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 대종주 (16): 유럽 유일의 불교 국가 칼미키야
한국에서 6700km 서쪽의 불교 국가, 칼미키야를 가다
볼가 대종주도 점차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후반을 장식할 도시, 칼미크 자치 공화국의 엘리스타.
사실 '유럽 유일의 불교 국가'라는 건 칼미키야의 특색을 아주 과장해서 부르는 말이긴 하다. 기본적으로 러시아 연방의 '자치 공화국'이니 당연히 주권 국가가 아니다. 타타르스탄의 경우 '대통령(President)' 칭호를 쓸 수 있는 유일한 자치 공화국이니 그래도 조금 봐줄 수 있는데, 타타르스탄 이외 자치 공화국은 '수장(Glava)'이라는 칭호를 쓴다. 옐친 시대에 엉거주춤하게 봉합했던 연방 정부와 자치 공화국 정부 간의 자치권 다툼은 푸틴이 들어서면서 거의 다 회수해갔다. 칼미크어를 더 전면에 내세우고 칼미크 민족 정체성을 소련 시절보다 열심히 표현할 수 있게 된 게 자치 공화국의 실상이다. 물론 이것도 소련 시절과 비교하면 대단한 변화지만...
어쨌든 지리적으로 유럽이라는 이 공간에서 뜬금 없는 몽골계 불교 '국가'가 있다는 게 꽤나 마케팅 포인트인지라, 실제로 가본 사람은 많이 없어도 알만한 사람은 들어는 보게 된 곳이 이 칼미크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파고 들면 애초에 그 유럽이라는 지리적 범주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가상의, 심리적 범주라는 함의가 도출되지만..
칼미크인이 이 지역에 도달하게 역사는 대몽골제국의 붕괴로 시작한다. 몽골 제국이 붕괴하며 알타이 인근의 오이라트가 흥기하게 되었고, 오이라트는 명제국과 맞서 싸우는 강력한 유목 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서쪽의 오이라트와 동쪽 할하 몽골의 다툼은 오이라트를 내부에서 분열시켰다. 그래도 17세기에는 준가르라는 이름으로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신장 지역에서 몽골 고원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을 통합하고, 만주의 청제국과 일전을 벌였다. 준가르는 청을 위협하는 막강한 세력이 되었으나, 청과 러시아의 연합, 청의 국가 및 행정 기구 강화, 내륙 아시아와 강남 상업 지대의 통합 등으로 인하여 준가르는 세력을 빠르게 상실했다.
오이라트 연합이 붕괴하고 준가르가 등장하는 사이의 혼란기에, 준가르에 통합되지 않고 17세기 초반에 서쪽으로 향한 오이라트의 일파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칼미크인들이 된 것이다. 이들은 17세기 중엽에 볼가강 하류와 카스피해 북쪽 지역의 초지를 점유하고, 북쪽의 러시아인과 마주했다. 차르 권력에 신속된 이들은 차르에 군사적으로 봉사하는 대신에 자치권을 부여 받았고, 기병대로 활약하며 군사 원정에 참여했다. 하지만 예카테리나 2세가 독일인과 러시아인의 이주를 촉진하면서 칼미크인들은 다시 위기 의식을 느꼈다. 이는 예카테리나 2세 시기 스텝 변경에서 나타난 무수한 압박의 일부였다.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제 코사크와 푸가초프 난에 합류한 바시키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토지 압박에 더하여 여제가 오스만과의 전쟁을 위해 칼미크에 군사적 부담도 더욱 무겁게 물리게 되면서, 칼미크인들은 다시 조상들의 고향인 몽골 초원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대륙 반대편 건륭제에게 귀환의 의사를 타진했는데, 이미 원정으로 준가르를 초멸했던 건륭제는 황제의 자비를 보여주어도 되겠다 싶어 그 제안을 허락했다. 문제는 귀환하는 길이었는데, 러시아 제국은 칼미크인들의 귀환을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카자흐인이나 코사크를 동원해서 칼미크 귀환 행렬을 공격하고 약탈하게끔 부추겼다. 귀환 행렬 과정에서 칼미크인들의 인구는 출발 시점에서 반 이상이 줄어 있었고, 준가르가 몰살 당해 이제 무슬림 위구르가 주류가 된 신장 지역에 도착해서도 전염병과 가난으로 고통 받으면서 힘들게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귀환 행렬에 합류하지 않고 러시아 제국의 신민으로 남겠다고 결정한 칼미크인들이 있었으니, 바로 그들이 지금 칼미키야 공화국의 직계 조상이 되는 칼미크인들이다. 러시아에 약 18만명이 살고 있으며, 그중 대부분은 칼미키야 공화국에 거주한다. 칼미키야 공화국에는 30%의 러시아인과 그 밖의 다른 민족들을 합쳐서 27만 명이 살고 있는데, 면적이 7만 6천 제곱 킬로미터(남한의 76%)임을 생각하면 인구 밀도가 얼마나 낮은지 알 수 있다. 그중 수도인 엘리스타의 인구는 10만 명이다.
차 창을 찍어서 화질이 낮은데... 같은 스텝이라도 볼고그라드까지 푸른 초원이 보였다면 칼미키야 쪽 초원은 초원이라고 불러도 되나 싶을 정도의 황량한 노란 색이었다.
6시간 가량을 달려 도착한 터미널. 터미널 안의 불교 사원 같이 보였다.
일전에 시베리아에 위치한 부랴티야 공화국의 수도 울란 우데에 갔을 때랑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숙소 예약을 시도하다가 도저히 예약 허락이 되는 데가 없어서 무턱대고 들어간 '알파 호텔' 역 앞에 위치한 호텔인데 가격이 꽤 쎘다. 1박에 5만원... 그래도 역 앞에 숙소를 잡으면 다음 도시로 떠날 때 편하기도 하고, 스탈린그라드 때 숙소는 좋았어도 멀리 떨어진 위치 때문에 고생했던 걸 생각하니 그냥 여기서 묵기로 결정했다. 숙소 근처에 있는 마가진(가게)에는 이름도 위엄찬 Z 콜라가 있었다. 검색해보니 로스토프 나 도누 쪽에 있는 음료수 기업에서 코카콜라가 남기고 간 생산 설비를 인수해서 만들고 있는 듯 했다. 심지어 Z답게 제로콜라! 칼로리 걱정을 않고 물처럼 마셨다.
롤톤(rollton)은 러시아 현지 라면 기업인데, 이런 매운맛 라면도 파는 줄은 몰랐다. 러시아 기준의 '매운맛'이라는 건 조선인으로서는 실로 가당치 않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호기심이 동해서 사보았다.
오 그런데 그 이전의 다른 매운맛 참칭 음식과는 달리 그럭저럭 그럴싸하게 매운맛을 보여주려고 해서 기특했다. 물론 한국에 가져오면 그냥 평범한 수준이다.
이 집은.... 혹시 저를 만나실 분이 있다면 이 집이 어떤 집인지 여쭤봐주세요. ㅋㅋ
동양풍의 장식이 이곳 저곳에서 많이 보인다.
가루다 석상이라고 한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칼미크 공화국에서는 민족 정체성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할 목적으로 이런 석상, 동상들을 이곳 저곳에 지었다.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소련의 다른 위엄찬 기념상에 비하면 수준이 높다고는 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그 문화적 독특함 덕분에 보는 맛은 있었다.
칼미크 공화국 최고 법원! 자치 공화국의 위엄이 보이는 건물이다.
근데 동양과 워낙 멀리 떨어진 곳에서 민족 정체성을 다시 내세우겠다고 동양풍을 열심히 깔다 보니, 뭔가 러시아에서 무지성으로 생각하는 오리엔탈리즘 양식들이 나오는 것 같기도...
'오이라트 아레나' 이름도 그렇고 저 Z가 압도적이었다..
상당히 까리했던 황금 기마전사상.
카잔과 우파에서는 타타르어와 바시키르어를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제프스크에서는 우드무르트인 인구가 많지 않아서 우드무르트어를 보기 쉽지 않았는데... 칼미크 공화국에서도 칼미크어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인구 57%가 칼미크인이라는데도 말이다. 그 대신 공화국 국기, 건축 양식, 사람들 얼굴부터 이곳이 칼미크 공화국임을 상기시켜주는 요소는 차고 넘쳤다.
칼미크 공화국 민족 박물관.
개인적으로 3년 전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도시 중 하나가 부랴트 공화국의 울란 우데였다. 티베트 불교를 반영한 독특한 미술품들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래서 칼미크를 방문할 때도 가장 기대되는 게 바로 박물관이었다. 바시키르 공화국에서도 박물관에 가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간 날은 휴관일이었다.
오이라트인들의 이동을 나타낸 지도.
여기가 우리가 그동안 여행한 볼가 지역이다.
Казань(카잔)
Самара(사마라)
Саратов(사라토프)
Царицын(차리친, 볼고그라드)
그동안의 여정을 생각하니 가슴이 웅장해지면서도, 상류의 니즈니노브고로드, 체복사리, 야로슬라블, 리빈스크, 지류의 페름도 언젠가 제패를 할 것을 다짐했다.
몽골 파스파 문자로 써 있는 여러 자료들이 있었다.
솔직히 부랴트만큼 미술품의 수준이 높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부랴트는 어쨌든 티베트 불교 세계의 외곽에 있으면서 문화적 교류를 할 수 있었고, 칼미크인처럼 이주와 귀환 같은 고난을 겪지도 않았다. 인구도 많고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교역을 하며 자본도 쌓을 수 있었던 부랴트인들이 훨씬 더 수준 높은 예술품들을 만들 수 있던 것이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서쪽으로 6700km 떨어진 곳에서 이런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 아닐지.. 각각 백색 타라 보살과 녹색 타라 보살. 19세기 작품이라고 한다.
표트르 대제와 칼미크 수장의 만남을 묘사한 작품 같은데 실제 둘의 권력 관계는 몹시 비대칭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주도하지만 그럼에도 민족은 평등하다'는, 소련에서 러시아로 이어져 오는 러시아의 제국 이데올로기를 생각한다면 실제 그 비대칭을 작품에라도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3년 전 카잔에서 본 그림에서도, 결코 동등할 수 없었던 러시아와 타타르를 동등하게 묘사하려는 노력이 인상적이었다.
실제 두 문명이 이렇게 동등하게 조우한 것은, 표트르 대제와 강희제의 사절단이 만나 러시아어, 만주어, 라틴어로 조약문을 써 국경을 획정했던 네르친스크 조약이었다. 언젠가 네르친스크도 가보리라..
여기에는 조금 더 러시아의 주도권이 잘 드러난다.
부랴트가 형성한 기대치에는 못 미쳤지만, 그래도 눈이 즐거웠다.
그 다음에는 대조국전쟁 기념관. 칼미크인들은 주로 기병대로 소련군에 복무하며 활약했다.
칼미크 출신으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된 인물. 아 이 친숙한 몽골로이드 얼굴이여...
18세기 후반에 러시아 영토에 잔류한 칼미크인들은, 귀환을 선택한 동포들보다는 덜 고통 받았지만, 그들 또한 20세기에 강제 이주와 귀환이라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청색 작전을 통해 독일군이 남러시아와 북캅카스로 밀고 들어오고, 일부 칼미크인들이 독일군에 협조하여 소련 체제에 반역할 기미를 보이자, 스탈린은 칼미크인 전체를 머나먼 페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으나, 일부는 소련군에 입대하여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해 보일 수 있었다.
많은 강제 이주 민족들처럼 흐루시초프 시대가 되었을 때야 그들은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다.
여기는 이제프스크나 우파에서 보았던 것처럼 거대한 제민족 우호 기념비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중앙 공원의 이름이 '우애 공원'이었다.
관리가 되는 건지 심히 의심되는 공원의 상태였는데...
그래도 영원한 불꽃과 대조국전쟁 기념비 쪽으로 가니까 훨씬 양호한 관리 상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건 대조국전쟁이 아니라 아프간 전쟁과 체첸 전쟁의 전몰자들이다.
엘리스타의 영원한 불꽃. 날이 너무 덥고 쨍해서 불꽃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숙소 할머니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다음은 어디로 가?"
"엘리스타요."
"엘리스타라.. 거기 엄청 더워."
"여기 볼고그라드도 뭐 엄청 더웠는데요 ㅎㅎㅎ"
"거기는 더 더워. ㅋㅋㅋ"
그 말씀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한국이 찜통이라서 덥다고 뭐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40도 햇살은 너무 강력하긴 하다...
이런 불교적 상징 참 좋았다.
엘리스타의 소비에트 연방 영웅을 기념하는 곳. 공원 안에 있다.
엘리스타의 남은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