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 대종주 (完): 볼가강의 끝, 아스트라한
기나긴 볼가강의 마지막 도시, 그리고 그곳의 소련 깃발
엘리스타에서 아스트라한까지는 다시 5시간 정도를 달려야 한다. 정말 황량한 구간이었다. 중간에 들린 휴게소에서 찍은 사진인데, 휴게소의 상점이라는 곳은 정말 물건도 없고 눈이 축 처진 아주머니 두 명이 우두커니 가게에 앉아 있었는데... 시원한 물이라도 마실까 했지만 미지근한 물줄기가 찔끔찔끔 나오는 급수대에서 대충 세수만 했다. 그래도 고속도로에서는 창문을 열어 놓고 달리니,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서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크게 덥지는 않다. 도시에 들어와서 속도가 느려지면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더워진다.
볼가강 물 줄기는 아스트라한을 거치면서 카스피해로 들어가는데, 저지대에서 물줄기가 자유분방하게 뻗어 나가면서 삼각주를 이룬다. 카스피해가 염호기도 해서 이 지역 토양은 염류화가 많이 진행된 듯 했는데... 저 하얗게 펼쳐진 것은 거대한 소금 평원이 아닌가 싶었다.
원래 이쪽 지형을 제대로 보지 않았을 때는 아스트라한에서 택시 타고 카스피해라도 보고 오자고 하려 했었는데, 삼각주 하구 쪽이 딱히 정비가 되어 있지는 않아서 카스피해를 볼 괜찮은 장소는 없는 듯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각보다 아스트라한에서 카스피해까지 거리가 꽤 된다.
서서히 나오는 볼가강 지류들.
드디어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 아스트라한에 도착!
숙소 근처에 '렌타'라고 하는 쇼핑몰이 있어서 갔는데 완전 코스트코가 따로 없었다. 일단 이 날은 여기서 술이랑 밥이랑 사서 하루밤을 대충 보냈다.
아스트라한 둘째 날.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쇼핑몰에서 밥부터 먹기로 했는데 일본 만화 관련 오타쿠 상품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그냥 구경만 하러 들어갔는데 오 진격의 거인이.
별개로 어딜 가나 활동적이고 인싸삘이 넘치는 러시아인들이라 대체 러시아의 아싸들은 어디 있으며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했는데 이 가게에서 모여 있는 한 무리의 러시아 오타쿠들을 보고 '아... 이렇구나'라고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국시 카비(국수 카페)라는 황당한 가게를 발견.
메뉴는 그냥 한중일이 섞여 있는 전형적인 러시아의 무근본 동양 음식점이었는데, 저렇게 거꾸로 뒤집힌 한글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는데 처참한 리뷰들이 몇 개 있어서 얌전히 푸드코트에서 검증된 다른 음식을 먹었다.
성 블라디미르 대공 성당. 20세기 초에 완공되었는데 러시아 혁명 이후 창고로 쓰이다가 한 동안 버스 터미널로 쓰였다고 한다. 그래도 폭파는 안 되어서 다행이다. 지금은 재건 공사가 한창이었고, 지하실 같은 데 작게 예배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볼가강 본류에서 아주 가까운 아스트라한의 운하. 저런 배를 타고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카스피해로 향하는 출구인 아스트라한은 카스피해 인근 국가들과 교류하는 허브이기도 하다. 그중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아제르바이잔과 교류가 특히 많은 듯 했다. KGB 출신으로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독재자가 된 헤이다르 알리예프 동상과 그의 공원이 있었다. 뒤에는 운하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까지 있었는데 모두 아제르바이잔 정부 기금으로 조성해 주었다고 한다.
저 뒤에 아스트라한 크렘린이 보인다.
'크림 탑'이라고 한다. 크림은 당연히 흑해의 그 크림 반도.
시내의 최고 중심가라서 그런지 여기도 레닌 동상이 있다.
아스트라한 크렘린으로 가는 길. 사실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하면서도 실질적으로 유일한 관광지다..
크렘린은 러시아어로 성채 요새를 뜻하는 말이다. 성곽과 그 내부의 행정 기관, 성당 등이 있다. 러시아 권력의 심장인 붉은 광장 앞의 모스크바 크렘린이 가장 유명한데, 그 밖에도 러시아의 유서 깊은 도시들은 다들 크렘린 하나쯤은 끼고 있다. 이번 행선지에서 크렘린이 있는 도시는 카잔과 아스트라한.
아스트라한도 당연히 러시아의 전통적인 영역은 아니었고, 과거에는 하자르인부터 시작하여 타타르인, 몽골인, 튀르크인들이 오가는 유목민의 땅이었다. 볼고그라드와 아스트라한 일대는 키예프 루스를 멸망시킨 킵차크 칸국의 중심지가 되었고, 수도인 사라이도 그 인근에 위치한다. 킵차크 칸국은 티무르의 침공과 흑사병의 영향으로 결정적으로 약화되고 분열했다. 그 결과 흑해와 면하고 있으며 훗날 오스만의 후원을 받게 되는 크림 칸국, 삼림 지대와 초원 지대를 연결하며 볼가강 중류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룬 카잔 칸국, 볼가강 수계망의 종착지이자, 동유럽 평원과 중앙아시아, 캅카스를 연결하는 요충지를 차지한 아스트라한 칸국이 세워졌다.
하지만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은 모두 러시아 국가의 권력을 공고히하고 본격적인 동방 팽창을 시작한 이반 뇌제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이 지역을 남쪽으로 향하는 주요 기지로 삼은 러시아 제국은 16세기부터 요새(크렘린)를 건설했던 것이다. 러시아 치하에서 이 도시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캅카스를 이어주는 카스피해의 교통 요충지로 성장했다.
역시나 어김 없이 우리를 반겨주는 Z
러시아 여행에서는 항상 화려하고 독특한 디자인의 정교회 성당이 중요 관광지로 꼽히는데, 실제 여행을 하면 늘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처음에는 그 화려함과 한국인 입장에서 이국적인 느낌에 놀라서 연신 감탄을 하는데, 사실 중반부터는 그 성당이 그 성당이라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후반부에는 그래도 유명하다니까 의무감으로 방문하게 된다. 물론 이는 러시아 정교의 상징과 역사를 읽어내지 못하는 나 같은 이들의 무지 때문이다..
이 탑은 소비에트 시절에 추가로 덧붙인 것이라고 한다. 안에 박물관이 있었는데, 표 사러 어디 갔다 오기도 너무 지쳐서 그냥 나왔다.
원래 이슬람 세력의 공간이다 보니 이런 비문들도 있었던 듯.
사실 정교회 성당은 안으로 굳이 들어가서 보는 것보다 밖에서 예쁘고 화려한 디자인과 색감을 즐기는 게 제일 좋다.
아스트라한 크렘린을 빠져 나와서 공원에 들렸다. 여기도 있는 영원한 불꽃.
적백내전기에 활약한 용사를 동상으로 제작한 것 같았는데 꼬마애가 신기한 듯이 계속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덥지도 않나..
레닌 동상이 있는 성벽 반대편에는 일리야 울리야노프의 기념상이 서 있다. 레닌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인데, 러시아어에서 가운데 이름은 아버지 이름을 뜻한다. 즉 '일리야의 아들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라는 뜻이다. 바로 이 사람이 레닌의 아버지다. 아스트라한이 고향이라서 이곳에 기념상을 세워둔 듯 했다.
일리야 울리야노프는 아스트라한에 태어나서 카잔에서 교육을 받았고, 카잔 남쪽의 볼가강 연안 도시 심비르스크에서 교육자로 일평생을 살았다. 심비르스크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이 바로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 레닌이었고 소련 정부는 레닌의 고향을 기리는 차원에서 심비르스크를 '울리야노프스크'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한편 레닌 또한 카잔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부자가 모두 볼가강과 함께 한 셈이다.
동시에 일리야 울리야노프는 추바시, 모르도비아, 칼미크, 러시아가 뒤섞인 복잡한 혈통을 갖고 있었는데, 추바시와 모르도비아도 각각 볼가강 인근 지역에 위치한 튀르크, 우랄계 민족이다. 볼가를 따라 형성된 다민족적인 러시아 제국을 상징하는 인물로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크렘린을 보고 아스트라한의 볼가강 하중도를 향해 길을 걷다가 발견한... 동행분이 "저기 좀 보세요" 하고 이걸 발견했을 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기의 처음을 장식한 우크라이나의 소련 깃발을 든 할머니와 어머니 조국상... 여행의 끝자락에서 이걸 본 것도 감회가 새로웠고 저 그림자의 어머니 조국상도 내가 직접 보았다는 게 실감이 나면서 그림이 다르게 다가왔다.
사실 처음에 소련 깃발을 든 할머니를 소재로 글을 쓸 때만 해도 아직 생각이 명확하게는 정리가 안 된 상황이었는데, 여행을 다니면서 조금 더 생각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 소련 깃발을 든 노인, 어머니 조국상, 볼가강, 그리고 우크라이나. 이 모두를 엮어내는 이야기가 손에 잡히고 있는데, 어떻게 쓸지 계속 고민을 하고 있다.
저 계단을 올라가면 아스트라한 다리에 오를 수 있다. 아스트라한에는 1950년대에 완공된 하류쪽 다리와 1980년대에 완공된 상류쪽 다리가 있는데 이건 후자다.
와 씨 근데 다리를 건너는데, 대형 화물차나 버스 같은 게 지나갈 때마다 다리가 흔들 거리는데 진심 너무 무서웠다. 물론 우리도 버스 타고 건넜기 때문에 이 다리가 무너지지 않을 것임은 머리로 잘 알고 있었지만 내 다리로 진동이 전해지니 으아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차가 지나가고 진동이 안 느껴질 때 살짝 안심하다가, 다리가 시간차로 흔들린다는 것을 깨달으며 절망하기도...
볼가강은 흐른다... 저 방향으로 가면 카스피해다.
강수욕을 즐기는 아스트라한 시민들. 숯불 꼬치 구이 샤슬릭을 구워주는 가게도 있었다. 생맥주 기계가 고장나서 우리는 대충 물만 들이키고 움직였다. 신발에 들어간 볼가강의 하류의 모래는 모스크바에서 간신히 다 빼냈다..
다시 벌벌 떨면서 돌아가는 길.
아스트라한의 대표격 호텔이었는데, 카스피해를 면하고 있는 국가들의 국기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이란,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옆의 깃발은 뭔지 모르겠고.. 마지막은 누구나 다 알 러시아 깃발.
소련 때까지만 해도 카스피해에 면하는 나라는 소련과 이란 두 나라 뿐이었고, 두 나라의 상대적 지위 차이가 너무 엄청나서 사실상 카스피해는 소련 독점 상황이었는데, 소련이 해체되면서 카스피해 연안국이 5개로 늘어나며 수역 문제가 크게 불거졌다고 한다. 카스피해의 거대한 석유와 천연가스전은 물론이고 각종 어업권에 해상 경비 문제까지... 러시아인 입장에서는 저 거대한 자원 지대를 통째로 넘겨주었으니 정말 아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 시절에는 자국의 기술력 부족으로 개발을 못 하는 상황이기도 했고, 서방 에너지 기업들의 투자를 받아서 생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과 카자흐스탄 삼국을 중심으로 카스피해를 새로운 물류 지대로 성장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배후에는 당연히 일대일로를 추진하는 중국이 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가 인도로 가는 대안 경로를 모색하며 이란과 인도의 참여를 이끌어낸 상황이다.
언젠가는 투르크메니스탄의 크라스노보츠크(현 투르크멘바시)에서 바쿠로 가는 배를 타고 횡단을 해보는 게 목표인데 할 수 있을지...
도시의 상대적으로 북쪽에 있는 또 다른 승리 기념 공원. 1970년대 쯤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 기념비는 1942-1943년에 죽은 선원들을 추모하는 것이다. 볼가강을 둘러싼 치열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핵심은 볼가강을 통해 끊임없이 밀어넣는 소련의 병력, 물자 지원이었는데, 당연히 이를 노렸던 독일군은 각종 공습으로 볼가강 보급선을 격침시켰다.
한편 스탈린그라드로 향하는 주요 후방 기지였던 아스트라한에서는 가축용 낙타까지 징발했고, 이들은 사막과 스텝을 통해 스탈린그라드로 물자를 이송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 지역은 독일군이 상정했던 소련 점령지의 동방 한계선이기도 한데, 독일 수뇌부는 북극해의 아르항겔스크부터 카스피해의 아스트라한까지를 독일 민족의 생활권(레벤스라움)으로 보고 이 두 도시를 잇는 'AA 라인'이라는 선을 그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 60주년 기념비니 2003년 쯤에 세워진 것 같다.
아스트라한 자체가 볼 게 그리 많은 도시는 아니기도 하고 여행 막바지라 피곤해서 일찍 들어왔다. 전날 들렸던 러시아판 코스트코의 잡지 코너였는데 러시아인들의 농막 별장인 다차를 소재로 하는 잡지가 꽤 많았다. 소련의 생활 수준이 괜찮아지면서 공산당은 대부분 소련인들에게 다차를 제공해줬는데 다차 인근의 텃밭에서 생산되는 채소류는 소련의 빈약한 공식 농업 부분을 보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지금 러시아는 농업깡패..
마트 생선 코너에서 '민타이'를 팔고 있었다. 한국어 명태가 러시아어에 전래된 것이다. 어업 관련으로 한국인들이 러시아인과 소련 시절에 꽤 많이 교류했던 듯 했다. 두바이에서 모스크바로 입국할 때, 옆 자리 러시아 아저씨와 잠깐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자기는 1960년대 초반생이고 러시아의 북동쪽 끝 캄차카 반도의 마가단이 고향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가단을 비롯 캄차카 지역에는 1960년대까지도 소련 국적이 아닌 한국인들이 꽤나 많은 수가 거주하면서 소련 어부들과 함께 일을 했다고 한다. 자기도 그래서 한국 음식을 어릴 때부터 먹을 수 있었고(사할린이 아닌데도!) 지금도 모스크바에서 지인들과 정기적으로 모여서 한국 음식을 해먹는다고 한다. 아아... 오리지널 K에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하여간 민타이라는 말도 그때쯤 넘어갔을 것 같다.
아스트라한에 간다고 하니 모두가 하는 말이 '거기 가면 수박을 먹어야 해!'. 햇살이 엄청 강하다 보니 러시아에서 손꼽히는 수박 명산지라고 한다. 나는 캅카스에서 먹은 수박과 멜론도 정말 너무 맛있었는데, 사라토프에서 볼고그라드 가는 열차에서 술 마시며 이 얘기를 하니 '캅카스는 고기 먹으러 가는 데지, 과일은 무조건 아스트라한이다'라는 답을 들었다.
아스트라한 수박이라고 브랜드까지 붙여져 있다. 옆에는 이런 스티커가 없는 일반 수박들이 쌓여 있었다.
맛있는 수박 고르는 법은 역시 여기서도 ㅋㅋ
마지막 만찬이니 좀 뻑적지근하게 먹어보자고 숙소 1층에 있는 꼬치구이 집에서 샤슬릭도 주문했다. 돈만 자유롭게 쓸 수 있으면 비싼 양고기 샤슬릭을 먹는 건데 그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아서 돼지고기 샤슬릭으로 만족.
장작을 패고 고기를 굽는 것이 실로 프로의 솜씨가 남다르셨다.
1통에 3500원 정도 했는데, 솔직히 둘이서 한 통을 다 먹는 건 무리라.. 꼬치집 아저씨한테 칼을 빌려서 수박을 자르는 대신에 반통은 선물로 드리기로 했다. 아저씨가 선물 고맙다고 서비스로 빵도 공짜로 넣어주셨는데 고기랑 같이 먹으니 역시 천상의 맛..
샤슬릭의 핵심은 역시 저 양파..
아스트라한은 또 러시아를 대표하는 진미인 캐비어의 주산지이기도 하다. 카스피해에 서식하는 철갑상어 알을 러시아 귀족들이 즐겨 먹으면서 문화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어로 생선알을 뜻하는 이꾸라도 러시아어 이끄라(Ikra)에서 온 것이다. 나는 러시아에서 연어알보고 이끄라라고 하길래 아 일본말에서 온 건가 했는데 정확히 반대였다.
혹시라도 캐비어를 먹어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정품 캐비어는 마트 같은 데서 취급도 안 하고 애초에 가격도 돈에 쪼들리는 우리가 넘볼 수 없는 후덜덜한 가격이었다. 대신에 마트에서 김, 미역 등 해조류로 가공해서 만든 모조 캐비어를 팔고 있었는데 꽤 그럴싸한 생선알 맛이 나서 맛있게 먹었다. 보드카 안주로 정말 딱이었다.
여기가 캅카스랑 가까워서 그런지 마트에서 아르메니아 여행 때 먹었던 아라라트 주스 브랜드도 팔고 있었다. 사실 이거 말고 병 밑에 진짜 포도알이 깔린 포도주스가 진짜 맛있는데... 그래도 이 사과주스도 정말 맛있었다. 아 카스피해는 좋은 곳...
드디어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길. 아스트라한에서 모스크바는 비행기로 2시간 반 정도면 간다. 3주에 걸쳐 내려 왔는데 2시간 반만에 돌아가는구나.
공항에서는 그래도 역시 팔아줘야지. 오세토바야는 캐비어 브랜드 중 하나인 듯 했다. 가격은 역시 넘볼 수 없는... 사실 한국 카드를 쓸 수 있다면 한 번 사서 먹어볼만한 가격이긴 했는데, 우리는 세 네번 정도는 손을 거쳐가며 교민들에게 부탁해서 루블 환전을 해야만 했던 상황인지라 돈이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브누코보 공항에서 공항철도를 타면 모스크바 키예프역까지 쏴준다. 브누코보 공항은 대부분 러시아 국내선 저가 항공들이 거치는 공항이다.
동행분과 키예프역 인근 쇼핑몰 푸드코트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고 우리의 마지막 관광지를 찍기로 했다.
바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연합 300주년 기념비.
17세기에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지도자 보그단 흐멜니츠키는 정교회 신앙을 억압하는 폴란드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고자 코사크 대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강력한 폴란드군과의 싸움이 어려워지자 흐멜니츠키는 차라리 신앙을 공유하는 모스크바와 함께 하는 것이 맞다고 코사크들을 설득하였다. 당시 모스크바는 이반 뇌제 사후에 수십 년 지속된 동란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신생 로마노프 왕조를 중심으로 간신히 통합한 상황이었다.
러시아는 코사크의 신종 요청을 받고 얼마 전까지 모스크바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 넣었던 폴란드와 싸우는 것이 과연 맞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1654년에 페레야슬라프에서 흐멜니츠키와 차르 알렉세이가 신종 조약을 맺으면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함께 하게 되었고, 코사크는 러시아 제국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나중에는 폴란드 정복까지 이루어냈다. 물론 흐멜니츠키를 주축으로 이 당시 러시아와 함께 한 코사크들은 동부인들이었고, 주로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 속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런 서사에 딱히 공감할 수가 없었다. 모호한 정체성과 상이한 지향성을 지녔던 우크라이나인들은 1945년 스탈린에 의하여 마침내 '하나의 우크라이나'에 합쳐지게 되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우크라이나 내부의 정체성 갈등을 유발하는 씨앗이 되고 말았다.
어쨌든 흐멜니츠키와 페레야슬라프 협정은 '형제 민족'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단결의 상징으로 계속해서 추앙 받았으며, 1954년에는 협정 300주년을 기념하여 이런 기념비가 건설된 것이다. 사실 300주년 기념의 상징은, 우크라이나 출신 지도자인 흐루시초프에 의하여 이루어진 크림 반도 양도였다. 소비에트 연방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했던 크림 반도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이는 소련 시절에는 그저 행정 구역 변경에 불과했으나, 주민 대부분이 러시아인이었던 크림 반도는 소련 해체 이후 1991년 우크라이나에 속하게 되면서 골치 아픈 문제가 되고 만다.
우크라이나 역사와 러시아와 얽히고 설킨 관계, 그리고 러시아 국가의 성격과 푸틴의 전쟁을 다 설명하면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일단 이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여행의 끝에서 본, 글씨가 거의 지워지고 주변에는 제대로 관리가 안 되어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기념비는 현재의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렸다.
어쨌든 그렇게 2022년 볼가 대종주는 모스크바 키예프 역에서 마무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