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의 세계사 (1)

패권의 세계사 (1)

몽골 세계제국에서 대영제국까지

임명묵

최초의 세계체제: 몽골제국

세계패권을 지닌 세계제국은 다른 국가들에 대한 지배적 우위가 세계적인 규모로 전개되는 나라를 뜻한다. 그 지배적 우위의 실체는 무엇일까? 월러스틴과 이후의 세계체제론자들은 일국의 경계를 넘어서는 공간적인 분업 구조를 통해 기능하는 세계 경제와 그 세계 경제를 관리하는 세계제국을 패권의 요체로 보았다. 이것은 패권 국가의 우위가 GDP 등으로 계상되는 추상적인 숫자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물리적 공간 위의 사람과 자원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를 통해서만 보증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세계제국으로서 미국은 단순히 혁신 기업이 많아서, 인구 구조가 건강해서, 북아메리카에 자원이 많아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라시아, 대양주에 걸쳐 사람, 자원, 기술의 전방위적 이동을 자신의 뜻대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성립된다.

이러한 세계제국이 등장한 것은 인류 역사를 보면 상대적으로 최근의 일이다. 물론 고대 문명이 등장한 이래로 각 문명 중심부는 광범위한 지역체제를 구축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은 일찍부터 멀리 영국 제도부터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장거리 교역망을 관장했다. 황하와 장강 유역에서 성장한 중화문명은 제국으로 거듭나며 고비사막 북쪽의 초원지대와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도시들, 남중국해와 그 너머의 바다까지 물산이 원활히 교환되도록 매개해주었다. 페르시아 제국, 로마 제국, 아랍 칼리프 제국, 중국의 여러 왕조들은 문명의 촉수를 아직 국가 사회에 포섭되지 않은 변경의 미개척지로 뻗쳤다. 카이로,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과 같은 도시는 각각의 제국이 건설한 지역체제의 중심부였다.

그러나 지역체제는 결코 단일 세계체제로 확장되지 못했다(지역체제에 속한 이들이 자신들의 지역은 그 자체로 ‘천하’와 동의어라고 인식했음에도). 제국은 야만족을 다스리지 못해 굴복하고는 했으며, 다른 지역체제의 중심부까지 도달하기에는 조직적, 기술적 역량이 부족했다. 과잉팽창한 제국이 야만족과 다른 제국과의 경쟁에 자원을 낭비하며 무너지고 지역체제에 거대한 혼란이 찾아오는 것은 문명의 역사에서 늘 찾아오는 주기적 사건이었다. 결정적으로 지역체제를 다스리는 제국들은 이미 자신들의 권력이 뻗치는 공간을 ‘잘 보호되는 제국의 강역’으로 인지하고 있었고, 모든 물산을 그 강역에서 거둘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다른 지역체제를 무리하게 자신의 지역체제 산하에 두려는 의욕을 갖지 않았다. 그러한 능력과 의욕을 지닌 몽골제국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바다에서 바다까지’ 유라시아의 대부분 문명 중심지를 정복한 몽골제국은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체제를 실현한 최초의 제국이었다. 대칸의 위엄이 미치는 영역에서 다양한 자원이 추출되어 대도, 사라이, 타브리즈, 알말리크와 같은 제국의 정치적 중심지로 향했다. 제국은 교역을 수행하는 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경비 병력과 서로 다른 상품의 가치를 표준화하는 화폐 시스템도 갖추고 있었다. 사람, 자원, 기술의 교류가 작동하는 세계시장, 그 시장의 기초를 떠받치는 세계제국이 진정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만주부터 러시아까지 뻗어있는 초원길과 신장에서 아나톨리아까지 오아시스 도시를 따라 뻗어있는 비단길이었다. 이 두 길은 상인이 챙겨온 화물과 장군이 이끄는 병사들이 신속하게 오갈 수 있는 물리적 기초로서, 몽골제국 체제에 포괄된 다양한 지역(중심부, 반주변부, 주변부) 간 호환될 수 있는 교역과 행정을 가능하게 하는 제국의 척추였다.

해양패권의 등장

하지만 몽골제국의 세계체제는 채 100년도 가지 못했다. 유라시아 전역을 관장하는 안정적 질서를 구축하기도 전에 유목민들은 분열되었고, 기후변화와 전염병의 확산은 제국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몽골제국의 폐허 위에서 오스만 제국, 사파비 제국, 무굴 제국, 러시아 제국, 명 제국과 만주 제국이 등장하여 유라시아는 다시 지역체제로 분할되었다. 그러나 한 번 작동하기 시작한 세계체제는 기술 교류를 촉진하고 지리적 상상력을 더하며, 권력과 부를 증대시키고자 하는 인간 욕망에도 불을 당겼다. 그 불이 가장 거세게 타오른 지역은 유라시아 세계체제의 변방이라고 여겨져 온 서유럽이었다. 몽골제국의 세계체제가 촉진한 기술 교환은 서유럽에 나침반, 화약, 인쇄술이라는 발명품을 전달해주었다. 이 발명품들의 기술 수준과 활용법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서유럽 국가들은 원양항해술과 화약 병기를 기반으로 대륙 반대편의 무역 거점까지 도달하여 인도양 세계의 막대한 부에 접속할 수 있었고, 아메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지역체제를 서유럽의 지역체제에 강제로 통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인류의 부가 집적된 중앙아시아의 비단길과 인도양의 바닷길과 견줄 수 있는 새로운 체제인 대서양 교환체제가 등장했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서유럽의 각종 항구 도시는 동양의 비단과 향신료, 아프리카의 노예, 아메리카의 담배와 카리브의 설탕이 집적되는 세계체제의 허브로 변모해나갔다. 에스파냐 제국이 안데스의 포토시에서 추출한 은이 유라시아에 쏟아져 들어오며 지역체제를 매개하는 상품 거래도 크게 활성화되었다. 대서양 무역은 점차 안정성을 확보해나가고 수익성을 개선했고, 서유럽인들은 대륙을 넘나드는 공간적 분업을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북미는 목재와 면화를 공급하며 영국이 인구증가와 도시화를 통해 겪고 있는 생태 압박을 완화해주었고, 카리브해의 설탕과 브라질의 커피, 중국과 인도의 차는 노동자들의 근력과 인지력을 더욱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아프리카는 백인들이 정착하기 어려운 아열대 지방의 토지를 경작할 수 있게 해주는 흑인 노예 노동력의 원천이라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공간적 분업은 상인을 가장 진취적인 세력이 되게 자극했고, 상인들은 해상무역의 리스크를 분산시키기 위해 주식회사와 보험이라는 상업적 제도를 발전시키며 근대 세계체제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나갔다. 한편 신장되어 가는 상인들의 힘은 토지에 기반한 기존의 정치 권력과 점차 충돌해 나갔는데, 서유럽에서는 1-2세기의 진통을 겪으며 영토국가의 강제력과 상인들의 자본력을 조화하는 국민 국가 시스템이 자리 잡으며 문제를 해결했다. 아프리카의 노예무역과 아메리카의 토지침탈과 유럽의 제도 발전이 하나로 엮여가며 유라시아 체제를 압도하는 힘을 축적한 것이다.

영국의 세계체제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이 되었을 때, 세계제국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던 영국은 이미 생산요소의 공간적 분업을 세계적으로 수행하고, 국제적인 자본과 상품 이동의 규칙을 쓸 수 있는 세계체제의 패권국이 되었다. 영국의 세계체제는 단순히 물자와 사람의 이동을 촉진하는 데서 그친 몽골제국의 체제보다 몇 배는 더 진일보하고 안정적인 제도적 기반과 군사적, 기술적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단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여전히 유라시아의 핵심적인 지역체제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국으로 대표되는 일부 지역체제는 여전히 상품, 교역, 자본에 대한 자신들의 정치적 통제를 놓지 않고 있었고, 세계체제로의 합류 정도를 자국 상황에 맞게 선택적으로 조정할 수 있었다. 주요 상품 공급처와 수익성 높은 시장을 경쟁적으로 확보해야 했던 유럽 국가들은 이러한 지역체제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무력을 통해 지역체제의 수장들을 굴복시켜 대서양이 중심이 되는 세계체제에 통합하고자 했다. 여기에 문화적 우월감과 사명의식이 더해져, 폭력적인 형태로 세계 전역을 하나의 교환 시스템으로 조직하는 거대한 파도가 일어났고, 후대인들은 그것을 제국주의라고 불렀다. 인도,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 중국의 청제국,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베트남의 대남제국 등은 관세 주권을 잃고 산업화된 병기로 무장한 군대를 앞세운 유럽 상인들에 의해 자국 시장의 전통적 규칙이 해체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제국주의가 자행한 막대한 폭력이 지나간 이후, 세계 각지에 산업혁명의 촉수가 뻗어나가면서 세계 대분업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세계 각 지역 간의 상호 연관이 너무나도 조밀해져서 어떠한 영역이 세계체제에서 이탈하면 세계 전체적인 공급망 충격이 찾아올 수 있게 될 정도였다(물론 그러한 일시적 공급망 불안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다른 대체 공간을 찾는 것도 세계체제의 또 다른 작동 방식 중 하나였지만). 동남아시아를 예로 들면, 말레이시아는 고무와 주석을 담당했고, 그 노동력은 중국인과 인도인 노동자가 제공했으며, 그들을 먹일 식량은 새롭게 개간될 미얀마 이라와디 삼각주에서 생산되었다. 이 물산들은 대영제국의 거점인 싱가포르로 모여 가공 처리되고, 수에즈 운하를 향해 유럽으로 향하거나, 홍콩과 요코하마로 가서 동아시아 시장으로 향하기도 했다. 그들이 입을 옷은 인도에서 생산된 면화를 영국에서 가공하여 만들어진 것이었고, 훗날에는 조선의 면화를 일본이 가공하여 만든 옷과 경쟁하게 될 것이었다. 런던, 파리, 뉴욕은 물론이고,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가 되었든, 식민지 조선의 경성이 되었든, 제국주의 권력의 중심에 가까울수록, 교육을 받고 상공업에 종사하는 상류층의 저택에서 인도, 페르시아, 멕시코,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미국 등 각지에서 생산된 다양한 가구와 잡화가 갈수록 늘어만 갔다.

다시 강조하자면, 역사 속의 여러 광범위한 교환 시스템이 늘 그랬듯 세계시장과 거기에 공급할 상품을 생산하는 세계대분업은 압도적 무력을 갖춘 세계제국이라는 판 위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몽골제국의 유목 기병을 대신한 영국의 군사적 근간은 강력한 해상력이었다. 세계 경제의 규모가 팽창하고, 상품이 더 많이, 더 멀리 이동하면서 육상 교역의 비중보다 해상 교역의 비중이 세계시장에서 더욱 중요해지고 있었다. 특히 지중해에서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인도양 연안을 따라 말라카 해협을 넘어 동아시아로 이어지는 항로는 유라시아의 교역 시스템의 중추라고 할만했다. 이 띠를 따라 확보된 영국의 영역, 몰타, 이집트, 예멘, 인도, 말레이, 홍콩을 거점으로 활약하는 영국 해군은 세계시장의 물자 이동이 타국 정부, 혹은 해적과 같은 민간 세력에 방해되지 않게 보증해주는 최초의 세계 경찰이었다. 물론 영국의 힘은 진정으로 전지구적이었기 때문에, 지중해-인도양-남중국해라는 띠 바깥을 둘러싼 남아프리카, 호주, 캐나다와 같은 정착민 식민지도 다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영국의 세계패권은 다른 국가들을 향해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구사했다. 유럽 국가들은 영국과 종종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긴 했지만, 이같은 영국의 교역로 보호 정책 덕분에 명백한 이득을 얻고 있었으며, 제국주의 세력과 협력하여 세계시장에서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비서구의 상인자본과 근대화 엘리트들도 마찬가지였다. 종종 자국 주권을 수호하고자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등장할 경우, 영국의 함포는 해안지대를 우선적으로 초토화시킬 수 있었고, 증기선은 강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내륙 물류망을 마비시키고 내륙 도시까지 얼마든지 위협할 수 있었다. 19세기 말에 영국이 완성한 전세계적 해상 패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 경제 운영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유라시아 지정학의 등장: 그레이트 게임

그러나 영국이 세계시장을 운영하는 세계제국이 되었다 하더라도, 전세계 모든 육지를 지배할 수는 없었다. 영국에 도전할 수 있는 다른 국가들도 영국 자본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시장에 참여했지만, 이들 역시 영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율적인 자신들만의 세력권을 구축하고자 했다. 서아프리카 일대와 인도차이나에 식민 제국을 건설한 프랑스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제국주의 열강은 세계 각지를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통제력이 미치는 세력권으로 분할하고, 자국 세력권을 향한 타국 자본의 침입을 막으며 자국 중심부의 자본과 기술 수준을 고도화시키는 경쟁에 돌입했다. 여전히 세계시장과 세계대분업 체제가 영국 주도 하에 문제없이 운영되고 있었지만, 각 공간을 나누는 정치적 장벽은 각국의 민족주의 정서가 발호하면서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이후 유럽에서는 늘 일상이었던 강대국 경쟁은 교통과 통신의 발전으로 그 공간적 범위가 세계 전체로 확대되었다. 화석연료의 힘은 병력을 대륙 이편에서 저편으로 신속하게 실어날랐고, 전기화된 통신 시스템은 신속한 정보 수집과 의사결정의 하달을 가능하게 했다. 규모와 범위가 확장된 지정학적 경쟁 국면은 세계제국으로서 영국의 지위에 압박을 가했고, 런던은 자연스럽게 어떤 국가를 경쟁자로 삼고 어떤 국가를 협력과 포섭의 대상으로 삼을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의 판단에서 영국의 세계패권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국가는 아직도 봉건제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한, 낙후한 러시아 제국이었다.

러시아는 19세기 말부터 프랑스 자본의 투자를 받아 빠르게 산업화에 나서고 있었지만, 사회의 현대화 수준은 한참 낮았고, 국토의 대부분이 개발되지 않은채 방치된 국가였다. 국민 대부분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농민들이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개혁 이래로 근대적 국가 조직과 군사력의 발전을 느리지만 꾸준히 따라가고 있었고, 러시아의 국가 중심지는 영국의 해군력이 닿을 수 없는 내륙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동유럽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태평양의 연해주까지 뻗어 있는 러시아의 국토는 지중해-인도양-남중국해라는 대영제국의 중추 어디든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인 기지로 느껴졌다. 자국의 발전 수준이 여전히 낮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정부는 대영제국을 위협하겠다는 진지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으나, 영국은 광대한 러시아 땅의 인구와 자원이 근대적 기술로 조직되었을 때 발생할 도전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 그 결과 만주의 평원과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히말라야의 까마득한 산봉우리와 흑해의 해변을 둘러싼 전방위적 지정학적 경쟁이 펼쳐졌는데, 영국인들은 이를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으로 칭했다.

그레이트 게임에 대처하는 과정은 영국인들로 하여금 유라시아 공간을 인식하는 새로운 전략적 사고의 틀을 계발하게 만들었다. 지리학자 핼퍼드 매킨더는 유라시아를 세계의 권력과 부가 집중된 ‘세계섬’으로 인식했다. 이 세계섬은 해양력의 영향을 받는 주변지대(림랜드)와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하여 바다와 격절되어 있는 심장지대(하트랜드)로 구분되는데, 영국은 해양력을 바탕으로 주변지대에 대한 절대적 통제권을 구축하고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패권국이었다. 본래 심장지대는 해상로를 통한 자원의 원활한 이동이 쉽지 않고, 내륙의 초원과 사막은 대규모 인구를 부양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분열된 유목민의 끝없는 항쟁으로 정치적 안정도 갖추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나 매킨더는 서구화 개혁을 통해 일신한 러시아가 심장지대를 정치적으로 대부분 통일했고, 철도가 바다를 가로지르는 화물선과 같은 역할을 하며 심장지대의 막대한 자원이 깨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러시아의 심장지대 통합-개발 프로젝트가 완료되었을 때, 블라디보스토크와 타슈켄트, 오데사 어디에서든 러시아군이 남하를 시작할 때 영국의 자랑인 해상 전력은 무력화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레이트 게임 내내 영국의 대응 전략은 심장지대와 주변지대 사이에 위치한 분쇄지대의 국가들을 후원하여 그들의 육상력으로 러시아를 막아내는 것이었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해체를 최대한 막아 서쪽에서 러시아에 맞서는 방파제를 보수했고, 만주로 향하는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대리전을 수행하게 하여 동쪽에서 남하하는 러시아를 저지시켰다. 특히 후자의 전쟁은 봉건적 유산과 현대적 발전 사이에 막대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던 러시아 국가 체제 자체를 약화시켜서, 1905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정까지 위협하는 혁명적 소요를 만들어냈다. 이 혁명적 소요는 러시아의 통치 하에 있는 심장지대의 각 민족들도 민족 의식을 각성하여 러시아 제국 질서 내부에서부터 심대한 도전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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