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 대종주 (5): 카잔, 동쪽으로 향한 창문

볼가 대종주 (5): 카잔, 동쪽으로 향한 창문

볼가강 중류의 역사적 도시이자 러시아의 동서가 교차하는 공간.

임명묵

카잔은 러시아 연방의 타타르스탄 자치 공화국의 수도로, 1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지닌 볼가강 중류의 중심 도시다. 이 지역은 중세 시대부터 볼가강의 지류들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어서 교역 중심지로서 발전한 곳이었는데, 카잔에서 남쪽으로 200km 가량 떨어져 있는 도시 볼가르가 대표적이다. 이들 '볼가 불가르'는 남쪽의 중앙아시아, 인도양 세계와 유라시아 북부의 삼림 지대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으며 국가로 성장했다. 볼가 불가르는 키예프 공국 이전에 러시아에 건국된 최초의 국가 단위의 정치체였다.

이후 몽골이 침입해 들어오면서 이 볼가강 중류 지역은 킵차크 칸국(주치 울루스)의 영토가 되었는데, 카잔은 킵차크 칸국이 쪼개지면서 세워진 카잔 칸국의 수도가 되면서 본격적인 역사의 중심지로 등장하게 된다. 1550년대에 있던 이반 뇌제의 정복전 이후에 카잔은 러시아의 동방 경략의 가장 주요한 거점이 되었다. 하여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보니 '스타라야 카잔', 카잔 크렘린을 중심으로 한 구시가지는 민속촌 관광의 느낌이 꽤 강하게 난다. 이 마차는 예카테리나 대제가 카잔에 두고 간 마차를 모형을 따서 전시한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 역사의 많은 주요 인물, 특히 동방과 관련된 인물들이 수없이 카잔을 거쳐갔다.

카잔은 타타르스탄 자치 공화국의 수도라는 점이 또 중요하다. 사실 많은 소수민족 공화국이 훗날에 이주해 들어온 러시아인에 비해 인구가 밀려 명목 상으로만 소수민족 자치 공화국인 경우가 많다. 가장 극단적인 예시는 유대인 인구가 1%에 불과한 극동의 유대인 자치주다. 하지만 타타르스탄은 다르다. 공화국 전체에서 타타르인 인구는 러시아인보다 많다. 도시인 카잔에서는 러시아인이 근소하게 많지만 그럼에도 러시아인과 거의 비등한 인구 수를 자랑한다. 그러다 보니 도시에는 어딜가나 러시아어와 타타르어가 병기되어 있고, 외관부터 확연한 타타르인들을 보는 것도 너무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1990년대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에 타타르스탄은 무슬림 민족 문화 운동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되었는데, 이 운동이 분리주의까지 가지 않는 것이 확인된 이후에는 러시아인들도 타타르스탄을 독특한 민족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관광지라고 생각하면서 많이 찾고 있다. 사진에 있는 타타르인 전통 과자인 '착착'은 그 대표적 상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꿀 강정 같은 과자인데 정말 어딜 가나 착착을 팔고 있었다.

카잔의 인싸 거리 바우만 거리의 전자 제품 매장. 제재에도 불구하고 성업 중인 것 같았다.

카잔의 주요 쇼핑 센터이자 교차로에 위치한 레프 구밀료프 동상. 러시아의 유명 문호 안나 아흐마토바의 아들이기도 한 구밀료프는 지리학자로서 러시아 역사를 연구했고, 러시아의 역사는 서쪽과의 교류가 아니라 동쪽과의 교류를 통해 진정으로 위대해질 수 있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대중화시킨 대표적인 학자다. 구밀료프는 몽골의 러시아 지배가 러시아 역사를 서유럽으로부터 끊어낸 역사의 비극이 아니라, 러시아인들이 제국을 건설할 수 있게끔 해준 국가 시스템이 이식된, 제국의 씨앗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의 사상에 내재한 여러 면모는 후대의 알렉산드르 두긴 같은 사상가가 계승하여 푸틴의 지정학적 기획을 정당화해주는 근거가 되어주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러시아 국가 두마 연설에서 구밀료프의 어록을 인용하여 잠시 알려지기도 했었다.

"나는 러시아 사람으로, 내 모든 삶 동안 타타르를 무고로부터 지켰다."

러시아 역사는 유럽보다는 타타르와 더 가깝다며 평생 저작을 써온 구밀료프의 삶을 상징하는 말일 듯 하다.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최고 중심부에 있을 만한 문장.

버스를 타고 아르스코예 수도원의 공동 묘지를 방문했다. 여기서 찾고자 하는 묘지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 묘지는 원래 찾고자 했던 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나 역사적 인물의 묘기는 하다. 미하일 데뱌타예프. 소련군 공군 조종사로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독일군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놀랍게도 포로 수용소에서 소련군 포로들 일부를 조직하여 비행기를 탈취하고 소련군으로 다시 복귀하는 영화와 같은 일을 벌였다.

하지만 NKVD는 그의 영웅스러운 경험이 너무나 황당하고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 생각했다 하고, 처음에는 그를 형벌 부대로 보내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고 한다. 1950년대까지도 그의 행적은 인정되지 않았다가 스탈린 사후 4년이 지난 1957년에야 소련 영웅으로 인정 받았다. 전후에 그는 카잔에서 배를 몰며 여생을 보냈고 2002년에 죽었다.

아르스코예 묘지에서 기념하고 있는 카잔 출신의 대조국전쟁 전몰자들.

누군지 모르는 분이었지만.. 정교회 수도원 묘지에 무슬림들도 자연스럽게 묻히는 것이 역시나 카잔다웠다.

내가 찾고자 한 묘는 바로 이 묘였다. 니콜라이 일민스키. 정교회 성직자였고, 19세기 러시아 동양학의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로 카잔 학파를 이끌었다. 정교회 성직자로서 그는 러시아가 동방 민족들을 올바른 신앙의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동방 민족들의 문화, 역사, 언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성경 번역 활동을 전개했다. 일민스키는 그 외에도 튀르크학을 비롯한 여러 동양학 연구에도 매진하였으며, 그의 제자들은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동양학자 세대를 형성하게 되고, 그들의 주장이 소비에트의 민족 정책까지 이어지게 된다.

수도원 옆의 묘역에서 한참을 찾아도 못 찾았는데, 묘역이 너무 넓어서 못 찾겠구나 했다가 지나가는 성직자한테 물어보니 아예 수도원 안쪽에 따로 추모비를 모셨다고 했다. 유해는 성당 안쪽에 있고, 외부인이 접근할 수 있는 건 오직 저 추모비다. 일민스키의 행적과 그의 유산에 대한 글은 차후에 쓸 수 있도록...

그 후 버스를 타고 잠깐 쉬워가는 차원에서 레닌의 집을 방문.

레닌이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인데 딱히 특별할 것은 없다.

인근 공원에서는 시민들이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공원에 있는 '정치적 억압 희생자들 추모비'. 아마 아랍 문자로 쓰인 타타르어 같은데 무슨 말인지 검색이 잘 안 되었다.

그 뒤 걷다가 발견한 소비에트적 계단. 저 뒤는 카잔 연방 대학교 건물인데 아마 소련 시절에 만들어진 계단인 것 같았다. 상단에 마르크스 /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 레닌이 써있다. 낫과 망치 표식 밑에는 12시부터 시계 방향으로 시간, 에너지,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НОТ), 시스템이라는 단어들이 써있다. 역시 소련이 추구했던 산업적 근대성이 잘 보이는 문구들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하지만 '만국'은 기본적으로 단결할 수 없었다. 소련은 공산주의의 모순 때문에 몰락하기도 했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제국을 구성하는 민족 간의 갈등으로 무너졌다.

버스에서 찍은 타타르 민족 시인 갑둘라 투카이 동상. 타타르인들은 16세기부터 러시아 엘리트층에 신속히 흡수되었고, 일민스키 프로그램과 러시아 자체의 경제 성장 등에 힘 입어 19세기에는 여러 민족 인텔리겐치아들을 배출했다. 타타르인들은 러시아 제국 역내의 무슬림 민족 중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되어 정치, 사회, 문화 운동을 전개했다. 타타르인들의 이런 선도적인 면모는 제국 내의 무슬림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타타르 주도권'이나 '타타르화'를 놓고 갈등이 있기도 했다.

카잔의 최고 중심부에 있는 누룰라 모스크. 1850년대에 지어졌지만 소비에트 시절에는 폐쇄되어 주택이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소련이 해체되자마자 다시 모스크로 복원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동행이 카잔에서 러시아어 연수를 했었는데 그 당시 자주 애용했던 바라고 한다.

잠시 쉬어가는 차원에서, 휴대폰 배터리 충전도 하고 물담배도 잘 피웠다. 물담배는 비흡연자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어 좋은..

모스크 근처라서 그런지 이슬람 관련 상점들이 눈에 띄었다.

여기는 다른 모스크인데, 카잔의 모스크들이 재밌는 특징이라면 기도 시간이 되었음을 외치는 첨탑인 미나렛이 없다면 사실상 전형적인 유럽 건물과 구분 가지 않는다는 것 아닐까. 가장 먼저 러시아화된 무슬림 민족이면서도 러시아 내에서 자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가장 열심히 복원하고 있는 타타르인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민족 과자인 '착착'만을 전시한 착착 박물관이 따로 있다길래.. 시간이 조금 떠서 대체 이건 뭐하는 박물관일까 싶어서 방문해 보았다.

아쉽게도 토요일만 개관하고 평소에는 카페로 쓰는 곳이라고 한다. 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간단한 꿀 과자 하나쯤 사서 먹고 나왔다.

아름다운 카잔의 풍경.

이렇게 히잡을 쓴 타타르 여성들을 보는 게 어렵지 않다. 사실 그 외에도 카잔은 여러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유학생을 유치하는 부유한 교육 도시기도 해서, 타타르인이 아니라 아예 아랍인처럼 보이는 이들도 많이 보였다.

버스를 타고 이제 강북으로 넘어간다. 강북은 역사적인 고도 느낌보다는 인구 100만 산업 도시 카잔의 주택 지구라는 성격이 강하다.

러시아의 주요 도시에는 제2차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고 전몰자들을 추모하는 '꺼지지 않는 불꽃' 공원들이 있는데, 지난 번 카잔 방문에는 찾아 가지를 못해서 이번에 방문하였다.

역시나 타타르어와 러시아어가 병기되어 있다.

카잔 및 타타르스탄 공화국 출신의 소비에트 연방 영웅들을 기념하고 있다. 소련에서는 주로 국방/정치 등에 기여한 소비에트 연방 영웅과 노동/산업/예술 등에 기여한 사회주의 노력 영웅이라는 두 영웅 칭호와 훈장을 만들었다.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줄 수 있는 커다란 부와 인센티브는 줄 수 없었지만 배급 특전을 비롯한 물질적 혜택과 사회적 명예는 줄 수 있었다.

꺼지지 않는 불.

3년 전에 노보시비르스크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이 승리 공원에 전시된 무기들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뛰어 노는 아이들을 보면 가끔 생경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군사주의 문화를 친숙하게 학습하는 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 나이면 뭐 다들 람보 터미네이터 놀이해야 제맛이기도 하니 뭐라 하기도 그렇다.

타타르스탄 공화국은 후방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서부 지역의 산업 시설들이 전시에 대거 대피하는 장소 중 하나가 되었고, 이 시기에 도시와 산업이 역설적으로 급격히 팽창했다. 그 뒤 전쟁 수행에 필요한 각종 물자를 생산하는 기지로서 역할도 톡톡히 했다. 저기 써있는 글은 전시 생산 기지로서 카잔의 역할을 기념하는 기록들.

어린애들이 '아곤(발사)!'이라고 연달아 외치며 놀고 있었다.

뒤로 가면 나오는 소련군 병사의 동상과 거대한 승리 깃발. 저 깃발은 얼핏 보면 소련 국기 같지만 그건 아니고, '승리 깃발(Znamya pobedy)'이라는 다른 깃발이다. 독소 전쟁에서 소련의 승리를 알린, 독일 베를린 제국 의사당에 꽂힌 군기인데, 이후에도 소련군 승리의 상징으로 채택되어 오늘날까지도 활용되고 있다.

공원 옆에는 호수가 있어서 노인들이 낚시도 하고 있었다.

가족들이나 연인들끼리 오리배를 타기도 하고.. 모든 게 너무나 평화로웠다. 사실 승리 공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한 기념물이나 상징이 추가되었으려나 하고 갔는데 그런 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카잔에서 창설된 각 부대들이 대조국전쟁에서 어떻게 활약했냐를 보여주는 피라미드. 이 부대는 1942년에 창설되어 모스크바에서 시작해 베를린까지 진격한 부대였다.

이런 부대들이 여럿 있었는데 목적지는 제각각이었다.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등등.

버스 정류장을 기다리는데 '얀덱스 예다' 알바를 하고 있는 청년이 보였다. 러시아에서도 배달 문화는 급속히 성장 중인데, 한국처럼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는 건 보기가 어렵고 오히려 자전거나 도보 배달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배달 속도가 답답해서 어째 견디려나 싶다.

카잔의 일반적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강북까지 올라온 김에 방문하게 된 아파트. 대체 이런 평범한 주택을 왜 방문했는가 하면...

스탈린의 둘째 아들 바실리 스탈린이 여기서 살았기 때문이다.

이 아파트는 카잔에 설립된 항공기 제작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어졌고 이후에 조종사를 비롯한 공군 관련 종사자들이 차례로 입주했다고 한다. 바실리 스탈린도 나름 대조국 전쟁에서 출격한 조종사였기 때문에, 퇴역 후에 카잔에서 이 아파트를 받아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강력했던 아버지에 짓눌렸던 그는 알콜 중독 망나니로 살다 죽었다.

스탈린이 둘째 아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네가 스탈린 성을 쓰겠다고? 나도 스탈린이 아니고 너도 스탈린이 아니야! 스탈린은 소련 권력이야!"

밖에 나오니 투폴레프 동상이 서 있었다. 안드레이 투폴레프는 소련의 대표적 항공기 설계자로서 이후 투폴레프 설계국을 주도했다. 투폴레프 브랜드는 냉전기 서방을 공포에 떨게 한 폭격기와 동시에 높은 사고율로 악명 높은 민항기로 유명하다.

카잔의 에너지 대학. 카잔은 다른 러시아 도시와 비교해서도 상당히 부유한 도시인데, 화학 산업과 기계 산업 등 각종 제조업도 중요하지만, 타타르스탄이 막대한 석유 매장량과 생산량을 자랑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러시아의 힘이 저기서 나온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다시 강남으로 돌아오면서. 이번 카잔행은 시간이 없어서 크렘린을 방문하지 못했다. 아쉬운대로 길에서라도 사진을 찍어서 남겼다.

쿨샤리프 모스크. 타타르스탄과 카잔을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지만 지어진 지는 막상 얼마 안 된 건물이다. 16세기 이반 뇌제의 카잔 정복 이후에 당연히 파괴되었고, 소련 시대에도 딱히 복원이 안 되다가 소련 해체 이후 타타르 민족 운동이 부흥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사실 겉에서 보면 꽤 멋있긴 한데, 내부는 딱히 별 게 없다. 그 옆에 카잔 정복 이후에 지은 '하얀 크렘린' 탑이 진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카잔의 상징인데, 아쉽게도 이번에는 수리 중이었다.

카잔 최고 중심가에 위치한 호수. 배들이 떠있고 음악이 흘러 나오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모든 게 완벽한 분위기였다.

북위 55도에 위치한 카잔은 여름에는 낮이 무척 길 수밖에 없다. 밤 시간을 한참 넘겼지만 여전히 해가 완전히 지지 않은 상태에서, 누룰라 모스크가 무척 아름답게 빛 났다.

다음 날은 동쪽으로 향한 창문 카잔을 넘어서 더 동쪽으로 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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