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약사 (2) - 카자르 왕조, 혁명, 강철 군주
18세기 혼란기에서 무력한 카자르 왕조를 거쳐 레자 샤의 강철 주먹까지
사파비 제국이 멸망한 뒤, 이란은 1780년대 카자르 왕조가 다시 이란을 통일하기까지 혼란기를 거쳤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 권력이 약화되고, 국가 이외 세력의 자율성과 힘이 커진 데 있었다. 사파비 황제는 튀르크와 루르, 쿠르드 등의 유목 부족들을 거느리고, 시아파 성직자들을 통해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했다. 황제에 의해 직접 통솔되는 굴람(노예병) 부대는 최고의 엘리트들로서 제국 질서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사파비 제국이 사라지면서 이 모든 질서가 무너졌다. 유목 부족장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따라 이란 영토를 분할했고, 농민들로부터 자체적으로 세금을 징수해갔다.
국법을 강제할 통일 권력이 사라지니 도시 지역에서는 성직자들의 자율성도 크게 증대되었다. 이란의 도시에는 훗날 울라마(성직자)-바자리(시장 상인) 동맹으로 알려질 사회적 연합체가 등장하고 있었다. 도시의 소규모 장인과 유통 업자들은 바자르에 모였다. 바자르 인근의 모스크와 마드라사에는 시아파 신학을 평생 공부한 신학자들이 있었다. 바자르 상인들은 그들의 부를 통해 성직자에게 기부를 하고, 시장 내외의 다양한 송사를 맡겼다. 상인과 신학자는 같은 가문에서 동시에 배출되는 경우도 많았고, 거미줄처럼 얽힌 통혼 관계를 통해서 더욱 단단히 결속했다. 국가 권력이 부재한 가운데 시아파 성직자들은 국법보다 우선한 종교법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런 18세기 말의 상황을 상징하는 것이 우술리-아크바리 논쟁이었다. 아크바리 학파는 시아파 내에서도 개별 신도의 자율적인 샤리아(율법) 해석을 지지한 반면, 우술리 학파는 무즈타히드라 불리는 학식이 높은 성직자들의 모범이 일반 신도보다 우선함을 주장했다. 사회적 권위가 사라진 혼란의 시기에 일반 사람들은 우술리 학파의 권위 있는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의지하면서 풍파를 버텨야만 했다.
게다가 모스크와 마드라사는 유목 부족과 귀족 가문이 난립하는 이란에서 그나마 가장 개방적인 통로로 부상했다. 비교적 한미한 배경을 가진 이라도, 마드라사에서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여 명망 있는 성직자가 될 수 있었다. 이들 성직자는 유력 권력자와 바자르 상인들을 매개하면서 분열된 이란 사회를 묶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해내었다. 훗날 국가가 다시 이란을 통일하여 근대화를 추진했을 때, 70년의 혼란기 속에서 자율적 세력으로 부상한 성직자와 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파비 제국의 시아파 보급과 제국의 해체는 200년 뒤의 이란 이슬람 혁명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이것이 1800년 경, 아가 모함마드 칸이 이란을 재통일하고 테헤란을 수도로 하는 카자르 왕조를 세웠을 때의 상황이었다. 카자르 왕조는 이란 각지에 이미 확고한 세력 기반을 구축한 유목 부족을 사파비 시절처럼 온전히 제압할 수도 없었다. 테헤란의 성직자들을 후원하고 그들로부터 통치 정당성을 공급받는 정치 권력으로서 위상은 회복했지만, 카자르의 군주는 사파비 황제와 같은 권위가 없었다. 혼란기 동안 이란의 경제도 약화되었다. 18세기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유럽 국가들이 해양 무역로를 독점하면서 아시아 시장에서 지배력을 확대해가는 시기였다. 농업 경제는 유목 부족의 지배력이 강해지면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규모가 줄어든 도시에서 비단이나 도자기 같은 페르시아의 공예품도 경쟁력을 상실해 갔다.
19세기가 되었을 때 유럽의 공세는 더욱 강해졌다. 이란은 지리적 요인으로 인하여 영국과 러시아가 맞닿는 최초의 전선으로 등장했다. 러시아는 이란과의 전쟁에서 대승하여 1813년 골레스탄 조약과 1828년 투르코만차이 조약을 맺었고, 남코카서스를 이란에게서 빼앗아 올 수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는 치외법권과 무관세로 유명한 불평등 조약을 이란에 강제했다. 이에 질세라 해군을 이끌고 영국이 찾아왔고, 영국은 최혜국 대우를 요구하며 마찬가지 특권을 받아냈다. 인도에서 유입되는 영국 상인과 코카서스에서 찾아온 러시아 상인들이 이란의 무역 특권을 독점하고 테헤란 궁정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카자르 왕조도 유럽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근대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제르바이잔 총독인 압바스 미르자 왕자는 근대군을 만들려는 군사 개혁 노력에 더하여 유럽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근대적 지식을 습득한 새로운 엘리트층을 키우고자 했다. 하지만 러시아와의 전쟁과 근대화의 짐을 혼자 떠안은 압바스 미르자는 44세의 나이로 단명했다. 오늘날 이란인들은 그가 왕위를 이었다면 이란의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상상하기도 한다.
압바스 미르자의 뒤를 이어 근대화를 시도한 이는 재상 아미르 카비르였다. 1848년부터 1896년까지 이란의 19세기 후반기를 이끈 나세르 앗딘 샤 치세 초기의 재상이었던 아미르 카비르는 광범위한 농업, 재정, 산업, 군대, 행정 개혁을 총지휘했다. 아미르 카비르의 가장 큰 업적은 유럽인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근대적 엘리트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인 다룰 푸눈(다르 알 푸눈)을 건립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시작했지만, 다룰 푸눈에서 교육받고 유럽으로 파견된 학생들은 훗날 이란의 정치 발전을 주도할 가장 중요한 인재들로 거듭나게 되었다.
하지만 아미르 카비르의 강력한 개혁 조치는 울라마와 대귀족을 비롯한 카자르 왕조의 전통 엘리트, 무엇보다 나세르 앗딘 샤 자신에게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나세르 앗딘 샤는 아미르 카비르를 숙청하고, 훨씬 더 수세적인 근대화 프로그램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전제 통치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이란 정부가 주도적으로 활동을 하기보다는 외국 기업들과 정부에 이란의 자원과 상품을 판매하고 투자를 받는 거래가 다수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이란 경제의 전체적인 생산력을 크게 저하했다. 유럽 열강은 이란 경제의 전체적인 발전에 당연히 관심이 없었고, 자국의 무역 이익 극대화를 위한 전형적인 식민 투자에 집중했다. 다양한 전매권 양허를 통해 벌어들인 돈은 군대를 건설하고 행정을 개혁하는 데 쓰일 수 없었다. 그런 의지가 없기도 했지만, 유목민, 바자르 상인, 울라마라는 이란 사회의 막강한 세력들을 제압할 국가의 역량 자체가 부재했다. 나세르 앗딘 샤는 대신 골레스탄과 같은 화려한 궁전을 건설하고, 시서화와 같은 풍류, 유럽 순방 등에 몰두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의 치세 동안 이란은 꾸준히 변하고 있었다. 1890년에 샤가 담배 전매권을 영국인에 양도한다고 했을 때, 이란 사회에서 이미 성장하고 있던 민족주의 운동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란에는 인접한 오스만 제국에 머물며 압뒬하미드 치세에서 상대적으로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오스만의 경험을 흡수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슬람 세계의 각성을 촉구하는 범이슬람주의자가 되어 이란으로 돌아올 때가 많았고, 울라마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울라마와 시장 상인들은 이란인들의 삶의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 담배를 영국인에 양도하는 것에 분개하여 불매 운동을 개시했고, 전국적인 호응이 뒤따르면서 영국과 샤는 담배 양허를 취소해야만 했다.
담배 불매 운동의 승리로 자극받아 이란에는 근대적 정치 운동들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정체하는 것으로 보였던 나세르 앗딘 샤 시대의 시계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구에서 교육을 받은 자유주의, 계몽주의 성향의 개혁가들이 테헤란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러시아와 연결된 북부 지역도 중요했다. 남아제르바이잔의 타브리즈와 길란의 라슈트는 러시아령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와 직접 연결되는 곳이었다. 바쿠가 석유 도시로 번영하기 시작하면서 이들 지역에서 바쿠로 이주하여 고된 석유 노동에 종사하는 인구가 크게 늘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가장 낮은 임금을 받고 가장 열악한 작업에 종사하는 이란인 이주 노동자들을 포섭했고, 여기서 이란 최초의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했다. 울라마들 또한 변화를 겪었다. 서구 사상에 노출되고, 이슬람 세계 전반과 이란이 위협받는다는 의식을 각성한 개혁적 울라마들은 이란이 개혁되어야 할 필요성을 설교했다.
1896년, 이란 출신의 범이슬람주의 사상가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에 감명을 받은 비밀결사 대원이 나세르 앗딘 샤를 암살하면서 이란의 정치 위기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였다. 이란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열강이었던 러시아를 같은 아시아 국가가 무찌른 것은 이란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본을 배우자는 주장이 크게 늘었고, 일본 성공의 비결로서 ‘헌법’을 언급하는 입헌주의자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궁정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1905년 러시아가 러일전쟁 패전으로 대대적인 반 전제정 저항 운동 국면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더욱 진전되었다. 러시아와의 무역이 끊기면서 북부 지역에서 경제 위기가 찾아왔고, 분노한 시장 상인들은 시위를 시작했다. 개혁적 성직자와 바자르 상인들이 주축이 되어 시위는 샤의 탄압을 뚫고 대규모로 확대되었고, 이들은 헌법(마슈루테)과 의회(마즐리스)를 요구하는 정치 운동을 승리로 이끌었다. 1906년 이란 입헌 혁명이다.
그러나 입헌 혁명은 이란에서 안정된 헌정 국가를 창출하는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샤로 대변되는 전통 질서를 선호하는 보수적 울라마들은 의회에서 계속해서 완전한 헌정에 대한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헌정을 인정할 수 없던 샤는 쿠데타를 시도하여 국가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러시아 코카서스 혁명가들의 지원을 받는 아제르바이잔 혁명가들, 길란 지역의 밀림에서 벌어진 대규모 농민 항쟁, 중부와 남부 지역 유목민 세력들이 봉기하여 전제정 복원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란에 자주적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극히 우려한 영국과 러시아는 1911년에 합작을 통해 입헌 혁명을 중단시켰다.
결국 이란에 필요한 것은 영국과 러시아라는 외세를 몰아내고, 난립하는 지역 유력자, 특히 유목 부족을 제압하고 이루어내는 중앙 집권화였음이 드러났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이란으로 넘어온 전쟁의 물결은 이 필요성을 더더욱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동부 아나톨리아를 둘러싸고 벌어진 러시아와 오스만의 갈등은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던 이란 북부로도 넘어왔다.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킨 이란이 러시아군과 오스만군의 전장이 되면서, 국내 및 국제 교역은 중단되었고, 식량 징발로 인한 기근이 이란을 덮쳤다. 세계대전 직후 창궐한 스페인 독감까지 겹치면서 이 시기 이란에서 200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참혹하게 죽어갔다. 이런 거대한 정치적 위기 속에서 카자르 왕조의 마지막 샤는 겨우 10대 소년에 불과했던 아흐마드였다.
혼돈의 시기에 러시아 제국마저 무너지면서, 러시아의 혼란이 이란으로 또 다시 전이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의 적군과 반볼셰비키의 백군이 러시아에서 처참한 내전을 벌였고, 패주한 백군이 이란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백군을 추격한 볼셰비키가 카스피해의 안잘리 항구로 내려오면서 러시아 내전이 이란으로 확산되었다. 볼셰비키는 신속히 물러났지만, 코카서스에서 소비에트 권력이 수립되자 인접한 이란에서도 자극받은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했다. 특히 길란 지역에서 미르자 쿠첵 칸은 ‘페르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여 이란에서 제국주의와 봉건 질서를 혁파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세울 것을 천명했다. 사회주의 혁명의 확산을 두려워한 영국은 이란에 어떤 식으로 개입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대내외적 위기 상황을 수습하겠다고 등장한 사람이 있었으니, 러시아가 훈련시킨 근대적 부대였던 코사크 여단의 레자 칸이었다. 테헤란 북서쪽 가즈빈에서 봉기한 그는 군대를 이끌고 테헤란으로 쳐들어가 신속히 정부를 장악한 뒤 궁정의 실세로 등극했다. 신생 소비에트 정부와 우호적인 협정을 맺고, 그 대가로 길란의 사회주의 반란을 진압한 그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영국과도 상대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다시 구축했다.
레자 칸은 1923년 협상국을 몰아내고 오스만 제국을 최종적 붕괴로부터 구해낸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롤모델로 삼았다. 레자 칸은 아타튀르크의 터키와 마찬가지로 이란도 강력한 군사 지도자 하에서 중앙집권적 국가를 건설해야했고, 그를 통해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적인 발전을 추진해야 했다고 믿었다. 아타튀르크의 영감을 받은 레자 칸은 자신도 카자르 왕조를 폐하고 이란을 공화정으로 바꿀 것이라고 제안했으나, 보수 세력이 왕정만큼은 유지해야 한다고 반발하여 결국에 그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 이전 고대의 이름인 ‘팔레비’를 왕조의 이름으로 채택한 그는 이제 군 사령관 레자 칸이 아니라 팔레비 왕조의 황제 레자 샤가 되었다.
군대에 대한 완벽한 장악력을 갖춘 레자 샤는 이제 중앙집권화를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했다. 영국-페르시아 석유 회사로부터 석유 판매 대금을 일부 챙길 수 있게 된 그는 예산의 상당수를 군 건설에 투입하였고, 제1차세계대전으로 성능이 입증된 신무기인 전차와 전투기를 구매했다. 신무기와 조직력을 갖춘 군대는 구시대의 유물이 된 유목 부족들을 신속하게 제압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19세기 동안 제국주의 세력들이 설치한 전신선은 이란 전 영토에 걸쳐서 신속한 통신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개편된 중앙 부처와 지방 관청들이 긴밀히 소통하면서 조세 행정이 거의 최초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에 반발하는 지역 유력자들은 레자 샤의 강철 주먹에 짓이겨질 수밖에 없었다.
레자 샤의 질주는 계속되었다. 그는 이란을 통합하기 위해서 이란의 두 바다, 카스피해와 페르시아만을 잇는 이란 종단 철도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다양한 철도 노선 외에도 포장도로들이 여러 도시를 연결했고, 서유럽과 미국에서 수입한 트럭들이 도로를 오가면서 이란인들의 속도감과 공간 관념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레자 샤는 1925년부터 1941년까지 제위하면서 교육 기관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페르시아어를 가르쳐 소수민족과 페르시아인을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테헤란 도시 현대화 프로젝트와 가족법 및 복장 규정 제정에 이르기까지 온갖 개혁을 도입하고 그 시행을 감독했다. 그 재원은 영국이 아주 낮은 비율로만 제공해주는 석유 로열티로 충당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에는 농민과 도시민에 과중한 세금을 물려서 국가 건설에 투자하는, 20세기 비서구 국가의 아주 일반적인 개발 전략을 철저히 시행했다. 불만이 커져갔지만 대규모 저항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일부는 공포에 기인한 면이 있었고, 일부는 그 이전 이란이 겪은 혼란이 너무나 엄청났기에 레자 샤가 제공한 안정 자체를 수긍하는 데서 기인하기도 했다.
20여년 전 입헌 혁명으로 화려한 시작을 알린 의회의 기능도 유명무실해졌다. 레자 샤는 측근들을 변덕스럽게 교체하면서 권력을 공고화했고, 의회는 샤의 정책을 승인하는 거수긱가 되었다. 이전 시대에 강력한 자율성을 자랑했던 성직자들은 사파비 시대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국가에 포섭되기 시작했다. 레자 샤는 페르시아 정체성을 내세우고, 세속화를 추진하며 서구식 의복을 사람들에게 강요했지만, 동시에 울라마를 보호하고 이란 국민의 신앙을 인도하는 종교적 군주로서 스스로를 홍보했다. 물론 반발이 없지는 않았다. 1935년 마슈하드에서는 정부의 새로운 의복 정책에 반발하는 대규모 반대 운동이 터져나왔고, 시아파 최대 성지에서 농성하는 시위대를 지역 당국은 진압할 수 없었다. 서쪽 끝 아제르바이잔에서 파견된 샤의 군대가 들어와서 피를 흘리고서야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종교를 중심으로 한 이란의 반왕정 운동은 무르익지 않았다. 콤을 비롯한 다른 시아파 주요 도시에서는 반대 운동 없이 사태가 조용히 지나갔다. 45년 뒤의 혁명을 위해서는 국제 관계의 대격변, 이란의 근대화, 그리고 새로운 혁명 사상이라는 다양한 조건들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