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 대종주 (11): 숨겨진 역사적 인물들의 도시 사라토프
재밌는 경험을 선사해준 사라토프 이야기
사라토프의 레닌 동지께는 불경하게도 숙소 얘기로 시작해보자.
최초의 문제. 여벌 옷도 없고 비와 땀에 쩔어 있는 상태에서 우리가 처음 물어본 것은 "세탁기 되죠?"였다. 호스텔에 세탁기가 안 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질문이지만... 근데 말이 되는 질문이었다. "아 지금 고장나서 안 돼"라고. 진짜 이때부터 머리가 노래졌다. 샤워하고 깔끔한 옷과 시원한 바람을 즐기는 것만 바라보고 왔는데 이게 무슨 소리지? "그러면 우리 빨래는 어떻게 하나요?" 하니 손으로 무언가 주물주물하는 제스처를 보여주며 "손으로"라고 하는 게 아닌가. 기분 나쁜 능글 맞은 웃음까지... 제발 A/S를 빨리 좀 하라고!
우선 급한대로 손빨래를 하고, 샤워도 해서 36.5도씨의 발열체인 신체를 통해서 옷을 말렸다. 뭐 그래도 이게 땀에 쩔어 있는 것보다는 당연히 나았다. 대충 장을 봐서 술 한 잔을 하고 잠을 자는데... 새벽 3시쯤 갑자기 눈이 번쩍 떠졌다. 3시간 정도 잤을까.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몸은 피곤한데 대체 왜 깬 것일까. 하는 생각조차 하기 전에 귀 속을 불쾌한 소리가 때리기 시작했다.
"왜애애애애앵~"
한 두 마리가 아니라 진짜 몇 마리가 방을 끊임 없이 날아다니고 있었고, 다리와 팔은 모기한테 이미 진수성찬을 제공한 상태였다. 내일도 계속 돌아다녀야 해서 잠을 충분히 자둬야 하는데 도저히 다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자려고 누워도 가려워서 깨고, 귀를 때리는 저 짜증나는 모기 소리 때문에 깨고. 아니 깼다는 말도 쓸 수가 없었다. 애초에 잠이 오지를 않았다. 그렇게 날이 밝을 때까지 모기에게 피를 약탈 당하다가 아침에 2시간 정도 마지못해 잘 수가 있었다. 다시 일어나서 확인해보니 방충망이 완전히 뜯겨져 있는 상태였다. 아....
우리는 술을 더 마셔서 만취 상태의 몸이 아예 모기를 인지하지 못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어쨌든 사라토프는 좋은 도시였다. 이런 소비에트적 근대성의 홍보물도 그대로 남아 있고
확실히 남쪽으로 갈수록 Z가 많아지는 느낌이 있다. "자신의 것을 우리는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라토프는 사실 러시아 지도에서나 간간히 보다가 이번 여행을 통해서 명확하게 인지했을만큼 나는 잘 모르던 도시였는데, 찾아보니까 흥미롭게도 굉장히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이 많이 거쳐간 장소였다. 이 인물은 표트르 스톨리핀. 러시아 제국 말기의 총리 대신을 역임했다. 세르게이 비테는 우크라이나 동부를 중심으로 프랑스 자본의 투자를 받아 산업화에 본격적으로 드라이브를 걸었다면, 그의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스톨리핀은 농지 개혁을 통해서 러시아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 경제를 부흥시켰다. 하지만 점점 커져 가는 전제정에 대한 사회적 압박에는 단호한 철권으로 대처한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스톨리핀 개혁에 대해서는 평가가 아직도 엇갈린다. 이 개혁으로 러시아는 급속한 경제 성장을 경험하고 있었으니, 만약 제1차세계대전과 볼셰비키 집권만 없었더라면 스톨리핀 개혁으로 러시아는 '정상적 발전 경로'를 밟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농민 공동체 '미르'에서 유능한 농가들을 따로 떼어내서 자영농으로 변환시키는 스톨리핀 개혁이 농촌에 엄청난 사회적 긴장과 갈등을 몰고 왔기 때문에 개혁 자체가 내부로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스톨리핀은 사라토프에서 현감을 역임했는데 가난한 사라토프 농민과 그들의 사회적 저항을 다루는 경험은 훗날 그의 개혁 정책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물론 볼셰비키들은 그를 거의 주적이자 대마왕으로 생각했기 때문에(생긴 것도 좀 악역 같고), 이 동상은 소련 해체 이후에 세워졌음이 틀림 없다.
인근에 있는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 동상. 19세기 초중반 러시아의 대표적인 근대주의자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소설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레닌이 이 책을 읽고 그 제목을 따와 그 전설적인 "무엇을 할 것인가(Chto Delat')"를 썼다. 체르니셰프스키는 사라토프에서 태어났다.
사라토프의 인싸거리를 보고 있는 체르니셰프스키 선생.
왼쪽 건물은 음악원이었는데, '러시아를 위해, 대통령을 위해!'라는 구호가 걸려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가가린 박물관에도 걸려 있는 '러시아를 위해! 대통령을 위해!' 러시아를 위해는 조금 봤는데 대통령을 위해는 여기서 처음 본다. 가가린은 사라토프에서 교육을 받았고 여러모로 사라토프와 인연이 많았다.
전국 각지의 어린이들이 보낸 가가린 사생대회 작품들이라고 한다. 이 그림이 뭔가 느낌이 좋아서 가져왔다.
가가린 최초 착륙을 묘사한 그림.
우리가 갔었던 착륙지는 원래 이런 식으로 표식을 설치했다고 한다.
박물관 관리하시는 할머니께서 우리가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본인이 신나서 박물관 전체 소장품들을 하나하나 다 설명해주셨는데... 그 친절에는 감사했지만 계속 서서 쏟아지는 러시아어를 듣고 있자니 굉장히 진이 빠지기는 했다. 그래도 그 호의에 연신 감사합니다를 거듭하고 나왔다.
거리 이름이 특이해서 찍었다. '사코와 반제티 거리' 사코와 반제티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활동했던 아나키스트들이다...
그 이름도 위압적인 '승리 플라자'
승리 플라자 앞의 공원에는 소련의 식물학자, 농학자, 유전학자인 니콜라이 바빌로프 동상이 서있다. 바빌로프 또한 사라토프 태생이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유학을 했었고, 유전자의 존재가 밝혀지기 전부터 그 존재를 예상했던 러시아의 가장 유능한 유전학자였다. 육종학을 위해서 세계 각지를 돌면서 종자를 모았고, 그를 위해 조선에 방문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바빌로프는 소련 체제가 그의 귀족적 배경과, 즉각 활용할 수 있는 실용성이 없어 보이는 이론적 탐구를 선호하지 않았기에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그의 후임으로 들어온 신진 연구자들은 주로 발탁 정책으로 뽑힌 노동자 농민 출신들이 많았는데, 바빌로프가 당장 소련에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연구나 한다고 비판했으며, 그게 그의 혁명 전의 유학 경험과 부유한 가정 환경 때문에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이는 1920-30년대 소련 전역에서 불거졌던 '부르주아 전문가'들과 '붉은 전문가'들의 갈등의 일환이었으며 훗날 중국에서는 홍전 논쟁으로 비슷하게 재현된다.
바빌로프는 그의 숙적이자 용불용설을 믿던 트로핌 리센코의 공격으로 숙청 당하는데, 수용소에서 비극적으로 아사하고 말았다. 리센코는 1960년대까지도 소련 농학계의 최정점에서 막대한 위세를 떨쳤으나, 연속적인 농업 정책의 실패에 책임을 지고 그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 후성유전학이 발전함에 따라 러시아 내에서는 리센코를 복권시켜야 한다는 국수주의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사라토프의 인싸 대로
더위에 목이 타서 크바스를 연거푸 마셨다. 500ml 한 잔에 6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
체르니셰프스키 박물관에 방문했다.
사실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레닌의 전설적인 작품에 영감을 줬다니 예의 상 방문해야 할 것 같아서 ㅎㅎ
밖에는 체르니셰프스키의 실제 고택들도 있는데 여기를 관리하던 할머니가 우리를 보더니 "신짜오"라고 맞아주셨다. "그건 베트남어고 저희는 한국 사람이에요"하니까 자기도 한국 사람이란다. 뭔 소리지? 하는데 "진짜야. 나 성도 김씨야"라길래 명찰을 보는데 정말 '타찌아나 페트로브나 김'이라고 적혀 있는 것 아닌가. 아무리 봐도 전형적인 슬라브 할머니인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하면서 신기해 했는데, 남편이 고려인이라 성을 바꾸신 것이라고 했다.
김 할머니와의 짧은 인연을 뒤로 한 채 현대차를 발견.
이제 엥겔스로 향한다. 볼가강 '대종주'가 아니라 볼가강 '횡단'도 한 번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사라토프 대교를 건너기로.
이쪽 길을 걷는데 갑자기 얼굴을 몹시 찡그리고 있는 러시아 아저씨가 신경질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당연히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말은 호의적이었다. 달갑지 않게 말을 받아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젠장, 내가 군대에 20년이나 복무했고 아프간이랑 체첸에서 그렇게 굴렀는데! 뭐 삶이 이따위야! 연금도 쥐꼬리만 하고 씨펄"이라고 속사포로 말을 쏟아냈다. 그러더니 우리한테 날도 더운데 물 한 잔 살 돈만 달라고 그랬다. 뭔가 씁쓸함이 느껴져 100루블 지폐를 건내줬다.
사라토프 대교 근처에 있는 가가린 동상.
그 바로 근처에는 표트르 대제 동상도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사라토프 대교. 횡단 거리가 2.2km 정도 되던가?
"볼가 강"
중간에 다리에서 내려와 어제 보았던 하중도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습도가 낮아서 한국 여름에 비하면 물론 가벼운 여름이겠지만 그래도 뙤약볕이라 힘들기는 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잤고..
이런 가게에서 음료수도 팔고 맥주도 팔길래
맥주 한 잔 했습니다.
그렇게 건너 온 엥겔스 시.
엥겔스의 상징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황소라고 한다.
당연히 독일의 그 마르크스 친구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다. 그 전에는 포크로프스크였다고 하는데, 한때 존재했던 볼가 독일인 자치주의 수도이기도 했다고. 사라토프와 포크로프스크에는 18세기 예카테리나 대제 시기에 이주해온 독일인들이 대규모로 거주하고 있었다. 아마 도시 이름을 대놓고 독일인 이름인 '엥겔스'로 바꾼 것도 이 지역의 민족적 배경과 무관하지는 않을 듯.
날이 너무 더워 늘어져 있는 개. 러시아에는 이렇게 그냥 돌아다니는 개들이 많은데 가끔 쫄 때가 있다..
엥겔스의 레닌 동상.
가족들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공원이다.
그러다 발견한 오징어 게임. 5세 이상은 놀 수 있다고 하는데 저기서 뭘 할지 궁금해졌다. 달고나 만들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려나?
엥겔스의 영원한 불꽃.
역시나 군사주의를 습득하고 있는 어린이들.
볼가강은 오늘도 유유히 흐른다..
공원에는 볼가 독일인 강제 이주를 추모하는 비석도 서 있었다. 내부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멀리서 줌을 땡겨서 찍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새롭게 확장했지만 무슬림 인구가 대대적으로 빠져 나간 볼가와 캅카스 지역의 인구를 보충하기 위해서 독일인들에게 토지를 주는 조건으로 상당히 많은 개척 이민을 받았다. 사실 독일인 공동체는 러시아 제국의 서쪽 변경, 특히 도시 지역에도 많이 형성되어 있기도 했을 정도로 독일-러시아 관계는 각별했다. 예카테리나 자신도 독일인이었고 후대 차르들도 다 독일계 혈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1차세계대전에서 러시아가 독일과 전쟁을 하게 되자, 서쪽 변경의 독일인들의 많은 수가 혹시 모르는 반역 가능성 때문에 멀리 후방에 있는 볼가 지역으로 강제 이주 당하게 된다.
제2차세계대전은 더욱 큰 비극이었다. 그야말로 종족 말살 전쟁이었던 독소 전쟁으로 독일군은 볼가 지역까지도 밀고 올 것이 자명했고, 스탈린은 이들이 독일에 적극적으로 부역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볼가 독일인들을 전면적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시킨다. 특히 카자흐스탄에 대규모 독일인 정착지들이 새로 생겼다. 소련 해체 이후 이들은 오랜 조상의 땅인 독일로 귀환하기도 했으나, 실질적으로 러시아화가 많이 진행된 상태라 독일 측에서는 받아 놓고도 당황했다고도 한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는 고려인들도 관련이 있는 만큼 한국에서도 관심이 많은 주제인데, 역사적 맥락을 제거하고 민족의 비극 차원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다소 안타깝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강제 이주 정책은 러시아가 근대화와 국가 폭력을 결합시키며 연속적으로 형성된 정책이며 2. 소련의 제민족 우애 정책과 어퍼머티브 액션 정책 '덕분에' 강제 이주가 가능했음을 알아야 한다.
엥겔스의 자랑 유리 가가린과 세르게이 코롤료프.
어쨌든 엥겔스까지 알차게 보고 돌아와서 보드카를 사고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취해서 모기의 약탈을 신경 쓰지도 말자고... 하지만 호스텔 관리인이 그 광경을 보더니 "너희들 규정 안 읽었어? 여기 술 금지야"라고 하는 것 아닌가. 아니, 제대로 관리라도 되는 호스텔이면 모르겠는데, 세탁기도 안 되고 모기장도 뜯겨 있는 관리 방치 상태의 호스텔이 이런 데서는 깐깐하게 나온다니 어이가 없었다. "아아 미안하다 우리가 러시아어가 짧아서 잘 몰랐다"한 다음에 다시 몰래 마시기 시작했는데...
한 잔을 나누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면서 "여기 애들 있어서 술 안 된다니까! 술 내놔."하는 것 아닌가. 부엌 겸 식당에 CCTV라도 달려 있지 않고서야 알 수가 없었는데... 뭐 달려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에는 술을 헌납하고 욕을 하면서 밥이나 먹었다. 당연히 시작된 모기의 공격에 전혀 방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잠은 들었는데...
당연히 모기 때문에 새벽 2시에 깨버렸는데 이번엔 더 희한한 일이 있었다. 방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 아닌가. 보니까 어제는 없던 러시아인이 옷도 안 갈아입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자기 개인 전등을 환하게 켜 놓고 자고 있었다. 아 이건 또 뭐야.... 하면서 부엌에 가서 쥬스나 한 잔 하고 다시 누웠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나한테 오더니...
"화장실 어디야?"
복도로 나가서 화장실을 알려줬다.
근데 갑자기 다시 오더니
"화장실 불 어떻게 켜?"
아.. 일단 얘가 켜 놓은 불부터 재빠르게 끄고 화장실에 가서 불을 켜주고 돌아왔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내 바로 앞까지 오더니
"지금 몇시야?" 이러는 것 아닌가.
이때부터 뭔가 이상한 인간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새벽 3시인데..."하더니 이것저것 계속 묻는다. 밖에 나가도 되냐, 근처에 가게 있냐 등등등. 아니 이 새끼는 뭔데 밤에 잠도 안 자고 뭐하는 짓거리인가 했는데 솔직히 예상치 못한 또라이일 수 있어서 조마조마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우리 방에는 강력한 카라차이-체르케스 무슬림 전사가 있으니 그가 잘 막아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문제는 내가 러시아어가 잘 안 되어서 답변을 제대로 못 하니 그 카라차이-체르케스 친구한테 가서 계속 뭔가를 물어봤다. 자기가 핸드폰도 잃어버리고 카드도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하냐 어쩌구저쩌구 하는데 아니 대체 이런 놈이 어떻게 호스텔에 들어온 거지 싶었다. 어차피 잠은 자기는 텄으니 핸드폰이나 하면서 동이 터올 때까지 시간을 죽였다. 결국 이틀차는 더욱 잠을 자지 못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스탈린그라드로 움직여야 했다.
그래도 나를 웃게 만들어준 CCCP 2.0 탱크
이건 또 왜.. 러시아 전쟁의 상징인 Z와 V. 모스크바에서는 사막에서 바늘 찾기였는데 여기는 다르구나.
무슨 군부대 시설인 것 같아서 몰래 찍었다. 이제 사라토프 역에서 기차로 5시간 반을 달려 남쪽의 도시, 볼가강의 도시 '볼고그라드'이자 전설적인 스탈린그라드로 향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