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 대종주 (12):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길
드디어 스탈린그라드에 도착! 하긴 했는데...
사라토프에서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기차 시간은 대략 5시간 반. 사라토프에서 출발하는 기차라서, 이제 막 출발 준비를 하는 기차는 후덥지근 했으나 기차가 달리기 시작하면서 이내 에어컨이 나오기 시작했다. 에어컨 빵빵한 선진 러시아 만세를 부르며 사라토프에서 고갈되었던 체력을 수면을 통해 보충하고자 했다. 그렇게 비좁은 2층에 몸을 구겨 넣고 아늑하게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저기 이거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라고 어떤 러시아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오셨다. 러시아인의 노안을 감안해서 대충 40세 언저리 정도 되어 보이는 분이었다. 2층 침대에 있는 침대 매트리스를 짐칸인 3층에 넣어줄 수 있냐는 것. 억지로 구겨 넣었던 몸을 다시 빼내고 도와드리고 다시 들어가서 잤다. 한 두 시간 정도 잤을까. 눈이 떠졌다. 내려와서 글을 쓰고 있는 동행과 우크라이나 역사에 관한 문제로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 도와드렸던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Can you speak english?"하면서 말을 걸어 오셨고, 아까 도와준 거 고맙다고 뭐 좀 먹으라고 하면서 가방에서 먹을 걸 주섬주섬 꺼낸다. 빵 위에 러시아 꼴바사를 올린 간식이었는데 꼴바사가 정말 맛있었다. 연신 감사합니다를 외치는데
"차나 커피는 안 필요해요?"
그렇게 차에 과자까지 얻어먹었습니다. 러시아 기차에는 고객용 찻잔이 항상 준비되어 있어서, 티백만 있으면 언제든지 차를 우려서 마실 수 있다. 아주머니가 뭔가 무척 사교적이고 '영어 쓴다'를 어필하고 싶으신 게 우리와 대화하고 싶다는 눈치가 강하게 느껴져서, 나는 차를 다 마시고 아주머니 있는 쪽에 가서 앉았다. 아주머니는 사라토프 사람이고, 아이들과 함께 소치로 놀러 간다고 했다. 남편은 외무부에서 일해서 러시아에 없다고 하고 짧은 영어도 그때 배웠다고 한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씩 웃더니
"혹시 싸마곤 먹을래?"
싸마곤은 러시아에서 양조장이 아니라 민간인들이 직접 담가 먹는 술을 뜻한다. 러시아 기차에서 술은 'Vagon-Restoran'이라는 식당칸에서만 먹을 수 있는데, 사실 몰래 음료수병 같은 데 담아서 홀짝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분도 그런 분이셨구나... 어쩐지 옆에 앉은 다른 아주머니는 이미 혀가 조금 풀린 것 같더라니. 물론 나도
"Konechno!", 물론이죠!를 외치고 립튼 아이스티 병에서 나오는 술을 한 잔 마셨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웃으면서
"러시아 인민의 진정한 술은 보드카가 아니라 싸마곤이거든."이라고 하셨다.
역시 이번에도 경제 제재 이후 러시아의 체감 경기를 물으니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라고. 물론 남편이 외무부에 근무하고 있다는 걸 감안은 해야겠지만 말이다.
역시 스텝 세계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해주는 풍경.
기차가 볼고그라드에 서서히 접어들자, 반대편 창가의 할머니가 "어머니 조국상"이 슬슬 나올 것이니 저쪽으로 가보라고 손녀를 우리쪽으로 보냈다. 그러더니 갑자기 차 안의 승객들, 특히 아이들과 함께 한 부모님들이 다들 창문에 붙어서 어머니 조국상이 나오는 것을 빤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웅성웅성 소리와 함께 마침내 모습을 드러난 어머니 조국상.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기차에서도 저렇게 보일 정도니 그야말로 그 아우라가 굉장했다. 손녀는 어머니 조국상이 다 지나간 다음에 다시 할머니에게로 돌아갔는데,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즉석 역사 강의를 시작했다. "Za Russki narod...."
'러시아 민족을 위하여....'
그렇게 도착한 볼고그라드 역.
역 앞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념하는 다양한 기념물들을 볼 수 있다.
2013년 이곳 기차역과 트롤리 버스에서 연쇄 테러가 발생해 30여 명이 죽은 비극이 있었다. 소치 올림픽을 노린 다게스탄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의 소행이었다고 한다.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가는 사건이지만 이 사건 때문인지 볼고그라드의 보안 검색대는 다른 곳보다 더 많았고 철저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상징인 아이들과 악어 동상. 옛날에 철거된 것인데, 러시아 애국주의가 부활하며 대조국전쟁에 대한 관심과 기념이 유행하면서 이 동상도 부활해 기차 역 광장 앞에 설치되었다.
역시나 나를 반겨주는 Z
'러시아는 나의 역사' 박물관... 너무나 궁금했으나 일정 상 가볼 수는 없었다.
대조국전쟁과 연관된 애국주의 광고는 어디서나 볼 수 있었지만 스탈린그라드는 역시나 스탈린그라드답게 자주 보였다.
자 이제 숙소로 가는 길. 볼고그라드의 숙소들이 예약 확정을 안 해줘서 고난 끝에 정하게 된 숙소. 일전에 사라토프에서 너무 크게 데였기 때문에 상당히 불안한 상황이었다... 시내 중심가에서 10km 떨어진 곳이고, 구글에서는 저렇게 1시간 20분이니 뭐니 하지만 실제로는 2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물론 우리는 볼고그라드가 인구 100만의 대도시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저기도 어느 정도 주택가가 있는 곳이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풍경인가요..
심지어 우리가 탄 버스는 숙소에서 한 2km 떨어진 곳이 마지막 정류장이라서 숙소까지 2km를 걸어가야 했는데, 나오는 풍경이 주택가는커녕 전형적인 아무도 안 지나다니는 시골길이라서 놀랐다. 아 이 거 제대로 된 숙소가 맞는가? 우리 오늘은 푹 쉴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가운데... 일단 숙소에 도착. 방은 무척이나 좋았다. 기숙사형 호스텔 말고 돈을 조금 더 얹어서 에어컨까지 나오는 2인실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 슬슬 마트 가서 저녁 거리나 사오죠."
"근데 근처에 마트가 있을까요?"
"음... 주인 할머니한테 물어보죠."
그리고 주인 할머니께서는 가장 가까운 마트가 3km 밖에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해도 뉘엇뉘엇 넘어가서, 마트 갔다가 오는 길에 깜깜해질 수도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
마트까지 가는 길은 아까 숙소 가는 2km 길보다 더 나를 쫄게 만들었는데, 사람이 드문드문 사는 허름한 주택가들이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근데 러시아에서는 들개가 많아서 사람이 있는 것도 무섭고 없는 것도 무섭다. 하여튼 해가 지기 전에는 갔다 와야 하는데!
그래도 풍경은 좋아서 이건 페이스북 커버 사진으로 낙착.
마트가 있는 곳에는 문명 사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아파트가 있었다. 마트에서 5분만에 후다닥 장을 보고 나와서, 짐을 들고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왔던 길을 신속하게 주파했다. 은은한 밤 풍경 대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스산한 러시아 시골을 배경으로 한 각종 호러 영화 소재들이었고... 1.5배 정도는 빠르게 돌아와서 길었던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제 다음부터 본격적인 스탈린그라드 탐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