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 대종주 (4): 드디어 볼가강
볼가강을 거슬러 올라가 스비야지스크 섬에 도착하다.
3년 만에 모스크바 카잔 역에 도착했다. 앞은 스탈린의 7 자매 중 하나인 레닌그라드 호텔.
20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서 모스크바로 향하는 여행을 했었는데 그 때 카잔역을 통해서 모스크바에 도착했었다. 원래 정석대로라면 야로슬라블역으로 갔어야 하지만...
러시아의 주요 역에는 이렇게 '밀리터리 굿즈' 가게들이 있는데, 이런 데 와서야 우크라이나 전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바로 'Z'.
모스크바 카잔스키역은 동쪽으로 가는 숱한 열차들이 출발하는 주요 기점이다. 러시아의 철도역 이름은 주요 목적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다. 카잔역 바로 근처에는 야로슬라블역과 레닌그라드역이 있는데 이 두 역도 모두 야로슬라블과 레닌그라드 방향 철도가 놓여 있는 역이다.
내가 탈 기차가 화면에 떴다. 시베리아의 주요 도시 바르나울까지 가는 기차인데 나는 겨우(?) 12시간을 달려 카잔에서 내릴 것이다. 아마 누군가는 3600km를 달려 바르나울까지 갈 것이다.
17호차는 저 멀리 끝에 가야 나온다.
많은 걸 생략해서 카잔역에 도착. 카잔은 볼가강의 남쪽에 구시가지가 있고, 북쪽에 주로 주택 단지를 중심으로 건설된 신시가지가 있는데, 요새 대부분의 기차는 신시가지에 새로 지어진 카잔-2 역에 정차하는 것 같았다. 3년 전에도 이 역을 통해서 모스크바로 향했다. 이 날의 일정은 먼저 카잔 역에서 내려서 볼가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를 타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빠르게 택시를 잡아서 이동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Rechnoi Vokzal. 강변 역이라는 뜻인데 주로 배를 타는 선착장을 지칭하는 말이다.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는 무슨 덩치 큰 개들이 잔뜩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반 년 전에 개한테 물린 경험 때문에 조금 움찔 했으나 우리 집 그 놈보다 훨씬 온순한 친구들이어서 이내 경계심을 거둘 수 있었다.
카잔 시내에서 보는 볼가강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광활함이 느껴지는 강이었다.
배가 오길래 우리가 타는 배구나! 하면서 갔는데, 승무원이 표를 확인하더니 옆에 다른 배를 타라고 그래서 헐레벌떡 뛰어 갔다. 저 배보다 훨씬 허름한 배였지만 6천원에 2시간을 타고 가는 걸 생각하면 뭐 만족스러운 배였다.
드디어 시작된 볼가강 항해. 우리가 향하는 목적지는 카잔에서 볼가강 상류로 가면 나오는 '스비야지스크 섬'이다. 이반 뇌제 시기 카잔 칸국 공략을 위해서 러시아군이 만든 요새에서 출발한 고을이라고 하는데, 나와 동행 모두 카잔 도시는 이미 볼 걸 많이 봐서 '볼가강을 따라 가보자'는 차원에서 선택한 관광지였다.
직선 거리로는 대략 30km 거리인데, 이곳 저곳 들리면서 가느라 대략 편도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길이다.
강 건너 편의 농촌 마을 '베르흐니 우슬론'. 하루에 한 번 왔다 갔다 하는 배편이지만, 카잔까지 가는 도로 교통편이 빙 돌아야 하는 것을 생각했을 때 아마 이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이 배편을 진지한 교통 편으로 쓰고 있을 것도 같았다. 옛날에는 더욱 더 그랬을 것이다.
중간에 사람들이 강변에서 캠핑장을 차리고 바베큐를 준비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스비야지스크 섬.
선착장에 도착했다. 소련 해체 전에 이 마을 인구는 750명 가량인데, 지금은 250명으로 확 줄었다고 한다. 소련 해체와 그 뒤를 이은 사회 변동은 농촌의 인구를 도시로 집중시키는 2차적인 도시화를 가속화했다.
일단 러시아어권의 주요 길거리 음료인 크바스를 한 잔 마시고 돌아보기로 한다. 크바스는 보리를 발효시켜서 만든 무알콜 탄산 음료인데, 달고 시큼하고 시원해서 여름철에 길거리에서 먹기 제격이다. 생맥주 기계 같은 데서 뽑아 주는데 우크라이나에 여행할 때는 길거리마다 크바스 노점이 있어서 입에 달고 살기도 했다.
스비야지스크 섬에서 올라가면 바로 나오는 내전기 박물관.
적백내전 당시 백군이 카잔과 볼가 지역을 위협하자, 붉은 군대 사령관인 트로츠키가 직접 스비야지스크 섬으로 내려와서 백군 진압을 지휘했다고 한다. 아마 옛 러시아의 오랜 요새가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렸으니 한다.
'붉은 삼각형으로 백색을 쳐라'라는 유명한 추상화 프로파간다를 오마주한 전시물이다. 이 전시관은 벽을 따라서 러시아의 서쪽 끝부터 동쪽 끝까지 내전 상황이 주욱 펼쳐져 있는, 굉장히 인상 깊은 전시관이었는데 다 소개할 수는 없겠다. 모스크바에서 스비야지스크를 거점으로 카잔을 공략하고자 하는 붉은 군대의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러시아 내전은 러시아의 다른 전쟁과 달리 정말 러시아 온 국토에서 벌어져 러시아인들끼리 싸운 전쟁이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다른 전쟁보다도 더 끔찍했고, 푸틴 정권의 러시아에서도 그 해석을 '올바르게' 내리는 데 난점을 겪고 있는 듯 했다. 지금은 백군과 적군 모두 러시아를 위한 애국자였다는 식으로 정리하고 있는 듯 하지만 말이다.
전반적으로 섬은 민속촌 느낌이 강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 옛 러시아를 추억하는 노인들이 많이 보였는데 이런 마차는 당연히 아이들이 딱 좋아할 법한 아이템이었다.
스비야지스크는 원래 섬은 아니었는데, 여기서 남쪽에 댐을 지으면서 많은 부분이 수몰되어 사실상 섬이 된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 육로가 한 줄기 있어서, 차량을 통해 접근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배를 타고 내린 수많은 사람과, 그에 버금가게 차를 끌고 온 수많은 사람들을 보자니 섬의 인구 250명은 훌쩍 넘기는 것 같았다.
요새 러시아 도시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정치적 탄압의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비'가 여기도 있었다.
이 성당은 유네스코 문화 유산이었다. 솔직히 정교회의 역사를 잘 모르는 입장에서, 정교회 성당은 그게 그거인 느낌이 강하다. 건물은 예쁘고 멋있지만, 내용을 모르니 감흥이 생길 수가 없는. 그래도 유네스코라는 말을 보자마자 무언가 생각지 못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관광 설명을 해주시는 정교회 성직자.
이 성당은 앞서 본 성당과 다른 성당인 우스펜스키 성당이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정말 관광객들이 넘쳐 흐르고 있다.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만 살짝 피하면, 정말 호젓하고 평안한 러시아 시골의 그림 같은 풍경이 어디든 펼쳐진다. 왜 이 곳에 이토록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지 알 것만 같았다.
16세기, 17세기 즈음에 지어진 이 건물은 18세기 즈음하여 석조 건물로 나름 재건축했다가, 2010년대에 옛 모습이 더 낫다고 판단되어 다시 그 옛 목조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고 했다. 역시나 소소한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앞선 성당도 그렇고 이 예배당도 그렇고, 머리에 천을 쓴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경건한 자세로 성당에서 성호를 긋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이 세대가 바로 1980년대에 '종교의 부활'에 가장 앞장 섰던 세대가 아니겠는가.
이쪽 내부는 완전 민속촌이다.
어린 애들이 모여서 활과 석궁 사격을 체험하는 사격장도 있었다.
이 분은 피부가 너무 창백한 데다가, 저 복장이 너무 잘 어울려서 솔직히 마네킹인 줄 알았다. 그런데 눈을 꿈뻑이시더니만 갑자기 일어서시는데 미라가 부활한 것 같아서 순간 소리 지를 정도로 깜짝 놀랐다. 나를 보고 웃으시더니 다시 자리에 앉으셔서 포즈를 취하시는데 관광객이 아니라 직원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쓰고 있는 관은 러시아 군주의 상징인 '모노마흐의 관'인데, 아시아적인 저 디자인이 러시아의 문화 혼종적인 면모를 잘 드러내 준다.
섬의 민속촌 느낌 나는 관광지에서 나오면 러시아 내전기의 용사들을 위한 추모비와, 제2차세계대전의 전몰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서 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일었다는 게 놀랍기 그지 없다. 그러나 중세 러시아 느낌으로 가공된 민속촌보다 훨씬 더 가까운 기억을 품고 있는 현대사의 기념비들에 찾아 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이제 다시 카잔으로 돌아간다. 카잔에서 9시에 출발해 11시에 도착하는 배가 하나 있고, 오후 3시에 출발해 5시에 카잔으로 돌아가는 배가 있다. 딱 한 나절 섬을 돌아보고 놀기 좋은 코스다. 물론 1박, 아니 한달 살이를 해도 전혀 아쉬울 게 없는 그림 같은 섬이기도 하다.
안녕... 스비야지스크 섬...
러시아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는 게 인상적이어서 찍어 보았다.
거대한 산업 시설이 있는 카잔 역에 도착.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러 이동한다.
다음 글에서 더 얘기할 것인데, 카잔이 속한 타타르스탄 자치 공화국은 러시아에서도 역사적으로, 현대 정치적으로도 굉장히 특별한 지위를 지닌 공화국이다. 이 지하철만 해도 전통 러시아 양식이 아니라 타타르 민족 예술 양식을 반영하여 디자인 된 것이 눈에 띤다(소련 시절에 개통한 타슈켄트 지하철도 정도는 다르지만 어느 정도는 비슷하다).
타타르스탄 자치 공화국 답게, 러시아어와 민족어인 타타르어가 어느 곳을 가나 병기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왼쪽 벽에는 Gabdulla Tukai Meidany, '압둘라 투카이 광장'이라는 타타르어 역명이 붙어 있는데, 사진에 안 나오는 오른쪽 벽에는 러시아어로 'Gabdulla Tukai Ploshchad'라고 러시아어 역명이 붙어 있다.
갑둘라 투카이를 표현한 타일.
우리가 하차할 역은 '크레믈료프스카야', 크렘린 역이다. 크렘린 하면 러시아 정부를 상징하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그 크렘린을 생각하는데, 사실 크렘린은 고-중세 러시아의 성, 요새를 뜻하는 일반 명사다. 카잔에는 '하얀 크렘린'이 지역의 명소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어 있다.
숙소 앞에 펼쳐진 운하.
카잔의 '인싸 거리'인 바우만 거리를 따라 가보았다. 3년 전에 갔던 길인데, 겨울이었던 그 때와는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이 신선했다. 이 가게는 맥도날드를 대체한 그 가게, '프쿠스노 이 토치카(맛있으면 그걸로 끝)'이다. 가게 안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야외석도 만석이다.
카잔의 대표적 문화 유산인 루터교 성당. 위에는 전망대가 있고, 정해진 시간마다 종을 울리는데 소리가 인상적이다.
카잔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성악가 표도르 샬랴핀(샬리아핀)의 고향이기도 하다. 루터교 성당 옆에는 샬랴핀 호텔과 샬랴핀 동상이 서 있어서 그를 기리고 있다.
샬랴핀은 러시아 제국 시기에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가수였다가, 혁명과 볼셰비키 체제 하에서 결국에는 서방으로 망명을 선택했던 수많은 지식인/예술가 그룹의 일원이었다. 녹음 기술이 발전하던 시기의 가수였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유튜브에서 그의 노래를 여전히 들을 수가 있다.
3L 맥주와 안주 세트를 마시면서 카잔의 밤을 보내고..
하늘 색깔과 운하의 물 빛이 똑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숙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