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개황 (2) - 이란의 지리와 민족

이란 개황 (2) - 이란의 지리와 민족

남북으로 구분되는 이란의 기후. 주변국들과 소수민족들에 대하여

임명묵

이란은 대국이다. 이란의 영토는 근대사의 질곡으로 인하여 대거 축소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16배에 달하는 160만㎢를 자랑하고 인구는 약 9천만 명에 달한다. 유라시아 남서부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민족의 교차로임과 동시에 그 내부에도 수없이 다양한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란의 지도를 어떻게 읽어야만 할까?

이란의 지형은 주로 높은 산맥들이 즐비한 산악 지형이고, 기후는 강수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건조 기후에 가깝다. 그러나 이 사실이 단순히 이란이 낙타가 사는 신비의 사막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란인들은 주로 자국의 국토를 남북으로 나누어 이해하고는 한다. 실제 1907년에 영국과 러시아가 이란을 분할하기로 했을 때도, 이란을 북부, 중부, 남부의 세 권역으로 나누기도 했다.

1907년 영러 협약에 따른 이란 분할.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두 지역을 나누는 주요한 기준은 기후다. 사파비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선을 그어보면, 북부는 카스피해에서 유입되는 수분으로 강수량이 많고 그 때문에 초목도 더 형성이 잘 되어있어 푸른 편이다. 특히 서쪽의 높은 고원 지대는 바람이 세차고 추운 편이라 타브리즈 등지는 겨울에 영하로도 떨어지곤 한다. 카스피해에 면한 길란과 마잔다란 지역은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이라 쌀농사를 주로 지으며, 특히 길란의 무성한 숲은 정글과도 같은 것으로 유명하다. 애초에 정글이라는 말의 어원이 페르시아어로 숲을 의미하는 ‘장갈’이다. 이란의 북쪽은 우리가 흔히 ‘중동’하면 떠올리는 건조한 사막 기후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는 곳이다. 수도인 테헤란이 바로 이곳에 위치해 있고, 테헤란의 가장 유명한 풍경 중 하나가 도시를 끼고 있는 알보르즈 산맥에 내려앉은 눈이다.

길란의 정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테헤란의 숙소에서 촬영한 알보르즈 산맥

이란의 북쪽은 과거에는 유목민 세력, 근현대에는 러시아 세력과 부딪히는 땅이기도 했다. 사실 역사적인 이란의 북쪽 경계는 오늘날보다 훨씬 더 북쪽이었다. 남코카서스로 불리는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은 이란 제국의 오랜 권역이었고, 중앙아시아는 이란 제국의 직접 통치를 받지 않을 때가 많았지만 대부분이 이란계 민족이 거주하는 ‘이란 세계’의 일원이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은 북쪽의 이란계 유목민인 스키타이와 계속해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세에 동쪽에서 튀르크 민족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 뒤에 들어온 파괴적인 몽골군도 튀르크에 동화되면서 이 지역의 이란계 농경민들도 빠른 속도로 튀르크화 되였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에 이란계 언어를 쓰는 국가는 동남쪽 구석의 타지키스탄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중심으로 우즈베키스탄에는 광범위한 타지크어 공동체가 여전히 남아 있다.

어쨌든 이들 튀르크인들은 전통과 수준이 매우 높은 페르시아 문화를 받아들였고, 반대로 중앙아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이란인들은 튀르크어를 말하기 시작하며 투르코-페르시아 문화가 형성된다. 이들 투르코-페르시아 공동체는 몽골 제국 이후에 이란의 정치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부상했다. 몽골 침략으로 이란의 오랜 농경 인프라가 파괴되고, 많은 지역이 유목민이 정착하기 좋은 초원으로 변했다. 따라서 여러 유목민 부족들의 쟁패가 몽골 이후 이란 역사의 상수로 부상했는데, 그중에서 오늘날 이란의 기틀을 만든 이들은 서북쪽의 아제르바이잔계 집단이었다.

사파비 제국이 시작된 곳. 이란 북쪽 끝 아르다빌의 알 사피 영묘

하지만 북방의 튀르크 세력은 더 북쪽에서 국력을 키운 강력한 제국인 러시아에 복속된다. 러시아 제국은 19세기에 카자르 이란과 전쟁을 벌여 승전하고, 남코카서스 지역 전체를 장악한다. 이후 중앙아시아로 진출한 러시아는 투르크메니스탄과 타지키스탄을 제국의 남쪽 경계로 확보하며 카스피해 양쪽에서 이란과 국경을 맞닿게 된다. 이 러시아와의 연결망은 이후 이란에서 매우 중요한 통로가 된다. 가난한 이란인 노동자들은 타브리즈, 라슈트, 마슈하드를 거쳐서 러시아 제국의 바쿠와 타슈켄트 등지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러시아의 사회주의 사상을 흡수하여 돌아오기도 했다. 반대로 러시아군이 이란의 정치적 혼란을 제압하기 위해 파견한 군대도 같은 길을 통해 이란으로 걸어들어왔다. 테헤란이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에, 러시아의 존재는 이란은 물론이고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 영국과 미국 입장에서 언제나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남쪽은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이란의 북쪽이 카스피해와 맞닿아 있다면, 남쪽은 페르시아만과 접한다. 참고로 이 페르시아만이라는 명칭은 이란인들의 국가적 자부심과 연계되는 문제다. ‘아라비아만’이나 ‘걸프만’ 같은 용어는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나도 여행 중간에 ‘그 바다의 이름은 뭐지?’라는 사상 검증(?) 질문을 가끔 듣곤 했는데 ‘칼리제 파르스(페르시아만)’라고 답하면 함박웃음이 번져나가는 것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 이 지역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중동’의 이미지와 더 부합하는 곳이다. 한여름에 섭씨 50도까지도 올라가는 곳이고, 훨씬 건조하다. 물론, 석유와 천연가스가 대부분 매장되어 있는 곳이라 다른 의미에서 ‘중동’의 이미지와 부합하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생산된 이란의 에너지 자원은 이란이 경제 제재를 견디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남부의 아바단 정유소.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북쪽이 유목민, 주로 튀르크인과 연결되는 공간이었다면 남쪽의 이웃은 명실상부 아랍인이었다. 원래 고대 페르시아 제국 시절에 아랍인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낙타 유목을 하며 돌아다니는 오랑캐로 간주되고는 했다. 중세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은 서쪽의 비잔티움 제국과 중동의 패권을 놓고 쟁패를 벌이며 아랍 부족들을 각자의 편에 포섭하고 대리전을 벌이곤 했다. 하지만 이 아랍 부족들이 혁신적이고 새로운 종교의 깃발 아래에 통일되었다. 이슬람으로 뭉친 아랍 제국이 등장한 것이다. 이 아랍 군대는 사산조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동쪽으로 진군을 계속하여 오늘날의 이란, 중앙아시아, 파키스탄을 이슬람 제국의 권역 아래에 하나로 묶었다. 이란 세계가 아랍 제국에 의해 통일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지역은 이슬람 황금시대의 중심으로 빠르게 부상했다. 이슬람 황금시대의 대표적 학자들 중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유산을 흡수한 페르시아계가 상당했다.

아랍인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것은 종교였다. 수세기에 걸쳐 조로아스터라는 이란의 민족 종교 대신에 이슬람이라는 아랍의 종교가 이란인들의 정신 세계에 각인되게 되었다. 페르시아어는 이제 아랍 문자로 표기되기 시작했으며, 아랍어에서 유입된 어휘들이 페르시아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상술한 것처럼 반대로 페르시아 제국의 유산은 아랍의 부족 공동체에 불과했던 초기 이슬람 국가를 거대한 제국으로 발돋움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북쪽의 투르코-페르시아만큼이나 남쪽의 아랍-페르시아도 용광로처럼 중동을 하나로 묶어낸 것이다.

예루살렘(고드스)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솔레이마니 기념관에서 촬영.

하지만 이란이 이슬람의 양대 종파 중 하나인 시아파의 종주국으로 부상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이란의 주류 종파가 시아파가 된 것은 아제르바이잔계 사파비 제국이 시아파를 정체성의 근본으로 삼고, 순니파를 탄압한 16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 이란의 ‘시아화’를 추진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 바로 아랍 시아파와의 연계였다. 본래 시아파의 최대 성지인 카르발라와 나자프는 이라크에 위치하고 있다. 페르시아의 사파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이라크를 넘겨받기 위해 수차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시리아와 레바논을 포괄하는 레반트 지역도 역사적인 시아파의 중심지였다.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이 각각 순니파와 시아파를 대표하는 종파적 정통성을 기반으로 경쟁에 들어갔기에, 사파비 제국은 오스만 영토의 시아파 성직자들을 이란으로 초빙해 정착시킬 수 있었다.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와 시아파를 통해 이어진 연결망은 21세기에 들어 이란, 나아가 중동 지정학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게 된다.

북쪽에서 훗날 러시아가 들어온 것처럼, 남쪽에서 들어온 새로운 세력은 영국이었다. 인도를 장악하고 있는 영국은 해로를 통해서 페르시아만에 간단히 진입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만에 면한 항구들은 유럽 상품이 유입되고 페르시아 카페트가 수출되는 통로로 개발되었고, 영국은 남쪽의 상업 이권을 간단히 장악할 수 있었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 홍해와 아라비아해까지 영국은 제해권을 완벽히 통제하게 되면서 이란에 끼치는 영향은 계속해서 커졌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석유였다. 러시아에 아제르바이잔을 상실한 이란의 주요 석유 생산지는 아랍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후제스탄 지역이었다. 훗날 BP의 중추가 되는 영국-페르시아 석유 회사(Anglo-Persia Oil Company)는 이란의 석유를 개발하여 막대한 이득을 벌어들였고, 이는 영국의 지정학적 핵심 이익으로 간주된다. 1953년 모사데크 총리의 국유화 시도와 영국에 의한 쿠데타 또한 남쪽에서 들어온 영국 세력과 맺은 지난한 악연의 결과였다.

막대한 석유와 천연가스의 존재, 그리고 이란 내 아랍인 지역이라는 민족 문제는 1980년에 다른 방식으로 결합했다.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는 이슬람 혁명으로 혼란한 이란을 침공하여 이란의 아랍 지역(후제스탄, 이전 아라베스탄)을 이라크에 통합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후제스탄 아랍인들은 호메이니가 이끄는 혁명군에 참여하여 후세인의 기대를 배신했다. 이 지역은 오늘날에 이란-이라크 전쟁의 성지들로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박물관의 일부. 메소포타미아의 갈대밭의 작전을 형상화했다.

그밖에 서부, 동부, 중부까지 포괄하는 이란의 대략적인 주요 도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테헤란: 북부 지역에 위치한 이란의 수도, 19세기 카자르 왕조가 이곳을 수도로 삼으면서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페르시아 문명보다는 근현대사의 중심 무대이자 중동 최대의 대도시로서 접근해야 하는 곳이다.

타브리즈: 1500만 명에 달하는 이란 내 아제르바이잔인들의 역사적 중심이자, 이란 서북방 최대 도시. 터키와 역사적으로 연계가 깊으며, 러시아와 통하는 북방의 문이기도 했다.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주축이 되어 1906년 이란 입헌 혁명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케르만샤: 중서부 지역의 중심 도시로, 천만명에 달하는 이란 쿠르드인들의 도시다.

아흐바즈: 남서부 후제스탄의 중심 도시로, 인구 수백만을 차지하는 아랍인들이 주로 거주한다. 인근 이라크 국경 지대인 아바단과 호람샤흐르는 이란-이라크 전쟁 최대 격전지이자 주요 에너지 지대이다.

반다르압바스: 페르시아만에 위치한 핵심 항구 도시다. 특히 호르무즈의 관문으로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자헤단: 시스탄-발루치스탄 주의 주도이다. 이란에서 가장 분리주의가 강성한 발루치 민족의 중심 도시이고, 파키스탄과 맞닿아 있다. 그 때문에 총기가 많이 유통되어 있어 치안이 불안정하다.

마슈하드: 북동부 최대 도시이자 이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시아파 성인 이맘 레자의 영묘가 있어서 시아파의 가장 중요한 성지로 시작해 지금의 규모로 성장했다. 투르크메니스탄과 맞닿아 있다.

콤(곰): 테헤란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중북부의 도시다. 마슈하드와 함께 이란 내 시아파 최고 성지다. 호메이니의 종교적, 정치적 거점이기도 하다.

이스파한: 중부 지역의 중심 도시이자, ‘세상의 절반’이라는 별칭을 지닌 사파비 제국의 수도.

시라즈: 페르시아의 기원인 파르스 지역의 중심 도시로, 중남부 지역의 거점이다. 페르세폴리스와 핑크 모스크로 알려진 나시르 알 물크 모스크로 유명하다.

도시 목록을 보면 이란 소수 민족들의 존재가 금세 드러난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 가장 중요한 민족 집단은 역시 페르시아인이다. 이란인들은 자신들을 대부분의 상황에서 ‘이란인’이라고 칭하지만, 이란 내의 다른 소수민족과 구분해야 할 때면 ‘페르시아인’이라고 한다. 이들은 인구의 50~60%를 차지하고 있으며, 아케메네스 왕조부터 이어지는 페르시아 제국 문화를 통해서 주변 민족에 문화적 주도권을 행사한다.

2. 그다음 가는 민족은 북서부에 위치한 아제르바이잔인들이다. 인구의 15~2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북쪽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보다 인구가 많다. 사실 역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중심 무대는 타브리즈를 필두로 하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이었다.

3. 그다음에는 약 400만 명을 차지하는 루르인이 있다. 서부 지역에 호라마바드를 중심으로 하는 로레스탄이 있고, 이중 주요 유목민 집단인 바흐티야르인은 근대사의 향로에도 영향을 끼쳤을 정도로 강력했다.

4. 후제스탄의 아랍인과 발루치스탄의 발루치인은 남서부와 남동부에 있으며, 각각 약 200만명의 인구를 지니고 있다. 역시 각각 이라크와 파키스탄에 국경을 넘어 형성된 민족 공동체가 있다.

5. 인구는 작지만 종교적인 소수민족도 중요하다. 가장 대표적인 이들은 북부와 이스파한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와 유대인 공동체이다. 이들의 존재는 이란의 국체를 정할 때 현대사에서 계속해서 논란이 되었다. 그럼에도 현재 이란 마즐리스(의회)에는 소수 종교인을 위해 할당된 의석이 존재한다. 이란 정부는 이란 유대인의 존재를 근거로 자신들은 반유대주의를 신봉하지 않으며 오직 이스라엘의 ‘사악한 시온주의 정부’에만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지리적 이해를 바탕으로 이란의 역사를 간략히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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