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류의 구성 성분으로 보이지 않는 민족들 중 하나다. 그러나 그러한 민족들은 이 세계에 몇 가지 큰 교훈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가 운명적으로 보여 주기로 되어 있는 교훈은 분명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류의 한 부분이 되어 있음을 깨달을 날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실현시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을지 아무도 모른다."

- 표트르 차다예프

후쿠야마가 끝났다고 선언했던 ‘역사’는 결국에는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규정할지를 둘러싼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이 세계는 어떤 질서에 의하여 규정되어 작동하는가? 국가와 공동체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 것인가? 중세의 역사를 쓴 힘은 종교였다. 사람들은 고전 시대에 만들어진 위대한 종교적 전통에 따라서 스스로를 규정했다. 기독교 세계에서 사람은 절대자인 신과 관계를 맺는 존재였다. 유목 세계에서는 천신 관념, 계절에 따른 이동, 부족의 호혜적 공동체 문화, 정주 세계와의 교역과 약탈이 세계의 질서를 의미했다. 중화 세계에서는 천자의 법과 능력주의적 관료제, 불교 세계에서는 부처가 설파한 도와 윤회가 그러한 질서였다. 문명 간의 싸움은 세계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의 충돌이었다. 문명 안에서의 싸움은 누가 더 문명을 규정하는 질서를 잘 해석하는지를 둘러싼 경쟁이었다.

근대 서구에서 등장한 계몽주의는 서구 문명의 연장으로 등장한 질서였지만, 동시에 중세와 단절된 새로운 문명의 질서이기도 했다. 계몽주의가 등장한 뒤 유럽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역사’가 쓰였다. 신 대신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회, 신의 의지가 아닌 과학적 합리성으로 작동하는 세계, 인간끼리의 합의인 법으로 통치되는 국가, 국가 간의 규칙으로서 국제 사회. 이것이 근대 서구가 추구했던 세계관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을 유럽에 정착시키기 위해서 계몽주의자들과 전통주의자들은 수 세기에 걸친 투쟁을 해야만 했다. 프랑스 혁명과 뒤이은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 전역을 포화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지만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적 전통주의자들은 여전히 긴장 관계 속에서 살았고, 새로이 등장한 낭만주의자들도 투쟁의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제1차세계대전으로 유럽의 보수적 왕정이 연달아 무너지면서 19세기의 투쟁은 계몽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