서비스와 막강한 노동조합으로 유명한 나라로 바뀌었는지, 왜 전 세계의 산업화 국가에서 빈부 격차가 애초보다 20세기의 3/4분기에 훨씬 더 줄었는지, 그리고 도대체 왜 수백 세대 이전에 고대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람들이 평등의 이상을 받아들이고 이를 실천에 옮기려 노력했는지에는 한 가지 큰 이유가 있었다. 왜 1950년대에 장좡촌이라는 중국의 마을이 완벽하게 균등한 농지 분배를 자랑하게 됐는지도 한 가지 큰 이유가 있었다. 왜 3000년 전 하이집트의 고위 권력층은 죽은 자에게 값싼 옷을 입히거나 그들을 조야하게 제조한 관에 넣어 매장하게 했는지, 왜 로마 귀족의 잔류 세력은 교황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으려고 줄을 섰는지, 그리고 왜 마야 족장의 계승자들이 일반 대중(hoi polloi)과 똑같은 식단으로 근근이 살았는지에 대해서도 한 가지 큰 이유가 있었다. 또한 비잔틴 및 이슬람 이집트 초기의 초라한 농장 일꾼과 중세 말 잉글랜드의 목수, 그리고 근대 초기 멕시코의 고용 일꾼이 이전이나 이후의 동료들보다 더 많이 벌고 더 잘 살았는지에도 한 가지 큰 이유가 있었다.그 큰 이유가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공통된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기존 질서의 대대적이고 폭력적 파괴가 그것이다. 역사 기록 전반에 걸쳐 대중 동원 전쟁, 변혁적 혁명, 국가 실패 및 대유행병으로 초래된 불평등의 주기적 압착은 전적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준화로 알려진 모든 사례를 언제나 초라하게 만들어왔다."


2020년대에 이 글을 다시 보니, 두 가지가 생각난다. 첫째로는 전쟁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는 과두재벌 사이에만 고여 있던 자원을 동원하여 자원병, 군수산업 종사자, 운수업 종사자 등 국가의 전쟁 기계에 참여하는 대규모 인구에 분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불평등 감소의 어떠한 효과가 관측될 것인가?

둘째로는 팬데믹. 이 책이 나오고 3년 뒤에 코로나19가 실제로 팬데믹으로 발전했는데.. 방역 역량의 증가, 신속해진 백신 개발 주기, 금융 당국의 역량 강화가 맞물려서 이번 시대의 팬데믹은 엄청난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전 시대에 비해서 다소 경미한 충격을 안겼던 것 같다. 그리고 이때 풀린 어마어마한 유동성이 자산시장으로 공급되어서 불평등을 늘린 것을 생각하면, 샤이델의 전망이 유효함이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

작가와 대화를 시작하세요 (1건)
1 이달에 읽은
무료 콘텐츠의 수

유료구독을 하면 마음껏 편히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하시면 갯수 제한 없이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