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3)
블라디미르 푸틴의 등장과 그의 통치
"러시아의 전통, 그리고 오늘 우리가 당신들과 함께 있는 성스러운 다게스탄 대지의 전통에 따라, 저는 이 잔을 들고 마시며 돌아가신 이들을 추모하며... 부상을 입은 분들의 건강과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하지만 우리 앞에는 많은 문제와 큰 과업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이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적들이 무엇을 계획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어떤 지역에서 어떤 도발이 기다리고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들과 당신들은, 단 한 순간도 나약해져 있을 권리가 없습니다. 1초도 말입니다. 우리가 나약해진다면, 이들의 죽음이 헛되었던 것으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은 이 잔을 내려놓을 것을 제안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잔을 다시 마실 것입니다. 반드시! 그러나 다음에, 당신들도 모두 아는 이 원칙적인 과업들이 해결된 다음에 마십시다."
- 블라디미르 푸틴, 1999년 다게스탄의 농촌 마을 보틀리흐에서.
1999년, 옐친과 올리가르히들은 다음 해에 있을 대선을 둘러싸고 옛 고민을 다시 한 번 마주했다. 이제 옐친이 또다시 나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했고, 바닥에 떨어진 그의 인기를 고려했을 때 나왔더라도 패배할 것은 자명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보전받을 수 있는 안정적 후계 구도를 어떻게 창출해야 하는가? 옐친의 이너서클 중에서 누군가를 불러오는 것도 공산당 같은 야당이 누리는 인기를 감안했을 때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보리스 베레좁스키와 같이 옐친 정권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올리가르히들은 자신들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면서도 러시아 국민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새로운 얼굴을 찾아야만 했다. 물색 과정에서 올리가르히들의 눈에 띤 인물이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인 아나톨리 소브차크의 측근이자 전직 KGB 요원인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푸틴은 이미 베레조프스키의 후원을 통헤 KGB(국가보안위원회)를 이어받은 러시아의 정보기관인 FSB(연방보안국) 의장에 올랐던 상태였다. 하지만 동독에서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시장 자리에 오른 무명의 보안국장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99년에 발발한 제2차 체첸 전쟁은 푸틴이라는 인물을 러시아인들에게 각인시켜줄 최고의 이벤트였다. 총리로 깜짝 발탁된 그는 제2차 체첸 전쟁의 진압을 지휘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유명인으로 데뷔했다. 이 과정이 너무 극적이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아파트 테러 같은 사건을 FSB와 올리가르히가 자작극으로 꾸며내어 전쟁의 명분을 얻었다는 음모론이 지금까지 제기되고 있을 정도이다. 어쨌든 당시 40대의 젊은 지도자였던 푸틴은, 제1차 체첸 전쟁 당시 러시아군이 겪었던 굴욕을 배로 갚아주면서 러시아인들로부터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소련 시절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체첸의 그로즈니 시는 이제 러시아군의 맹포격으로 사실상 평탄화되었고, 민간인 피해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무자비한 진압 작전을 통해 푸틴은 체첸을 ‘안정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체첸인과 러시아인들이 겪은 고통과는 별개로, 푸틴은 제국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러시아인들의 공포를 해소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늙고 술에 취한 옐친과 젊고 강인해보이는 카리스마적 푸틴의 대비 효과는 압도적이었고, 유권자들에게도 실질적으로 정권 교체를 해내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었다. 푸틴은 선거를 통해 손쉽게 러시아 연방 대통령에 취임할 수 있었다. 옐친과 올리가르히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푸틴을 통해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올리가르히들은 푸틴이라는 인물의 절반조차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푸틴은 옐친과 같이 올리가르히의 꼭두각시를 하면서 만족할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대통령의 강력한 권력을 통해 크렘린에 대한 올리가르히들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2001년에 올리가르히 중에서 가장 유력자라고 할 수 있는 베레조프스키와 구신스키가 모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올리가르히들의 전횡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일반 러시아인들은 ‘부패 재벌’을 철저히 찍어누르는 푸틴의 정치에 열광했다. 물론 이것이 올리가르히 지배 체제를 바꾼 것은 아니었다. 푸틴은 자신에 충실히 협조할 올리가르히와 그렇지 않을 올리가르히를 철저히 구분했다. 만약 올리가르히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반납하고 크렘린의 지휘를 따른다면, 그들은 부와 영향력을 어느 정도는 보전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민영화한 국가 자산을 통해서 푸틴으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었다. 베레조프스키와 구신스키를 시작으로 푸틴의 지휘를 받지 않으려는 올리가르히들에 대한 일종의 사냥이 이루어졌다. 사냥 뒤에 남은 전리품은 푸틴에 협조하는 올리가르히들과, 푸틴의 새로운 측근 그룹으로 떠오른 권력 엘리트들에게 분배되었다. 이들은 소련 시절 KGB, 검찰, 군대 등의 권력 기관을 통해 경력을 쌓은 엘리트들이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들을 ‘실로비키’로 부르게 된다. 정부의 막강한 힘을 통해 과거 올리가르히들이 취득한 자산은 다시 국영화되거나, 국가의 감시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푸틴은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연방에서 계속되고 있는 분권화 과정에 제동을 걸었다. 지방 권력의 자율성을 각종 제도적 조치와 감사, 억압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중앙으로 회수했다. 지역 지도자들은 이제 모스크바에 있는 푸틴과의 관계를 통해서 지역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확약 받을 수 있었다. 푸틴은 서구식 법치주의를 도입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1990년대의 준무정부 상태를 ‘법에 의한 통치’, 자의적일지라도 어쨌든 최소한의 통치는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바꾸어내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인들은 푸틴 집권 1기 4년 만에 자신들의 삶이 개선되는 것을 실질적으로 체감했다.
물론 푸틴이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국제 경제 속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아시아 금융위기나 훗날의 닷컴버블로 종종 유가가 곤두박질쳤지만, 2000년 이후 에너지 가격은 다시 꾸준히 상승했다. 이는 중국의 놀라운 경제 성장과 그에 수반되는 전 세계적 경제 호황이 에너지 수요를 계속해서 견인했기 때문이었다. 1985년 미국의 요구로 시작된 사우디아라비아의 증산과 그로 인한 저유가 국면으로 경제적 침체를 겪어야 했던 러시아가 이제야 고유가의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석유, 천연가스, 광물 등의 원자재를 판매하면서 러시아는 경상수지를 정상화할 수 있었고, 푸틴은 이를 올리가르히에 분배하면서도 다양한 국가 재건 프로젝트에 투입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옐친 시대와의 본질적 차이점이 있다면 이것이었다. 과두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국가적 투자를 도외시했다. 그러나 그 올리가르히들을 자신의 밑에 제압하고 국가를 장악한 1인 지도자인 푸틴은 국가 전체의 발전과 그를 통한 지지 확보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빈곤, 실업, 부실 인프라 등 1990년대 러시아를 상징했던 모든 지표가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빠르게 개선되었다. 통치 시스템의 재건, 고유가를 통해 들어온 수입의 적절한 분배와 투자가 러시아의 회복을 이끌었고 많은 러시아인들이 푸틴에 대한 압도적 지지를 보내는 근거가 되었다.
서방 지도자들도 푸틴을 선호했다. 물론 그가 강한 러시아의 회복을 이야기하며 독자적 목소리를 낼 의지를 표명했기에, 옐친만큼 ‘쉬운’ 상대는 아닐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정치경제가 안정화되면서 러시아는 서유럽 국가들이 필요로 하는 값싼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처로 새로운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구매력이 증대되면서 러시아는 서방 국가들의 각종 소비재와 첨단 기기, 제조업을 위한 부품과 장치들을 흡수하는 시장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세계 경찰인 미국에게 러시아는 미국이 가장 눈엣가시로 생각하는 상대와 같이 맞서주는 협조자였다. 2001년에 발생한 9.11 테러는 부시 행정부로 하여금 이슬람주의 무장단체와의 투쟁, ‘테러와의 전쟁’에 들어서게 만들었다. 부시는 2001년 아프가니스탄,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고, 나아가서 시리아와 이란 등 미국에 협조적이지 않은 중동 국가들도 압박할 구상을 갖고 있었다. 푸틴은 미국이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공군 기지를 사용하는 것을 묵인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카르시-카나바드 공군 기지와 키르기스스탄의 마나스 공군 기지는 유라시아에서 가장 진입하기 어려운 땅인 아프가니스탄의 산악 지대에서 작전하는 미군을 위한 유용한 보급창이 되어주었다. 미국에 대한 푸틴의 이 같은 협조는 테러와의 전쟁이 자국의 안정화를 위해서도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002년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과 같이 체첸인과 무슬림들에 의하여 여전히 발생하는 테러는 푸틴이 강력한 국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해주었다. 푸틴은 서구와 국내의 인권단체 등에 의하여 제기되는 강경 진압에 대한 비판을 ‘테러와의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라며 무마할 수 있었다. 2004년 초등학교를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여 수많은 무고한 사상자를 낸 베슬란 테러는 그 절정에 있는 사건이었다.
즉, 역사를 다시 돌이켜볼 때 푸틴이 처음부터 서구 세계와 대적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지닌 채 집권했다는 증거는 찾기 어려웠다. 당시 푸틴이 원한 것은 러시아의 재건과 그를 통한 자신의 권력 확보였다. 러시아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 대항하는 올리가르히들을 제압해야했고, 지방 유력자들의 자치를 회수해야 했고, 체첸 등의 분리주의자들을 철저히 눌러야 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재원은 서방의 원자재 수입국들이 제공할 것이었다. 반대로 서방의 자본과 기술도 러시아에 도입하여 과거 고립되었던 소련과 달리 세계 네트워크 속에서 러시아를 정상 국가로 만들 필요도 있었다. 푸틴은 이 과정에서 미국, 나토와 안정적 외교관계를 구축하여 국제적 승인과 지지를 받아야만 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만 판단하자면, 푸틴의 목표는 서방 지도자들도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온건하고, 서구인들의 세계관으로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목표였다.
푸틴과 서방에 있어서 진짜 문제는 러시아 바깥에서, 정확히는 러시아인들이 근외(近外, Ближнее зарубежье)라고 부르게 된 구소련 공화국들에서 발생했다. 서구식 정치경제 체제를 신속히 수용하고 유럽 연합에 합류하게 된 발트 3국을 제외하면, 탈소비에트 국가들은 대부분 두 경로 중 하나를 걸어야만 했다. 첫 번째는 구 공산당의 권력 구조를 그대로 승계한 독재자들의 체제였다. 많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가 여전히 걷고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 국가들에서는 정치적 억압, 심각한 부패, 불평등의 심화 같은 각종 부정적 현상들이 벌어졌지만, 그래도 국가 체제가 사라지는 최소한의 붕괴는 피할 수 있었다. 두 번째 길은 안정적 통치 구조를 확고히 하지 못한 불완전한 민주주의 체제였다. 이 경우 상당한 표현, 집회, 결사의 자유, 자유 선거 등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지나치게 취약한 국가 권력은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견고한 통치 구조를 창출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이었는데, 이 나라에서는 올리가르히들이 정치를 쥐고 흔들고 국가의 권한은 없다시피 했던 옐친식의 정치가 2000년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어느 쪽도 그들이 소련에서 탈출할 때 꿈꾸었던 체제, 부유하고 자유로우며 안정적인 체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 국가들에서 광범위한 시민 저항 운동이 발생하여 정치 구조 자체를 개혁하고자 했던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푸틴 집권 2기가 시작될 무렵, 탈소비에트 국가들에서 동시다발적인 정치 개혁 요구와 봉기가 빗발쳤다. 한 국가의 성공은 다른 국가의 운동을 자극하여 연쇄적인 성공을 끌어냈다.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3국에서 일어난 색깔 혁명(Colour revolution, Цветная революция)이 그것이었다. 각각 장미 혁명, 오렌지 혁명, 튤립 혁명으로 불리게 된 이 국가들의 시민 저항과 정권 교체는 소련 해체 이후 벌어진 오랜 방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시민들은 혼란하거나 억압적인 정치, 소련 시절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빈곤과 불평등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였다. 많은 경우 색깔 혁명의 시위대들은 자신들의 국가도 폴란드나 체코, 발트 3국 같은 동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서방식 정치, 경제 체제를 수용하고, 서방의 일원으로서 합류하기를 원했다. 과거 스페인의 사상가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는 “스페인은 문제이며 유럽은 답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색깔 혁명에 나선 시민들에게 그 말을 “소비에트는 문제이며 유럽은 답이다”라고 바꿔서 들려주었다면 아마 누구나 수긍했을 것이다.
푸틴 입장에서 서방의 행동 중 가장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색깔 혁명이었다. 에너지 및 상품 교역, 테러와의 전쟁 협조를 통해 서방과 좋은 관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푸틴은 서방이 러시아의 명백한 세력권인 탈소비에트 국가에 색깔 혁명을 부추기면서 개입한다고 분노했다. 물론 해당 국가의 시민들과 서방 입장에서는 푸틴이 화를 내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나라들은 이제 러시아와는 연관이 사라진, 국경으로 분리된 주권 국가였다. 주권 국가의 정치와 외교의 향방을 그 나라의 시민들이 행동을 통해 결정하겠다는 것은 러시아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서구 국가들과 NGO가 색깔 혁명을 지원하고 시위대에게 정치 교육, 인권 교육을 진행하고, 친서방 신정부와 우호 관계를 천명하는 것 또한 문제될 것이 없는 외교 활동이었다. 서구의 자유주의가 ‘역사의 종언’ 이후 보편화되어야 마땅할 규범으로 자리 잡은 1991년 이후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서구의 이런 활동들을 러시아는, 정확히는 푸틴과 그의 측근 그룹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색깔 혁명이 서구 정부와 정부의 지원을 받은 국제 NGO들의 음모로 정당한 정권을 찬탈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색깔 혁명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해당 국가 국민의 의지가 아니라, 탈소비에트 국가를 하나씩 접수하여 서구화하고 서방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게끔 개조하는 서구, 특히 미국의 의지였다. 무엇보다 푸틴은 색깔 혁명을 해당 국가들의 온전한 주권 행사라며 옹호하는 서방 국가들의 언설을 위선의 극치라고 보았다. 그들은 이미 미국이 러시아를 온전한 주권 국가처럼 대우하지 않았는데 무슨 평등한 주권을 운운하냐며 분노하고 있었다. 크렘린이 보기에 세계는 여전히 불균등한 권력을 지닌 다양한 국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등한 주권 국가 간의 평등한 국제 관계 질서라는 것은 미국이 자신의 압도적 패권을 감추기 위해 연출한 허상이었다. 크렘린의 세계는 미국과, 미국에 맞서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역 강국들과, 패권국과 지역 강국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소국들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였다. 소국이 가까운 강국을 벗어나 멀리 있는 미국 편에 서겠다고 움직인다면 그것은 미국의 힘이 작용한 결과물이었다.
색깔 혁명은 푸틴에게 세 가지 위협을 제공했다. 첫째는 해당 국가들이 지정학적으로 미국과 서방 세계의 자장에 포섭될 수 있다는 공포였다.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키르기스스탄과 같은 국가들에 미국의 공군 기지가 들어서고, 심장지대의 가장 깊숙한 요새인 우랄과 시베리아가 타격권에 들어오게 되는 것은 불길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물론 많은 이가 ‘러시아가 전쟁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미국 공군을 두려워할 이유가 대체 무엇이 있느냐’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전통과 현대사, 바로 직전에 겪은 제국 해체의 대혼란을 감안하면 안타깝게도 러시아인들에게 전쟁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게 더 이상한 주문이었다. 우크라이나는 이중에서도 특히 문제였는데, 만약 우크라이나 전체가 서방 세력권에 들어가게 된다면 장애물 없이 평탄한 남부 러시아와 러시아의 심장인 모스크바가 그대로 노출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었다. 이미 발트 3국이 나토에 가입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서방 군사력을 마주하게 된 상황이었다.
두 번째 위협은 탈소비에트 국가에 위치한 역외 러시아인, 혹은 친러시아계 소수민족들의 문제를 통해 제기되었다. 러시아를 새로운 제국 질서로 바꾸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었던 푸틴과 달리, 탈소비에트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그간 억압받았던 민족 정체성의 화신으로 포장하면서 정치적 정당성을 찾았다.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을 이끌었던 러시아인들의 압제로 각국의 민족 역사와 문화는 부당한 탄압을 받았고, 이제 과거부터 면면히 흐르는 민족 전통이 1991년 독립과 함께 부활했다는 새로운 민족 신화가 각국의 공식적 서사로 채택되었다. 이런 서사가 점차 힘을 얻어가면서, 탈소비에트 국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러시아인 인구가 각종 불이익을 받고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는 추세가 빠르게 늘어갔다. 러시아인과 함께하며 제국 질서에서 공존했던 더욱 작은 규모의 소수민족들도 마찬가지로 억압을 받았다.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처럼 색깔 혁명을 전혀 겪지 않은 국가들에서도 이러한 민족 정체성의 강화와 소수민족의 배제는 거스를 수 없는 추세였다. 우크라이나 서쪽의 헝가리인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 캅카스 국가들의 각종 소수민족들, 그리고 근외에 남겨진 2500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14개 민족 공화국의 새로운 소수자로서 바뀐 현실에 힘겹게 적응해가야만 했다. 그리고 역외 러시아인, 친러시아 정체성을 강하게 내면화하고 있는 소수민족들은 그들만의 여론을 형성하여 러시아 내부에 자신들의 불만을 유통시킬 수 있었고, 최종적으로 러시아의 대외정책에까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세 번째 위협은 색깔 혁명으로 탈소비에트 국가들이 차츰차츰 하나씩 넘어가다가 최종적으로 러시아까지 전복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었다. 소비에트 연방 또한 동유럽 제국(諸國)의 붕괴를 고르바초프가 방기한 끝에 벌어진 일이었다. 색깔 혁명이 처음에는 친서방적 성격이 강하거나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키르기스스탄에서 일어났다면, 그 다음에는 훨씬 견고해보이는 아제르바이잔이나 카자흐스탄 같은 국가들로 번지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러시아까지 ‘서방이 후원하는’ NGO들과 ‘서방 비밀요원들’의 영향력으로 색깔 혁명을 마주하게 된다면 푸틴 정권도 얼마든지 붕괴될 수 있었다. 특히 탈소비에트 국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러시아와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우크라이나가 색깔 혁명으로 뒤집힌 사실은 크렘린 수뇌부에게 분노와 공포를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 정권의 전복을 두려워한 이유는 단순히 자신들의 권력과 이해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권력과 이해관계를 지키고 재분배하는 것은 정치의 본질적 작동 원리 중 하나다. 하지만 푸틴과 그의 측근 그룹은 권력 문제를 뛰어넘는 일종의 사명감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곧 러시아의 번영과 안정의 동의어라고 생각했다. 고르바초프부터 옐친까지 추구했던 무리한 서구화 시도는 러시아의 해체와 끝없는 혼란만을 안겨주었을 뿐이었다. 푸틴이 보기에 러시아가 다시 소생하기 위해서, 다시 강력하고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막강한 중앙집권형 권력이 그 무엇보다 필요했다. 서방이 요구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러시아를 다시 분권화시켜 최종적으로 해체하려는 음모나 다름없었다. 자원을 능수능란하게 동원해서 광범위한 국토에 재분배하기 위해서는 선거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는 중앙의 철권이 필요했다. 푸틴 입장에서 자신이 그러한 철권을 갖는 것은 서방의 이익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에, 서방이 기를 쓰고 자신을 막으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푸틴 집권 2기에 본격적으로 푸틴의 러시아는 서방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직 서방의 길과 반대되는 길은 아니었다. 푸틴은 러시아의 강력한 중앙집권 권력을 복원하고 그것이 서방으로부터 승인만 받는다면 러시아도 대유럽 경제권에 합류하여 큰 이득을 볼 수 있음을 확신했다. 사실 서방 국가들도 러시아가 그런 방향으로 통치 질서를 개편하는 것은 묵인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서방과 러시아의 사이에 있는 국가들에서 발생했다. 이들 국가의 거취에 대한 서방과 러시아의 생각은 도저히 합의점을 찾을 수 없는 수준으로 달랐다. 그렇게 색깔 혁명 국가들을 둘러싼 갈등이 누적되면서, 노골적인 반서방주의와 다름없는 ‘푸티니즘’이 등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