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의 세계사 (2)

패권의 세계사 (2)

독일과 파시즘의 도전

임명묵

주변지대의 부상과 세계분할

하지만 영국이 러시아의 도전에 집중하는 동안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났다. 프랑스를 누르고 유럽 대륙 최강의 육상 강국으로 등극한 독일이었다. 낙후한 러시아가 세계체제에서 자본을 수입하고 산업 기술을 자급자족할 수 없는 반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던 반면, 독일은 국가 주도의 교육 시스템과 공격적 산업 투자를 바탕으로 세계체제에서 지위를 빠르게 올렸다. 금융과 물류라는 세계체제 중심부가 수행하는 기능은 여전히 대영제국의 것이었지만, 독일은 잠재력이 높은 신기술과 새로운 사회 조직 방식을 실험하며 세계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워갔다. 비스마르크의 소극적 정책이 끝나고, 빌헬름 2세가 더 공격적인 세계정치(Weltpolitik)를 추구하자 독일은 단순히 유럽 대륙에서의 위협을 넘어 세계제국으로서 대영제국의 지위까지 위협했다. 독일 제국은 영국과 건함경쟁에 나서며 해상 패권을 추구함과 동시에, 유라시아 주변지대를 육상으로 연결해 영국의 해상 연결에 침입하고자 했다. 독일은 베를린에서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바그다드로 이어지는 철도 건설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만약에 이 물류망이 완성되었다면 영국의 세계체제를 우회하는, 독일이 주축이 되는 지역체제가 탄생할 수도 있었다. 그 지역체제가 영국의 세계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독일식 세계체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1907년 영국과 러시아는 유라시아에서 세력권을 분할하는 영러협정을 맺었는데, 이는 독일을 막기 위한 심장지대와 주변지대의 연합을 의미했다.

세계적인 지정학 경쟁과 유럽 대륙의 패권 경쟁이 맞물려 발생한 제1차세계대전은 그럼에도 영국 세계패권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는 영국과 보조를 맞추는 육상 세력으로서 젊은이들의 피를 받치며 독일군을 견뎌냈다. 러시아는 독일을 당해내지 못해 종국적으로는 국가가 붕괴했지만, 그래도 독일군의 전력을 충분히 분산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독일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이 소모전 양상으로 흘러가자, 세계체제를 쥐고 있는 영국이 지구전에서 더 유리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독일 해군을 분쇄한 영국군은 독일에 해상봉쇄를 가했고, 유럽 바깥 세계와 자원공급망을 확보하지 못한 독일은 전시 내내 물자 부족으로 고통을 겪었다. 여기에 영국 패권을 이어받을 후계 국가인 미국이 문화적, 체제적 친연성을 이유로 가세하여 북미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자원을 서부전선에 쏟아붓자 독일은 더 버텨낼 수 없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은 여러 의미에서 세계제국으로 영국의 지위에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혔다. 영국식 산업혁명을 학습하고, 더 효과적인 적응 방식을 창안한 국가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은 광대한 식민지를 보유하여 자원을 동원하는 것만큼이나, 본국에서 후방의 인적, 물적 자원을 끝까지 쥐어짜 전쟁 기계로 집어넣을 수 있는 조직 역량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현대적 총력전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각종 자원(식량, 광물, 에너지)을 얻을 수 있는 ‘광역권’과 국가 시스템을 총력전에 적합하게 개조하는 고도근대(하이모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경쟁이 시작될 것은 자명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우크라이나의 곡물과 아제르바이잔의 석유를 광역권으로 통합할 야심을 보였던 독일, 만주를 근거지로 하여 중국 대륙 전체와 동남아시아까지 망라하는 광역권에 총력전을 위한 신질서를 부과하고자 했던 일본이 대표적이었다. 물론 내전의 폐허를 수습하고 유라시아 심장지대를 진정으로 하나의 유기적 경제 공간으로 조직하고자 했던 스탈린주의 소련도 이 경쟁에 참여했다.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이탈리아도 리비아에서 에티오피아를 잇는 아프리카 제국을 건설하고, 동지중해를 자신들의 광역권으로 삼고자 하는 야심을 보였다. 세계체제와 세계시장이 분열되고 각지의 광역권, 즉 지역체제가 경합하는 블록 질서가 등장하고 있었다.

자유주의 세계이념과 파시즘의 도전

세계패권과 세계시장의 균열에는 ‘세계이념’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자유주의의 퇴조도 큰 역할을 했다. 18세기 대서양 세계에서 등장한 자유주의는 상인들의 이념으로서, 세계의 중심을 개인에 두고 개인의 활동을 향한 공동체의 개입을 억제하는 권리론을 핵심으로 했다. 헌법과 대의제에 입각한 정부를 통해 권리를 인정받은 개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만개시키며 상업 활동을 이어갔다. 자유무역을 통해 순환하는 부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과학기술은 유능한 개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이야말로 세계 전체 부의 증대, 진보와 개선의 근간임을 입증해주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자유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반대에 직면했다. 서구 사회와 비서구 사회를 막론하고 자유주의가 전통적인 공동체를 해체하며, 도덕적 타락을 부추긴다는 비난이 등장했다. 근대로의 전환이 강제적인 형태로,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비서구 사회에서는 각종 농민 봉기와 신흥 종교 운동의 형태로 터져나오며 최초의 반세계화 운동을 형성했다. 오스만 제국의 반아르메니아 폭동, 이란의 바비교, 중국의 태평천국 반란, 수단의 마흐디 반란, 조선의 동학 봉기까지, 이윤과 신용으로 움직이는 도시 사회의 ‘얕은 관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서구 문명이 자신들의 삶을 유린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도덕 공동체로 작동하는 향촌 사회의 규칙을 복원하고, 서구 제국주의에 협력하여 국가를 배신한 계몽 엘리트를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간기가 되자, 개인주의와 법적 규약으로 움직이는 근대 이익사회(게젤샤프트)에 대해 느끼는 불만이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이루고 있다고 여겨진 서구 사회에서도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 자본가들은 전쟁과 군수 생산에 참여하여 힘을 확대한 노동계급과의 정치적 합의를 이루는 것을 계속 실패하고 있었고, 세계시장은 전후 공급 과잉의 충격을 조정하지 못해 대공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도시 사회에 내던져졌다는 스트레스에 물질적 곤경이 가중되자, 현재 시스템에서 이익을 얻고 있다고 간주되는 이들을 향한 분노가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자본가와 금융가들이 민족의 정신에서 유리되어 파렴치하게 사익을 축적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공산주의자들을 교회 도덕을 파괴할 소련의 앞잡이라고 적대했다. 토지 공동체에서 유리되어, 도시 공간에서 성공적인 개인으로 살아온 역사가 긴 ‘최초의 근대인’ 유대인들은 자본가와 공산주의자 모두가 되어 민족을 파괴할 수 있는 반역자들이었다. 개인과 상인에 근거한 자유주의는 노동자와 빈농을 세계시장의 변동성에 어떤 완충장치도 없이 노출시켜 자본의 논리에 따라 언제든지 빈곤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 있는 비윤리적 이념이었다. 따라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반공동체 사상에 맞서는 반대자들은 각 사회 계층이 민족이라는 ‘자연적 공동체’로 뭉치고, 각자의 직분을 다할 수 있도록 결속을 장려하는 파시즘을 요구했다. 파시즘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했고, 일본 또한 파시즘과 유사한 여러 사상을 발전시키며 메이지 자유주의를 폐기하기 시작했다.

비서구 사회의 농민 봉기는 근대의 물적 진보를 거부하고 향촌의 질서를 복원하고자 했기에 제국주의의 기관총에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서 유행한 파시즘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물적 근대화를 축적한 국가들이 새로운 기술적 진보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며 자유주의에 맞서고자 했다는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새로운 모델은 역설적으로 차세대 자유주의 세계제국인 미국에 있었다. 뉴욕 금융가, 유대인,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반감으로 뭉친 중서부의 노동자들과, 그들을 대량생산 체제라는 첨단 기술로 조직하여 ‘도덕 경제’를 구현하고자 했던 헨리 포드가 그 주인공이었다. 나치는 북미 원주민을 ‘청소’하고 흑인을 노예화시키며 북미에 백인들의 ‘생활권’을 구축한 미국에 커다란 영감을 받았으며, 포드식 대량생산 체제를 독일의 민족 윤리에 적합한 경제 모델로 연구했다. 일본 또한 사회 전방위적인 국가 관리, 제국의 각 지역을 독자적인 경제 중심지로 개발하고자 ‘종합기술주의’를 추구했다. 총력전을 경험하며 신장된 국가의 관리 기술은 유럽이나 동아시아와 같은 광역권을 하나의 단위로 조직할 수 있게 해줄 것이었고, 그 결과 자동차와 같은 첨단 소비재부터 전투기와 전차 같은 현대전의 총아를 영국이 통제하고 있는 자원 공급망 바깥에서도 찍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광역권(지역체제)을 작동시키는 새로운 윤리는 구성원 모두가 민족과 제국을 위해 봉사하며 공동체 윤리에 충성하는 결속의 이념이 될 것이었다.

세계제국인 영국과 차세대 초강대국인 미국의 전략가들이 자연스럽게 이들이 자유주의 패권에 제기하는 지정학적 위협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니콜라스 스파이크먼은 매킨더가 심장지대로 대표되는 러시아의 위협을 지나치게 과장하였고, 오히려 해양세력의 자유주의 패권에 대한 진정한 도전은 유라시아 주변지대에서 온다고 파악하였다. 심장지대는 자체적인 중심을 형성하기에는 철도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너무 광대한 미개척지였고, 심장지대에서 주변지대를 위협하는 일은 지리적 장벽이라는 커다란 제약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스파이크먼은 대신에 심장지대와 해안지대 사이에 위치한 주변지대, 혹은 분쇄지대의 국가들을 핵심 위협으로 상정했는데, 이들이 심장지대의 막대한 자원을 추출-동원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해상 무역에도 쉽게 접근할 수 있어 동원과 교역을 통해 순식간에 제국으로 부상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파이크먼은 러시아를 장악하여 유럽 광역권을 구축하고자 한 독일과, 중국을 손에 넣고 동아시아 광역권(미래의 대동아공영권)을 설계하고 있는 일본을 미국이 상대해야 할 주요 경쟁자로 설정했다. 이들을 통제하고 굴복시키기 위해, 지정학적으로 영국의 라이벌인 심장지대 제국이자,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에서 위협하고자 했던 공산주의 혁명 국가인 소련과 동맹을 맺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미국 패권의 시대

서쪽의 독일과 동쪽의 일본이라는 두 유라시아 주변지대 제국은 파멸적인 제2차세계대전으로 몰락했다. 하지만 세계대전은 동시에 영국의 세계패권에도 사형 선고를 내렸다. 독일과의 전쟁은 영국 본토의 자원을 끝없이 소모시켰고, 아시아에서 일본의 활약은 영국이 대륙 건너편의 식민지를 더는 방어할 수 없음을 만천하에 알렸다. 세계대전에 참여하며 근대적 관료제와 군 조직의 작동 원리를 배운 식민지 엘리트들은 독립을 요구하며 대영제국의 해체를 추진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소련은 주변지대 제국을 분할하며 자신의 마땅한 몫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유럽에서 엘베강 이동의 동유럽 전체를 점령하며 주변지대 문턱까지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았고, 태평양에서는 쿠릴 열도와 만주의 항구를 장악하여 러일전쟁 패전의 수치를 갚았다. 주변지대를 향한 소련의 팽창은 패전국이 아닌 중동의 중립국들에게도 위협으로 다가왔다. 소련은 튀르키예에 흑해의 출로가 되어주는 보스포러스 해협의 관리 권한을 요구하고, 이란에서는 북서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분리시켜 영향권을 확대하고자 했다.

물론 소련은 자신이 세계체제와 분리된 독자적인 심장지대 지역체제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급자족의 광역권을 구축하고자 한 주변지대 제국이 붕괴되자, 해양 패권 세력은 다시금 세계체제를 복구하고자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주인이 이제는 영국이 아니었을 뿐이다. 영국 패권을 인수하여 훨씬 더 견고한 세계체제로 재편성한 미국이 진정한 세계제국으로 부상했다.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두 대양의 보호를 받으며, 유라시아 제국들 간의 처절한 소모전에 국력을 낭비하지 않은 미국은 북미 대륙 전체의 자원을 동원하고, 자본과 기술 면에서 압도적인 정상에 올랐다. 소련은 자신의 안보를 보장 받을 수 있는 완충지대를 원함과 동시에, 미국이 복원할 세계체제에 원활히 합류하기를 원했다. 소련은 자신들의 세력권에서 안보를 다지고, 세계체제에서 평화공존하며 그들의 대항 이념인 사회주의를 실험하다 보면, 사회주의가 자유주의를 대체하고 진정한 세계이념의 자리를 거머쥘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소련에 우호적이었던 루스벨트 행정부가 트루먼 행정부로 변하자, 미국은 소련의 모순적 목표를 충족시켜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세계체제를 설계할 사람들은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재계, 외교정책을 담당하는 국무부, 전세계적인 군사력을 휘두르는 펜타곤을 오가는 일군의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은 인류가 제1차세계대전이라는 재난을 겪고도 또 다시 참혹한 전쟁을 벌인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을 지녔다. 그들이 보기에 제2차세계대전은 1920-30년대에 세계체제의 회복을 선택하지 않고, 각지의 광역권, 혹은 블록으로 나뉘기를 선택한 반란자들 때문에 벌어졌다. 따라서 그들이 그린 전후의 세계상은 미국의 절대적인 경제 우위를 기반으로, 세계의 각 지역이 비교우위에 따라 생산을 특화하고 적극적으로 교역에 나서는, ‘안정적 세계 대분업’의 부활을 특징으로 했다. 세계 무역의 근간은 미국이 가치를 보증하는 달러가 될 것이었고, GATT는 각국의 무역 분쟁을 조정할 것이었고, IMF와 세계은행은 올바른 경제정책을 조언하여 더 빠른 번영을 가져올 국제 공공재가 될 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시장을 거부하는 이들이 쌓은 장벽, 광역권을 무너뜨려야 했다. 일단 가장 악독한 반란자들인 독일과 일본의 광역권은 조각조각 해체되어야 마땅했다. 물론 이 두 국가에 모든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민족자결이 세계적인 대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권으로 식민지를 통제하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유럽 제국주의도 척결해야 할 블록화이자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는 적폐였다. 이 유럽 제국들도 세계대전으로 국토가 완전히 파괴된 상황에서 식민지를 경영할 역량도 고갈되고 있었고, 미국의 원조에 의지해야 했기 때문에 비교적 상대하기 간편했다. 전후 세계체제의 설계자들이 마주한 가장 큰 적은 모스크바의 권위에 복종하는 각지의 공산당 조직을 통솔하는 소비에트 제국이 될 것임이 자명했다. 미국이 소련을 동등한 협상 대상이 아닌 세계체제를 향한 위협으로 간주하자, 소련은 자신의 제국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했고, 그 결과로 냉전이 시작되었다.

냉전 지정학의 공식은 과거 영국의 승리 공식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냉전 전략의 설계자인 조지 케넌은 소련 체제의 취약함을 간파하고 있었다. 케넌은 소련이 또 다른 기술과 무역 중심지인 주변지대로 팽창하지 못하도록 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의 장차적인 팽창 방향은 세 곳이었다. 미국과 대서양으로 연결되어 있고 전통적인 자본과 기술 중심지였던 서유럽, 태평양과 연결되어 있으며, 신흥 중심지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동아시아, 그리고 전후 현대 경제의 근간으로 자리 잡을 석유가 대량으로 매장된 중동이다. 미국은 유럽에서 독일의 분단을 용인하며 독일 인구와 경제의 다수를 점하는 서독을 끌어왔고, 서유럽 국가 사이의 구원(舊怨)을 억제하며 소련에 맞서는 군사 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만들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을 상실하며 뼈아픈 패배를 겪었지만,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남한을 방어해내고, 일본, 남한, 대만을 공산주의의 태평양 팽창을 막는 방벽으로 삼는 데 성공했다. 중동에서는 소련과 국경을 맞닿은 튀르키예와 이란의 현대화 정권을 지원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정을 보호하며 석유가 세계시장에 안정적으로 흐를 수 있도록 보장했다. 수에즈와 말라카를 잇는 대영제국의 중추와 마찬가지로, 냉전기 형성된 미국의 봉쇄틀은 오늘날에도 자유주의 패권의 기초 전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소련은 다양한 방식으로 봉쇄를 해결하고자 했는데, 가장 용이한 방법은 서독과 일본이라는 기술 중심지와 교역하며 심장지대의 경제적 고도화를 추진하는 길에 있었다. 그러나 패전국으로서 서독과 일본이 자율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기에, 이 두 국가의 자본이 소련 시장과 원자재를 몹시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제재 압박으로 교역은 단절되기 일쑤였다. 미국이 마셜플랜을 가동하며 서유럽의 전후 부흥을 이끌자, 반나치 투쟁의 명성과 전후 혼란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있던 공산당의 기세는 순식간에 꺾였다. 대규모 산업 노동자가 존재하는 서유럽은 역설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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