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 대종주 (10): 인간이 우주에서 돌아온 곳
사라토프 근교의 유리 가가린 최초 착륙지 방문.
사마라 남쪽으로 8시간 기차를 타고 가면 나오는 사라토프. 이곳도 인구 80만의 대도시이며 항공 및 기계 산업의 중심지이다. 그런데 확실히 카잔이나 사마라보다는 조금 꼬질꼬질한 느낌이 더 나기는 했다.
역 맞은 편에는 KGB의 전신인 체카의 수장으로 악명 높은 펠릭스 제르진스키 동상이 서 있다. 제르진스키는 일찍 죽은 바람에 겐리흐 야고다나 라브렌티 베리야처럼 대숙청에 연루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러시아 내전기와 그 이후의 정치적 탄압을 진두지휘한 사람이었다.
확실히 남쪽으로 내려올 수록 Z를 더 많이 보게 되는 것 같다.
일단 사라토프 첫날 일정은 이랬다.
인구 80만의 사라토프는 볼가강 건너편에 인구 20만 도시 엥겔스를 마주하고 있다. 엥겔스에서 버스를 타고 시 외곽으로 한참 가면, 가가린 지구 귀환 착륙지를 공원으로 조성해 놓았다. 사라토프에서 엥겔스로 가서 엥겔스 외곽으로 빠지는 것도 일이고, 그 버스 정류장에서 가가린 착륙지까지 일단 2.5km. 거기서 다시 정류장으로 돌아와서 보스토크 귀환선 착륙지까지 가는 것이 2.5km. 도합 10km를 땡볕에서 걸어야 하기 때문에 하루 전체를 이 일정에 할애하고 쉬기로 했다.
숙소 체크인 시간 전부터 움직이는지라 무거운 짐을 메고 걸어야 하는 게 또 난점이었다..
사라토프-엥겔스를 잇는 대교는 1960년대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그 전에는 아마 배를 타고 왕래하지 않았을지.
인구 80만의 사라토프도 카잔이나 사마라보다는 꾀죄죄했는데, 인구 20만의 엥겔스는 아 정말 이게 러시아지 싶은 전형적인 그 느낌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길을 걷다가 발견한 '러시아의 영웅에 영광을! 예브게니 스베르쿠노프 이병'이라는 광고판. 열심히 사진 찍고 있는데 엄청 무섭게 생긴 러시아 남자가 오더니
"너 저거 왜 찍었어?"라고 묻길래 몸이 그대로 얼어 붙었다.
러시아어 못하는 척 하려고 "아아 내가 잘 못 알아들었는데..."라고 하니까
"좋아? 나빠?"라고 대답을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을 그대로 박아버린다.
당연히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라쇼!"
그러자 의미심장한 웃음을 씨익 짓고 갈 길을 가는...
이것이 사라토프-엥겔스와의 본격적인 조우였다.
쇼핑몰을 들려 화장실을 좀 가려고 했는데 뭐 이런 걸 걸어놨다. 아 그리운 동아시아여.
버스를 타고 한참 달려 스멜로프카라는 마을 근처에 도착.
우주 귀환 공원의 1번 출구 되시겠다.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나를 반겨주는 "빠예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를 타고 우주로 나갈 때 관제소에 날린 유명한 멘트다. 러시아어로는 "그래 가자!"라는 뜻이다. 사실 문법적으로는 과거형인데 관용어로 저렇게 쓰인댔나.. 하여튼 러시아에서 가가린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문구라고 할 수 있겠다.
입구에서 가가린 착륙지까지 갔다가, 다시 입구로 돌아와서 보스토크 귀환선 착륙지로 가야 한다. 가가린 착륙지랑 보스토크 착륙지랑 연결하는 길 정도는 만들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여긴 러시아니까. 그냥 10km 열심히 걷기로 했다.
길을 가다가 발견한 드넓은 해바라기 농원. 해바라기는 러시아의 국화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전세계 해바라기유의 70% 이상을 생산한다고 들었던 것 같다. 실제 러시아 기차를 타면 나이 좀 있는 사람들은 해바라기 씨를 한 뭉치 꺼내서, 계속 까먹는다.
아마 해바라기씨의 기름 때문인지 곳곳에 '불 절대 조심!'이라는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불 붙으면 장관일 듯..
어영부영 걷다 보니 등장한 가가린 공원.
러시아 로켓 과학의 아버지인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와 세르게이 코롤료프.
러시아 우주 영웅들 레퍼토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는 세계 최초의 인공 위성 스푸트니크, 세계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세계 최초의 우주 유영자 알렉세이 레오노프, 세계 최초의 우주 정류장인 살류트와 2세대 모듈형 우주 정류장인 미르, 달 탐사선 루노호트와 금성 탐사선 베네라 정도가 있겠다. 아 가슴이 웅장해지는구나.
공원 카페, 기념품점에서 착륙지까지 가는 길에 이런 걸 또 만들어놨다. 태양에서부터 해왕성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판인데 러시아 우주 개척의 업적들을 쭉 써놨다.
러시아의 달 탐사 역사. 러시아어로 달은 루나다.
스푸트니크.
계속 읽으며 걷다 보면 저기가 착륙지라고 대놓고 써 있다.
일부러 최초의 우주 비행사를 선정할 때 외모를 많이 봤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역시 소련이야말로 본질적으로는 아이돌판을 이해 했던 국가라고 할 수 있겠다.
모스크바의 인민경제달성박람회(베데엔하)에 가면 이거랑 형태가 똑같지만 훨씬 거대한 우주 기념탑을 볼 수 있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유리 가가린의 교신 내용을 걸어가면서 볼 수 있게 써놓았다. 가족들끼리 보러 오면 진짜 유익하고 재밌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소련에서는 우주 진출이야말로 사회주의가 계몽주의와 근대성의 적자임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소련이 러시아로 바뀌면서, 계몽주의는 전통주의가 되었고 근대성은 탈근대성으로 이행했지만, 우주 진출에 대한 그들의 여전한 자부심은 여전히 남은 근대성의 편린이 아닐까 싶었다.
입구로 돌아가는 길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피할 수 없이 나무도 뚫어 버리는 소나기가 내려서 결국 비를 쫄딱 맞았다.
숙소에 가서 씻고 쉴 것만 기대하니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 생각했지만..
보스토크 착륙지로 가는 길은 정비 상태가 가가린 착륙지로 가는 길만큼 좋지 못했다. 아무래도 찾는 사람도 훨씬 적을 것이고.
앞에 보이는 게 볼가강이 아니라 뒤에 파란색 줄 같은 게 볼가강 본류인데, 이 호수는 자유곡류 하천에서 예전에 튕겨져 나온 것인지, 어떻게 조성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아마 실제 당시 귀환선은 박물관이나 연구소 같은 데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걸 타고 지상으로 떨어졌다니 나 같은 겁 많은 인간은 바로 낙제다.
다시 걷고 또 걷는다. 무거운 짐을 들고 비까지 맞아가면서 돌아가려니 이때쯤 슬슬 힘이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시골 버스다 보니 배차 간격도 길어서 버스 정류장까지 한참 걸어가서 한참을 또 기다렸다. 그렇게 엥겔스까지 가서 내리면 엥겔스에서 사라토프 가는 버스를 타고 그제야 숙소로 갈 수가 있다.
2014년 소치 올림픽 때 만든 국기로 써 있는 것 같은데... 버스 기사의 애국주의를 느낄 수 있었다.
볼가강 한 가운데에는 저런 하중도가 형성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숙소 근처에서 먹을 거 좀 사오러 나왔는데 발견한 오타쿠적 그림..
너무 목이 말라서 일단 한 캔 까서 마셨다. 고국의 맛 밀키스. 러시아에는 밀키스가 꽤나 인기라 별의 별 맛이 다 있다고 하던데 러시아에서 처음 마셔본다.
우리가 방문한 식당은 아니지만 '아시아 음식'과 '유럽 음식'이 다 있다길래 참으로 러시아스러워서 찍어 보았다.
이때는 우리 숙소가 얼마나 끔찍한지 아직 제대로 체감하지 않았던 호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