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부산 - (2)

제국 부산 - (2)

남포동 구시가지와 부산의 근대

임명묵

부산인 친구가 현지인이라면 절대 가지 않을 해동용궁사를 손님들이 온 김에 가보고 싶다고 하여 이틀차 첫 행선지는 해동용궁사가 되었다. 울산까지 연결되는 광역전철인 동해선을 타고 부산 시내에서 1시간 정도 가다보면 오시리아역이 나오는데 이곳이 해동용궁사와 가장 가까운 역이다.

이게 무슨 지명인가 하고 알아보니 인근의 오랑대와 시랑대라는 관광지에서 한글자씩 따와서 오시ㄹ + 장소를 뜻하는 접미사 -ia를 붙여서 오시리아라고..... 무슨 해괴한 지명인가 했는데 이번에 모인 4명 중 3명이 중동 전공이라 "오, 시리아!" 아닌가라는 재미 없는 개그를 치면서 낄낄댔다...

왼쪽의 큰 원이 남포동과 부산항을 중심으로 한 구도심, 범일역에서 부산시민공원이 서면 권역, 동쪽이 해동용궁사이다.

해동용궁사 자체는 1970년대에 지어진 신생 사찰이라서 무슨 한국 불교사와 관련된 무언가는 당연히 없고, 그냥 경치가 좋고 오리엔탈한 감성도 주는지라 관광지로 인기가 좋은 듯 했다. 실제로 풍광은 매우 좋았고 외국인도 엄청 많았다. 그리고 역시 운전의 성지 부산다운 교통안전기원탑....

신생사찰이고 역사성이고 뭐고 좋은 풍광 보니 없는 불심도 생기는 법. 그런데 햇살이 너무 쨍해서 가만히만 있어도 기가 빠질 정도이긴 했다...

다시 택시를 타고 오시리아역에 와서, 서면역으로 향했다. 밀면을 먹자고 하고 나는 전철 안에서 잠이 들었는데, 서면 인근 부전역에 도착하고 보니 내가 자는 사이에 부산 명물 이재모피자를 먹자는 총의가 세워져 있었다. 1992년에 세워진 부산의 로컬 피자집인데 이곳저곳에 지점이 있을 정도로 부산 시민들 사이에서는 정말 유명한 피자라고. 치즈도 많고 스파게티도 맛있었다. 문제는 너무 인기 있는 곳이라 서면점에서 오후 1시에 대기번호 137번을 받았다는 것.... 부산인 친구가 "빨리 줄어듭니다~ 걱정마이소~"했지만 웨이팅은 무려 3시간 ㅋㅋㅋ 을 이었다. 그래도 카페에서 3시간 동안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잘 보냈다. 1시간 식사하고 나오니까 오후 5시가 되어 저녁시간...

부산인 친구는 저녁에 일정이 따로 있어서 타지에서 온 셋이서 따로 둘러보고 부산인 친구와는 다음 날 다시 합류하기로 결의했다.

우선 방문할 곳은 부산 지하철 자갈치역 뒷편에 위치한 부산 최초의 연립주택. 1941년에 지은 청풍장과 1944년에 지은 소화장이 80년의 세월을 버티며 여전히 서있다. 소화장의 소화는 당연히 당시 일본 제국의 살아있는 신이었던 천황 히로히토.

저 좁은 창문에서 뭔가 일본 주택의 느낌이 묻어나오는 것 같기도? 1층은 현재 상가 건물로 활용되고 있어서 주상복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은 너무나 낙후하여 안전을 걱정해야 하는, 언제 재개발로 철거될지 모르는 연립주택이지만 지어질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 제국이 야심차게 선보인 근대 주택이었을 것이다. 실제 6.25 전쟁 당시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온 국회의원들이 이곳에 거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딱히 국제시장을 보려고 온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국제시장 근처에 왔으니 한 번은 들러줘야겠다 싶어서 국제시장 탐방. 제국 시절 일본인 거류민 구역이었으나 일본인이 빠져나간 자리가 시장으로 발전했고,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을 피해 몰려든 무수한 피난민이 정착하고,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쏟아져 들어온 미국 원조물자를 거래하는 곳이 되어 '국제시장'으로 거듭난다. 당연히 밀수가 판을 치고 상권을 둘러싼 암흑가의 어깨들이 조직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시장을 나와서 정처 없이 걷다가 부산타워가 눈을 사로잡았다. 부산타워의 그 존재도 모르고 있었지만.. 남포동에 위치한 50m의 야트막한 구릉 용두산에 세워진 전망탑이고, 73년에 완공된 부산의 상징이라고 한다. 도시에 왔으면 또 탑에 올라서 전망을 바라보는 것이 관광객으로서 해야 할 일이니까.

용두산 뒷편을 오르려고 길을 찾고 있었는데 인근에 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역시나 우연히 들어가게 된 대각사. 페이스북에도 따로 적기도 했었던 것을 여기도 올려놓는다.

이 절은 1877년에 건립된 일본 정토진종 히가시혼간지(동본원사)의 부산별원 자리에 세워진 곳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부산이 개항되었을 때 일본 측에서 포교를 위하여 파견된 승려 오쿠무라 엔신이 그 주인공이다. 오쿠무라 엔신은 대륙으로 향하는 창구인 규슈 사가현 가라쓰(당진) 출신으로 1588년에 역시 조선 포교를 위해 건너온 오쿠무라 죠신?의 후손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뒤 동본원사 부산별원은 개화기 근대 문물이 유입되는 창구로도 기능했는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이동인(아사노 도진)이다.  동래 범어사 혹은 양산 통도사 출신 승려였다는 이동인은 한양에서 개화파와 교류하다가 동본원사를 방문, 오쿠무라와 필담을 나누며 개화 의지를 다졌다. 이후 오쿠무라의 도움으로 1879년부터 일본을 왕래하게 된 이동인은 일본에서 입수한 근대 문물을 개화파에게 전달해주기도 하였으며 아예 일본 종단에서 법계를 받기도 했다.

일본통이자 '개화승'으로서 활약했고 특히 국제외교에 발을 처음 들인 조선 정부에서도 그를 중용하였느나 1881년에 실종된다. 인터넷의 정보에는 반개화파에게 암살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가장 많았다. 오쿠무라 엔신은 부산 이외에도 말년까지 조선 각지에서 일본 불교 포교에 진력하고 오쿠무라실업학교를 세우는 등 활동을 계속했다. 일제가 조선을 합병한 뒤에 이곳은 계속해서 밀려드는 부산의 일본 거류민 사회의 주요 사찰로서 기능했을 것이다. 대각사 자리에서 용두산이 아주 잘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당시 이 곳은 일본 사찰과 신사가 모여있는 거류민 종교 구역이기도 했을 것 같다. 동시에 일본인에게 조선어를,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언어교육원이기도 했다고 한다. 해방후 동본원사 건물은 1953년 국제시장 화재 때 소실되었다고 하며 이후 새로이 한국 불교 사찰 대각사가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대웅전 앞에 놓인 종에는 명치 23년(1890년)이라는 글자가 여전히 남아 있다.

천장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원래 있었던 동본원사의 흔적일지가 궁금했다. 근대의 핵심현장에 관한 흥미로운 정보들을 그 공간에서 직접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인터넷에 검색해서 찾아야 했다는 건 조금 아쉬웠다.

살짝 숨이 찰 정도로 언덕을 오르다보니 용두산 공원에 도착했다. 이순신 동상이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용두산 전망대는 탑의 5층에 있는데 당연하게도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용두산 높이 50m와 부산타워 높이 120m를 합하여 대략 170m 정도 되는 고도인 것 같다. 배가 오고 가는 부산항의 모습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와서 참 좋은 곳이었다.

이쪽 방향은 광복동과 영도. 크게 보이는 롯데몰 광복점 자리가 원래는 일제시대의 행정 중심지였다. 일제의 부산부청이 있었고 1998년까지도 부산시청으로 쓰이다가 철거되고 롯데몰이 세워졌다.

부산부청 자리는 또 용미산이라는 작은 언덕이 있는 곳이었다. 용두산과 용미산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최근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자료들에 따르면 대마도에서 오가는 일본인들의 시선에서 용미(꼬리)와 용두(머리)로 칭해졌다고 한다.

이순신 동상이 있는 이 자리, 용두산 공원은 원래 일본의 용두산 신사가 있던 곳이었다. '일본 제국'의 용두산 신사가 아닌 이유는, 조선반도의 신사들이 개항과 식민화와 맞물려 근대 일본 제국의 세력 투사의 결과물로 건립된 데 반해 이곳은 1678년 초량왜관을 드나드는 일본인(왜인)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한일이 제국과 식민지로 위계적 관계를 맺는 공간이 아닌 조일 양국이 평등한 위치에서 교류하는 일종의 접촉지대(contact zone)였던 셈이다.

사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부산은 해안에 면한 작은 포구였고, 인근에서 전통적 중심지는 동래였기 때문에 해안의 작은 언덕에 신사 하나 지어주는 것은 조정 입장에서도 용인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의 용두산신사.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물론 1678년의 신사는 부산이 개항장이 되고 제국 권력을 등에 업은 일본인 거류민들이 유입되면서 성격이 변하게 된다. 일제 시대에 여러 신사를 통합하여 일종의 단지로 만든 것으로 보이며, 이후 이곳은 부산 일본인 거류민들의 정신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 패망 이후 일어난 방화로 신사는 전소되어 오늘날에는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용두산공원 비석과 부산타워.

이 자리에는 원래 부산부청과 용미신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곳이니만큼 더더욱 '광복동'이라는 이름과 함께 커다란 태극기를 걸어뒀을 수도.

1930년대 부산부청과 도개하는 영도대교. 이미지 출처: 공유마당

옛 부청 자리에서 더 가면 영도대교가 나온다. 1931년 만주국 건국 이후 일본의 대륙 진공이 가속화되고 부산의 중요성도 더욱 커지면서 일제의 부산 인프라 투자는 더욱 큰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전에 선박에만 의존하던 영도-부산 교통을 아예 다리를 놓아 육로로 연결하는 프로젝트가 개시되었고, 1932년 착공하여 1934년에 개통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구간이 해운 교통량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에, 영도대교는 도개식으로 건설되었다.

만주의 개방과 부산의 변화는 한석정 교수의 <만주 모던>에서 매우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오는 일본인 이주민들이 영도대교의 도개를 보며 신기하게 구경하는 그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이후 영도대교에서 북항대교를 바라보며 부산항 제1부두, 그러니까 개항과 함께 시작된 역사적 부두로 걸어갔다. 과거에 부산잔교역이 있었고, 바로 만주국의 수도 신경(현 장춘)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도 있었다고 하는 곳이다. 사진으로는 담지 못했는데, 부산항 부두에서 내리니 신사가 있을 용두산, 도개를 하고 있을 영도다리, 웅장한 부산부청 건물 등이 부산에 내린 승객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게다가 인근 대각사와 소화장/청풍장까지 생각하면 정말 거대한 일본인 거류 구역이었음이 실감이 난다.

남쪽 지역이 이틀차에 주로 둘러본 구역이다.

서면으로 돌아와서 늦은 저녁. 점심을 점심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4시에 먹었기 때문에 저녁은 9시 넘어서 먹게 된 것 같다... 그래도 늦은 시간까지 열고 있는 밀면집이 있어서 다행이다. 부산에서 밀면 한 그릇 시원하게 먹어줘야.

이제 부산 여행을 마무리할 마지막 3일차. 중동 전공자가 세 명이나 모였으니 이슬람 사원을 안 들려줄 수 없다. 부산 성원은 부산에서 북쪽 금정구에 위치한 두실역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데, 1980년 리비아의 한 독지가의 지원으로 지어졌고, 2012년 터키 지원으로 한 차례 리모델링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인근에 카파도키아라는 터키 식당도 하나 있었다.

유흥가에 외국인 거주지까지, 한국 안의 '작은 중동'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태원 성원 인근과 달리 부산 성원 인근은 정말 평온한 주택가 한 가운데 있어서, 이슬람권을 여행해본 내 입장에서는 '그래 이게 이슬람 사원이지'에 더 걸맞는 분위기였다.

작고 평범하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성원의 내부.

조금 늑장을 부려서 나와서 대충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점심으로는 또 다른 부산 명물 음식인 낙곱새를 선택. 뭐 이제 알만한 사람은 아는 음식이지만 낙지+곱창+새우를 한 데 먹는 음식이다. 나는 이번에 처음 먹어보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낙곱새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였다.

엄청나게 매운 낙지를 새빨간 소스에 볶아서 주는 것이 서울 무교동 낙지볶음 스타일이라면, 부산의 낙지볶음은 굳이 따지면 전골에 가까운 종류의 음식이다. 이를 '조방낙지'라고 한다. 그러면 조방은 무엇일까. 아무 생각 없이 검색해보았는데 '조선방직'을 뜻한다고 한다.

조방낙지 자체는 1960년대 즈음에 생긴 음식이다. 그리고 조방낙지가 생겨난 곳은 부산에 위치한 조선 최초의 근대적 면방직 공장, 조선방직 앞이었다. '조방 앞에서 만들어진 낙지볶음'이라 조방낙지인 것이다. 조선방직은 1917년에 미쓰이 그룹이 세웠는데, 해방 이후에도 경영이 이어지며 1968년까지 존속했다고 한다. 방직공장은 노동집약적인 데다가, 식민지 조선에 얼마 안 되는 산업기반이었을테니까 조방은 부산에서도 꽤나 대규모 노동력을 고용하는 일대 경제 중심이었음은 틀림없다(여공 중심의 대규모 노동쟁의와 파업도 있었다고). 그러니 자연스레 조선방직이 있는 범일동은 '조방앞'으로 불리었고, 일종의 지명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부산인 친구에게 조방앞이라는 지명을 실제 써봤냐고 물어보니, 2030들은 아마 거의 쓰지 않았을 것이고, 부모님 세대가 종종 '조방쪽에서 보자'라며 사용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해주었다.

지금은 전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일본 제국이 조선을 식민화할 때 확보하고자 했던 주요 자원이 면화였음을 생각하게 한다. 목포 고하도에 미국 육지면을 조선에서 꽃피워내웠고, 이후 총독부의 지휘 아래 조선의 많은 농지가 일본의 면화 수급을 위한 공급처로 변모하게 된다. 어느 나라나 산업화 초기에 가장 중요한 산업은 노동집약적이고 필요한 기술 수준이 높지 않은 면방직업이었으니... 이것이 부산 낙곱새에 얽힌 '면화의 제국'의 이야기다.

그 다음 행선지는 구도심과 범일동 사이에 위치한 일본 적산가옥 정란각이다. 1943년에 일본인이 지은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인데, 해방 이후에는 고급 요정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후 근대문화유산으로 인정되어 일반인에게도 공개되었다.

역시 일본 가옥에서는 다도를..

아이유의 뮤직비디오 밤편지도 여기서 촬영되었다고 하고. 에어컨 바람 쐬며 다다미에 앉아서 차가운 녹차 홀짝이며 뒹굴 거리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이렇게 좋은 공간을 조금 더 문화적 스토리텔링을 부가하여 널리 알리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오버투어리즘은 방지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이후 다시 남포동으로 내려와서 부산근현대역사관에 방문. 옛 조선은행 위치이자 해방 이후 한국은행 부산지점이 들어섰던 곳을 최근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으로 만들었다. 1층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있고, 2층과 3층은 전시관으로서 부산의 근현대사를 전시한다.

전시 내용은 역시 좀 전형적인 민족주의 서사라서 아쉽긴 했는데 이 미적 센스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사진 하나 찍었다.

왼쪽의 육면체 건물이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이고, 정면에 찍힌 2층 건물은 동양척식회사 부산지점 건물이다. 이후 미문화원으로 사용되었다가 부산근현대역사관이 되었다. 최근에는 한국은행 건물을 본관으로 만들고 동양척식회사 건물은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으로 용도를 변경하며 재개장했다.

현재 한국에 남은 동양척식회사 건물은 세 곳인데, 각각 목포, 대전, 부산에 있다. 모두 일본 제국 권력의 침투와 함께 성장한 도시들이다. 대전의 경우 얼마 전 다녀왔는데 카페와 전시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전시 공간은 다소 소략했고, 본관의 전시도 조금은 아쉬웠기 때문에 조금 실망할뻔했다. 현재는 거의 지역 주민들의 무료 도서관처럼 활용되고 있었다. 근데 비치된 장서들을 보니 하나같이 근현대사에 대한 수준 높은 책들이 즐비해서, 실망을 거두고 책선정을 누가 했는지 감탄을 연발했다. ㅎㅎ

이쯤되니 땡볕 아래 삼일 간의 강행군으로 체력이 고갈되고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보수동 책방 골목은 봐줘야지 말하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미군 잡지와 일본 거류민이 남긴 고서들을 거래하며 전국 최대급의 서적 골목의 위상을 자랑했으나, 사람들이 책을 사지 않게 되고, 중고책 시장을 온라인 플랫폼이 장악하게 되면서 보수동 책방 골목은 눈에 띄게 쇠락하고 있다. 초등학생 때 옛날 만화 어떻게 구해보려고 아버지를 졸라서 왔던 적이 있었는데, 아마 18년 전쯤이었을 것 같다.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남아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때 내 기억보다 훨씬 쇠락해있는 것 같다는 인상만큼은 확실히 받아 안타까웠다.

마지막 행선지는 부평깡통시장에서 돼지국밥을 먹으며...

대선 소주를 얼큰하게 마시고 부산을 떠나 오송으로 돌아간다... 이 역시 1930년에 일본인 기업가에 의해 만들어진 대선양조라는 회사가 기원이라는데, 인터넷에서는 광복 이후의 역사만 나오지 광복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자료를 찾기가 어려웠다. 일설에는 대일본을 염두에 두어 '대조선'을 뜻한다고 하는데, 그럴싸하면서도 명확한 근거는 보이지 않아서 아쉬웠다.

뭐 어찌되었든 술은 대조선의 푸른병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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