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땅과 중동의 소용돌이 - (1)
제국의 해체와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갈등
우크라이나 전쟁이 교착 상태에 놓인 가운데, 10월 7일에 발발한 가자 전쟁으로 세계 질서는 한층 더 혼란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물론 이팔 분쟁은 새로운 것도 아니다. 1948년 제1차 중동 전쟁부터 시작된 이팔 분쟁은 20세기 내내는 물론이고 21세기에도 지속되었다. 문제가 전혀 해결이 안 되는 가운데 학계와 언론 모두에서 주목해왔던 문제이니만큼 분쟁의 배경과 갈등 양상도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갈등이기도 하다. 그래도, 이팔 분쟁을 역사적 시선에서 바라보는 글을 쓸 필요가 있다고 보여져 짧게라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스라엘 땅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이 속한 더 넓은 지역인 레반트가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과 레바논, 시리아와 요르단에 걸친 지역인 레반트는 고대 페니키아인들의 땅이자 블레셋인들의 땅, 고대 유대 국가가 있었고 훗날 페르시아 제국과 로마 제국을 거쳐 숱한 제국이 점유하게 된 지역이다. 문명의 중심지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를 잇는 교차로이자, 지중해로 뻗어 나가는 해로의 거점인 레반트 지역에는 오래 전부터 상업이 발전하였고 유서 깊은 도시들이 세워졌다. 7세기 아랍 세력이 흥기하여 이 지역을 정복하기 이전에, 레반트는 그리스-로마의 지중해 문명 하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곳이었다. 이후 아랍인들의 정복 후에 레반트는 점차 이슬람화 되었고, 다마스커스는 우마위야 칼리프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동이 빠르게 이슬람화되는 와중에도, 레반트의 험준한 산악 지대와 무역 도시들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지키거나, 순니파 이슬람에서 이단시하는 소수 종파를 믿는 종족들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키고 있었다.
계속해서 주인이 바뀌는 레반트에 장기간의 안정적 통치체를 수립한 것은 오스만 제국이었다. 셀림 1세는 이집트의 맘루크조를 정복하고, 이란의 신흥 도전 세력인 사파비 제국을 물리친 뒤 아랍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했다. 정치적으로 안정화되자, 이집트와 발칸, 레반트와 이라크를 잇는 제국의 무역로 하에서 레반트 지역은 혜택을 볼 수 있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 특유의 분권적인 지방 통치 체제는 레반트의 안정을 창출하는 데 중요했다. 오스만 제국은 각 공동체 구성원들을 그들의 신앙에 입각한 ‘밀레트’라는 행정 시스템으로 나누어서 통치했다. 제국에 세금을 충실히 내고, 조정의 요구 사항에 따른다는 전제 하에 각 종교 공동체는 해당 공동체의 율법 시스템에 맞게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부여받았으며, 종교 공동체 간의 갈등은 중앙 정부에서 조율하거나, 때로는 양측 모두 갈등이 확대되지 않도록 억제했다.
밀레트 제도는 오스만 제국이 내부 분열을 맞이하고, 특히 유럽 열강에 의하여 분할되기 시작하면서 큰 위기를 맞았다. 오스만 제국은 전성기에 유럽 상인들의 활동을 보장해주는 특전인 카피툴레이션을 발급했는데, 제국이 쇠약해지자 이는 유럽 상인들이 제국 안에서 마음껏 이득을 취해갈 수 있는 불평등 관계의 기초가 되었다. 유럽 열강은 오스만 제국에서 상업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현지 협력자들을 찾았는데, 많은 경우 원래 제국 내에서 상업을 오랫동안 맡고 있던 현지 기독교인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유대인, 레바논의 마론파 기독교인은 러시아, 프랑스, 미국, 영국 등의 정치적 후원을 등에 업고, 제국 내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게다가 기독교 지역이었지만 상업 민족이 주류가 아니었던 발칸 반도에서는 이에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이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며 독립을 추구했다. 제국의 주류 무슬림들은 갈수록 부를 축적하는 기독교/유대교 밀레트에 대해서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인-무슬림 갈등은 오스만 제국이 징병제를 실시하자 더욱 심해졌는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된 자치권이 점점 회수되고 제국의 확고한 신민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에 불만이었고, 무슬림들은 이교도와 같은 군인으로 복무를 해야한다는 데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제국을 구원해보려고 한 압뒬하미드 2세가 칼리프 권한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제국의 주요 정체성에 이슬람을 내걸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이탈과 반발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제국은 위기를 겪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만 위기를 겪은 것은 아니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도 같이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 동시다발적 위기는 오스만 제국의 레반트 통치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아랍인들이 각성하고 있었다. 압뒬하미드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헌정을 복원시킨 새로운 집권 엘리트인 청년 튀르크당은, 유럽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강력한 민족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보기에 발칸의 민족주의에 대항할 수단은 오스만 제국의 뿌리를 형성하는 튀르크인들의 각성밖에 없었다. 압뒬하미드 2세가 ‘제국의 이슬람화’를 추구했다면 이들은 ‘제국의 튀르크화’를 대안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제국 내의 아랍인들의 반발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비무슬림이 이탈하기 시작하며 튀르크를 강조하니 이제는 비튀르크 무슬림들이 이탈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제국 내 아랍인의 대다수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권을 지지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아무리 그 영향력이 미약해졌다 하더라도 이미 600년을 이어온 무소불위의 제국이었고, 술탄은 셀림 1세 이래로 400년 간 칼리프를 자처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이 이슬람 세계 전역을 침범하고 있는 상황에서, 압뒬하미드 2세 시기에 강화된 술탄-칼리프의 역사적 권위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1913년 파리에서 개최된 아랍 회의는, 아랍인들이 점차 ‘아랍성’이라는 민족성을 각성하고 있으며, 제국 안에서 새로운 아랍인의 위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아랍 민족주의의 시초가 될 아랍 회의는 제국 이후에 아랍이 걸어갈 진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터였다.
아랍인의 각성에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특히 러시아에서는 대러시아 민족주의가 강화되었고, 1905년 혁명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의 통치 구조에 불안정성이 늘어나면서 민족 분규가 격화되고 있었다. 캅카스의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갈등처럼 변경 소수민족 사이의 갈등도 있었지만, 가장 격렬한 갈등은 유대인을 상대로 일어났다.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거치는 광대한 동유럽에는 수백만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은 주로 도시 지역에서 자신들에 주어진 직분에 따라 생활을 했다. 하지만 러시아 민족주의가 강화되고, 농촌 경제가 불안해지자, 러시아인의 분노가 유대인을 향하게 되었다. 전제정은 대중의 분노가 자신들에게 오지 않도록 새로운 적을 지정해줄 필요가 느껴 반유대주의를 부추겼다. 유대인에 대한 집단 공격인 ‘포그롬’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면서 유대인들이 숱한 고통을 느꼈다. 오데사 항구를 비롯한 유대인의 거점 도시들에서는 이제 러시아 제국을 탈출하는 유대인 이민자들의 행렬이 끊이지를 않았다. 이들은 영국, 프랑스 같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서유럽 국가, 나아가 대서양 건너편의 신천지인 미국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나 19세기 유럽에서 각성한 민족주의가 유대인들에게도 강력한 영향을 끼치면서, 다른 행선지를 고민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동유럽의 끝이 안 보이는 포그롬도 문제였지만, 서유럽이라고 반유대주의가 없는 곳은 아니었다. 1894년에 프랑스에서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의 간첩 혐의를 둘러싼 공방인 드레퓌스 사건이 벌어지면서,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들은 유대인도 독립적인 민족 국가를 건설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된다. 얼마 안 가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인 테오도르 헤르츨이 주도한 시온주의라는 정치적 비전이 본격화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천년 넘게 나라 없이 떠돌던 유대인들이 어느 곳에서 자신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까? 많은 유대인들은 성서에 나오는 그들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 즉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시온주의라는 것을 접해보지도 못한 채 포그롬 박해를 피한 피난처를 찾고자 팔레스타인의 문을 두드린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하여 시온주의가 본격화되기 십여 년 전인 1880년대부터 동유럽계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알리야)가 시작되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까지 수만 명의 동유럽계 유대인들이 레반트 지역으로 건너왔다. 유대인 이주의 물결은 안 그래도 제국 내에서 상업 특권을 갖고 활약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에 대한 경계심이 컸던 제국 정부와 무슬림의 반발을 초래했다. 특히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레반트의 주류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아랍 지식인과 지도자들의 반발이 컸다.
레반트와 아랍 지역에서 쌓이는 민족 긴장은 제국들이 모조리 몰락하게 된 1914년의 제1차세계대전으로 격화되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등 전쟁 당사국들은 모두 상대편 제국의 분열을 획책하고자 노력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전세계적인 반제국주의 운동과 민족자결주의의 확산을 불러왔다.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유럽 포로들을 조직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해체하려고 했다. 오스만 제국은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인구를 선동하여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에 타격을 입히려고 했다. 러시아는 반대로 오스만 제국의 발칸 인구와 아르메니아 인구를 대상으로 분리주의 선전을 했다. 그리고 레반트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레반트에서 한참 남쪽에 떨어진, 모든 무슬림의 성지인 메카를 다스리는 하심 가문에게 오스만 제국의 해체와 통합 아랍 국가의 수립을 약속했다. 그리고 중구 세력(독일, 오스트리아)과 오스만 제국의 해체를 노린 다른 인구 집단도 영국에 접촉하고 있었다.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화학자 하임 바이츠만은 유대인이 영국에 협조해주는 대가로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약속받고자 했다. 당장의 전쟁 승리가 급했던 영국은 아랍인들에게는 맥마흔 선언을, 유대인들에게는 밸푸어 선언을 하면서 그 악명높은 이중 계약을 체결했다. 이중 계약을 모르는 아랍인들은 1916년에 아랍 대반란을 일으켜 오스만 제국을 압박했고, 유대인들은 영국에 전비를 제공해주었다.
물론 영국의 진짜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1916년에 영국은 프랑스 측과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체결하고,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역을 어떻게 분할할지를 결정했다. 물론 시대가 19세기 식의 식민 경쟁이 가능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국제 연맹의 회원국인 각국이 위임 통치를 맞는 방식이 될 것이었다. 그 결과 레반트는 프랑스 위임통치령이, 이라크는 영국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그 여파로 탄생한 아랍의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의 역사는 너무 복잡하다. 간단하게만 정리하자면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1919년부터 위임통치령으로서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에서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으나,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반발로 인하여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아랍에 개입하는 정도를 줄여갔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영국과 프랑스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촉발된 아시아의 반식민, 민족주의 운동이 제1차세계대전으로 그것이 거대하게 확대되는 과정이 갖는 파급 효과를 간과했던 것 같다. 유럽식 교육을 받은 새로운 세대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을 ‘일본처럼’ 만들고자 했다. 게다가 유럽의 구 열강과는 다른 이념을 설파하기 시작한 신흥국 미국과 혁명국 소련도 반제국주의와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고 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위임통치를 수용하기에는 아시아가 이미 각성했었다.
그리하여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을 전후로 한 시점에 각종 아랍 국가들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1921년에는 하심 가문이 통치하는 요르단 토후국이 수립되었고 1946년에 독립했다. 이라크는 위임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켜 1932년에 독립했다. 프랑스의 레반트에서는 식민 제국을 유지하고자 한 프랑스의 시도가 더 길게 지속되었지만, 나치 독일에 프랑스가 정복당하면서 제국 통치가 불가능해졌고 위임통치령의 독립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해안과 산악 지역의 기독교인 다수 지역을 묶은 레반트의 작은 행정 구역이 ‘레바논’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고, 나머지는 시리아가 되었다. 이미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반독립 상태로 영국의 보호국이었던 이집트도 1922년에 독립국이 되었다. 최초로 영국이 오스만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라고 설득했던 헤자즈 지역(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곳)은 역내의 혼란을 틈타 내륙 네지드의 사우드 가문에 의해 정복되었다. 영국이 사우드 가문이 아라비아 반도의 패자가 되었음을 인정하자, 사우디아라비아가 설립되었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은 독립 이후에도 수십 년이 지속되지만, 어쨌든 아랍 국가들은 새로운 20세기에 맞추어서 오스만 제국의 폐허에서 독립을 얻을 수 있었다.
각 지역의 아랍인들이 나름의 독립국을 형성하는 가운데, 영국이 관리하는 또 다른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었다. 위임통치 체제에 아랍인들이 반발하며 민족주의를 깨우치고 있는 동안에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는 가일층 극심해졌다. 제1차세계대전은 러시아 제국 지역에 상상을 초월하는 포그롬을 격발시켰으며, 독일군과 러시아군이 오가는 그 모든 지역에서 유대인들은 약탈과 폭력의 대상이 되었고, 이런 대혼란은 1920년대에야 비로소 끝나는 러시아 내전기까지 지속되었다. 러시아 혁명과 소련의 성립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볼셰비키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이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피해 러시아를 떠나는 이민자의 수도 폭발했다. 역시나 그들 대부분은 미국이나 서유럽을 향했으나, 일부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앞선 세대가 닦아놓은 기반에 합류했다.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탄생한 신생 독립국에서도 유대인은 수난을 겪었다. 폴란드나 헝가리라고 해서 결코 유대인에게 호의적인 곳은 아니었고, 유대인을 향한 차별과 불만은 이곳에서도 극심했다. 제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 동유럽 신생 독립국의 탄압을 피해 1920년대 10년 간 수만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그리고 1930년대가 되었을 때는 진정으로 엄청난 이주의 물결이 시작되었는데, 이번에 문제의 핵심은 러시아가 아니라 독일이었다. 러시아의 포그롬보다 한참은 더 가혹한 반유대주의 정책을 국가적으로 추진한 나치 독일의 핍박을 피해, 1929년부터 1939년까지 10년 동안 25만 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유입되었다. 유럽의 반유대주의가 계속해서 팔레스타인 땅으로 유대인을 송출하자,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점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과정이 계속 지속되면 팔레스타인 땅이 영국의 지원을 받는 유대인의 땅이 되는 것은 아닐까? 아랍 각지에서 독립 국가가 수립되거나 자치령이 만들어지는 가운데 팔레스타인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이중계약 문제로 소외되고 있었다. 특히 쏟아져 들어오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지 않는 아랍계 부재지주(不在地主)로부터 토지를 구매하면서 팔레스타인의 아랍계 소작농들의 경제적 처지가 위협받고 있었다. 땅을 잃게 된 빈농들은 도시로 유입되어 빈민가를 형성했고, 사회적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유대인과 무슬림 모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둘러싼 충돌이 잦아졌고, 1929년에는 아랍인에 의한 폭동이 발생해 여럿의 유대인 사망자들이 발생했다. 1930년대에 유대인 이주 물결이 이전과는 다른 수준으로 유입되면서, 아랍인과 유대인의 갈등은 더 잦아지고 더 격렬해질 것이었다.
아랍인들은 땅을 빼앗기고 영국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고 분개했지만, 유대인의 입장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시온주의의 신화 아래에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곳은 1880년대부터 반세기에 걸쳐서 동유럽을 휩쓴 반유대주의 폭력으로부터, 유대인들이 건설해내야만 했던 피난처였다. 제1차세계대전과 1920년대에 지속되는 내전, 나치즘, 파시즘의 광풍까지 겪고 온 이들은 자신들이 깔보는 아랍인들의 사정을 봐줄만큼 한가한 태도를 보여줄 수 없었다. 1931년, 유대계 무장조직 이르군이 창설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