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의 흔적을 찾아, 아르메니아 귬리
아르메니아 제2의 도시 귬리를 향하여
이 다음으로 향할 곳은 아르메니아 제2의 도시 귬리. 예레반에서 차타고 126km 정도 떨어져 있으니 대충 서울-청주쯤 되는 거리라고 하겠다. 그러나 제2의 도시라고 하더라도 인구수는 예레반하고 천지차이라서, 100만이 넘는 예레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11-12만 명쯤이다. 소련 시절에는 거의 두 배에 가까운 22만 명이었는데, 1988년에 대지진이 도시를 강타하며 인구가 빠르게 줄어들었고 소련 해체의 혼란기라는 여파까지 겹쳐서 여즉 회복이 안 되고 있는 실정이다.
도시의 이름은 원래 1837년 코카서스를 정복한 러시아 제국이 차르 니콜라이 1세의 황후 이름 알렉산드라를 따서 '알렉산드로폴'로 바꾸었었다. 혁명이 일어나면서 도시 이름은 레닌을 따서 '레니나칸'으로 바뀌었다. 접미사 '-아칸'은 아르메니아어에서 형용사를 만들 때 붙이는 어미인 것 같다. 역시 소련 해체 이후의 많은 지명이 그렇듯, 도시 이름은 민족적, 역사적 유래에 맞게 돌아갔다. 약 150년 만에 귬리는 다시 원래의 이름을 찾았다.
원래는 예레반 역에서 기차를 타고 귬리 역으로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소련 해체, 카라바흐 전쟁으로 아르메니아 철도가 그루지야의 트빌리시, 바투미로 향하는 1개 노선 밖에 남지 않게 되면서 운행 편수 자체가 엄청나게 줄어버렸다. 우리 여행 일정에 맞는 예레반-귬리 행 열차표가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역 인근의 버스 터미널(저번 여행기 사진에서 나왔듯이 터미널이라기엔 너무 초라했던)에서 귬리행 차를 잡아 타야 했다. 그마저도 정식 버스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다. 하긴 인구 100만에서 인구 12만 도시 가는 버스라면 한국으로 치면 어디 청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경북 상주 가는 느낌이긴 하다...
소련 지역에서 자주 쓰는 승합차를 타기로 했다. 마르쉬루트까라는 건데, 그냥 택시 합승이랑 다를 바가 없다. 차 종류는 나름 밴 정도 되는 것에서 다마스나 아니면 진짜 그냥 일반 승용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특정 목적지까지 함께 갈 사람이 일정 머릿수만큼 모이면 그제서야 출발하는 시스템. 아침 일찍 나왔는데, 귬리 가는 사람이 더럽게 안 나타나서 두 세시간을 그냥 하염 없이 기다렸다..
위의 지도에서는 2시간이라고 나오긴 하는데 중간 중간에 작은 마을들에 내렸다 탔다 이러면서 이동해서 시간은 조금 더 걸렸던 것 같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귬리 도착. 정말 옛날 초등학교 다니던 음성군 금왕읍 무극터미널이 생각나는 정겨운 풍경이다..
귬리 버스터미널에서 조금 북쪽으로 걸어 올라가면 슬슬 시내 느낌이 나는 곳이 나온다.
시내 남쪽 끝자락에 있는 귬리의 순교자 성당. 이곳은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름 새 성당인데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성당은 아니고 가톨릭 성당이라고 하는 것 같다.
일단은 예레반-귬리부터 표가 없어서 가지 못했던 참사가 있었으니, 빠르게 기차표를 사러 귬리역부터 먼저 향한다. 시가지가 아담하다보니 남쪽 끝에서 역이 있는 동쪽 끝으로 가더라도 금방 갈 수 있었다.
가는 길에 역시 러시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정겨운 노점상들.. 좌판과 차양을 펼쳐 놓고 아르부스(수박)와 디냐(멜론)를 팔고 있다. 러시아어로 하면 안 되고 아르메니아어로 해야하나? 아무튼 코카서스의 수박과 멜론은 정말 말 그대로 꿀맛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때는 먹지 않았지만...
그렇게 당도한 귬리 기차역. 사실 도시 크기에 비하면 웅장하기 그지 없는 건물이다. 원래 러시아 지역에 철도 교통에 오랫동안 많이 의존해왔기 때문에 도시 인구에 비해서 기차역이 상당히 화려하고 멋진 경우가 많다만, 전성기에도 인구 22만 밖에 안 되던 도시가 이렇게 멋있는 기차역이 왜 있나 조금 의문이 있었다. 나중에 좀 더 알아보니, 귬리 자체가 원래는 국경 너머 터키 카르스를 향해서 가는 아르메니아 철도의 중요 관문이었다. 게다가 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그루지야 트빌리시로 나갈 수 있고, 남쪽으로 가면 예레반을 거쳐 이란으로 향한다. 소련-터키-이란이 마주하는 핵심적인 관문이었던 셈이라 역이 도시 규모에 비해 큰 것이 당연했다. 역시 이곳도 1979년에 아르메니아 건축 양식을 반영해서 지었고 굉장히 멋있다.
그러나 소련 시절의 영화는 천장의 샹들리에로만 남아 있고, 역사 내부에는 가히 고요함과 황량함만 가득했다. 표를 사러 온 승객은 우리 밖에 없었다. 어차피 현재 아르메니아 철도의 유일 노선인 예레반-바투미 노선도 대부분 승객은 예레반에서 탑승할테니까 귬리에서 출발할 사람이 뭐 얼마나 있겠나 싶다.
예레반-트빌리시 / 트빌리시-예레반 / 예레반-바투미 / 바투미-예레반 등등 철도 노선도가 써있는 역판. 아르메니아 철도인데도 러시아어가 당연히 써있는데, 사실 현재 아르메니아 철도를 담당하는 회사 자체가 러시아철도국 RZhD이다.
도저히 철도 운영이 의미가 없는 상황이라, 2008년에 아르메니아 정부가 러시아 철도국에 철도를 위탁 운영 해달라는 양허 각서를 썼고, 현재 러시아 철도국은 남코카서스 철도회사를 지사로 두고 아르메니아 철도를 대리 운영해주고 있다. 기한은 30년인데 물론 이 문제 가지고도 양국 간의 마찰이 꽤나 있는 상황이다. 결국 관건은 아르메니아 철도가 소련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아제르바이잔, 터키, 이란과 다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인데,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를 가지고 30년째 진척된 게 없었다. 아르차흐 공화국이 멸망해버린 지금,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양국 관계가 회복된다면 다시금 귬리가 국제 철도의 허브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이 언제 오려나..
어쨌든 역사의 진로와 제국의 해체에 대한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표는 샀다. 이제 다음날 귬리를 떠나면 그루지야로 향할 수 있다. 해가 쨍쨍한 가운데 드디어 체크인을 하러 이동. 그런데 나름 시내 주택가인데도 도시가 참으로 적막하다.. 한국 시골도 뭐 크게 다르지는 않다만.
그래도 골목골목 애들이 정말 골목놀이, 그러니까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망까지 말타기를 하면서 화기애애한 모습들이 흐뭇했다. 놀다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게 느껴지지 않을까? 요새 한국에도 애들이 저러고 놀려나 싶었다. 어쩄든 숙소를 향하여 계속 진군.
숙소에 체크인을 했는데 정말 마음씨 좋은 다비드라는 아저씨와 그 아내분께서 우리를 맞이해주셨다. 가격도 너무나 저렴하고, 무엇보다 여기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나무 그늘과 탁자가 있어서.. 오늘 밤 음주는 무조건 저기서 해야겠다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우리보고 조금 먹으라고 과일도 내와주셨다.
건물만 보면 뭔가 부실해보이는데, 내부는 아주 깔끔하고 좋았다. 씻고 핸드폰 좀 하면서 뒹굴 거리다가 본격적으로 아르메니아 대지진 탐방 시작.
귬리에는 이렇게 1988년 대지진의 여파에서 복구되지 못한 흔적들이 너무나 많다. 1988년에 지진이 났고,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고 그 와중에 아제르바이잔과 전쟁이 시작되었다. 1990년대 구소련 모든 국가들이 하나같이 어려웠지만, 아르메니아는 승리로 인하여 역설적으로 지정학적으로 고립된 바람에 더욱 어려움이 컸다. 1966년에 있던 타슈켄트 지진은 소련이 전성기였던 관계로 오히려 도시의 현대화를 위한 계기로 삼을 수 있었던 것과 참으로 대조적이다.
진원지 자체는 귬리 인근에 있는 도시 스피탁이었는데, 지진 규모가 너무 커서 귬리도 대타격을 받았다. 2만 5천명에서 5만명의 사람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며, 훨씬 더 많은 수가 이재민이 되었다. 1988년은 체르노빌 사태가 터지고 고르바초프의 경제개혁 실패로 소련이 대혼란을 겪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전역에서 자원봉사자와 구호물품이 도착했다. 탈냉전 분위기의 여파 덕택에 서방에서도 소련이 할 수 없었던 많은 지원을 대신해서 해주었다. 물론 아름다운 이야기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지진 이재민들은 소련 각지에서 임시 이주를 했는데, 타지키스탄의 두샨베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아파트를 먼저 배급하고 차별대우를 한다는 풍문이 돌아 대규모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100주년을 추모하는 학살 기념비다. 이때는 코카서스에 큰 관심이 없었어서 예레반에 있는 아르메니아 학살 50주년 추모 단지를 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
1988년에 건립된, 아르메니아의 저명한 민족 시인 아베티크 이사하캰의 동상. 뒤편에 있는 동상은 소비에트 시절 아르메니아 영화에서 국민 배우의 위상을 얻었다는 '프룬직' 마크르치안의 동상이다. 누군지 알았다면 이때 가서 자세히 찍었을텐데.. 별칭이 프룬직인 이유는 소련군 원수 미하일 프룬제에서 따와서라고 한다.
이쪽은 귬리 독립 광장 인근. 왼쪽 건물은 1990년에 세워졌다는 귬리의 '진보 대학'이라고 한다. 어떤 대학일까...
펄럭이는 아르메니아 국기를 보며 지진의 흔적을 찾아 하염없이 걷기 시작..
시내를 벗어나 아예 교외로 나가는 중. 밑에 아주 조그만 아르메니아 교회 건물이 보인다. 날씨가 무척 더웠지만 이렇게만 보면 참 쨍하고 풍취가 좋은 느낌이다. 실제로 습하지 않아서 그래도 다닐만 했었고..
걷고 또 걷는 와중에, 이쯤이었는지 더 가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밌는 일화가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약주를 한 잔 했는지 얼굴이 벌건 아르메니아 아저씨 하나가 우리를 보더니 손을 흔들며 여어- 인사를 건냈다. 안녕하세요, 하면서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한국인이라고 답했다. 그러더니 대뜸, "나는 장교였어."라고 하는 것 아닌가. 이게 뭔 소리여, 하면서 "아 아르메니아군 장교셨나요?"라고 하니. 씩 웃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아피쪠르 브 싸벳쯔꼬이 아르미이!" (소련군 장교!)
아르메니아 출신의 정통 소련군 장교 출신 아저씨가 약주 한 잔 걸치고 행인에게 추억팔이를 하는 곳 귬리.. 또 가고 싶어진다.
그러다가 충격적인 이름의 옷 가게를 발견.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연방이 어찌 옷가게 이름이란 말이요.
걷다가 정말 우연히 발견한 러시아군 기지. 이때는 여기에 러시아군 군사 기지가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러시아군 제102 군사기지인데, 당연히 원래는 구소련군의 기지였다. 독립 아르메니아에서 여전히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카라바흐 전쟁에 있다. 주변에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으로 포위가 되어버린 아르메니아는 실존적인 안보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국토가 미국의 해상 군사력이 닿을 수 없는 내륙에 위치해 있다는 특성상 러시아군 밖에 안보를 기댈 곳이 없었다. 1996년 러시아군이 기존 군사 기지에 복귀하면서 러시아군의 주둔이 시작되었고, 이후에도 카라바흐 지역 관련하여 평화유지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군 기지는 아르메니아에서 늘 논란의 중심에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치 우리나라 미군들이 범죄를 일으켜 미군 철수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왔듯이, 여기서도 러시아군 병사들이 심각한 범죄를 일으킨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외교적 논란과 기지 철수 여론이 터져 나왔다. 1999년에는 술 취한 병사 두 명이 AK 소총을 갖고 시민 두 명을 죽인 일이 있었고, 2013년에는 기지 주변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지뢰 사고로 사망한 일이 있었다. 무엇보다 큰 사건은 2015년에 발레리 페르먀코프라는 병사가 갑자기 탈영하여 민가에 침입해 일가족 7명을 학살한 '아베티샨 일가족 살해 사건'이었다. 어린 아이와 아기까지 살해한 이 끔찍한 사건은 아르메니아의 반러 감정을 폭발시켰고 대규모 집회가 이어졌다. 러시아 측에서는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책임을 인정하고 페르먀코프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럼에도 귬리 기지는 앞으로도 아르메니아에 계속 남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2018년에 아르메니아에서는 친서방 색깔 혁명인 벨벳 혁명이 있었다. 이때 들어선 니콜 파시냔 정부는 러시아에 조심스럽게 멀어지며 친서방 행보를 보였는데, 이것이 CIS 지역에서 신경이 곤두서 있던 푸틴을 건드렸다. 이 틈을 노리고 아제르바이잔의 일함 알리예프는 2020년에 군사 행동을 감행하여 아르메니아군을 패배시켰는데, 귬리 러시아군 기지는 거의 반응이 없었다. 아르메니아 국경을 넘어서지 않고 아르차흐 공화국(국제법 상 아제르바이잔의 국경 안쪽)에서만 전투가 일어날 경우 러시아군은 개입할 의지가 없어보였다. 결국 2023년에 아제르바이잔이 다시 공세에 내서 아르차흐 공화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물론 카라바흐 바깥 지역으로 가서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이 아예 아르메니아 영토까지 침범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매우 낮다. 이제부터는 아제르바이잔 쪽에 명분도 없다. 다만 1915년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기억이 있는 아르메니아로서는 양국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란과 아르메니아가 우호적이긴 하지만, 이란 자체가 내부 사정이 안정적이지 않은 관계로 이 지역에서 아르메니아의 안보를 실질적으로 보장해줄 주체는 결국에는 러시아 밖에 없다...
가장 좋은 일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수교가 다시 이루어지고 기존의 연결망이 복원되어 아르메니아도 유라시아 경제통합에 참여하는 일일테다. 켜켜이 묵은 감정이 풀릴 수 있을 것인가..
이제로 진짜로 지진 흔적들이 막 나오기 시작한다. 짓다가 완공되지 못한 건물들, 지진으로 박살이 난 건물들. 이 무렵이 정말 혼란했던 게, 바쿠에서 구호 인력을 운송하는 비행기 하나가 레니나칸(귬리) 근처에서 추락해서 77명이나 죽는 사고도 있었다. 정말 어려운 시절, 하드 타임이었다..
무너진 건물에도 간판은 있었다. 사람이 여전히 쓰고 있는 걸까? 그렇게 보이기도..
계속해서 나오는 폐허들.
한국에서도 소도시에 가면 진짜로 이런 수준의 3층 내지 5층 완전 오래된 아파트/빌라들이 있는데 이것도 그런 것 같았다. 지진으로 버려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귬리에서는 이 지진 피해를 다 복구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주택을 보장 못 받는 인구가 있다고 한다. 그런 사정을 고려하면 당연히 여전히 사람이 살 것이다..
놀랍게도 이토록 위험한 지진대에 위치한 아르메니아에는 원자력 발전소도 있다! 메차모르 원자력 발전소는 1969년에 착공하여 1976년에 세워진 것인데, 캅카스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던 중요한 전원이었다. 아마 브레즈네프 시기에 비유럽 지역 공화국에 대한 투자가 크게 늘어난 것과 많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당연히 메차모르 발전소는 1988년에 지진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가동 중지를 했다. 1986년에 체르노빌이 터진 걸 생각하면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지진에 대한 대처법과 안전장치를 갖췄다고 판단된 1995년까지 원전은 가동 중지 상태가 되었는데, 아르메니아의 주요 에너지 공급처인 아제르바이잔이 카라바흐 전쟁으로 봉쇄를 시작했기에 아르메니아의 에너지난은 정말 극심했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 원전을 재가동하면서 아르메니아는 충실한 전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오늘날 소련 시절 만들어둔 누렉 댐이 타지키스탄의 전기를 대부분 책임지는 걸 연상케한다. 누가 연구 안 해주나..
예전에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근교를 걷다가 소떼를 본 것처럼 이번에도 한가하게 소를 모는 아르메니아인 농민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어떻게 저 많은 거대한 동물들을 착착 잘 인솔하시는 것일까. 농민은 위대하다.
이쯤되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원래는 도시 남쪽으로 3-4km 걸어가면(땡볕 40도를 뚫고) 뭔가 아르메니아 지진 기념비가 나올 거라는 정보를 보고 움직였었다. 지도에도 분명 나와 있는데... 근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지도의 그 위치를 가도 없다. 있기는 한 걸까, 지도가 잘못된 걸까, 내가 이상한 건가. 그래도 이럴 때 아니면 귬리의 근교를 언제 이렇게 여유롭게 걸어보겠는가 하면서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지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것 같은 포근한 아파트 단지를 하나 발견. 여기만 둘러보고 돌아가기로 했다.
이게 그 추모비가 아닌가 생각해봤는데 알 수는 없었다. 왼쪽에는 젊은 아르메니아군 전몰자를 추모하는 추모비가 있었다. 아마 카라바흐 분쟁 과정에서 돌아가신 분 아니었을까 싶었다.
언제나 조선의 아름다운 정경을 떠올리게 해주는, 한가운데 놀이터가 있는 아파트 단지. 살으리 살으리렷다 아파트에서 살으리렷다. 어디 한 곳 들어가서 쉴 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 있을 리 없지.. 일단 귬리 외곽의 다음 주요 관광지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