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2)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2)

소련 해체 이후, 혼돈의 90년대

임명묵

Ты вчеpа был хозяин импеpии

그대는 어제 제국의 주인이었지만

а тепеpь - сиpота

지금은 그저 고아일뿐이다.

소련에서 태어났다(Рождённый в СССР) - DDT(ДДТ)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었을 때, 서방 진영의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호시탐탐 서쪽을 노려온 저 동방의 대제국이, 제국을 지키고자 군대도 동원하지 않고 순순히 모든 것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소련은 서구 제국주의보다 훨씬 더 평화롭고 부드럽게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았다. 프랑스 제국이 알제리와 베트남에서 보여준 것이나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서 보여준 것은 비교 대상도 아니었다. 소련의 평화로우면서 이상한 제국 해체를 보면서 많은 사람이 역사가 종언했다는 후쿠야마의 말에 공감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의 우월성은 그의 가장 강력한 대적자마저도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지게 만들 수 있었다. 그들은 고르바초프가 자신들을 위해 내려준 역사적 결단을 칭송하였고, 그가 서구의 계몽주의를 열렬히 따랐던 것을 높이 샀다.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는 서구의 힘이 아니라 서구의 도덕성과 매력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한 번 제국이 무너지고 나자 서구인들은 무너진 뒤의 이야기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중요한 것은 서구 안의 이야기, 혹은 러시아와 공산주의가 아닌 또 다른 바깥의 이야기가 되었다. 탈산업화를 겪으며 심화된 국내의 빈부격차 문제, 낙태와 소수인종 권리 같은 문화적 갈등, 이란과 이라크가 제기하는 새로운 도전, 유고슬라비아와 소말리아 등지를 바라보며 자각하게 된 세계 경찰로서 새로운 임무가 서구의 떠오르는 활동 무대가 되었다. 이제 유럽과 북아메리카, 어쩌면 동아시아에서도 끝내버린 역사를 지구 전체에서도 끝내기 위해서 미국은 세계 경찰이라는 짐을 기꺼이 떠맡았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서구에 합류할 수 있다고 기대했던 러시아인들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서구인, 심지어 러시아인들조차 1991년 시점에서 잊고 있던 게 있었다. 바로 제국의 해체라는 것은 늘 엄청난 혼란과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유라시아 전역에서 펼쳐진 아수라장은 제국이 해체되면서 생긴 재난이었다. 총력전은 그에 적합하지 않았던 과거의 제국 체제를 파괴했는데, 무너진 제국 체제 속에서 새로운 오스만 제국에서는 아랍인, 쿠르디인,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튀르크인 사이의 끔찍한 살육과 대규모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출현한 작은 국민국가들은 영토 안의 소수민족을 청소하고, 국경 바깥의 자민족 거주 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편입하고자 서로 싸웠다. 러시아에서 발생한 총체적 붕괴는 기근, 학살, 종족 갈등을 수반한 가장 끔찍한 재난 중 하나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앞의 세 제국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국민국가로 바꾸면서 새로운 역사를 쓰기로 결정했다(이중에서 독일은 ‘잠시’ 일탈하긴 했지만). 하지만 볼셰비키는 이념적 비전과 무자비한 폭력을 결합하여 제국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1991년에 러시아가 20세기의 두 번째 제국 붕괴를 맞이했던 이유였다.

물론 두 번째 해체는 첫 번째 해체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서구의 관찰자들이 감탄한 것처럼, 다른 시대와 지역에서 벌어진 사례에 비하면 소비에트 제국의 해체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체 중인 소비에트 공간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상대적 비교는 딱히 위안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기능부전을 겪고 있었다고 했지만 소비에트 시스템은 분명히 기능하고 있는 시스템이었고 시스템의 구성 요소들에 무언가를 안정적으로 제공해주고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 시스템의 붕괴는 그에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총체적 재난으로 다가왔다.

경제가 가장 큰 문제였다. 소련은 연방을 구성하는 15개 공화국 간의 유기적 분업 체계를 통해 국가 경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소련 본국이 손해를 보고 있기는 했어도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과의 상호 분업 체계 또한 시스템의 중요한 축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통째로 사라지자, 소비에트 연방이 근대성의 상징이라면서 설치했던 온갖 시설과 인프라는 순식간에 고철 덩어리로 전락했다. 과거에는 공산당이 주도하고 국가의 경제 부처들이 집행하였던 자원의 재분배를 이제는 시장이 맡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장 거래에 전혀 적응되어 있지 않던 상태였다. 게다가 시장이 15개 공화국의 국경을 따라 분할되고, 물자와 사람의 이동에 주권이라는 장벽이 생기자 산업 시설을 제대로 운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소련에 속해 있지 않은 우즈베키스탄의 항공기 공장은 아무런 쓸모를 갖지 못했다. 그러면 그 항공기에 부품을 공급하는 다른 공화국들의 공장들도 마찬가지로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는 의미였다. 비효율적이나마 소련 시스템을 작동하게 해주던 산업 생산마저도 사라지자 구 소비에트 공간에서는 소련 말기를 훌쩍 뛰어넘는 절대적 물자 부족이 이어졌다. 러시아의 경우 국내적 물류망도 마비되고는 하였다. 거대한 국토를 아슬아슬하게 잇는 빈약한 교통망은 강력한 중앙 통제력의 존재가 아니고서는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없었다. 행정 권력이 분권화되면서, 각 지역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자원을 다른 지역과의 협상 카드로 쓰려고 비축했다. 중앙 계획 경제의 붕괴는 시장을 통한 자유로운 거래의 등장이 아니라, 봉건 영주들 간의 협상 체계로의 후퇴였다(사실 이는 후기 소련에서 이미 지역 공산당 지도자들 사이에서 등장하고 있던 관행의 연장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당장의 먹을 것을 구하고자 소비에트 체제가 부여해준, 자신들의 영광스러운 기억이 담겨 있는 훈장까지도 시장에 내놓았다. 몇몇 사람들은 자발적인 범죄 조직을 결성하여 자구책을 찾고자 했다. 여성들은 가장 손쉽게 현금화할 수 있는 자신의 성을 팔아 필요한 물자를 구하고자 했다. 물자가 부족해지자 명예와 도덕이 사라졌고, 범죄와 부패가 기승을 부렸다. 체제의 기획과 체제가 제시한 삶이 한순간에 사라지자 사람들은 실의에 차서 더욱 많은 알콜, 혹은 마약을 찾았다. 소련 정부가 가까스로 끌어 올린 남성 기대수명은 무려 58세까지 추락했다. 국가가 운영하던 보건 체계의 붕괴는 과거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사소한 질병에도 대처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외국과의 교류가 확대되고 성산업이 번창하자 HIV가 창궐했다.

국가의 정성 어린 투자 덕분에 소득 수준에 비해서도 훨씬 높았던 소련의 인적자본 또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당시 러시아를 여행했던 많은 이들은, 추운 겨울날 길거리에서 쓸쓸하게 좌판을 펼친 노인들이 문화와 예술, 철학에 상당한 조예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는 했다. 이런 이들은 소련 체제가 자신의 인민을 계몽시키기 위해 설치했던 거대한 교육기구의 종사자들일 때가 많았다. 소련이 자랑으로 삼았던 인민의 ‘문화성(Kul’turnost’)’은 국가의 막대한 자원 투입이 사라지자 순식간에 증발하고 말았다. 최고의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월급으로 먹을 것조차 살 수 없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다른 일에 뛰어들어야 했다. 국가의 자존심이었던 과학 기술의 최고 엘리트들은 훨씬 더 많은 보수를 약속하는 서방의 대학과 연구기관으로 옮겨 갔다.

소련을 구성하는 여타 공화국이 떨어진 것으로 모자라서, 이미 축소될 대로 축소된 러시아에서도 제국 해체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러시아의 상황을 더욱 최악으로 만들었다. 소수민족들이 다수를 이루는 여러 자치 공화국들은 러시아 연방 구조에서 훨씬 더 큰 자치와 자율성을 누리고자 모스크바와 협상했다. 그러나 이런 협상만 되어도 러시아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문제였다. 진짜 큰 문제는, 소련을 탈출한 여러 독립 공화국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도 아예 러시아 연방으로부터 이탈하겠다고 등장한 분리 독립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이웃한 다른 민족 공화국들이 독립을 이루었다면 자신들도 같은 과업을 달성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가장 갈등이 격심했던 곳은 러시아 제국의 남방 변경인 북캅카스였다. 이 지역에서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체성 운동이 발생하였는데, 1990년대에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게 된 이슬람주의 운동이었다. 1979년의 이란 이슬람 혁명과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 전파는 세계 각지에 초국적 무슬림 전사들을 양산했으며, 이들은 이슬람의 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진출하여 현지인을 고무하고 적들을 향한 싸움에 나서고 있었다. 새로운 이슬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체첸, 잉구셰티야, 다게스탄 등 무슬림 소수민족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샤리아에 의하여 통치되는 무슬림 국가로 재구성하고자 결심했다.

러시아 연방 자체의 해체까지는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던 옐친 정부는 북캅카스의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결심했다. 북캅카스의 자치 공화국들을 놓아준다면, 러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수많은 자치공화국들, 혹은 모스크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극동 지역의 행정구역들이 이탈을 선언할 수 있었고, 러시아 연방 자체의 연쇄적 붕괴를 불러올 수 있었다. 이미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으로서 권력을 잡게 된 옐친과 그의 측근들이 자신 권력의 축소를 용인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소련 해체를 그들이 지지했던 것은 그 해체를 통해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캅카스의 독립은 그 밖의 다른 치명적 문제로도 이어질 수 있었다. 러시아의 지정학적 후퇴,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진 상황에서 주요 에너지 인프라를 상실한 위험 등이 그것이었다.

국내적으로 체첸이 야기한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들 지역에 상당히 많은 러시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러시아는 모든 러시아인을 대표하는 나라였다. 하지만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발트 3국 등 구소련의 다른 공화국에 사는 러시아인들은 소련이 해체되면서 순식간에 ‘자기 땅의 이방인’으로 전락했다. 민족 공화국 입장에서는 물론 다른 서사가 있었다. 이 땅은 애초에 러시아인의 땅이 아니었고, 오히려 자신들이 소련 시대에 ‘자기 땅의 이방인’이었으니 이제 올바른 상태로 돌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였다. 많은 러시아인들이 자신의 조부 시절부터 살던 독립 공화국의 땅을 떠나 친척들이 살고 있는 러시아 본토로 귀환했다. ‘제국 민족’인 러시아인을 둘러싼 문제는 소련 해체 당시부터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인들의 가장 큰 상처로 남게 되었다. 만약 러시아 연방의 변경 자치 공화국들이 또 다시 독립을 하게 된다면, 그 내부의 러시아인은 또 다시 국가로부터 버려졌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사회주의 종주국이 아니라 러시아인을 위한 민족 국가로 정체성을 새로이 바꾼 러시아 연방으로서는 치명적인 정통성 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혼란기의 러시아는 무엇보다 힘이 약했다. 러시아는 이제 중앙집권형 공산당이 일사불란하게 사회를 통제하고자 시늉이라도 했던 소련이 아니었다. 체제 전환기라면 늘 그렇듯이, 러시아의 새로운 지배 그룹도 소련 엘리트의 최상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변부에서 등장했다. 그들은 러시아 연방이 제프리 삭스와 예고르 가이다르의 ‘충격 요법’을 도입하고 시장화 개혁을 추진할 때 소련의 저평가된 국영 자산을 헐값을 매입하여 자신만의 영지를 구축한 이들이었다. 과거 공산당 간부들의 숫자에 비하면 한 줌이라고 할 수 있는 신흥 재벌들은 처음에는 국영 자산을 누가 더 많이 긁어모으냐를 두고 그야말로 유혈낭자한 전투를 벌였다. 마피아를 동원해서 경쟁자를 암살하고 국가 권력을 누가 더 잘 매수하는지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 끝에 생존자들이 결정되었다. 이들은 말 그대로 과두제(oligarchy) 엘리트였고, ‘올리가르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올리가르히들은 러시아의 자산을 서방에 값싸게 공급하고, 자신의 자산을 런던 등지의 역외 금융 중심지에 예치하여 혹시 모를 국가 권력의 변덕에 대비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국가 권력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러시아를 다시 소련 시절로 돌리겠다는 공산당의 겐나디 쥬가노프, 예측 불가능한 국수주의자인 자유민주당의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가 대두하여 권력을 얻는다면 올리가르히 지배 체제는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올리가르히로서 가장 좋은 지도자는,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면 사실상 무정부 상태 또한 방치해줄 수 있는 혼군(昏君)이었다. 술에 취하느라 정무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옐친은 자신과 가족들이 챙길 수 있는 부와 퇴임 이후의 안위만을 생각했다.

하지만 국가 경제를 마비시키고 사회를 파탄 상태에 이르게 한 옐친을 어떻게 ‘민주적 선거’에서 다시 당선시킬 수 있을까? 이것이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올리가르히들에게 직면한 과제였다. 그래도 올리가르히들로서 다행이었던 것은, 옐친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러시아 공산당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체계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 대신에, 다시 ‘영광스러웠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공산당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많은 러시아 시민들에게 어느 정도 인기를 얻을 수는 있었지만 결정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옐친의 무정부 상태에 고통스러워했지만, 소련 시절의 안정적인 갑갑함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올리가르히들은 러시아에 만연한 혼란과 그에 따라 점점 늘고 있는 옐친에 대한 환멸을 생각했을 때 옐친의 패배도 충분히 가능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승리를 확고히 하고자 새로운 체제의 새로운 기법을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각종 미디어 기업을 장악한 올리가르히들은 서방에서 활용하는 광고와 마케팅 기법을 활용하여 옐친의 재선이 러시아에 꼭 필요한 일임을 유권자들에게 납득시키고자 했다. 같은 기법을 쓸 수 없었던 경쟁 후보들은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옐친 집권 2기가 되었을 때 변화의 조짐은 이미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러시아의 혼란은 오래 지속된다면 단순히 러시아 국가뿐 아니라 구 소비에트 지역 전체에서 파국을 만들 수 있다는 불길한 신호를 보냈다. 무엇보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핵무기 보유국 중 하나였다. 이런 핵무기가 러시아의 추가적 붕괴에 따라서 다른 분쟁 지역으로 유출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1990년대 서방 전략가들의 가장 큰 공포 중 하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무언가 점점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1998년 동아시아 경제 위기의 영향으로 러시아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한때 세계의 절반을 지배했다는 초강대국의 위상이 눈 녹듯이 사라진 것은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현실이었지만, 나름의 공업과 과학 기술 기반을 갖춘, 세계 최대의 영토를 가지고 있는 자원부국이 당장의 빚도 갚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은 여간 충격적인 일이 아니었다. 체첸 전쟁이 마무리되어 불안한 안정 상태에 있던 북캅카스에서는 다시금 포성이 울릴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북캅카스의 제민족 간 지속되는 분쟁과 유력자들 간의 다툼은 체첸의 불안정을 인접한 다게스탄으로 전이시키고 있었다. 경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제국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원심력이 또 작동한다면 러시아 연방은 정말로 다시금 붕괴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제국의 상상력은 죽지 않고 다시 기지개를 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장소는 러시아도 아니었고, 러시아가 내려놓은 구 소비에트 공화국들도 아니었다. 옛 위성국들인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맹국들의 땅도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초기에 소련에 반기를 들었던 공산 국가인 발칸의 유고슬라비아가 역설적이게도 러시아의 제국적 상상력이 최초로 부활한 무대였다. 소련과 유사한 국가 시스템을 통해 다민족 영토를 통치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는 정치적 권위의 구심점이었던 티토의 사망과 이어지는 경제난, 민족 갈등으로 인해 소련과 마찬가지 위기를 겪고 해체되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는 소련 수준으로 평화롭게 해체되지 않았다.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인들을 중심으로 ‘피와 땅’을 일치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과거 서로 원한을 쌓았던 기억들이 고개를 들었다. 특히 연방 체제에서 자신들의 우위를 지키려는 세르비아인들의 반발이 가장 거셌다. 그렇게 발발한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각 민족과 정체성 차원에서 연계되어 있는 여러 외부 세력들의 지원이 교차하며 국제적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체첸의 전사들은 보스니아로 향하여 유럽에서 그들의 지하드를 이어가고자 했다. 유럽공동체와 그 뒤를 이은 유럽연합은 가톨릭을 믿는, ‘문명적인’ 서유럽과 중부유럽 문화권에 속한다고 생각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다. 러시아인들의 관심은 세르비아로 향했다. 비록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은 냉전기 내내 갈등했지만, 그 후계 국가들인 세르비아와 러시아는 정교회의 믿음을 공유하는 슬라브 형제국가라는 새로운 인식을 통해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두 나라의 국가 정체성은 이제 사회주의를 통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화적 뿌리를 통해 정의되고 있었다. 공산주의 이후의 사람들이 헌법, 자유선거와 시장경제를 통해 자신을 정의할 것이라 기대했던 서구인들의 예상을 깨는 움직임이었다. 새뮤얼 헌팅턴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관찰하며 이념의 시대가 아니라 문명의 시대가 개막했다고 썼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잔혹한 유혈극 끝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북마케도니아가 주권 국가로 독립하면서 마무리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98년에 알바니아계 무슬림 지역인 코소보가 독립을 요구하면서 발칸의 화약고에는 다시 불이 붙었다. 독립 요구를 세르비아가 진압하면서 전쟁이 발발했고, 세계의 경찰로서 자신의 임무를 새롭게 정의한 미국은 인도주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세르비아에 대한 무력 투사를 시작했다. 미공군에 의한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공습은 21세기가 과연 미국이 기대한 역사의 종언으로 흘러갈 수 있을지에 물음표를 제기한 최초의 사건 중 하나였다. 베오그라드의 중국 대사관이 미군의 오폭으로 타격을 받고 중국인 3명이 사망하자, 중국 내부의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 속에서 경제적 발전을 신속히 이루려고 했던 중국 공산당으로서는 관방에서 승인한 민족주의 운동의 경계를 넘어서는 대중적 민족주의 정서의 폭발을 늘 우려했다. 자본, 기술, 제품 수요를 제공해주는 미국과의 관계를 해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6년에 발생한 대만 해협 위기, 1998년 인도네시아의 화교 학살, 1999년 베오그라드 대사관 오폭 사건은 중국의 대중적 민족주의가 국가의 정책에 압력을 줄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러시아의 분위기는 중국보다 더 심각했다. 러시아인들은, 정확히는 고르바초프를 위시한 많은 당국자들은 자신들이 평화롭게 제국을 해체하면 서방이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기대했다. 그러나 서방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요구에 전부 응하는 것은 필요 이상으로 과한 일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동유럽 제국은 소련이 무력으로 부당하게 차지한 공간이었고, 그 공간이 제국의 영역에서 풀려나는 것은 지극히 도덕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동유럽 또한 나토의 안전보장 영역에 포함되고, 민주적 선거와 자유시장을 통해 대서양 세계의 역동성과 활력을 포용하게 되는 것은 서방 세계 주요 지도자들 모두가 공유하는 비전이었다. 이런 비전에서 러시아의 제국적 유산을 위해 내어줄 자리란 없었다. 그러나 슬라브 형제국의 수도를 자신들과 어떠한 상의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폭격했다는 사실은 러시아인들에게 서방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모욕감을 주었다. 그들은 1989년 이래로 10년간 자신의 것을 내어주기만 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는 상상하지 못한 끔찍한 혼란이었고, 제국이 버린 영토에 남겨진 동포들이었고, 과두 지도자들의 타락과 국가 자산의 약탈이었다. 러시아인들은 서방의 금융 지원을 통해서 경제를 개선하기를 기대했지만 그런 지원은 오지 않았다(물론 옐친과 올리가르히의 부패한 지배 구조 속에서 함부로 돈을 넣었다가는 한 줌 과두 지배자들의 지갑만 불려줄 것이 자명했기에, 서방 입장으로서는 납세자의 돈을 그런 식으로 낭비할 수 없다는 나름의 합리적 이유가 있었다). 서방은 이제 마지막 남은 국가의 자존심, 세계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강대국이라는 정체성마저 빼앗아 가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러시아 국가를 회복하겠다고 나선다면 강력한 영웅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러시아 총리 예브게니 프리마코프가 미국으로 향하는 대서양의 상공에서 나토군의 세르비아 공습 소식을 듣고, 비행기를 즉시 모스크바로 돌리라고 했을 때 그럴 조짐은 이미 나타났다. ‘프리마코프 회항’은 러시아가 더는 서방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선언이었고, 러시아 국민들은 그 선언에 환호했다. 프리마코프는 오늘날의 세계를 만들 주요한 아이디어를 창시한 인물이기도 했다. 본래 소련의 아랍 학자였던 그는 중동에서 오랜 기간 활동했으며, 아시아 문제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는 서방의 독주를 끝내는 것이 러시아로서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러시아가 압도적 힘을 보유한 서방을 향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비행기를 돌리는 일 밖에는 없었다. 프리마코프는 유라시아의 대국들 간의 연계로 서방에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무게중심을 창출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모스크바-베이징-뉴델리’라는 전략 삼각형, 소위 ‘프리마코프 삼각형’은 그렇게 탄생했다.

한편 1999년도 끝나가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에게 고통과 눈물의 세기이자 영광의 세기이기도 했던 20세기가 저물고 있었으며, 인류사의 한 페이지였던 두 번째 천년기가 새로운 천년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전환의 시대에 늘 술에 취해 있는 옐친은 전혀 적절한 지도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그의 배후에 있던 올리가르히에게도, 그를 지켜보고 있던 러시아 국민들에게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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