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의 세계사 (4)

패권의 세계사 (4)

팍스 아메리카나와 그 불안

임명묵

세계제국의 투쟁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하지만 냉전과 탈식민화 국면에서 벌어진 숱한 국가들의 경쟁은 분명히 세계체제의 내부 구성에 심대한 변화를 만들고 있었다. 특히 찬란히 반영하던 미국인의 삶에서 일어난 변화가 가장 가시적이었다. 분명 미국은 주변지대의 독일과 일본을 무너뜨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를 해방시키고, 그들이 소련에 이끌리지 않도록 인도했으며, 끝내 소련마저 무찔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평범한 미국인의 삶은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과거에 헨리 포드가 제공했던, 평범한 사람도 중산층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대규모 제조업은 무너져 내렸고, 도심지는 마약과 총기가 바삐 오가는 혼돈의 공간이 되었다. 도심 공간은 곧 인종 갈등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흑인을 향한 인종차별이 철폐되었고, 그들을 돕기 위한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도 등장했지만 더 많은 흑인이 비참한 빈곤으로 내몰리면서, 인종 폭력이 백인 자경단의 린치가 아니라 경찰 폭력과 도시 폭동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냉전이 끝났을 때 과연 미국이 이 경쟁의 진정한 승자인지를 묻는 질문들이 제기되고 있었다. 총력전 경험을 바탕으로 서독과 일본은 미국에 준하는 기술적 고도화를 이루고, 더 효율적인 숙련 노동 동원 양식을 만들어냈다. 전후의 폐허에서 제조업 초강대국을 일군 양국은 각각 유라시아의 가장 중요한 시장인 유럽과 동아시아의 경제적 중심으로 일어서 전후 체제의 번영을 선도했다. 미국은 세계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하여 이들의 경제적 번영을 지원했는데, 두 국가가 미국의 번영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올랐을 때도 그러했다. 서유럽과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은 소련의 위협을 막아설 수 있는 견고한 방파제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서독과 일본은 국가 주도의 중상주의 경제라는 해자를 쌓은 반면, 미국은 달러의 원활한 유통과 우방국의 발전을 위해 자국 시장을 개방하고 있었다. 당초 세계시장을 위해 필요한 세계제국이었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세계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미국이 세계시장에서 후퇴할 수 없어졌고, 이는 미국 제조업이 서독과 일본에 의해 경쟁력을 상실해 초토화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 20세기의 지정학 경쟁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진짜 승자는 역설적으로 가장 부유한 경제와 안정된 산업 노동력 고용을 모두 달성해낸 패전국, 서독과 일본이라는 말이 아예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동서의 두 아시아

두 국가 중에서 진정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국가는 전통적 중심인 유럽에 속한 독일이 아니라, 신흥 아시아의 중심 일본이었다. 탈식민화를 둘러싼 쟁투는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에 예상치 못한 수혜를 연속적으로 가져다 주었다. 일본 자본은 남한과 대만을 자국의 수출시장으로 삼아 발전했다. 경제 기적이라 불릴 일본의 고속 성장은 남한과 대만의 성장도 자극했다. 일본 경제가 발전하며 임금이 상승하자, 이제 저부가가치 영역이 된 산업들은 남한과 대만으로 향했고, 일본은 대신 고부가가치 영역에 집중하며 생산성을 개선했다. 남한과 대만은 일본이 넘긴 산업을 흡수해 타국에 상품을 수출했고, 그렇게 축적된 자본으로 더욱 고도화된 일본 제품을 수입했다. 이것은 미국 패권의 우산 아래에서 재현된 대동아공영권의 지역체제 구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엄청난 부를 동아시아에 이전하며 태평양 경제 발전의 자극제가 되었다. 베트남에 주둔한 수십만 미군을 위한 상품이 고베, 부산와 부산에서 바쁘게 출항하여 남베트남의 사이공으로 향했다. 마침 새롭게 등장한 컨테이너는 항만 물류의 혁명이 되었고, 이전보다 훨씬 더 대규모 화물이 신속히 처리되며 물동량이 폭증했다. 한국과 일본의 기업들은 미군의 보급품 수요를 충당하고, 건설 프로젝트에 입찰하며 자본을 이전받았고,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대규모 병력까지 파병하며 베트남 전쟁을 자국 발전에 더욱 긴밀히 연계시켰다. 물론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홍콩,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지역체제에 연계된 미국 진영의 경제주체들도 베트남 전쟁으로 무수한 특수를 누렸고, 그들의 경제성장은 다시금 일본 상품, 훗날에는 한국과 대만 상품을 향한 수요를 끌어올렸다. 냉전 종식 이후 시작될 중국의 폭발적 성장은 이미 이 과정을 통해 서태평양에 축적된 자본의 네트워크 덕택에 가능했다.

중동에서 전개되는 사건들도 동아시아 경제 기적에 연료를 공급했다. 이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장악하자, 대영제국 항로의 입구가 가로막혔다. 이는 페르시아만에서 생산되는 막대한 석유가 유럽으로 향하는 길이 막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조선들은 곧 자신들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는데, 빠르게 성장하며 에너지 수요도 폭발하고 있었던 동아시아였다. 곧이어 동아시아는 중동 석유를 흡수하는 최대의 수요처로 등극하게 된다. 1973년에 제4차 중동전쟁은 또 다른 계기를 제공했다. 중동 산유국들이 유가 담합을 개시하자, 동아시아도 여느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위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산유국들이 갑작스럽게 쌓인 부를 소비하기 시작하자, 동아시아 국가들이 활약할 길도 열렸다. 동아시아는 에너지 수입을 위한 막대한 돈을 중동에 지불했지만, 중동은 동아시아에서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며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돈이 돌며 인도양 세계 반대편의 두 지역이 발전을 거듭했다.

중동의 사건들은 세계체제의 전통적 중심지인 미국과 유럽에서는 다른 결과를 낳았다. 첫 번째 파급 효과는 경제에서 나타났다. 동아시아, 특히 일본은 높은 에너지 비용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력 활용 극대화와 연료 효율 개선을 추구하며 포디즘을 넘어서는 새로운 제조업 양식을 개척했다. 하지만 유럽, 특히 미국에서 연료 비용 증대는 안 그래도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던 제조업의 신속한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다. 대신 산유국들이 예치하기 시작한 막대한 오일머니가 런던과 뉴욕의 은행으로 들어가, 세계체제 최중심부의 특권인 세계금융의 연료가 되었다. 이는 세계시장과 세계경제 전반에 대한 세계체제 중심부의 지배력을 더욱 높여주었지만, 안정적 일자리를 상실하고 금융시장의 변동성에 노출되게 된 다수의 노동계급에게는 그다지 좋은 소식이 되지는 못했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를 시작으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은 전후 복지국가를 해체하며 시장 원리를 경제 전반에 더욱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실험을 개시했다. 그 실험 뒤에는 베트남에서 뿌려진 달러, 일본 나고야의 자동차 공장과 한국 거제도의 조선소,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에서 추출되는 석유가 자리하고 있었다.

서구(북미와 유럽을 합친 대서양의 기독교 문명)와 중동 이슬람 세계의 관계가 급변한 것은 중동의 탈식민 과정에서 발생한 두 번째 파급 효과였다. 반둥 정신을 수용한 아랍 사회주의 국가들은 경제 발전과 사회 개선 영역에서 낮은 성적표를 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불명예는 한줌도 안 되는 유대인 군대에 수차례 처참히 압도당했다는 군사적 실패에서 발생했다. 터키와 이란 같은 친미 성향의 근대화 정권은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의 아랍 사회주의 정권이 겪은 굴욕까지는 당하지 않았으나, 역시 농촌과 도시가 근대화 과정에서 고강도의 사회적 스트레스를 마주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거둔 승리와 미국의 노골적인 지원은 서구에 대한 전통적인 적대감에 불을 질렀다. 곧이어 중동에서는 세속주의 성향의 근대화 정권들을 비판하며, 더욱 전면적인 반제국주의 투쟁과 문화적 퇴폐 세력을 향한 정화 운동, 전통 도덕에 근거한 사회의 재조직화를 강조하는 새로운 근대 정치 운동, 이슬람주의가 힘을 얻었다. 1979년 이란에서 친미 팔레비 왕정을 전복시킨 시아파 이슬람주의(호메이니주의)는 1982년 레바논 시아파 사이에서도 미국과 이스라엘을 향한 투쟁의 이념으로 채택되었고, 헤즈볼라가 창설되어 끝없는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1981년 이집트에서도 순니파 이슬람주의의 사상적 거두인 사이드 쿠틉의 영향을 받아 급진화된 무슬림 형제단이 이스라엘과 화평을 추구한 안와르 사다트를 암살했다. 그래도 일단 혁명적 이슬람주의는 가장 강성했던 이란의 혁명 세력이 시아파라는 종파적 장벽을 넘지 못하고, 오히려 이라크 정부와 8년간 소모전에 빠져들면서 누그러지는 듯했다. 하지만 탈식민을 추구하며 등장한 이슬람 세계의 모든 정부는 이 거대한 파도를 다루는 법을 배워나가야 했다. 시리아의 친소 바스주의 정부, 튀르키예의 친미 케말주의 정부, 파키스탄 군부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정까지, 각국 정부는 이슬람주의를 철저히 찍어누르거나, 어느 정도 공적 공간을 내주며 타협하는 등 각자의 방침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억압과 타협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세계에서 서구적 현대화를 거부하며 대안적 현대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등장한 사실, 결정적으로 서구 자체에 적대하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추세는 불길한 것이 분명했다. 유라시아 지정학의 틀에서 주변지대의 파시즘과 심장지대의 공산주의에 대처한 세계제국은 이슬람주의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상이, 지정학적으로 분류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공간에서 등장해 자유주의 세계이념을 거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워싱턴 컨센서스

새뮤얼 헌팅턴은 그의 문제작 <문명의 충돌>에서 20세기가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문명의 시대가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각 문명이 각자의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며 대안적 근대화 경로를 밟을 것이었고, 그때가 되었을 때 서구 중심의 세계패권은 몽골제국과 대영제국 사이에 존재했던 문명들의 다극 질서로 변모할 수밖에 없었다. 헌팅턴은 서구의 세계패권에 대항할 가장 강력한 경쟁자를 중국의 유교 문명과 중동의 이슬람 문명으로 간주했다. 일본, 한국, 대만이 일으킨 경제 기적이 중국에서 훨씬 더 거대한 규모로 나타나고, 이슬람이 늘어만 가는 청년 인구를 반서구주의로 계속해서 무장시킬 때, 서구는 두 세력의 도전에 이전처럼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예측이었다.

하지만 걸프전의 충격이 여전히 세계인의 뇌리에 남아 있는 시점에서 헌팅턴의 예측은 ‘새로운 대결을 원하는 냉전 전사의 목소리’ 정도로 치부되었다. 오히려 90년대에는 동아시아와 이슬람은 서구, 특히 세계제국인 미국과 경쟁할 처지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신자유주의 경제 전환으로 미국이 탈산업화를 겪고, 계층 격차가 더욱 극심해졌지만, 그대신 월스트리트의 금융과 실리콘밸리의 IT라는 새로운 경제 영역이 막대한 부를 벌어들이고 있었다. 미국의 금융자본은 전세계에 걸친 자원과 노동력을 끊임없이 조율하고 재배치하면서, 세계시장 속의 세계대분업을 전례없는 수준으로 신속하고 긴밀하게 확장하고 심화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전세계에 표준을 제공하기 시작한 정보통신 기술은 모든 정보를 0과 1로 변환하여 빛의 속도로 지구 전역을 오갈 수 있게 해주었다. 미국에서 이런 전환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일본은 여전히 공장 중심의 제조업에 몰두하고 있었고, 수출로 축적한 거대한 부를 경쟁적인 부동산 투기에 쏟아붓다 자멸했다. 구경제를 복원하지도 못하고, 서구처럼 신경제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일본은 규모 면에서 여전히 대단한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세계시장의 주도권을 빼앗아 올 능력이 없음이 분명해졌다. 게다가 일본이 고꾸라지고 얼마 안 가서 동아시아 지역 전체에 경제적 충격이 찾아왔다.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한국을 연쇄적으로 강타한 외환위기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경제 주체들의 자율적 혁신을 통한 실질적인 생산성 개선 대신에 정치 영역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요소 투입에 치중했음을 보여주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보인 한계가 이렇다면, 규모만 달랐을뿐이지 중국이 나아갈 길 또한 능히 예상가는 것이었다. 서구화되거나, 고꾸라지거나.

이슬람 세계는 동아시아보다 더욱 취약해보였다. 이슬람 보수주의의 아성이자 두 성지를 수호하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왕정의 안정을 해칠 수 있는 전투적 이슬람주의를 탄압하는 헌병 역할을 맡았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은 아랍의 친미 국가들을 지원하며 이 국가들이 이란처럼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하여 전복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다. 도저히 근절할 수 없는 전투원들은 심장지대 제국이 해체되며 발생한 종교 갈등의 현장, 체첸, 보스니아, 아프가니스탄 등지에 밀어넣을 수 있었다. 중동에서 미국 질서에 대항하는 국가들은 여전히 아랍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 이슬람 혁명 정신을 내걸고 있는 이란 정도가 전부였다. 이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은 이라크군은 다국적 연합군에 의하여 섬멸되었다. 이는 국력을 총동원하여 8년의 전쟁을 벌이면서도 이라크를 압도하지 못한 이란군도 당연히 미군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의미했다. 결국에 이슬람 세계에서 미국과 서구 패권에 맞서는 국가급 행위자는 존재할 수 없었고, 기껏해야 ‘세계체제의 가장 구석진 변방’에서 제국의 최전선을 간혹 위협하는 소규모의 비국가 행위자만 있을 뿐이었다. 이런 세력들은 소탕하기 귀찮을 뿐이지, 광대한 세계체제를 떠받치는 아틀라스인 세계제국을 향해 진지한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청년층은 두 가지 갈림길을 마주하고 있었다. 하나는 신이 내린 말씀을 정련한 전통에 따라 살면서 성전에 나서는 길이었다. 다른 하나는 위성통신망에 접속하여 미국이 만들어낸 감각적인 대중문화를 즐기는 길이었다. 20세기 후반의 역사는 도시화된 청년층이 대체로 후자의 길을 선택해온 여정이기도 했다. 미국 대중문화는 전후 미국이 처한 도전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세계문화로 완성된 것이었다. 교외의 주택단지에서 핵가족과 함께 자라난 전후의 아이들은 풍요로운 소비사회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으며, 공동체를 향한 전통적 의무보다는 도시 소비사회가 제공하는 감각과 자극을 누리기를 원했다. 새롭게 등장한 청년 문화는 자유주의 세계이념을 더욱 급진화시켰고, 여전히 전통적 보수주의의 색채가 남아있던 서구의 고전적 자유주의를 해체하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 68혁명은 당초 그들이 구호로 내걸었던 것은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한 실패한 혁명처럼 보였고, 서구 사회 내부의 취약성만을 노출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실제 68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 사회의 흑인들은 자신들이 축적한 감각의 문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표출했고, 로큰롤, 리듬앤블루스, 디스코, 힙합에 이르기까지 다른 어떤 나라도 따라오지 못할 미국 팝음악에 아프리카의 ‘소울’을 제공했다. 한편 성적 규범과 전통 가치에 도전하는 다양한 문화들이 TV 전파를 타고 모든 주택의 거실을 침략했고, 다른 나라의 청년들도 68세대의 반란을 ‘쿨’하다고 생각하며 서구의 반문화를 자신들 사회의 맥락에 맞게 지구화했다. ‘미국화’를 퇴폐와 동일시하곤 했던 서유럽과 동아시아는 자국에 주둔한 미군들의 영향에 그대로 노출되며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하고 항복했다. 68문화를 자본가들이 조장하는 문화적 타락의 극치로 보았던 소비에트 세계는 발레와 오페라, 혁명가요로 맞서고자 했으나,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굉음의 혁명에 정신을 잃는 아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글라스노스치는 죽어가는 공산당 원로들이 지켜보는 무기력한 열병식과, 난동을 부리는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든 락페스티벌을 대조하며 제국의 종말을 전시했다.

그러니 이슬람 세계는 물론이고, 인도, 중국,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의 모든 청년들이 일단 위성방송, 나아가 인터넷에 접속하기만 한다면, 자신들의 구태의연한 ‘전통’을 모두 집어던지고 할리우드화, 맥도날드화, MTV화와 빌보드화로 대표되는 ‘미국화’에 전력질주할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냉전의 역사가 그것을 보증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지정학도 의미가 없었다. 심장지대 제국은 붕괴했고, 미국의 공군력은 공간의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 전세계 어느 목표든 간에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었다. 세계 전역에 뻗친 미군 기지와 항공모함의 활주로는 매킨더와 스파이크먼, 조지 케넌을 상대로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니 미국은 세계체제를 계속 문제없이 운영하고, 사소한 반란을 진압하며 역사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미국에는 이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더욱 빨리 넘기고자 했던 집단이 존재했다. 신보주의자들, 혹은 ‘네오콘’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공화당에서 세력을 확대하며,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이념이 세계체제의 보편적 근간이 되도록 더욱 공세적인 대외정책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미국 질서에 대항하는 시리아, 이라크, 이란, 북한은 필요하다면 전쟁을 통해 지도부를 제거하고 세계체제에 원활히 참여하기를 원하는 새로운 지도부로 교체해야만 했다. 중국은 지속적인 압박을 통해 미국에 도전할 생각을 추호도 품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고, 장기적으로는 공산당 질서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었다. 이미 무너진 러시아 역시 심장지대에서 절대로 제국을 회복하지 못하게끔 봉쇄를 이어가야만 했으며, 탈소비에트 국가들은 세계이념을 받아들이도록 적극 장려해야 했다. 네오콘은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당선을 바라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사명이 왜 실현되어야 하는지 웅변하는 대사건을 마주했다.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고 약 8개월이 지난 2001년 9월 11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래 처음으로 미국 본토가 공격을 받았다. 공격을 수행한 주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과 맞서 싸웠던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무자헤딘, 오사마 빈라덴이 이끄는 테러조직 알카에다(기지)였다. 이 공격은 미국이 자신과 세계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지구의 한 점에라도 세계체제의 반란자를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중동으로 향하는 분노한 미군은 약 10년 전 걸프전과 마찬가지로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힘을 과시할 것이었다. 하지만 9.11 테러 직후 개봉한 한 영화는 미군이 걸프전 이후에 벌인 이슬람 세계에서의 또 다른 군사 개입을 기억할 필요를 상기시켰다. 1993년, 제국주의와 냉전이 할퀴고 간 빈곤과 혼란의 땅에서 조악한 무기로 무장한 민병대가 미국이 자랑하는 최첨단 병기로 무장한 특수부대원들을 내쫓는 과정을 담은 영화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 측 사망자는 18명에 불과했지만, 미국 유권자들은 미국 젊은이들의 아까운 목숨을 외국의 전장에서 잃는 것에 점점 인내심을 잃고 있었고, 천 명을 넘게 사살해도 계속해서 저항을 멈추지 않는 민병대 대원들은 미군의 전투 의지를 고갈시키기에 충분했다. 영화는 이 전투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 UH-60 헬리콥터가 눈먼 RPG-7을 맞고 추락한 사건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UH-60 헬리콥터는 흔히들 ‘블랙 호크’라고 불리었다. 당시 블랙 호크가 떨어진 곳은 홍해와 인도양을 잇는 아프리카의 뿔에 자리한 나라,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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