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 대종주 (10): 인간이 우주에서 돌아온 곳](https://storage.googleapis.com/cdn.media.bluedot.so/bluedot.m2lim/2022/07/KakaoTalk_20220731_140539951_12.jpg)
볼가 대종주 (10): 인간이 우주에서 돌아온 곳
사라토프 근교의 유리 가가린 최초 착륙지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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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라 남쪽으로 8시간 기차를 타고 가면 나오는 사라토프. 이곳도 인구 80만의 대도시이며 항공 및 기계 산업의 중심지이다. 그런데 확실히 카잔이나 사마라보다는 조금 꼬질꼬질한 느낌이 더 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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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맞은 편에는 KGB의 전신인 체카의 수장으로 악명 높은 펠릭스 제르진스키 동상이 서 있다. 제르진스키는 일찍 죽은 바람에 겐리흐 야고다나 라브렌티 베리야처럼 대숙청에 연루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러시아 내전기와 그 이후의 정치적 탄압을 진두지휘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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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남쪽으로 내려올 수록 Z를 더 많이 보게 되는 것 같다.
일단 사라토프 첫날 일정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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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80만의 사라토프는 볼가강 건너편에 인구 20만 도시 엥겔스를 마주하고 있다. 엥겔스에서 버스를 타고 시 외곽으로 한참 가면, 가가린 지구 귀환 착륙지를 공원으로 조성해 놓았다. 사라토프에서 엥겔스로 가서 엥겔스 외곽으로 빠지는 것도 일이고, 그 버스 정류장에서 가가린 착륙지까지 일단 2.5km. 거기서 다시 정류장으로 돌아와서 보스토크 귀환선 착륙지까지 가는 것이 2.5km. 도합 10km를 땡볕에서 걸어야 하기 때문에 하루 전체를 이 일정에 할애하고 쉬기로 했다.
숙소 체크인 시간 전부터 움직이는지라 무거운 짐을 메고 걸어야 하는 게 또 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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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토프-엥겔스를 잇는 대교는 1960년대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그 전에는 아마 배를 타고 왕래하지 않았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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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80만의 사라토프도 카잔이나 사마라보다는 꾀죄죄했는데, 인구 20만의 엥겔스는 아 정말 이게 러시아지 싶은 전형적인 그 느낌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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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가 발견한 '러시아의 영웅에 영광을! 예브게니 스베르쿠노프 이병'이라는 광고판. 열심히 사진 찍고 있는데 엄청 무섭게 생긴 러시아 남자가 오더니
"너 저거 왜 찍었어?"라고 묻길래 몸이 그대로 얼어 붙었다.
러시아어 못하는 척 하려고 "아아 내가 잘 못 알아들었는데..."라고 하니까
"좋아? 나빠?"라고 대답을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을 그대로 박아버린다.
당연히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라쇼!"
그러자 의미심장한 웃음을 씨익 짓고 갈 길을 가는...
이것이 사라토프-엥겔스와의 본격적인 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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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몰을 들려 화장실을 좀 가려고 했는데 뭐 이런 걸 걸어놨다. 아 그리운 동아시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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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한참 달려 스멜로프카라는 마을 근처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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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귀환 공원의 1번 출구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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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에서부터 나를 반겨주는 "빠예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를 타고 우주로 나갈 때 관제소에 날린 유명한 멘트다. 러시아어로는 "그래 가자!"라는 뜻이다. 사실 문법적으로는 과거형인데 관용어로 저렇게 쓰인댔나.. 하여튼 러시아에서 가가린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문구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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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가가린 착륙지까지 갔다가, 다시 입구로 돌아와서 보스토크 귀환선 착륙지로 가야 한다. 가가린 착륙지랑 보스토크 착륙지랑 연결하는 길 정도는 만들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여긴 러시아니까. 그냥 10km 열심히 걷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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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발견한 드넓은 해바라기 농원. 해바라기는 러시아의 국화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전세계 해바라기유의 70% 이상을 생산한다고 들었던 것 같다. 실제 러시아 기차를 타면 나이 좀 있는 사람들은 해바라기 씨를 한 뭉치 꺼내서, 계속 까먹는다.
아마 해바라기씨의 기름 때문인지 곳곳에 '불 절대 조심!'이라는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불 붙으면 장관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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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부영 걷다 보니 등장한 가가린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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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로켓 과학의 아버지인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와 세르게이 코롤료프.
러시아 우주 영웅들 레퍼토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는 세계 최초의 인공 위성 스푸트니크, 세계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세계 최초의 우주 유영자 알렉세이 레오노프, 세계 최초의 우주 정류장인 살류트와 2세대 모듈형 우주 정류장인 미르, 달 탐사선 루노호트와 금성 탐사선 베네라 정도가 있겠다. 아 가슴이 웅장해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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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카페, 기념품점에서 착륙지까지 가는 길에 이런 걸 또 만들어놨다. 태양에서부터 해왕성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판인데 러시아 우주 개척의 업적들을 쭉 써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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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달 탐사 역사. 러시아어로 달은 루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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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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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읽으며 걷다 보면 저기가 착륙지라고 대놓고 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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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최초의 우주 비행사를 선정할 때 외모를 많이 봤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역시 소련이야말로 본질적으로는 아이돌판을 이해 했던 국가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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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인민경제달성박람회(베데엔하)에 가면 이거랑 형태가 똑같지만 훨씬 거대한 우주 기념탑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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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코롤료프와 유리 가가린의 교신 내용을 걸어가면서 볼 수 있게 써놓았다. 가족들끼리 보러 오면 진짜 유익하고 재밌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소련에서는 우주 진출이야말로 사회주의가 계몽주의와 근대성의 적자임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소련이 러시아로 바뀌면서, 계몽주의는 전통주의가 되었고 근대성은 탈근대성으로 이행했지만, 우주 진출에 대한 그들의 여전한 자부심은 여전히 남은 근대성의 편린이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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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로 돌아가는 길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피할 수 없이 나무도 뚫어 버리는 소나기가 내려서 결국 비를 쫄딱 맞았다.
숙소에 가서 씻고 쉴 것만 기대하니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 생각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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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토크 착륙지로 가는 길은 정비 상태가 가가린 착륙지로 가는 길만큼 좋지 못했다. 아무래도 찾는 사람도 훨씬 적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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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보이는 게 볼가강이 아니라 뒤에 파란색 줄 같은 게 볼가강 본류인데, 이 호수는 자유곡류 하천에서 예전에 튕겨져 나온 것인지, 어떻게 조성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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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실제 당시 귀환선은 박물관이나 연구소 같은 데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걸 타고 지상으로 떨어졌다니 나 같은 겁 많은 인간은 바로 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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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걷고 또 걷는다. 무거운 짐을 들고 비까지 맞아가면서 돌아가려니 이때쯤 슬슬 힘이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시골 버스다 보니 배차 간격도 길어서 버스 정류장까지 한참 걸어가서 한참을 또 기다렸다. 그렇게 엥겔스까지 가서 내리면 엥겔스에서 사라토프 가는 버스를 타고 그제야 숙소로 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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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소치 올림픽 때 만든 국기로 써 있는 것 같은데... 버스 기사의 애국주의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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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가강 한 가운데에는 저런 하중도가 형성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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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근처에서 먹을 거 좀 사오러 나왔는데 발견한 오타쿠적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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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목이 말라서 일단 한 캔 까서 마셨다. 고국의 맛 밀키스. 러시아에는 밀키스가 꽤나 인기라 별의 별 맛이 다 있다고 하던데 러시아에서 처음 마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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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방문한 식당은 아니지만 '아시아 음식'과 '유럽 음식'이 다 있다길래 참으로 러시아스러워서 찍어 보았다.
이때는 우리 숙소가 얼마나 끔찍한지 아직 제대로 체감하지 않았던 호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