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 대종주 (6): 이제프스크로 이동
450km를 동쪽으로 달려 이제프스크로.
다음 목적지는 볼가 강의 다른 지류인 이시 강이 흐르는 도시, 이제프스크다. 이 도시 또한 타타르스탄의 수도 카잔과 마찬가지로 '우드무르트 자치 공화국'의 수도이다.
가급적이면 훨씬 편한 기차를 타면서 이동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활용할 수 없는 기차편이 없었기 때문에 버스를 이용했다. 12시 10분에 출발하는 버스다 보니 아침에 움직여야 했다. 문제는 카잔에 묵은 숙소가 이틀 동안 물이 제대로 안 나와서 뭐 씻으면서 피로를 풀 수도 없었다는 것인데...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어쨌든 다음 목적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여행이 그렇겠지만 러시아 여행이 원하는 대로 전부 만족스럽게 풀리는 경우는 없다.
카잔의 인싸 거리를 지키고 있는 삼성 서비스 센터의 위용. 역시 조선의 제국은 삼성 제국과 케이팝 제국 밖에 없다.
타타르어 책들을 파는 서점이다. 그 옆에는 키탑레스토랑이라고 책도 읽으면서 밥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었는데, 간판 위에 '먹어라, 읽어라!'라고 써 있던 게 인상적이었다.
타타르스탄에서 간혹 찾아볼 수 있는 투바타이라는 토속 패스트푸드점이다.
민속 의상을 개량한 유니폼을 입고, 패스트푸드로 개량된 민속 음식을 판다. 카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타타르 정체성의 재발견과 그 현대화라는 추세와 딱 맞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버스를 기다리며 찍은 시계 탑. 아랍 문자로 쓰여 있는 타타르어는 무슨 뜻일까..
카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기로 한다.
아스트라한, 모스크바, 노보체복사르스크, 오렌부르크, 시르잔, 식팁카르, 톨리야티, 울랴노프스크, 우파, 체복사리. 여기서 아스트라한까지는 무려 1500km다...
사실 우리가 탈 버스가 오기 전까지 과연 어떤 버스를 타게 될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간혹 저런 미니 버스(Mikroavtobus)들을 탈 때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소 도시로 향하는 노선들은 거의 100% 큰 버스가 아니라 미니 버스를 타야만 한다. 그래도 체복사리까지 가는 버스는 겨우 운행 거리가 150km 밖에 안 되니 버틸 만 할 것도 같다. 하지만 덩치 큰 몸을 우겨 넣고 역시 덩치 큰 러시아인들과 딱 붙어서 가는 경험은 언제 해도 유쾌하지가 않다... 전에 그루지야 고리에서 쿠타이시로 넘어갈 때도 150km를 저런 미니 버스를 타고 갔는데 아직도 그때의 비좁은 감각이 생생히 기억 난다.
그나마 다행히 우리가 탈 버스는 이런 큰 버스긴 했다. 모스크바에서 출발해 카잔을 거쳐(800km), 페름(1500km)까지 가는 버스. 러시아의 지리 감각을 한국으로 비유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건 대충 경기도/충청도 안에서 노는 버스가 아닐런지. 러시아 국토 한 가운데의 철도 중심지인 노보시비르스크를 대전으로 놓을지 대구로 놓을지에 따라 한국과의 비유가 조금 달라지긴 할 것 같다. 만약 대전으로 놓는다면 페름, 예카테린부르크를 비롯한 우랄 지역은 경기 남부가 될 것이고 대구로 놓는다면 그쪽이 딱 대전이 될 것이다. 뭐 사실 의미 없는 비유긴 하다. 1500km라니..
버스 안에서 버티는 건 쉽지 않았다. 에어컨이라고 불러주기에 민망한, 한없이 약하고 미지근한 바람을 쏴주는 송풍기와 만만치는 않은 러시아의 여름 태양의 대결은 후자의 압승이었다. 버스가 넓지도 않았고 우리 가방은 짐칸에 실어주지도 않아서 큼직한 가방을 껴안고 자리에 앉아서 6시간을 버텨야만 했다. 러시아에서 구매한 보조 배터리는 제대로 작동도 안 해서 인터넷도 마음대로 할 수도 없다. 도착하기 전에 핸드폰이 방전되면 그것도 말 못 할 고역이라 배터리를 최대한 현명하게 아껴 써야만 했다. 비행기 모드를 켜서 핸드폰으로 찍어온 책을 보고 저장한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통차이 위치나쿤 교수이 <지도에서 태어난 태국>을 완독하고, 리처드 세넷의 <무질서의 효용>을 조금 읽다가 왔다.
중간에 도착한 타타르스탄의 주요 도시인 나베레즈니예 첼니. '첼나 강 강변'이라는 심플한 이름의 도시다. 80년대에는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의 이름을 따서 잠시 브레즈네프시로 불리기도 했다. 이 도시는 대형 트럭을 주로 생산하는 카마즈 자동차 공장이 있는 거대한 산업 도시이기도 하다. 카마강에 건설된 댐이 동력을 제공하고, 인근의 작은 산업 도시들을 이끌고 있는 도시로 볼가 공업 지대의 중추 중 하나다.
이런 도시가 경제 제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도시 아닐까 싶다. 아마 서방 측과 연계 되어 있는 공급망도 많이 끊겼을 것이고, 국제 결제도 말도 안 되게 불편해졌고, 판매처도 잃었을 것이고, 러시아가 에너지를 더 잘 파는 기이한 상태에 진입하면서 루블도 강세라 수출이 더 어려워졌다. 과연 이번 제재의 파고를 잘 넘길 수 있을지.
잠시 바깥에서 바람을 쐬고 몸을 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제 이제프스크로 올라가는 길만 남았다.
대략 7시간 반을 달려 이제프스크에 도착. 우드무르트 공화국은 모스크바/타타르스탄보다 한 시간 더 빠른 시간대를 채택하고 있어서 도착하니 이미 8시 반이었다. 호스텔까지 15분, 20분은 더 걸어야 하는데 정말 피곤에 절어 있던 상태였다. 비행기 모드로 아끼고 아끼던 핸드폰 배터리도 9%만 남아서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버스 터미널에서 내려서 호스텔까지 걸어 가는 짧은 시간 동안 느낀 점.
1. 허름하다. 카잔은 역시 정말이지 러시아 기준으로도 상당히 부유하고 정비가 잘 되어 있는 도시였다. 이제프스크는 소련 시절에 건설된 많은 시설물이 때를 타면서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시베리아의 도시들에서 느껴지는 기운과 비슷했다.
2. 어딜 가나 타타르어가 있던 카잔과 달리 우드무르트 공화국의 수도라는 이 곳에서는 우드무르트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의 옛 교통을 상징하는 트롤리 버스. 모스크바에서는 전면적으로 사라졌고 차츰 전기버스로 교체 중이라고 한다(출처는 나무위키). 그런데 그 부유한 카잔도 그렇고 이런 지방 도시들에서는 소련 시절에 설치한 트롤리 버스 인프라를 여전히 잘 활용하고 있긴 하다.
그나마 우드무르트어를 볼 수 있었던 곳인데 이곳은 우드무르트 공화국 교육청이었나 그랬던 것으로 기억. 그래 여기서는 우드무르트어를 써야지... 길거리에는 중동계처럼 생긴 비러시아인들이 꽤 많이 보였는데 내가 사진으로 본 우드무르트인들과는 전혀 달라서 어느 민족 사람들인지는 가늠이 잘 안 되었다. 타타르스탄과 달리 이제프스크 인구의 69%가 러시아인이고, 우드무르트인은 15%, 타타르인이 9%로 이곳에서 우드무르트인들은 되려 소수자다. 우드무르트 전체에서는 우드무르트인이 28%로 비율이 더 높긴 하다. 이곳도 산업 지역이다 보니 소련 시절부터 해체 이후에도 계속되는 러시아인 인구 유입 추세가 꺾일 일은 없어 보인다.
참 허름한 쇼핑 센터다 싶다가도, 한국 1기 신도시들이나 지방 대도시의 퇴락한 상가들 생각하면 뭐 한국도 크게 다를 바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정말이지 소련스러운 아파트. 카잔에서는 외관이 전부 새로 정비 되었던 것과 비교된다. 사실 카잔이 이상한 도시인 것이다.
러시아의 정겨운 도로 포장 상태.
우리가 걸은 거리는 독일 혁명가 이름을 딴 카를 리프크네히트 거리인데, 중간에 이런 선전물을 볼 수가 있었다. 가운데에 커다랗게 써 있는 글씨는 "наш паровоз вперед лети(우리 기관차는 앞으로 날아간다)"라는 소련의 유명한 공산주의 선전가 가사다. 둘러싸고 있는 글씨들은 소련의 유명한 산업-문화 프로젝트들이다. 왼쪽에는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마그니토고르스크 철강 단지, 콤소몰스크 나 아무레, 브라츠크, 바이칼 아무르 철도, 카마즈. 제1차 5개년 계획부터 소련 해체 직전까지 있던 유명한 산업 프로젝트들이 써 있다. 오른쪽의 ликбез는 문맹 퇴치 운동, 그 밑은 '대학들'이라고 써 있다.
소비에트식 계몽주의의 흔적인데, 바이칼 아무르 철도나 카마즈 같은 소련 말기 프로젝트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80년대쯤 만들어진 것 같다. 어쩌면 소련 해체 이후에 소련을 추억하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수도..
호스텔 맞은 편에 있는 거대한 소비에트식 아파트. 아 역시 이 또한 소비에트적 근대성..
칼라시니코프의 도시에 왔으니 칼라시니코프 보드카를 마신다.
옆에서 전형적인 러시아 더빙 영화 소리가 들려 오길래 뭔가 하고 보았더니 터미네이터 3.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과 함께 보았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은 터미네이터 2에 비하면 너무 실망스러웠다고 하셨지만 나는 재밌게 보았는데 나중에 터미네이터 2를 보니 왜 실망스러워 하셨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터미네이터 속편들이 전부 망하면서 터미네이터 3는 정말이지 할리우드의 근본 정신을 지킨 명작으로 재평가 되고 있는 것이 참으로 격세지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