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부산 - (1)

제국 부산 - (1)

제국의 교차로 부산을 가다

임명묵

8월 11일부터 13일까지 부산 여행을 다녀왔다.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고, 대학원 친구 하나가 8월 말로 미국으로 유학을 나가고, 다른 친구는 중국으로 교환 학생을 가서, 그 전에 시간 되는 친구들끼리 여행이나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두 명은 서울 사람이고 나는 그다지 컨텐츠가 많지 않은 조치원 사람이라, 자연스레 부산 출신 친구를 앞세워 부산을 돌아보는 쪽으로 합의가 정해졌다.

물론 일단 부산을 찍어놓기는 했으나 부산에서 뭘 보아야 할지는 아직 아무 것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부산 풀코스'에서 으레 나오는 광안리 회 한사바리에 서면에서 돼지국밥하고 밀면 먹고 우리 동네 횟집과 우리 동네 국밥집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맛을 경험하고 '다음에 오면 지대로 풀코스로 놀아보입시다~'하는 게 부산 여행의 정석이다만, 또 아시아 연구 대학원생들끼리 그런 상투적 여행만은 할 수 없지 않은가. 인터넷을 뒤져보면서 부산의 인문 여행 장소들을 선정해서 부산을 탐방했다.

1일차 여행지는 일단 네 곳. 외지인 세 명이서 부산역 앞의 차이나타운에서 만나서, 부산인 친구와 합류한 뒤에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과 유엔기념관, 유엔공원을 본 뒤 이기대에서 바다를 보고 숙소를 잡은 서면 근처 부산시민공원에서 헤어지는 코스였다.

부산역에서 친구들과 접선한 것은 10시 반. 11시에 이른 점심을 이곳 차이나타운에서 먹기로 했다. 부산역 앞 차이나타운은 알 사람은 아는 유명한 곳이다. '차이나타운인데 중국인은 없고 러시아인만 있다'는 말로...

부산 차이나타운의 역사는 1884년에 시작되었다. 청국 영사관이 이곳에 세워졌고, 이후 자연스럽게 부산을 거점으로 삼는 화교 상인들과 노동자들이 마을을 형성하여 청국 조계지/청관이 되었다. 이 부산 최초 화교들의 출신은 부산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국 화교의 주류는 인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황해 건너편의 산동성 출신들이고,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에는 연변 조선족을 중심으로 동북삼성 출신 화교들이 많이 왔다.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해외 화교들이 대개 복건, 광동, 해남에 위치한 남방 해양 중국 출신임을 생각하면 한국 화교의 화북/대륙성은 이채로운 일이다.

하지만 부산은 동중국해의 항구 도시라는 특성 때문에 남방 화교들이 이주해오는 도시가 되었다. 부경대 조세현 교수에 따르면 부산 화교는 일본 고베에 이미 진출해있던 화교들이 부산으로 무역 거점을 확장하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되었고, 출신은 복건과 광동이 많다고 한다. (출처)

물론 이후에는 조선반도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산동성 및 동북 지역에서 오는 이주 물결로 부산 지역도 결국에는 이들 북중국 지역의 화교 커뮤니티가 주류를 점하게 되었다(추측컨대 한국전쟁기 부산으로 피난 온 화교들이 이곳에 그대로 정착하면서 크게 희석되지 않았을까). 그래도 최초의 화교들이 갖는 특징은 부산 역시 인도양을 중심으로 펼쳐진 아시아 해양사를 이루는 주요 노드이며 한중일을 잇는 거점이었다는 역사는 여전히 특기할만 하다 하겠다.

거리 한복판에 화교 학교가 있고 삼국지가 전시되어 있다.

만주사변, 중일전쟁, 해방, 국공내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재한 화교 사회의 기반은 위태로워졌다. 일본과 중국이 전쟁에 돌입했고, 일본 제국의 네트워크가 해체되면서 지역을 넘나드는 무역로도 단절되었고, 본토에서는 공산당이 신중국을 수립하며 해외 화교와의 연계가 약화되었다.

중국인의 세력이 약해질 때 들어온 새로운 세력은 미국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부산은 서울을 빼앗긴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가 되었다. 낙동강 전선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미군이 주축이 되어 계속해서 병력과 물자가 들어와야 했다. 한국 전쟁이 현대 부산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계기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대규모의 미군 기지가 부산에 들어왔고, 주한 미군 부산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해외 미군 기지의 미군들은 미제국의 문화를 각지에 이식하는 첨병이었다. 막강한 구매력을 갖춘 미군들의 소비는 인근 지역 경제의 중추가 되었고, 미군을 상대하기 위한 각종 점포들이 생겨나며 문화적 접촉이 발생했다. 성(性)과 돈의 교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그 교환이 매개되는 주점들이 세워지면서 전세계 각지를 수놓은 기지촌 유흥가가 만들어졌다. 부산에서 그 중심은 부산역 차이나타운과 공존하고 있는 텍사스거리였다.

이태원이나 평택 송탄에 가면 보이는 80년대-90년대 느낌의 환전소나 촌스러운 영어 간판을 이곳에서도 마주할 수 있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유흥가의 성격도 여전하여 밤에 가면은 우범지대의 느낌도 간다는데 이때는 대낮이어서 오히려 지나는 사람도 별로 없어 고요했다.

1984년 주한미군 부산 사령부가 해체되고, 미군들은 부산을 떠나 다른 곳으로 재배치되기 시작했다. 텍사스거리의 주축인 미군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새로이 빈자리를 메우는 민족 집단이 등장했다. 그 미군들이 봉쇄하고자 전력을 다했던 소련인들이 부산에 유입되었다. 1990년 한소 수교가 이루어지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부산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극동 러시아와 한국을 잇는 창구가 되었다. 러시아 선박들이 부산항에 입항했다. 옐친 시기 혼란기에 소련의 계획경제 공급망이 깨져서 더욱 낙후된 극동 러시아는 바깥과 무역을 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지경에 몰렸다. 물론 그 무역에는 상품의 교역이나 육체노동도 있었지만 항구 도시의 숙명답게 마약, 총기, 성(性)도 동시에 따라왔다.

러시아인의 커뮤니티가 일정 수준 생긴 뒤에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인들이 뒤따라왔다. 2000년 푸틴이 러시아 경제를 재건하면서 러시아인들의 유입은 이전처럼 많아지진 않았지만, 상당한 인구 증가에 비해 경제 회복이 더뎠던 중앙아시아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해외 이주 노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같은 소비에트 제국의 문화를 공유하는 러시아인들의 정착지를 중심으로 커뮤니티에 새로이 유입되었다.

부산역 차이나타운에는 그래서 옛 화상들이 운영하는 중국집과, 여전히 얼마 간은 남아 있는 미군 컨셉 술집,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인들이 모이는 '사마르칸트'니 '우치쿠둑'이니 하는 식당이 공존하고 있다.

이 사진은 지나가다가 찍은 임대 사진인데, 키릴 문자로 ван рум이 재밌어서 담았다. van rum.. 완룸이라는 뜻이다. ㅋㅋ

서면에서 부산인 친구와 접선한 다음에 택시를 타고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유엔공원 인근 언덕에 지어진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대학원 친구 하나가 이 무시무시한 역사관의 존재를 찾아내서 우리 다른 곳은 못 가더라도 이곳은 가야한다는 결의를 다졌고 택시를 타고 바로 달려갔다. 2016년에 개관했다는데 생각보다 그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놀랐다.

시작은 일본 제국의 침략 야욕부터인데... 메이지 유신은 왜 등장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전시는 전반적으로 일본 제국의 조선 침탈, 자원 수탈 및 전시의 인력 동원, 강제 징용과 징병, 전범으로 처형된 조선인 군속 문제, 그리고 위안부 문제 등으로 꾸려져 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익숙할 이야기들이다.

기억 공간인데 한 친구가 이스라엘에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관인 야드 바셈이 떠오른다고 말해주었다.

나이센잇타이데스네...

맨 윗층으로 가면 어린이 체험관이라고 쓰고 놀이방인 곳이 있는데... 관부연락선 컨셉의 미끄럼틀과 군함도 컨셉의 미로를 만들어 놓았다. 아니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었는데 저 천진난만한 설명을 보고 웃음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강제동원역사관 바로 옆에는 그보다 더 작은 규모로 유엔평화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강제동원역사관은 행정안전부가 세웠는데, 유엔평화기념관은 현재 보훈부 소관이다. 둘 다 입장료는 무료.

전반적인 전시는 한국전쟁 시기 대한민국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준 유엔의 도움, 그리고 유엔의 창립 정신부터 현재에 이르는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취적이고 밝은 내용의 전시라서 기분은 상쾌해졌다. 지금 유엔은 물론 지정학적 갈등이 서로 폭발하는 유명무실의 기관이 되고 있지만..

한국전쟁기 부산항 부두를 보여주는 디오라마. 정말 잘 만들었다.

당시의 지도인데 서울보다 Kyongsong, Keijo가 더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해방 후 5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이곳은 경성이었나보다.

중간에 전시되어 있던 김일성-스탈린 편지. 김일성이라면 국한문 혼용보다 능숙한 러시아어로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까 싶긴 했지만..

이때도 날이 무척이나 더웠다. 그래도 호국 영령들과 나라를 지켜준 유엔 장병들을 기리지 않을 수는 없어서 언덕을 내려가 유엔공원으로 향했다. 경사가 상당해서, 택시타고 와서 망정이지 걸어서 올라왔으면 큰일 났겠다 싶었다.

전몰 장병들의 이름을 적은 추모명비다. 아마 국적별로 이곳에 안장된 분들의 성함을 새긴 것 같았다.

다시금 숙연해지는 참전국 깃발들.. 한국전쟁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등장한 국제질서를, 음으로든 양으로든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휘호를 남긴 유엔군 위령탑.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 6명의 방문을 기록한 표지가 놓여 있다.

무명용사의 길... 저 길을 넘어가면 울타리가 쭉 쳐져서 공원 한 바퀴를 두르고 있다. 24시간 개방되는 일반 공원이 아니라, 국가에 중요한 전몰 장병 묘지라서 출입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그렇다. 바깥에도 산책로와 가로수길이 조성되어 있어서 부산 시민들이 산책 코스로 애용하고 있었다.

대충 일일 주요 코스는 끝냈으니까 저녁으로 회라도 한접시 하자고 결의하였다. 부산인 친구가 아버지로부터 이기대를 가보라는 추천을 받고 택시를 잡아 이기대로 향했다.

이기대는 해안 절벽이 있어 동해안의 아름다운 경치가 보이는 명소라고 하는데, 해안 방위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해서 90년대까지는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 뒤 민간인에게도 개방되어 오늘날에는 해안 트래킹 코스로 관광지화 되었다.

이미 많이 돌아다녔기에 이기대 트래킹을 할 겨를은 없고, 그냥 회나 먹기로. 이기대 북쪽 끝에 있는 섭자리 어부촌길이다. 예전에는 한적한 어촌 마을이었는데, 이제는 시가지 확장으로 아파트 단지를 마주하고 있는 조그마한 어시장 느낌이다.

조그만 만에 부두가 형성되어 있는데, 꼼장어와 생선회를 파는 가게들이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어 행인들에게 호객을 한다.

먹으면서 이기 스울 아들은 모르는 부산 회맛 지대로지예? 라고 하니 부산인 친구가 진짜 죽이고 싶다고

물론 관광지 횟집이라 가성비는 좋지 않았지만 분위기도 좋았고 뭐.. 관광지 와서 바가지 좀 쓰는 것은 또 나름의 리추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 멀리 보이는 해운대..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부전역 뒷편에 위치한 부산시민공원이다. 원래 주한미군 부산 사령부가 있던 캠프 하야리야를 시민에게 환원하여 시민공원으로 만든 곳이다. 이때는 밤이라서 사진이 잘 나오지 않기도 했고, 휴대폰 배터리가 별로 없어서..

원래는 일본 제국 시기에 경마장이 위치한 곳이었고, 전시가 되면서 군사 시설 및 포로 수용소로도 사용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공원 한켠에는 당시 경마장 시기에 설치된 비석들 같은 것도 남아서 전시되어 있다. 당연히 일본군이 물러간 뒤에 들어온 미군은 일본이 남긴 군사 인프라를 활용하였고, 이곳을 캠프 하이얼리어(Camp Hialea)로 40년 간 쓰게 된다. 이곳도 역시 다른 곳의 미군 기지와 마찬가지로 미제국 문화가 배후지 문화와 교환되던 제국의 허브였다.

한편 부산 시가지가 계속 팽창하면서, 한적한 경마장 자리였던 이곳은 점점 서면과 연계된 주택가가 들어차게 되었고, 주민들과 마찰도 잦아졌다. 부산의 미군이 계속 감축되기도 하던 터라, 199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기지 반환 운동이 벌어졌다고 하고, 그 뒤 협상 끝에 2006년에 미군은 기지에서 완전 철수를 했다. 오염 정화 작업을 거친 뒤 2014년에는 드디어 부산 시민 공원으로 개장을 했다고 하는데 부산인 친구의 말에 따르면 자기 고등학생 때 나름 지역 사회에서 크게 화제가 된 일이었다고.

밤공기가 완전히 가을 공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푹푹 찌는 더위는 꺾여서 나름 선선한 밤공기 불어오는 가운데 산책하기에 멋진 공간이었다. 공원 역사관이 있다고 하는데 이미 너무 늦은 밤이어서 아쉽게 역사관을 둘러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일제 경마장과 미군 기지라는 공간의 역사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공원을 기획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들었다. 물론 제국과 연계된 역사의 문제가 단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한국에서 그런 기획을 하는 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겠으나, 오히려 반대로 제국 공간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기획을 통해 역사 문제의 전환을 시도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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