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 대종주 (14): 어머니 조국상
말이 필요 없이 그저 직접 보고 압도될 수밖에 없는 걸작.
드디어 이번 여행의 사실상 진짜 목적지라고 할 수 있는 어머니 조국상으로 향하는 길. 그런데 우리 숙소가 있는 동네에서 어머니 조국상이 있는 '마마예프 쿠르간'으로 바로 내려주지는 않고, 한참 걸어야 나오는 무슨 복합 쇼핑몰 같은 데서 내려주었다. 문제는 우리가 전날 보드카를 너무 많이 마셔서 술병에 걸려 있던 상태였다는 것...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한 첫 날, 야간의 쇼핑을 마치고 샤워를 한 뒤 감격의 술상을 벌이기 직전. 숙소 바깥에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갔는데 3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웃통을 벗고 있는 러시아인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어요?"
"아 한국 사람입니다."
"일하러? 공부하러?"
"여행 왔습니다."
"오오 여행! 이 도시 원래 이름이 뭐였는진 알겠죠?"
"그야 당연히 '스탈린그라드'!"
이 말을 듣더니 씨익 웃으면서
"그러면 그 전의 이름은?"
"차리친이죠."
"똑똑하시네. 이름이 뭐에요?"
"림이요."
"비탈릭입니다. 들어봐요. 여기 '어머니 조국상'만큼은 반드시 봐야 합니다. 반드시!"
잠시간의 가슴이 웅장해지는 대화를 나눈 뒤 헤어지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Spokoinoi noch'" (안녕히 주무세요)
"난 우크라이나인인데, 우크라이나어로는 ~~~라고 합니다."
헉 우크라이나인이라니. 아무래도 볼고그라드에 오래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 같았다. 무척 민감한 주제지만 그가 지금의 정치적 상황과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졌다. 사실 러시아어로만 얘기하면 껄끄러울 수도 있는데, 마침 동행분이 우크라이나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우크라이나어도 알고 그 지역 분위기와 역사에 정통한 편이기 때문에 그런 미묘한 문제는 잘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얘기를 동행에게 하니 비탈릭을 술자리에 다음 날 꼬드기자며 보드카를 조금 더 샀던 것.
문제는 비탈릭이 일하느라 바빠서인지 그날 숙소에 돌아오지를 않았고... 이미 취한 상태에서 "에이 남은 것도 그냥 다 마실까요?" 했다가 재난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원래 700ml만 마시던 우리는 1000ml를 먹고 뻗어 버렸는데 1인당 소주 3병 정도는 마시게 된 듯.
나는 괜찮았는데 동행이 술병을 좀 앓아서 출발도 늦어지고 여러모로 고생하게 되었다. 비탈릭하고는 끝내 이야기를 더 못했는데 이건 참 아까운 일이다. 그렇게 고생하게 된 상태에서 어머니 조국상 바로 옆도 아니고 한참 걸어야 하는 쇼핑몰에 내려주니 처음에는 절망스러웠으나, 쇼핑몰에서 KFC를 발견하고 뭐라도 입에 쑤셔 넣고 갈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이 또한 어머니 조국의 은혜이리라.
위 사진은 그 쇼핑몰에서 발견한 'Designed by KOREA' 옷집
마마예프 쿠르간은 '마마이 언덕' 같은 뜻이다. 마마이는 킵차크 칸국(주치 울루스)의 유명한 군 사령관으로 쿨리코보 전투에서 돈스코이에게 패배한 것으로 러시아 역사에서는 유명하다. 쿠르간은 폰투스 초원 지대에서 발견되는 커다란 봉분인데, 고대 인도유럽인들이 무덤 위에 큼지막하게 세운 언덕이다. 이 쿠르간이 인도유럽인 자체를 상징하게 되어서, 인도유럽인이 폰투스 초원 지대에서 유래한 목축민이라는 가설도 '쿠르간 가설'이라고 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실 마마이 언덕이라고 하면 좀 의미가 잘 살지는 않지만... 어쨌든 언덕이다보니 오르막을 올라야 하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서 어머니 조국상이 정말이지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눈 앞에 나타났다.
그러니까 뭐랄까 저런 크기의 기념상이 저런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어색해서, 뇌가 '이거 뭔가 이상한데?'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라고나 할까. 신화의 거인족이나 괴수 영화에 나오는 거대 괴수를 실제로 보면 저런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참고로 이 기념상의 높이는 52m이고, 치켜 든 칼 끝에서 바닥까지의 높이는 85m다.
동상 뒷편에는 무려 '스탈린 박물관'이 있다. 그런데 아뿔싸, 스탈린 박물관에서는 현금 밖에 안 받는다는 말을 들었다. 이걸 어쩌나 하다가 내일 아침에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들리자고 하고 일단 넘겼다.
스탈린 박물관 옆에는 제2차세계대전의 결정적 시기를 담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그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벌어진 대격전인 쿠르스크 전투를 담고 있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박물관.
알고 보니 우리는 정문을 따라서 간 게 아니라 후문을 따라서 뒤에서부터 보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과 비교해봤을 때 그저 할 말이 없습니다.
동상 앞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념하는 여러 석상들과 기념물들이 늘어서 있고 사실 이거 하나하나가 걸작들이다.
우선 스탈린그라드 전몰자 묘역부터.
하바로프스크 변강주에서 달려온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전자들을 위한 추모비. 별의 별 곳에서 이런 추모비를 다 보내왔다. 카자흐스탄, 사마라 주, 아디게야 자치 공화국, 타타르스탄 공화국 등등... 공식 자료에 따르면 거의 48만명 가까운 소련군이 이 전투 하나에서 죽었고 65만명이 다쳤다고 한다. 평균적으로 신병 생존 시간이 24시간이 채 못 되었다니 정말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다.
저 벽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것이 모두 사람 이름이다.
기념상 쪽에서 바라본 아랫쪽 풍경.
발가락 하나만 해도 위엄이 장난이 없다.
전사한 아들의 시신을 감싸 안은 어머니 동상.
러시아 문화에는 이런 가족주의나 한국과 유사한 '한'의 정서가 꽤 자주 나타나는 것 같다. 많은 구소련권 도시에서는 '우는 어머니' 기념상을 볼 수 있는데 제2차세계대전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것이다.
여기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는 곳.
1시간에 한 번씩 교대식을 진행하는데, 뒷편을 잘 보면 나오지만 병사들이 그 소련식 발걸음을 하면서 빠져 나가고 있다. 운 좋게 교대식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내려가면 (사실은 반대로 올라가야 하는 거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격전을 묘사한 석상들이 일렬로 쭉 서 있는 공간을 지나가게 된다.
웅혼한 소비에트 마초이즘
마마예프 쿠르간의 또 다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동상.
이쯤에서 들어줘야 하는 노래. 붉은 군대 합창단이 부른 '꾀꼬리'
내 기억이 맞다면 1970년대 초반에 촬영된 영상인데, 마마예프 쿠르간 기념 단지가 조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숨진 소련 병사들을 위로하는 추모곡 같은 노래인데, '땅에 묻힌 병사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꾀꼬리들아 울지 말아라'
어떤 분이 유튜브에 친절하게 가사 번역을 첨부해서 올려주셨다.
사실 여기가 시작점이고, 여기서부터 점점 위로 올라가면서 다가오는 어머니 조국상의 위엄을 느낄 수 있게 설계된 듯 했다.
밑에를 내려오면 '영웅 도시' 기념물들을 볼 수 있다. 영웅 도시는 제2차세계대전 때 영웅적으로 싸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은 도시들을 뜻한다. 대조국전쟁 기념 공원 같은 데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리고 키예프.
세바스토폴. 오데사도 있다.
어머니 조국상 덕택인지 술병은 완치가 되었고 이제 스탈린그라드 시내의 나머지 구역들을 둘러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