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 대종주 (8): 바시키르인들의 도시 우파

볼가 대종주 (8): 바시키르인들의 도시 우파

러시아 동방의 또 다른 중심지

임명묵

우파는 도시 시가지가 꽤나 넓고 볼 것도 흩어져 있는 느낌이 강했다. 우리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두슬륵(튀르크어로 우정) 기념비로 시작. 역시 자치 공화국 수도답게 제민족 우호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다.

바시키르인들은 16세기 이반 뇌제가 카잔과 아스트라한의 칸국들을 정복한 다음에 마주치게 된 튀르크계 유목민들이다. 볼가와 우랄 지역에 살았으며 이슬람을 믿었다. 상대적으로 일찍 러시아의 권력에 포섭된 카잔 타타르인과 달리, 바시키르인은 조금 더 오래 저항하면서 자신들의 자치를 지키고자 했다. 그런 와중에 계속되는 러시아 농민들의 동방 이주로 인해서 바시키르인들의 토지가 침탈 당하고, 차르 정부가 세금과 군역을 계속 무겁게 물리기 시작하며 러시아와 바시키르인들의 갈등이 심해졌다. 그럼에도 일부 바시키르인들은 러시아의 군사 정복 활동에 편입되면서 러시아의 엘리트층에 편입되기도 했다.

제민족 우호 기념비를 보고 택시를 잡아서 일단 시내로 향한다. 소비에트 시절 정비된 대부분의 도시는 가장 큰 대로를 레닌 대로로 정해 놓는데 여기는 우파의 레닌 대로다. 그 한 가운데서 한국 화장품점 '촉촉'을 발견하니 실로 감동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레닌 대로 옆에 있는 레닌 동상. 소련 해체 당시에 많이 무너뜨렸다지만 러시아에는 여전히 많은 레닌 동상들이 있다.

자기르 이스마길로프라는 바시키르인 유명 작곡가라고 한다. 찾아보니 소비에트 시절에 주로 활동했고 명예로운 인민 예술가 칭호도 받았다고 한다. 클래식을 잘 몰라서 생략.

바시키르에 내려오는 일곱 여인의 전설이 있다는데 2015년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러시아는 어딜 가나 공원과 분수가 있고 수령이 오래 되어서 키가 길쭉한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운다.

인근에 문화 센터와 극장이 있는데, 카잔에서도 보았던 표도르 샬랴핀 동상이 여기에도 있었다. 샬랴핀이 여기 잠시 묵으면서 공연도 했던 것을 기린다고 한다.

정말 널찍했던 레닌 공원. 카잔에 비교해서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큰 것 같다.

바시키리야 자치 공화국이 수훈한 훈장들을 이런 식의 기념물을 세워서 자랑하고 있는 것 같다. 옆에는 두 개의 레닌 훈장 기념물도 있었다.

멀찍이서 펄럭이고 있는 러시아 연방과 바시코르토스탄 공화국 깃발.

공원에는 러시아 내전기에 볼셰비키 편에서 죽었던 영웅들을 기리는 기념물도 있었다.

다시 남쪽으로 걸어가서 들린 바시키르 모스크.

러시아는 제국의 무슬림들을 관리하고자 종무국을 설치했는데, 종무국에서는 국가에 고용된 이슬람 성직자들이 제국 내 무슬림들에게 교리에 근거한 판결을 내려주는 등 각종 종교 문제를 관리하곤 했다. 이 모스크는 19세기 초에 제국 종무국의 고위 무프티가 건립한 우파의 가장 오래된 모스크라고 하며 이슬람을 탄압했던 소비에트 시기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 남았었다.

우파의 상징 벨라야강 옆에 바시키르인들의 민족 영웅 살라바트 율라예프 동상이 있어서 그 방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보이는 거대한 '콘그레스 홀 토라타우'. 러시아의 카잔이나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누르술탄 등에서 유목민, 이슬람 양식, 러시아 및 현대 양식을 결합한 건축물을 랜드마크로 종종 건설하고는 하는데 이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다.

토라타우에서는 2015년 제7차 브릭스 정상 회담이 개최되었다. 러시아의 푸틴이 의장국을 맞고, 중국의 시진핑, 인도의 모디, 브라질의 호세프, 남아공의 주마가 모여 '우파 선언'을 채택했다. 각 정상들은 이 회의에서 브릭스가 주축이 된 '신개발은행'을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사실 2015년 당시로서는 브릭스가 이제 내리막길로 가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기 좋았다. 브라질의 호세프는 경기 부진과 정치적 분열로 고생하고 있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같은 브릭스라고 하기에는 체급도 맞지 않았다. 러시아는 크림 반도 합병에 따른 서방의 경제 제재로 인하여 경제적 곤궁과 대외적 입지 추락을 감내해야 했다. 중국만이 성장세를 견고히 유지하고 있었지만 시진핑은 중국 자신들이 주도하는 AIIB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있었지 브릭스와 같은 협력체에 얼마나 참여할지는 미지수였다. 인도의 모디 정부는 인도양으로 공격적으로 확장하는 중국을 보며 네루의 오랜 비동맹 원칙을 접고 중국에 공동 대응하자는 일본의 적극적인 구애에 호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브릭스가 부활했다. 자원이 갖는 힘이 강해지고, 유라시아가 통합되면서, '중국에 공동 대응'보다 '서구에 공동 대응'이 훨씬 더 시급한 의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보우소나루도, 그리고 다음에 귀환이 유력하다는 룰라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서방의 규칙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중국과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인도가 에너지 가격의 고공행진을 방치할 수 없다며 러시아 석유를 대량 구매한 것이 결정타였다. 다시 확인된 러시아와 인도의 우호 관계는, 인도가 중국 위협에 맞서기 위해 쿼드를 통해 함께 하지만, 인도는 근본적으로 서구의 길이 아닌 인도의 길을 가며, 인도양 바깥의 일에 우리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선언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게 언론 지면에서 거의 이름을 보기 어려웠던 브릭스가 이제는 미국과 G7 국가들에 대응하는 연합체로서 공세를 개시하고 있는 느낌이다. 다시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을 생각하고 브릭스 정상들이 모였던 우파 토라타우를 보자니 격세지감을 느꼈다. 그런데 이 때 채택되었던 우파 선언을 찾아보니 다시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8. 우리는 국제법과 국제관계의 보편적 규범을 위반하는 일방적인 군사 개입과 경제 제재를 규탄한다.

41. 우리는 EU가 참여하여 중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연방, 영국, 미국 및 이란 간에 합의될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A)의 조기 타결을 기대한다.

43. 우리는 우크라이나 상황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우리는 갈등에 대한 군사적 해결책은 없으며 화해의 유일한 방법은 포괄적인 정치적 대화를 통한 것임을 강조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모든 당사자가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지도자들이 지원하는 우크라이나의 접촉 그룹이 민스크에서 2015년 2월에 채택한 민스크 협정 이행을 위한 조치 패키지의 모든 조항을 준수할 것을 촉구한다. 이는 우크라이나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202호에서 승인되었다.

44. 우리는 중동, 북아프리카, 사헬 지역에 극도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리비아의 무력충돌 확대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 우리는 2011년 이 나라에 대한 군사 개입으로 통합된 국가 기관, 효과적인 군대 및 법 집행 기관이 붕괴되었고, 이는 차례로 테러리스트 및 극단주의 단체의 활동 증가에 기여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우리는 국가의 주권과 영토 보전이 시급함을 강조하고, 리비아 정치세력 간의 불화를 극복하고 가능한 한 조속히 국민통일 정부 구성에 대한 합의를 달성할 필요성을 재확인한다.

많은 면에서 우파 선언은 2022년에 당도할 새로운 세계를 이미 예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방의 경제 제재에 대한 불편함, 민주주의 확산의 명분으로 진행되는 군사 행동과 그에 따라오는 혼란, 서방에 적대하는 나라를 배제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이 많은 내용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밖에도 우파 선언은 농업, 산업, 에너지, IT, 이주에 대해서도, 비서구 국가들이 자신들만의 질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의지를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었다.

2015년의 우파 선언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나도 이번 우파 방문을 통해 처음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직후, 2016년 트럼프가 부상하고, 인도 태평양 전략이 채택되고, 러시아가 대서방 정치 공세를 이어가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방과 중국/러시아의 대결 구도에 집중했다. 하지만 거대한 인구와 영토를 지닌 개발도상국들이 현행 세계 질서를 뒤흔들려는 수정주의적 연대체를 건설하고 발전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저류는 변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2022년에 전쟁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살라바트 율라예프 동상 앞에 조성된 공원에서는 어제, 여느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평화만이 가득했다.

바시키르인들은 러시아인의 토지 침투와 심해지는 납세, 군역의 의무에 저항하여 종종 봉기를 일으키고는 했다. 그중에서 가장 기세가 대단했던 봉기는 러시아 코사크인 예멜리얀 푸가초프가 이끌었던 '푸가초프의 난'이다. 우랄과 볼가 지역에서 코사크, 바시키르인, 타타르인, 농노 등 제국의 소외된 소수자들 세력을 규합한 푸가초프는 자신이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폐위된 표트르 3세로, 가짜 황제를 무너뜨리고자 봉기를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동쪽으로부터 무서운 기세로 몰아닥친 푸가초프의 난에 대거 참여한 주력이 바로 바시키르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예카테리나 대제의 강병과 싸워 이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푸가초프는 사로 잡혀 공개 처형되고 말았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차르 전제정 시절에도 반역자 푸가초프를 영웅으로 그리는 소설인 '대위의 딸'을 집필하기도 했다(예카테리나가 그를 능가하는 영웅으로 묘사되었기에 출판이 가능했을 것이다). 푸가초프는 차르 전제정에 저항하는 농노와 소수 민족들의 역사적 상징으로 계속 이야기될 것이었다. 소비에트 공식 역사학은 푸가초프의 난을 봉건 사회의 계급 착취 구조를 뒤흔들고자 했던 아래로부터의 민중 운동으로 높이 샀다(한국에서 홍경래의 난 등의 사건을 억지로 마르크스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것과 아주 비슷하다). 하지만 푸가초프의 난에서 정말 중요했던 것은 조아한 마르크스주의 계급론보다는 이슬람과 유목민, 코사크가 얽히는 변경과 강해지는 제국의 통치 구조의 문제였을 것이다.

살라바트 율라예프는 푸가초프의 난에 참여했던 주요 바시키르인으로, 이후에도 바시키르인들에 의하여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 받고 있다고 한다.

율라예프는 우파를 따라 흐르는 벨라야강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강 건너편에는 거의 개발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생태계가 펼쳐져 있었는데, 아마 내가 모르는 인간의 활동과 개입이 분명 있을 것이다.

바시키르 국립 대학교를 지나서...

바시키르 민족 음식을 먹어 보고자 식당에 들어갔다.

다른 메뉴들은 아 이런 게 바시키르 전통 요리겠구나 싶었는데 누가 봐도 인도 카레랑 누가 봐도 똠양꿍이 나온 건 대체... 인도 카레야 우파도 중앙아시아 문화권이고 인도랑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었을테니 그렇다 치는데, 똠양꿍은 정말 상상하지 못했다..

도시 북쪽으로 향한다. 러시아 공산당에서 운영하는 스탈린 박물관이 있다길래 ㅋㅋ

사실상 박물관이라 하기에는 뭐하고 공산당 활동을 하는 노인들의 사랑방 같은 느낌이 강했다.

도시에서 아주 북쪽에 위치한 우파 승리 공원. 거대한 붉은 별이 입구를 장식하고 있다.

역시 여기서도 아이들이 뛰어 나와 군 장비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전쟁 영광 박물관인데 Muzei에 러시아 전쟁의 상징인 Z를 크게 확대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어째 모스크바 이런 곳보다 지방 도시에서 Z를 종종 더 보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이제프스크나 우파나 딱 한 번씩만 본 것이니 많지도 않다.

6월 22일은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날로 러시아의 현충일이다.

스탈린은 혹한의 겨울 모스크바 방어전을 앞두고 동쪽에서 온 병사들을 붉은 광장에서 행진시켰다. 그리고 멸망 직전 최초의 반격이 성공하며 이 열병식은 전설이 되었다.

내전과 독소전쟁에 참여했던 바시키르인 군인인데,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아니라 러시아 연방 영웅을 받았다. 러시아 연방에서도 역사적 영웅들을 계속 찾아내서 사후에 수훈하는 듯 했다.

2회 소련 영웅 수훈자에는 파벨 리발코가 있었는데 꽤 유명한 기갑 용장이다. 그런데 우파나 바시키르하고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뭐 근거가 있으니 붙였겠지..

우파의 꺼지지 않는 불과 승리 조각상.

저 멀리 랄라 툴판 모스크가 보인다. 1990년대에 소련 해체 후 민족성과 종교의 부활 분위기를 타고 신축된 큰 모스크다. 현대적 디자인이 아름다워 우파에서 나름 랜드마크 대우를 받고 있는 듯 했다.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한 번쯤 보고 싶긴 했는데 날이 너무 덥다보니 도저히 보러 갈 기력이 안 났다. 택시를 잡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간다.

여기도 있는 정치적 억압 희생자들 추모비.

물론 그 인근에는 10월 혁명 영웅들을 기념하는 기념상도 있다.

이게 정말 놀라운 풍경이었다. 러시아에서 먹는 시원한 보리 탄산 음료인 크바스인데, 길거리의 노점들에서 종종 싼 가격에 팔고는 한다. 그런데 이제까지 돌아다니면서 크바스 노점을 본 적이 없어서 '날도 더운데 어디 크바스 안 파나'하고 있던 차, 시내 쇼핑몰 앞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번호를 써놓고 계좌 이체를 받고 있었다. 동전을 쨍그랑 거리면서 1루블씩 지루하게 세고 있어야 하는 저 할머니가 계좌이체를 받는 러시아라니. 무현금 사회화가 3년 사이에 정말 말도 안 되게 신속히 진행된 배경이 궁금하다.

너무 피곤해서 더위 먹었나 싶었는데 3일 동안 카페인을 안 먹어서 그런 것이라는 합리적 결론에 도달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문.

러시아에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잘 안 마시는 것을 넘어서 존재조차 모를 때가 많다. 3년 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라고 하니 아예 알아 듣지를 못해서 아메리카노 쌀돔(with ice)라고 주문했는데, 팔팔 끓는 뜨거운 아메리카노에 각얼음 하나 올려서 주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 그래도 요새는 엄청 개선되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From Bashkiriya with love' 바시키르의 상징 살라바트 율라예프 동상 그림이 인상적이다.

시내에는 이렇게 할랄 상점도 많이 볼 수 있다. 이제프스크가 있는 우드무르트 공화국과 달리 바시키르인 인구도 꽤 있고 무슬림 인구도 많다.

아무 표지도 없어 보이는 이 평범한 아파트는, 소련-러시아의 반전 락밴드 DDT(데데테)의 리더 유리 셰브추크가 살았던 아파트다. 셰프추크는 우파 출신으로 그곳에서 밴드를 만들었고, 훗날 레닌그라드로 이주하여 전국적 스타가 되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비판하면서 떠오른 그는 오늘날에도 푸틴 정권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러시아에서는 그의 음악은 좋아해도 그의 반정부적 발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다.

DDT의 노래 중 가장 유명하고 사랑 받는 노래인 '가을이란 무엇인가'

10월 혁명 50주년 기념비.

그 옆에는 혁명은 아랑곳하지 않은 우랄-시베리아 은행 건물이 서있다.

저녁을 떼운 푸드코트에 입점해 있는 오타쿠 상점 '오타쿠' 아 정말 너무 직관적인 가게 이름이었다.

러시아 혁명기를 대표하는 아방가르드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동상을 보며 숙소로 돌아갔다. 그 다음 날은 사마라로 향하는 8시간짜리 기차를 타야 한다.

작가와 대화를 시작하세요 (3건)
1 이달에 읽은
무료 콘텐츠의 수

유료구독을 하면 마음껏 편히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하시면 갯수 제한 없이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