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1)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1)

동과 서 사이에서 정체성을 둘러싼 러시아인들의 투쟁

임명묵

"우리는 인류의 구성 성분으로 보이지 않는 민족들 중 하나다. 그러나 그러한 민족들은 이 세계에 몇 가지 큰 교훈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가 운명적으로 보여 주기로 되어 있는 교훈은 분명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류의 한 부분이 되어 있음을 깨달을 날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실현시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을지 아무도 모른다."

- 표트르 차다예프

후쿠야마가 끝났다고 선언했던 ‘역사’는 결국에는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규정할지를 둘러싼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이 세계는 어떤 질서에 의하여 규정되어 작동하는가? 국가와 공동체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 것인가? 중세의 역사를 쓴 힘은 종교였다. 사람들은 고전 시대에 만들어진 위대한 종교적 전통에 따라서 스스로를 규정했다. 기독교 세계에서 사람은 절대자인 신과 관계를 맺는 존재였다. 유목 세계에서는 천신 관념, 계절에 따른 이동, 부족의 호혜적 공동체 문화, 정주 세계와의 교역과 약탈이 세계의 질서를 의미했다. 중화 세계에서는 천자의 법과 능력주의적 관료제, 불교 세계에서는 부처가 설파한 도와 윤회가 그러한 질서였다. 문명 간의 싸움은 세계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의 충돌이었다. 문명 안에서의 싸움은 누가 더 문명을 규정하는 질서를 잘 해석하는지를 둘러싼 경쟁이었다.

근대 서구에서 등장한 계몽주의는 서구 문명의 연장으로 등장한 질서였지만, 동시에 중세와 단절된 새로운 문명의 질서이기도 했다. 계몽주의가 등장한 뒤 유럽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역사’가 쓰였다. 신 대신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회, 신의 의지가 아닌 과학적 합리성으로 작동하는 세계, 인간끼리의 합의인 법으로 통치되는 국가, 국가 간의 규칙으로서 국제 사회. 이것이 근대 서구가 추구했던 세계관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을 유럽에 정착시키기 위해서 계몽주의자들과 전통주의자들은 수 세기에 걸친 투쟁을 해야만 했다. 프랑스 혁명과 뒤이은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 전역을 포화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지만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적 전통주의자들은 여전히 긴장 관계 속에서 살았고, 새로이 등장한 낭만주의자들도 투쟁의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제1차세계대전으로 유럽의 보수적 왕정이 연달아 무너지면서 19세기의 투쟁은 계몽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그다음의 투쟁은 계몽주의 안에서 벌어졌다. 인본주의, 과학적 합리성, 산업 경제 등의 지향점에 공감하는 이들은 자신을 자유주의자 아니면 사회주의자라고 정의했다. 서구 계몽주의의 일반적인 흐름을 계승한 자유주의자와 달리 사회주의자들은 계급과 집단 정체성에 근거한 새로운 판본의 계몽주의를 주창했다. 한편 계몽주의 내부의 투쟁 와중에 새로이 등장한 믿음이 있었으니, 낭만주의를 상당수 계승한 파시즘이었다. 이들은 개인이든 계급이든,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으로 세계를 세속화하는 것에 깊은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인간의 존재를 유기체적 민족의 구성원으로 정의했고, 세계를 그러한 민족 간의 진화론적 투쟁의 장으로 인식했다. 유기체로서 민족의 올바른 활동을 위해서는 종교적 초월성과 숭고함, 전통의 힘을 긍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파시즘은 그 끔찍한 폭력성과 호전성으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연합을 이끌어 냈으며, 최종적 패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파시즘을 무찌른 계몽주의자들은 전간기와 제2차세계대전을 계몽주의의 끝없는 행진에 잠시 등장한 막간의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 뒤에 펼쳐진 냉전은 지구적인 믿음이자 인간 사회 발전의 자명한 운명으로서 계몽주의를 누가 더 잘 해석하고 있는지를 두고 벌어진 교리 싸움이었다. 이 싸움의 승자는 세계 무역의 지배력과 더 선진적인 기술력, 역동적 경제와 활력 넘치는 문화를 갖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렇게 후쿠야마는 역사가 끝났음을 선언했다. 그러나 역사는 다시 돌아왔다.

역사의 종언에 가장 큰 반격을 가한 국가는 러시아였다. 세계를 어떻게 해석할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투쟁이 역사라고 한다면, 러시아는 그 바깥과는 물론이고 그 안에서도 가장 격렬한 ‘역사의 투쟁’을 거친 나라였다. 러시아 민족은 어떤 민족이며, 러시아는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하는지는 러시아 국가의 탄생 때부터 러시아인들을 사로잡은 질문이었다. 키예프 공국이 정교회를 받아들일 때, 그들은 동슬라브 전통 신화를 버리고 비잔티움 제국의 기독교를 수용하는 것이 맞는지를 두고 분열했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 신화의 신과 정령들을 기독교의 성자에 대응하면서 이 분열을 봉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교회는 로마노프 왕조의 여명기에 러시아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지를 두고 다시 분열의 화두가 되었다. 정교회는 차르의 후원 하에 그리스의 표준에 맞춰야 한다는 신교파와, 러시아의 전례 전통을 지킬 필요가 있다는 구교파로 갈라졌다.

하지만 러시아의 역사적 투쟁을 가장 크게 심화시킨 이는 표트르 대제였다. 러시아가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발전한 서구를 따를 필요가 있다고 보았던 그는, 러시아 역사의 고도인 모스크바를 뒤로 하고 발트해의 뻘밭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다. 귀족들의 수염을 깎았고, 그들을 새로이 건설된 서구식 건물에 입주하도록 밀어 넣었다.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서구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인 러시아는 유럽의 당당한 강국이 될 수 있었고, 표트르의 개혁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많은 러시아인이 여전히 자신들이 무언가 ‘몸에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다는 불안감을 표출했다. 그들에게 페테르부르크는 자연스러움을 주는 도시가 아니라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불안한 도시이자 아슬아슬한 인공물이었다.

서구화의 영향을 깊게 받은 이들은 오히려 러시아가 충분히 서구화되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고삐가 풀린 계몽주의의 가차 없는 전진을 목도한 러시아인들은 러시아가 서구에서 전개되는 변화를 훨씬 더 빠르게 쫓아갈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들 중 일부는 실패할 운명의 혁명을 기획하였는데, 데카브리스트가 바로 그들이다. 반발을 무릅쓰고 서구화를 추진했던 차르 전제정은 이제 서구화를 통제해야만 함을 깨달았다. 서구화의 지속은 차르 통치와 제국의 붕괴를 뜻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차르를 포함한 러시아의 귀족층은 일상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독일계 귀족들과 통혼했으며, 런던의 수정궁을 보고 감탄했다. 귀족들의 서구 추종에 불만을 느낀 사람들은, 러시아의 뿌리인 슬라브 문화가 서구 계몽주의가 상실한 영적 가치, 공동체의 도덕성을 지키고 있기에 이 고귀한 문화를 서구의 오염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차르 궁정은 자신들의 전제정을 정당화해주는 슬라브주의를 선호하고는 하였으나, 그들은 여전히 프랑스어를 쓰는 독일계 집단이기도 했다. 한편 러시아인들은 러시아가 아시아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구보다 더 열등하다고 느끼기도 했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서구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를 정복하며 인도를 얻은 영국과 동등한 반열에 올랐다고 자화자찬했지만, 자신들이 피정복민인 중앙아시아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모순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충분히 서구화되어 서구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러시아의 전통적 가치와 고유성을 지켜야 한다는 욕구는 러시아인들을 분열시켰는데, 그 단층선은 한 개인의 내면을 따라서도 그어진 것이었다.

러시아인들 내면의 분열은 이를 바라보는 서구, 또 자신을 바라보는 서구의 시선을 의식하는 러시아인들에도 연속적 영향을 미쳤다. 서구는 러시아를 자신들과는 다른 야만적 공간, 비유럽적 공간으로 인식하기도 하였고, 유럽의 가장 고귀한 문화적 중심지로 추켜세우기도 했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이 아무리 흉내 내기를 해도 끝끝내 인정해주지 않는 서구를 증오하기도 했고, 흉내 내기가 모자라다고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다.

계몽주의의 확산을 어떻게든 통제하려고 했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는 자신들을 새롭게 규정해야만 했다. 그 과업을 주도하겠다 자임한 이들은 볼셰비키였다. 볼셰비키 역시 서구와 계몽주의를 향한 모순적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러시아 제국이 충분히 계몽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가 후진적인 상태로 방치되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서구 국가보다 더욱더 계몽주의적으로 변해야했다. 문제는 그 계몽주의의 내용물이었다. 그들은 서구의 자유주의적 계몽주의가 아니라 대안적인 계몽주의, 대안적인 근대성을 추구하여 그 격차를 메꾸고, 나아가 아예 인류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려고 했다.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이상향을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의 최신 판본을 보여주고 있는 미국에서 찾았다. 하지만 종국적으로는 소련에서 개발될 새로운 방법론이 더 우월함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물론 서구는 볼셰비즘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볼셰비키의 압제는 러시아인들 내면의 본성인 ‘동양적 전제주의’가 현대적으로 발현된 것이었다. 정치 지도자의 강력한 카리스마, 인적 관계망을 통한 지배, 영토 전역에서 자원을 동원하여 재분배하는 특유의 경제 시스템, 군사적 정복과 팽창을 추구하는 습성, 언론, 출판, 결사,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폐쇄적 태도. 서구가 보는 소련과 볼셰비키는 근대의 물질적 도구를 손에 쥔 타타르 전사들이나 다름없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런 서구의 시각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당신도 아시아인이고 나도 아시아인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5개년 계획과 그에 연동된 수많은 계몽주의 프로그램을 가동하여 소련 사회를 급속히 근대화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제국은 러시아인이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유라시아의 제민족을 통할하는 유라시아 제국이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와 이슬람교를 비롯한 각종 종교를 부흥시켰고, 보수적 가족 제도 및 전통과 맞닿은 여러 문화 요소를 추켜세웠다. 스탈린은 그와 유사한 리더십 스타일을 보여준 표트르를 지나치게 서구를 추종했다는 이유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좋아하고 늘 참고한 지도자는 러시아를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고 아시아와 유럽 양방향에 걸쳐 팽창한 16세기의 지도자 이반 뇌제였다. 한편 독일을 향해 맞서면서 소련 전체의 인적 자원을 총동원했던 대조국전쟁의 경험은, 러시아인들과 캅카스, 중앙아시아, 극동아시아 인들을 총력전의 가마솥에 넣는 효과를 가져왔다. 연방 전체에 걸친 동원 체제 속에서 함께 ‘호모 소비에티쿠스’로 조형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공통의 역사와 기억, 문화를 공유하는 형제들이라는 인식을 형성했다.

물론 모든 소련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고, 러시아인의 다수는 여전히 표트르 대제가 만들어낸 자기 인식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러시아는 유럽의 일원이면서도 유럽의 일원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지식인은 유럽 철학에 정통했고, 러시아의 예술가들은 유럽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소련 엘리트들은 런던이나 파리에서의 근무를 그 어느 곳보다도 가장 선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소련이 유럽 공동체에서 두려움과 불쾌함을 동시에 자아내는 외부자라는 것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유럽 바깥에서 소련이 얻은 새로운 권위와 환호성에 어깨를 으쓱하기도 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냉전기 소련의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군대가 프라하의 봄을 군대로 진압한 것을 계속해서 부끄러워했다. 유럽인들에게 붉은 군대란 처음에는 해방군이었으나 바투가 이끌었던 몽골 원정군의 재림으로 여겨졌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그런 생각을 가진 채로 1985년에 소련의 서기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 미숙한 정책으로 국내의 경제를 마비시켰고, 차츰 소련 사회에 누적되고 있던 갈등에 불을 지폈다. 소련 내부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타오르자, 그는 그 자신도 뼈저리게 공유하고 있던 많은 러시아인의 숙원을 해결해줌으로써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모든 어려움은 러시아가 유럽의 일원이 된다면 해결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곳은 문명의 지향점이자 모든 발전의 원천이었다. 만약 러시아가 스스로의 야만성을 벗어던지고 유럽의 품에 안길 수만 있다면, 유럽인들도 자신들의 불신을 걷어내고 러시아에 따뜻한 우정의 손길을 내밀 것이 분명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 서구의 문명을 러시아에 이식해서 러시아가 현재 겪고 있는 곤경을 해결하고, 스탈린과 같은 동양적 지도자들의 횡포로 탈선한 러시아의 길을 바른 길로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고르바초프의 꿈은 데카브리스트의 난 이래로 수많은 서구주의자들이 공유했던 믿음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고르바초프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소련 체제가 억누르고 있던 유라시아 제민족의 긴장은 형해화된 공산당 체제를 최종적으로 무너뜨릴 대지진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제국을 안정화하기 위한 외부의 지원은 거의 오지 못했다. 서구 입장에서는 소련이 다시 살아났을 때 이 나라가 다시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러시아의 서구주의자들의 바람과 달리, 서구인들은 러시아를 결코 폴란드나 체코 같은 국가와 같은 국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러시아는 너무나 컸고,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였다. 서구의 지도자들과 대중들이 고르바초프가 소련이 두르고 있던 외투를 벗고 유럽으로 성큼 걸어오자 열광적 반응을 보였던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철의 장막이 내려가는 것과 소련이 당면한 위기를 넘기도록 막대한 재정 지원을 해주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었다. 서구인들에게 냉전의 해체는 그것대로 좋은 일이었으며, 서구 계몽주의의 약속된 승리를 실현하는 길이었다. 잃어버린 유럽의 반쪽, 동유럽의 형제들을 서유럽의 품으로 끌어안는 것은 ‘유럽’이라는 거대한 기획의 완성으로 여겨졌지만, 유럽인들이 보기에 러시아는 그 유럽에 낄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어쨌든 러시아는 자신의 길을 알아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구로부터 거절당한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추구하던 방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방향을 바꾸지 않고 자신이 걸어가는 길을 더욱 굳건히 걷기로 결정했다. 고르바초프는 서구에서 받는 인기에 만족감을 느꼈고, 언젠가 그것이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는 소련이 구축한 제국의 서쪽 변방을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해체했다. 자신의 직책을 공산당 서기장에서 ‘소련 대통령’이라 바꾼 것은 러시아가 서구가 제시한 ‘정상성’을 체현하는 과정이었다. 물론 이런 것으로 소련에서 수십 년간 누적된 체제의 비효율성과 민족 간 긴장, 공산당의 피로 얼룩진 역사와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해결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국내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한 고르바초프는, 소련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보수파와 더욱 급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개혁파 사이에서 진퇴양난에 빠져 정치적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결국 유라시아 제국인 소련은 그 주인인 러시아가 제국을 아예 해체하자고 주장하면서 무너졌다. 소련의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옐친은 고르바초프보다 더욱 강한 ‘서구 회귀’를 내걸었다. 그가 보기에 러시아의 문제는 낙후한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즉 아시아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쏟아붓고 있는 데서 발생했다. 차라리 선진적인 ‘유럽’, 기독교를 믿는 백인 인구로 나라를 재편하고 유럽 공동체에 참여하면 훨씬 더 나은 미래를 바랄 수 있을 것이었다. 소련의 무슬림 공화국들은 소련에 남기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이 되고자 하는 러시아인들에게는 불필요한 짐덩어리로 여겨졌기에 방출당했다. 1991년 12월 25일, 러시아는 그렇게 예카테리나 2세 이래로 100년 간 정복하고 다시 100년 간 공고히 해온 제국의 변경을 거의 피를 흘리지 않은 채 뱉어냈다.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정교회를 받아들인 이래로 동과 서 사이에서 천년 간 고민해온 러시아인들의 ‘역사’가 마침내 마무리되는 것 같던 순간이었다. 계몽주의를 추구하면서도 거부하던 러시아 제국의 모순적 행보, 아예 새로운 계몽주의를 들고 나왔던 소련의 도전은 모두 대서양 양편을 오가는 자유롭고 역동적인 아이디어와 자본의 교환에 의하여 붕괴되었다. 이제 그 네트워크에 러시아가 들어갈 수 있다면, 러시아인들은 영혼의 방황도 끝내고 결핍과 억압으로 얼룩진 고통스러운 생활도 풍요와 자유의 새로운 삶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그렇게 되기는커녕 모든 것이 당초의 바람과 반대로 흘러갔다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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