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 대종주 (3): 숙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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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에는 드디어 동행과 접선하여 본격적으로 목적을 정해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날 저녁에 기차를 타고 카잔으로 갈 것이었어서, 낮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보내기로. 일단 이번에 볼 것은 스탈린 시대 숙청 희생자들의 묘다. 모스크바 남쪽의 레닌스키 프로스펙트에서 시작.
점심은 북한 식당 '고려'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솔직히 북한 냉면이야 그저 그랬고, 오히려 같이 주문한 두부구이가 정말 맛있었다. 특히 양념장이... 태국에서부터 못 먹던 조선 음식을 오랜만에 먹으니 정말 인간은 고향을 떠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북한이 고향은 아닙니다만...
당연하게도 북한 종업원들이 서빙을 하는데 무의식적으로 러시아어로 물어보다가 다시 조선어로 바꿔서 응대하는 게 재밌었다. 러시아어로 쓸 때는 무뚝뚝하고 굵은 목소리가 나오는데 조선어로 말하니 갑자기 목소리가 간드러지게 바뀐다.
기독교 권이라서 그런지 이런 수도원에 딸린 묘지들이 참 많다. 그루지야에서도 그런 수도원 묘지를 한 군데 가기도 했었는데.. 수도원과 묘지에도 당연히 '급'이 있다. 국가의 최고 영웅들만 매장되는 크렘린 벽묘지를 제외하면 러시아/소련의 명사들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묘지에 묻혀 있다.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옐친 같은 정치인부터, 마야코프스키나 쇼스타코비치 같은 예술가까지. 몇 년 전에는 성악가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가 묻히기도 했다. 이번에 방문한 돈스코이 수도원 묘역은 노보데비치 정도는 아니기에, 묻힌 사람들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나름 명망 있는 인물들이라는 느낌은 금세 받을 수 있었다.
숙청 희생자들을 보러 갔는데 얄궂게도 대문에서부터 대숙청의 사형 집행자 바실리 블로힌의 묘가 나타났다. 그는 대숙청 시기에 NKVD(내무인민위원회)의 수석 사형 집행인으로 수만 건의 총살을 직접 집행했다고 하며, 카틴 숲의 폴란드 장교 7천 명의 사형도 관장했다(출처: 위키피디아). 스탈린 사망 이후에 면직되고 얼마 안 가 1955년에 죽었는데, 공식적 사인은 자살이었다.
묘 밑을 보면 그의 자녀들과 함께 묻혀 있는 듯 하다.
사형 집행자를 지나 길을 가다 보면 숙청 희생자들의 묘가 나온다. 워낙 많은 이들이 죽고 개별적 묘도 안 남기고 뿌려졌다 보니 명판만 묘에 저런 식으로 붙였다. 몇 이름은 내가 아는 이름들이기도 하다.
더 가면 러시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대조국전쟁 전몰자 기념비가 있다.
수도원 묘역을 나오려고 하는 도중에 눈을 사로 잡는 기념비들이 있어서 살펴 보았는데, 이 또한 '정치적 억압의 희생자 추모비'였다. 조금 더 살펴 보니, 앞서 본 것은 1930년대부터 1942년까지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이고, 여기는 1945년부터 그 이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이었다. 여성 동상 바로 뒤에는 1948년에 레닌그라드 지역 당에 대한 대대적 숙청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비가 서 있고, 그 옆에는 제2차세계대전 기에 소련에 의해 억압 당했던 다른 국가들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비가 서 있다.
1993년에 일본 정부와 함께 조성한 추모비다. 많은 일본군 병사들이 만주 작전에서 소련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시베리아로 끌려 갔고, 역시 많은 수가 노역에 종사하다가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사망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숙청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이 따로 또 있다고는 하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나왔다. 따로 개별적 묘역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벽에 이렇게 납골당처럼 안치를 하는 듯 했다.
그 다음 행선지는 레닌스키 프로스펙트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코무나르카 처형장. 2019년에 추가로 연장된 1호선 소콜니체스카야선을 타고 맨 남쪽에 있는 올호바야 역에서 내렸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가면 코무나르카 처형장이 나온다.
처형장이라고 생각하고 봐서 그런지 조금 음산한 느낌이 들기도..
이 땅에 정치 테러의 희생자 수천 명이 묻혀 있다. 그들을 영원히 기억한다!
1938년에 처형된 정치, 사회 엘리트들이 여기에 다수 묻혔다. 대표적으로 니콜라이 부하린. 물론 처형장이라 돈스코이 묘역과 마찬가지로 개별 묘역이 있는 게 아니라 일단 흩뿌려 놓고 소련 해체 이후에야 추모 공간을 조성한 것 같았다.
그런데 월요일은 닫는다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지하철에 버스에 머나먼 남쪽까지 왔는데 허탈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묘역 옆에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초원을 보니 좋았다.
물론 섬뜩한 역사의 비극이 바로 옆에서 펼쳐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런 저런 음악들을 들으며 별 것 아니어 보이지만 아름다웠던 풍경을 감상했다.
모스크바 시내로 돌아가면 슬슬 기차 시간이 다가올 것이라 시내 중심부에서 딱 하나만 더 보고 가기로 했다. 목적지로 가던 중 나타난 이 건물은 '비즈니스 센터'라는데 양식이 무슨 스탈린의 7자매 양식이랑 비슷해서 흠칫 했다. 찾아보니 'Biznes Tsentr Oruzhheinyi'인데 뜻은 살벌하게도 '무장한 비즈니스 센터'다. 이 자리는 원래부터 입지가 좋아서 1970년대부터 마천루를 지을 계획이 있던 곳이었는데, 소련 후기에 전혀 진척이 없다가 한참 뒤인 2000년대에야 공사가 진행이 되었다고 한다. 양식은 실제로 '신스탈린주의' 양식으로 모스크바의 스탈린의 7자매를 의도적으로 오마주한 것이라고.
당연히 이 건물을 보러 간 것은 아니었고,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기념상이 있다길래 보고자 해서 왔다. 개인 화기의 대명사 'AK'의 개발자인 그는 1919년에 태어나 2013년까지, 러시아의 20세기 현대사를 모두 눈에 담고 그 역사에 참여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여행 목적지 중에 칼라시니코프 공장이 있고 그가 눈을 감은 도시 이제프스크가 있기도 하거니와..
러시아어 위키피디아를 찾아 보니 이 동상은 건립 때부터 굉장히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푸티니즘'으로 상징되는 러시아의 군국주의화 경향을 비판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았다는 살인 병기를 왜 자랑스럽게 모스크바 한 복판에서 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논쟁을 제기했다. 조각가 셰르바코프를 비롯한 옹호자들은 칼라시니코프 소총 자체가 이미 러시아의 문화 브랜드이며, 세계 평화와 애국을 위해 올바르게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받아쳤다.
셰르바코프는 "이 무기는 평화 유지와 악에 대한 승리의 상징"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지금도 우리는 나토군에 포위되어 있지 않은가."
아무튼, 이제 카잔으로 떠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