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권의 세계사 (3)
냉전과 탈식민의 소용돌이
냉전과 탈식민의 소용돌이
하지만 곧 두 번째 길이 열리고 있었다. 유럽 제국주의가 썰물처럼 물러나기 시작하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 신생 독립국이 등장하고 있었다. 소련은 반제국주의라는 공통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들과 우호적 무역 관계를 구축하고자 했고, 소련의 근대화 경험을 수출하며 소련식 개발이 미국의 자유주의 개발을 향한 유의미한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선전했다.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모인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국들은 미국과 소련의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제3세계 노선을 외치고 있었지만, 그들이 심정적으로 소련에 이끌리고 있음은 명백했다. 19세기 영국의 자유주의는 전함의 대포로 자유무역을 강요했고, 농민 봉기와 민족 운동을 총칼로 진압했으며, 전통적인 생산 양식은 기계에서 무한히 생산되는 유럽산 상품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제 그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면적인 근대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는 공감했으나, 서구의 앞잡이들과 매판 상인이 주도하는 사익 추구형 근대화는 거부하고 있었다. 대신에 ‘계몽된 정부’가 국민을 선도하여 자주적 발전을 이뤄야 한다는 ‘반둥 정신’이 확산되었고, 소련은 반둥의 정신을 상찬하며 신생국들에 접근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심지어 미국의 독점적 세력권인 라틴아메리카에도 친소 성향 국가가 등장한다는 것은 세계체제의 운영자들이 보기에는 자유로운 무역을 막는 도전이었다. 독립 운동의 외피를 쓴 공산주의자들의 부상을 막기 위하여 미국 당국자들은 경멸의 대상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자들과도 때로는 손을 잡으며 지구적인 반공 운동을 조직했다. 워싱턴은 영국, 프랑스, 서독, 일본 등 소련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앞선 세계체제의 중심부를 동원해서 신생 독립국들의 개발 프로젝트를 후원했고, 미국의 사회과학자들은 연방정부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으며 근대화를 위한 올바른 ‘처방전’을 제시하라는 요구에 복무했다. 소련, 중국, 쿠바 등지에 연계된 민족해방운동가들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력의 주기적 사용도 당연히 필요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다양한 민족해방운동은 미국의 봉쇄 전략에 끝없는 훼방을 놓는 것처럼 여겨졌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는 처음에는 소련, 나중에는 중국과 친선을 자랑하며 아시아 해방의 축을 건설하자고 외쳤다. 인도의 네루 정부는 여전히 영국의 영향력을 배제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소련과 지속적인 우호 노선을 천명했다. 한편 냉전 초기 가장 큰 위협은 해양 패권의 상징이었던 수에즈 운하에서 발생했다.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아랍사회주의 군부는 수에즈 국유화를 선언하며 반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미국은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영국의 미몽을 진압하고 나세르를 달래며 상황을 통제하고자 했지만, 아랍사회주의는 예멘,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서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중동의 친미 정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남베트남을 미국의 괴뢰정권이라 규정한 북베트남의 공세가 계속되었고, 미국 당국자들은 베트남이 무너졌을 때 동남아시아 전체가 ‘도미노처럼’ 적화될 것을 우려했다. 수에즈와 말라카가 진지하게 소련 해상력의 위협 받는다면, 미국이 관장하는 세계체제와 국제 대분업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민족주의 세력에 대처하는 미국의 노력은 많은 경우 성공으로 끝났다. 미국이 가진 자원은 공산권을 압도하고 있었으며, 미국이 지원하는 정부들의 힘은 여전히 강력했고,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야심찬 구호가 만들어낸 통제 불능의 상황 속에서 제풀에 고꾸라졌다. 나세르가 이끄는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스라엘에 무참히 패배하며 명성을 잃었고, 이집트의 남은 국력도 사우디가 지원하는 예멘의 전장에서 끝없이 소모되고 있었다. 이란에서 석유 국유화를 추구하는 민족주의적인 모사데그 정부는 미국과 영국이 공모한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인도네시아의 상황은 수카르노의 모험주의에 불만을 품은 반공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50만 명을 학살하자 빠르게 안정되었다. 인도는 여전히 친소 노선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파키스탄과의 대치에 집중하고 자국의 거대한 경제 문제를 관리하느라 내향적인 대외 정책을 수정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성공은 베트남에서 물거품처럼 무너져내렸다.
허약한 농민 게릴라를 상대하는 사소한 작전에 불과하다고 인식되었던 베트남 전쟁은 곧 미국의 전비와 병력을 끝없이 소모시키는 늪으로 변모했다. 베트남 자체가 탈출구 없는 소모전의 늪을 의미하는 거대한 은유가 되었다. 미국이 고전한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남베트남 정권은 인기가 없었고, 이미 프랑스를 몰아낸 베트남인들은 미국의 초토화 공격도 버텨낼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은 제국주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부도덕한 전쟁이라고 비난을 받으며 국내외의 지지를 모두 상실했다. 미국 내에서 인종 평등 운동이 전개되면서 공산 국가들은 흑백차별이야말로 미국 자본주의의 민낯이라며 미국의 도덕성에 다시 흠결을 내었다. 그러나 군사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메시지는 명확했다. 소련은 비록 미국 주도의 세계체제에서 결코 자본과 기술의 중심부가 될 수 없는 반주변부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군사 기술의 차원에서는 비교적 용이하게 격차를 좁힐 수 있었다. 소련이 지원한 방공 시스템은 공군 우위를 통해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던 미국에 지속적인 손실을 강요했다. 베트남이 미국에 강요한 군사적 소모는 미국의 도덕적 사명에 영원한 오점을 남김과 동시에, 미국의 절대적인 경제 우위도 침식하는 전방위적 패배로 이어졌다.
덫에 빠진 심장지대 제국
1970년대가 되자, 미국은 베트남에서의 패배를 반전시키기 위한 새로운 지정학적 시도가 시작되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그의 고문 헨리 키신저는 군부 강경파를 억누르고 베트남에서 철군한 뒤, 소련과 데탕트를 추진하며 냉전의 과도한 안보 압박을 해소하고자 했다. 미국이 헬싱키 협정을 통해 소련의 동유럽 지배를 일정 부분 용인한 것은, 일종의 세력권 합의처럼 보일 수 있어 자유주의 반대파들의 강한 비난을 받았지만, 미국 자본이 소련을 시장으로 포섭하여 경제적 돌파구를 마련하는 길이기도 했다. 게다가 데탕트가 제3세계에서 소련의 추가적 세력 확대를 용인한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키신저는 베트남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대량 폭격을 명령했고, 라틴아메리카에 제2의 쿠바가 등장하는 것을 막고자 민주적으로 당선된 칠레의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키며 악명을 쌓았다.
유라시아 지정학에서 가장 상징적인 방향 전환은 닉슨과 키신저가 공을 들인 중국 방문으로 나타났다. 마오쩌둥의 중국은 세계 반제국주의 혁명의 주도권을 놓고 소련과 다투고 있었으며, 양국은 1969년에 공식 교전에 준하는 국경 분쟁을 겪은 바 있었다. 그래도 중국은 여전히 전세계의 반제국주의 무장투쟁에 자금을 지원하고, 이념적인 선도성을 확보하고자 했기에, 세계체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 세력임은 분명했다. 키신저는 소련의 위협에 대해 느끼는 중국의 압박감을 활용하여, 소련 세력을 중앙아시아와 극동에 묶어두는 것을 노렸다. 세계체제의 도전자를 세계체제의 협력자로 전환하고, 가장 강력한 도전자인 소련에 대항하는 공동 전선을 펴는 전략이었다. 이로써 주변지대를 통한 심장지대의 봉쇄는 엄청난 수준의 진전을 이루게 되었다.
키신저의 후임자인 카터 행정부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심장지대에 대한 봉쇄를 더욱 한차원 높은 압박으로 강화했다.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중국은 경제적 난관을 해소하고자 세계시장에 참여할 필요를 느꼈다. 당내 권력투쟁이 끝나고 1978년에 등장한 두 번째 지도자 덩샤오핑은 일본과 동남아시아 각국을 순방하며 기술 지원과 자본 투자를 요청했다. 마오쩌둥 시기에 설치한 해외의 혁명 네트워크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이라는 약속도 더해졌다. 이는 중국이 세계시장에 참여하며 중국은 경제성장을 통한 사회 안정을 이루는 대신에, 미국의 세계패권을 인정한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대신 중국은 심장지대의 소련군에 맞서기 위한 군 현대화 작업에도 박차를 가했고, 주변지대에서 소련의 거점이 되며 자체적인 야망을 추구하는 베트남과 전쟁에 나서게 되었다.
중동에서 브레진스키의 정책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강경책이었다.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미국은 페르시아만의 석유를 향한 심대한 위협을 얻게 되었지만, 이란의 성직자들이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만큼 공산주의와 적대한다는 사실은 미국에 큰 위안이 되었다. 오히려 브레진스키는 이슬람주의를 통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남하한 소련군을 ‘베트남’에 빠트릴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키신저가 중국과의 소통 창구로 낙점하여 육성한 우방국 파키스탄을 통해서 이슬람주의 전사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유입되었다. 베트남에서 소련의 S-75 미사일이 미 공군을 괴롭힌 것에 대한 복수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에게 스팅어 미사일을 선물하여 소련의 헬리콥터 조종사들에게 악몽을 선사했다. 지정학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파키스탄 주변지대가 거점이 되어 미국 물자가 아프가니스탄과 위구르라는 심장지대로 계속 이동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해양 패권에 맞서는 심장지대 요새가 장거리 폭격기뿐 아니라 주변지대 국가들의 포위망으로 위협을 받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중동의 긴장은 유럽으로 옮겨붙었다. 카터 행정부는 소련을 인권 문제로 압박하면서, 데탕트 질서는 해체되고 있었다. 카터의 후임은 강경한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나토는 퍼싱-2와 같은 위협적인 중거리 미사일을 서유럽에 배치하기 시작했고, 나토의 군사 교리도 바르샤바 조약군의 수백만 군대에 궤멸적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더 공세적인 공지전(Air-Land Battle)으로 이행하고 있었다. 비록 미디어의 선전으로만 그쳤지만, 미국이 첨단 기술을 총집약시켜서, 우주에서 소련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무력화시키는 전략방위구상(SDI)도 등장했다. 이는 모든 면에서 미국에 열세였던 소련이 가진 유일한 카드, 핵무기를 통한 상호확증파괴의 위협마저 무너뜨리겠다는 신호였다. 심장지대 요새를 감싼 올가미가 바짝 조여지고 있었다.
결국 1985년에 소련에서 독자적 광역권을 허물기로 결정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오르면서 40년에 걸친, 냉전이라는 이름의 유라시아 지정학 경쟁은 종식되었다. 냉전의 종식은 고르바초프라는 개인의 선택이 초래한 예상치 못한 눈사태였다. 고르바초프에게 그런 선택을 강제하게 한 여러 요인에는 미국의 대소련 봉쇄 전략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도의 기술 수준을 요구하는 자본재에 접근할 수 없는 소련 산업은 계속 낙후되었다. 세계시장에 접근이 제한된 소련은 사회주의 자체의 비효율성까지 더해져, 중심부의 기준을 따라가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갈수록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소련은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에 의지하며 경제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지역체제의 중심이 될 수는 있었지만, 모스크바의 중심성은 교역 면에서의 우위보다 무력에 의지하고 있었다. 세계체제에서 소련의 지위는 기껏해야 반주변부로서, 러시아 제국 시기의 지위에서 크게 달라진 바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제국 주변의 분리주의를 조장하고, 주변지대 강국을 통해 심장지대에 계속 군사적 압박을 가하면서 소비에트 제국 질서 자체의 균열을 획책했다. 당시 소련이 겪고 있던 어려움은 미국 당국자나 고르바초프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어서, 서구 지향적인 고르바초프가 제국의 담장을 허물기로 결정한 그 순간 소비에트 광역권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심장지대는 해체되었고, 세계에는 이제 미국이라는 단일 세계제국이 보장하는 단일 세계시장만 존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