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5)
신유라시아주의, 푸틴의 제국을 위한 새로운 세계관
러시아 사람들과 ‘러시아적 세계’의 민족 내의 사람들은 유럽인들이 아니고, 아시아인들도 아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리고 우리 자신의 고유한 문화 및 삶의 요소들을 융합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음과 같이 인정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유라시아주의자들이라고.
-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빛의 아들들, 예수와 마흐디의 군대, 영적 전통, 성스러운 동방(Ishraq)과 이란 혁명, 이 세계의 거짓된 통치자에 대항해, 유독한 육과 부정의 독재에 대항해 죽음을 무릅쓴 전투에서 천국에 계신 하느님의 영광과 영원을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바친 아야톨라 호메이니, 솔레이마니 장군과 그리스도교 성인과 순교자를 따르는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우리 공동의 혁명을 위한 여러분의 기념식에 진심어린 축하를 보냅니다.
- 알렉산드르 두긴, 테헤란에서 이란 혁명 40주년을 기념하며.
막스 베버는 ‘국가는 폭력의 독점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확실히 국가의 본질은 영토 안에 있는 자원, 사람, 정보 등에 대한 독점적인 권력 행사다. 그런 능력이 없는 국가는 취약한 국가다. 하지만 국가가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폭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폭력과 타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국가 권력이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권력의 대상이 되는 주민들이 국가 권력의 존재와 작동을 지지하고, 때로는 그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근대 국가의 형성과 진화는 국가의 힘과 주민의 지지가 최적의 합의점을 찾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움직여 온 역사였다.
그렇다면 국가는 권력과 통치의 정당성, 합법성을 어디에서 구했고, 어떤 방식으로 국민을 설득했을까? 가장 강력한 정서적 기반은 민족주의였다. 민족은 공통의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여 국가를 이루고자 하는 집단이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강력한 국가 권력은 경쟁하는 민족 국가 사이에서 해당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었다(만약 주민의 대부분이 같은 민족 정체성을 강하게 공유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민족주의만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민족 간의 혈투가 끔찍한 재난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달은 뒤로는 더욱 그렇게 되었다. 국가는 단순히 민족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정서적인 지지를 넘어서는 또 다른 통치 정당성의 원천을 확보해야만 했다. 국가는 주민들이 지지하는 공동의 프로젝트와 비전을 제시해야 했다.
민족주의를 한층 더 강화한 파시즘을 제외하면, 20세기 국가관을 둘러싼 싸움은 큰 틀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싸움으로 요약되게 된다. 자유주의는 세계가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으며, 헌법의 틀 속에서 개인의 의사를 다수결 투표로 종합하여 결정하는 것이 이상적 통치라고 주장한다. 세계와 국가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들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반영하여 통치하는 것이 국가가 그 구성원들을 위해 봉사하는 방법이다. 자유주의의 통치 이념은 현대 대한민국의 이념이기도 하며, 적어도 1987년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익숙한 이념이다. 반면 사회주의는 세계가 계급으로 구성된다고 믿는다. 모든 개인은 생산력에 따라 형성된 생산 관계, 계급의 이익과 계급이 형성하는 특수한 문화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한다. 사회주의는 기존의 국가들은 지배 계급, 특히 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며 착취를 통한 불로소득을 누리는 계급의 이익에 따라 조종되는 기구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대신 만약 국가가 필요하다면 정말로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계급의 이익을 반영하여 통치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소련과 그 파생 국가들에서 노동계급의 이익을 가장 잘 대변하는 집단은 공산당을 비롯한 전위정당이다. 그들이 나머지 사회를 인도하여 올바른 길을 밝히는 것이 정당한 통치다. 유럽에서 사회주의의 매력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빠르게 퇴색되었지만, ‘진정한 세계의 주인’인 피착취자의 의사를 대변한다는 사회주의의 비전은 제3세계 탈식민주의와 결합하여 유럽 바깥에서 놀라운 힘을 발휘하며 자유주의나 여타 친서방 민족주의 세력과 경쟁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국가의 통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이념으로서 사회주의가 생명력을 상실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역사의 종언’은 이제 이 세상을 구성하는 200여 개의 민족 국가가 정당성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이 자유주의 이념에 있다는 선언이었다. 동구권의 시민들은 이제는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전위정당 대신에 개인의 의사를 다수결과 법치에 따라서, 즉 자유주의에 따라서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렇게 자유주의가 얻은 이념적 패권의 힘은 엄청나게 강력한 것이었다. 새뮤얼 헌팅턴은 <제3의 물결>에서 1980년대를 전후로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막대한 요구가 전세계적으로 분출되면서 민주화가 마치 물결처럼 퍼져나간 모습을 그려냈다. 과거 자유주의 이념에 대한 대항 논리로 제시되던 민족주의나 사회주의는 전후 세계에 태어난 신세대들 사이에서 빠르게 퇴조하고 있었다. 서방 국가들이 행사하는 지적, 도덕적 패권은 비서방 권위주의 세계의 시민들에게 빠르게 퍼져나가 저항운동을 자극했다. 자유주의 이념에서는 군부 독재든, 당 독재든, 개인 독재든 간에 헌법의 원칙과 다수결 투표로 정당화되지 않은 권력은 모두 존립 근거가 없는 부당한 권력이었다. 부당한 권력은 국가 폭력을 특정 지배 집단의 이해관계를 위해 무절제하게 휘두르게 되니, 다수 주민들의 이익과 발전을 저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유주의가 느끼는 불의(不義)였다. 정의와 불의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탈냉전 시대 이후에 더욱 강화되어 세계 각지의 권위주의 정권을 위협했다. 구소련권에서는 색깔 혁명이 퍼져나가고 있었고, 중동에서는 아랍 봉기가 30년에 걸친 독재 정권들을 무너뜨렸다. 공산당이 놀라운 물질적 성취를 이룩한 중국에서도 류샤오보 같은 인물들이 주창하는 헌정과 민주주의 요구가 호소력을 발휘했다.
따라서 21세기의 권위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가장 필요해진 것은 시민들에 나눠주어 불만을 무마시켜줄 물질적 부가 아니었다. 물론 과거 많은 권위주의 정권들이 물질적 부의 부족으로 인하여 위기를 맞이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한국과 대만의 사례는 물질적 부가 늘어나면 또 마찬가지로 권위주의 국가들의 통치 정당성이 흔들리는 것 또한 보여주었다. 많은 서구의 관찰자들은 중국이 한국과 대만이 걸었던 길에 진입했다면서 중국의 민주화를 낙관했다. 물질적인 문제로만 통치 정당성을 한정짓는다면 권위주의 정권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걸리게 되는 셈이었다. 따라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단순한 소득과 소비의 문제를 넘어서, 억압적 통치마저 정당화할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통치 논리, 새로운 통치 정당성의 원천이었다. 진짜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상상력이었다.
서방에 대항하는 강대국들은 국가적으로 이러한 상상력의 원천을 육성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을 통해 정권을 획득하고, 신학자들에 의한 통치(Velayat-e Faqih)를 내세운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시아파 이슬람를 그러한 원천으로 삼았다. 서구와 이슬람을 아우르는 지적 전통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서방 세계에 맞서면서 제재를 감내하는 억압적 이란 정부의 권력 행사를 정당화하는 각종 논리를 개발했다.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우고 있긴 하지만,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며 엄청난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있는 중국 또한 새로운 통치 정당성이 필요했다. 그들은 중앙당교나 중국사회과학원 등의 국가 연구 기관을 통해 민족주의, 경제 성장, 정치적 안정을 결합한 자신들만의 통치 논리를 확립했다. 중국 공산당은 자유주의가 보편적 통치 이념이 될 수 없으며, 각 민족과 국가는 각자의 실정에 맞는 적합한 통치 이념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화 민족의 발전을 선도하고, 강력한 중앙 통제력이 사라질 때 발생할 혼란을 방지하는 일은 중국 공산당이 가장 잘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하지만 이란과 중국과 달리 푸틴의 러시아는 새로운 통치 논리의 창조라는 과제가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자유주의로부터 이탈했던 소련 체제가 종국적으로 실패했다는 뼈아픈 경험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고, 그 실패를 반성하며 자유주의를 수용하기까지 했었다. 물론 러시아의 자유주의 실험은 대혼란으로 끝났지만, 자유주의 이념, 자유주의의 본류인 서방에 합류하고 싶다는 열망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 열망은 2011년에 러시아 각지의 거리 시위로 구체화되면서 자신의 에너지를 입증했다. 물론 2006년에 수르코프가 제시한 주권 민주주의가 중국과 어느 정도 유사한 정당화 논리를 발전시키기는 하였다. 중앙 집권형 제국 질서를 통해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 국제 사회에서의 높은 존재감을 제공할 수 있고 그것이 러시아 인민의 이익과 의사에 부합한다는 것이 주권 민주주의론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1세기에 가까운 역사, 민족 해방과 제국 재건이라는 역사적 위업, 경제 성장과 국력 신장이라는 가시적 성과까지 갖춘 중국 공산당에 비해 새로운 차르 푸틴의 개인적 독재는 정당성의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푸틴 2기부터 크렘린의 권력을 위한 여러 새로운 이념들이 고안되었고, 정당화를 위한 과거 이념의 재발굴들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푸틴은 2005년에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서유럽으로 망명했던 파시스트 사상가 이반 일린을 언급했다. 1980년대에 소련이 흔들리면서, 체제가 억압했던 러시아 민족주의 또한 다시 고개를 들었는데, 부활한 러시아 민족주의 그룹은 암암리에 일린을 비롯한 백계 러시아인(볼셰비키 혁명과 러시아 내전 당시 망명을 떠난 러시아인 집단) 사상가들의 저작에 주목하고 있던 터였다. 일린의 사상은 이미 기독교의 가치를 상실하고 정신적으로 타락한 서유럽 문명을 구원할 러시아의 임무, 그리고 그를 위한 지도자 숭배 등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이후 일린의 저작들을 모두 수집하고, 그의 유해를 다시 러시아로 이장하면서 일린을 예우했다. 2007년, 정부는 루스키 미르 재단을 설립하여 러시아 문화를 국제적 차원에서 널리 알리고 러시아어 보급에도 앞장설 것을 공표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서구 국가들이 운영하는 일반적인 공공외교 재단을 넘어서는 의미를 띠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세계’라는 뜻의 루스키 미르는 러시아의 영토 공간, 국경 바깥의 러시아인들이 거주하는 공간, 나아가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러시아 문화를 내면화한 이들의 공간, 러시아의 영적, 정신적 공간 등 다양한 의미를 포괄한다. 이전부터도 러시아에서 종종 언급되는 개념이었던 루스키 미르는 러시아 정부가 지지하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새로운 통치 정당성의 근원을 함축하는 개념으로 변모했다. 러시아 국가, 그리고 지도자의 사명은 러시아의 세계를 사수하고 러시아의 세계가 전세계에서 합당한 위치를 점한 채 대우를 받게끔 러시아를 소생시키는 것이 되어야 했다.
짧은 막간이었던 메드베데프 시대가 지나고, 2012년에 푸틴 3기가 시작되면서 러시아에서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를 마련하는 작업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색깔 혁명, 아랍 봉기, 2011년의 부정선거 논란과 반푸틴 시위를 거친 상황에서 또다시 푸틴이 집권하는 것은 대내외적으로 막대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바깥은 물론이고 안에서조차 서구식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통치의 근간으로서 사람들의 상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2012년에 이에 대한 대항적인 지적 거점으로 ‘이즈보르스키 클럽’이 설립되었다. 이즈보르스키 클럽은 러시아의 극우적 지식인들의 네트워크로서, 루스키 미르를 위한 이념과 담론을 생산하고자 에스토니아 근처의 이즈보르스크에서 설립되었다. 이 도시는 폴란드, 스웨덴을 비롯한 ‘서쪽의 침입자’로부터 러시아를 지키는 보루와 같은 역사적 위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었다. 회장을 맡은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를 비롯한 작가, 학자, 성직자 등의 다양한 인물들이 이즈보르스키 클럽을 통해 서로 교류하고 러시아의 새로운 통치 질서를 위한 사상과 논리를 고안해냈고, 무엇보다 그들의 사상을 국제적 차원에서 확산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이 단체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세계적 악명을 획득한 극우 사상가가 포함되어 있었으니 바로 알렉산드르 두긴이었다.
먼저 알렉산드르 두긴에 대해서 알려진 여러 이야기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지난 8월 20일 두긴의 딸인 다리야 두기나가 모스크바에서 폭탄 테러로 암살을 당하면서, 두긴은 러시아 안팎에서 다시금 조명을 받게 되었다. 수염이 잔뜩 나 있는 그의 외모 덕택에 서방에서는 그를 종종 ‘푸틴의 라스푸틴’, ‘푸틴의 브레인’ 등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긴 사상이 갖는 힘과 막대한 영향력을 고려하더라도 이러한 평가는 다소 과장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두긴의 사상은 형이상학, 역사 등을 조합한 매우 추상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다. 두긴의 이론에 근거해서 직접적인 정책을 결정하기에는 실제 푸틴이 처리해야 하는 일은 정치적으로 복잡한 맥락을 띠고 있으며 기술적이며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한다. 게다가 푸틴 주변의 사상가나 조언가가 두긴만 있는 것도 아니다. 대표적으로 2020년 수석보좌관에서 경질되기 전까지 푸틴의 최측근이었던 ‘주권 민주주의’의 고안자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도 있었다. 따라서 두긴의 사상이 푸틴의 실제 행동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간접적인 방식이지, 직접적인 정책 결정의 내밀한 과정에 개입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두긴이 이토록 주목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서구에서도 일찍부터 조명 받은 데는 두 가지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첫째는 그 자신이 국제적 차원에서 활동하는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두긴은 자신의 글을 영어로 활발하게 출간하고, 세계 각지의 극우 사상가들과의 네트워크와 연대체를 만드는 것을 선호한다. 두긴과 생각을 공유하는 이즈보르스크 클럽의 다른 사상가들의 글은 러시아어 구사자가 아니라면 접근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둘째로 두긴은 ‘스타성’이 있다. 수염이 무성한 그의 외모는 그의 지적 계보와 닿아 있는 도스토예프스키나 솔제니친가 형성하는 이미지와 매우 잘 부합한다. 서구인들이 러시아 지식인들에게서 기대하는 신비롭고 영적인 이미지 말이다. 물론 이런 요소들만으로 두긴의 중요성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다. 두긴의 사상과 그가 제시하는 서사가 내용이 아무것도 없었다면 그가 결코 지금과 같은 위상을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긴 사상, 혹은 그의 ‘신유라시아주의’의 가장 큰 강점은, 그 사상이 세계와 역사를 바라보는 종합적인 시야와 서사를 제공해준다는 데 있다. 러시아 역사에 대한 구체적 맥락과 러시아의 지적 전통을 이해해야 접근할 수 있는 다른 사상과 달리, 두긴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지구, 대륙, 해양과 같은 공간 관념을 기반으로 전개되고, 그 위에서 펼쳐지는 인간 역사를 해석하면서 서사를 쌓는다. 두긴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여러 언설을 직접적으로 따라가려면 플라톤과 하이데거, 이슬람 신학 등을 누비는 그의 작업을 들춰봐야 하지만, 사실 두긴이 제시하는 서사 자체는 놀랍도록 단순하다. 두긴은 명쾌하고 단순한 서사를 통해 세계와 역사에 대한 재해석을 제시함으로써 막강한 호소력과 힘을 획득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를 통해 러시아 바깥을 넘어서 외부 세계의 다른 사람들을 ‘감화’시킬 수 있던 것이 중요했다. 이 감화 과정 자체가 두긴이 구상한 세계 질서의 실현이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두긴 사상의 이런 특징은 그가 증오해 마지않는 자유주의 사상과 많이 겹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두긴을 푸틴의 직접적인 조언자이자 막후의 정책 결정자로 인식하기보다는, 러시아에 자유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통치 이념으로서, 대안적이며 종합적인 세계관을 제시하는 사상가로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사상이 러시아의 국시(國是)로 채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거부해야 하는 러시아 정부가 후원하는 새로운 극우 사상의 일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두긴의 사상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즈보르스키 클럽을 비롯한 국내의 네트워크, 그리고 러시아 바깥까지 뻗어 있는 극우 지식인과 정치적 행동가들의 네트워크로 존재한다. 일종의 글로벌 극우라는 생태계의 중요 교차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 네트워크의 사상들 사이에서는 물론 여러 차이가 존재하지만 목표는 명확하다. 러시아라는 제국적 공간에 대한 권위적 통치를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논리로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 두긴의 신유라시아주의는 이 질문에 대한 매력적인 대안 서사로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상인 셈이다.
신유라시아주의는 그 이름에서부터 보이듯, 유라시아주의, 혹은 ‘고전 유라시아주의’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유라시아주의는 표트르 개혁 이후 러시아가 오랜 기간 겪었던 동과 서의 정체성 갈등, 그중에서도 19세기에 격렬하게 분출된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의 경쟁 위에서 등장했다. 서구주의를 받아들이고, 유럽의 ‘문명화 사명’에 참여하는 길로 캅카스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식민화를 추구했던 러시아에서는 19세기 후반이 되었을 때 서구의 인정을 받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회의론이 크게 대두되었다. 영국은 크림 전쟁 이래로 수십 년에 걸쳐서 러시아의 팽창을 차단하고 있었고, 서유럽 지식인들은 러시아를 동양적 전제주의와 야만의 상징으로 멸시하기 일쑤였다. 이 시기 서유럽과 계몽주의에 대하여 유사한 불만을 공유하고 있던 독일 낭만주의 사조가 러시아에 유입되었고, 많은 러시아 지식인들이 서구와 대별되는 독자적 러시아의 문화와 정체성을 내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전통적으로 서구주의와 경쟁했던 슬라브주의는 정교회 신앙의 우월성, 차르 아래에서 공존하는 다민족 제국, 계몽주의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는 러시아의 전통적 생활 양식과 도덕성, 농민 공동체의 이상(理想)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슬라브주의와 그를 계승한 대러시아 민족주의는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서구 문명을 지향하고 있었다. 슬라브주의자들이 보기에 서구 문명의 ‘올바른 모습’은 서유럽의 계몽주의가 아니라 슬라브인들이 지키고 있는 전통과 신앙에 있었다. 따라서 동과 서 사이의 러시아는 아시아의 민족들에게는 기독교를 비롯한 서구 문명을 전해주고, 서유럽의 민족들에게는 영적 구원을 줄 수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황혼기, 혹은 러시아 사상과 예술의 ‘백은시대’였던 1890년대와 1900년대에 일단의 학자와 사상가들은 슬라브주의에서 한 발자국 더 동쪽으로 나갔다. 이들은 여전히 정교회 신앙과 슬라브 문화의 가치를 이야기했지만, 그 근거를 많은 부분 동쪽에서 찾았다. 러시아는 중국, 인도와 같은 아시아의 위대한 문명과 전통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서구가 지니지 못한 가치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아시아에 대해 러시아 지식인들의 품었던 호감은 실제 아시아 사회와 역사,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와 서유럽, 특히 영국과의 갈등이 계속되면서, 서구에 대항하기 위한 근거로서 아시아라는 안티테제를 세운 것에 가까웠다. 그 내용물은 러시아인들이 생각하는 서구의 구성물을 반대로 뒤집은 것들로 채워졌다. 20세기 여명기의 아시아 열풍이 실제보다는 상상에 기초했기 때문에, 아시아의 실제적 위협인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위축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시아를 향한 러시아 지식인들의 새로운 해석은 러시아 제국의 붕괴와 볼셰비키 정권의 수립을 맞이하면서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제국이 무너지고 여러 해에 걸친 대혼란이 펼쳐지면서 수많은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망명길에 올랐다. 이들은 서유럽과 미국에서 망명자 공동체를 형성하고, 볼셰비키가 장악한 러시아 본토와는 제한된 연결을 유지한 채 독자적인 사상가 그룹을 구성했다. 앞서 푸틴이 재발견했다는 이반 일린도 이러한 망명자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1920년대에 일군의 학자들이 서로 교류하며 러시아의 역사와 사명을 재해석하는 글들을 발표했는데, 언어학자인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를 필두로 사비츠키, 플로롭스키, 카르사빈, 미르스키, 베르나드스키 등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서구로부터 거부 당한 러시아의 경험과 제1차세계대전이 서구의 심장에서 만들어낸 참상으로 인하여 일련의 지식인 그룹에 서구 회의론이 강하게 퍼졌다. 하지만 아시아는 유럽의 진보가 만들어낸 막강한 힘에 대처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은 러시아가 온전한 유럽도 아니며 아시아도 아닌 ‘유라시아’라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러시아가 자신의 ‘유라시아성’을 인식할 때 동과 서의 분열을 극복하고 인류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
유라시아주의 그룹이 천착했던 핵심적인 화두는 슬라브주의와 마찬가지로 민족과 문화의 고유성과 유기적 일체성이었다. 이는 유라시아주의 사상가들의 지도자 격이었던 트루베츠코이가 언어학자였다는 것과도 큰 연관을 맺고 있다. 그들은 지리적 공간, 그 위에서 공동체가 형성한 독특한 언어와 문화가 본질적 차원에서는 침해될 수 없는 고유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주장은 역사에는 단선적인 발전 단계가 있으며, 가장 앞선 서구가 나머지 비서구 민족들을 발전으로 이끌어야 한다는(혹은 그들은 영영 발전할 가망이 없다는) 당시의 일반적 생각에 대한 반론으로서 등장했다. 트루베츠코이는 인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하나의 결말로 향하는 단선적 발전은 존재하지 않고, 각 민족은 각자의 고유한 공간에서 자기 나름의 발전과 흥망성쇠의 순환을 경험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지닌 고유성은 무엇인가? 유라시아주의자들은 제국적 성격이야말로 유럽과 아시아의 면모를 모두 지니고 있는 러시아의 고유성이라고 보았다. 일례로 유라시아주의 역사학자 베르나드스키는 러시아의 역사를 ‘숲’과 ‘초원’의 대립 속에서 펼쳐진 종합이라고 보았다. 숲의 민족인 러시아인과 초원의 민족인 몽골-타타르인들은 세력의 부침을 겪으면서 상대방을 지배하는 대립의 시기를 거쳤다. 그런 뒤 18세기 러시아 제국에 의하여 이 두 지리적 공간의 상이한 민족들이 진정한 통일체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역사의 이런 제국적 성격은 무슬림, 타타르인, 아시아인, 몽골인 등이 각자의 문화적 원형을 보존하면서도 러시아 국가라는 더 큰 틀 속에서 공존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조건이 되어주었다. 이런 제국 질서 아래에서 다원성의 긍정이야말로 몽골-타타르의 지배가 러시아 국가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었다. 러시아 고유의 성격은 ‘투란’인으로 통칭되는 몽골, 타타르, 튀르크와의 투쟁과 교류 속에서 서구와 구별되는 방식으로 탄생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유라시아주의자들은 상이한 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근간으로 여전히 러시아 정교회의 역할을 강하게 지지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고전 유라시아주의자들은 그들이 다민족 연방 체제를 건설하고 무신론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볼셰비키에 대한 양가적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망명 지식인 집단인 유라시아주의자들이 당시의 소련, 혹은 세계적으로도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트루베츠코이가 1938년 사망하고, 제2차세계대전이 발생하면서 유라시아주의 그룹의 활동은 거의 끝이 나버렸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소련 내부에서 유라시아주의의 불씨를 지킨 사상가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레프 구밀료프였다. 러시아의 유명한 문인인 니콜라이 구밀료프와 안나 아흐마토바의 아들이었던 그는 스탈린 시대의 테러로 아버지를 잃고 그 자신도 시베리아의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20대에 타지키스탄을 탐험하고, 레닌그라드 대학교 역사학부에서 공부하며 끊임없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한 그는 수용소와 제2차세계대전의 전선을 오가는 삶 속에서 계속해서 유라시아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했다. 역사학, 고고학, 지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섭렵하고, 흉노와 고대 튀르크인, 몽골 제국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구밀료프는 1920년대 망명 지식인들과는 상당히 다른 각도에서 유라시아주의에 접근하면서도 그들과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다.
1960년대를 거치며 정립된 구밀료프 역사 이론의 핵심은 “민족형성과 지구의 생물권(Etnogenez I Biosphera Zemli)”이라는 저서에서 구체화되었다. 구밀료프는 공부를 하면서 지구과학자 블라디미르 베르나드스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생태학, 기후학, 인구학, 지리학 등 자연과학의 언어를 구사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구밀료프는 우주방사선의 변동에 따라서, 고유한 지리적 환경 속에서 민족이 형성되고 부침을 거듭한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구밀료프는 충분한 부양력을 지닌 공간에서 민족이 탄생하고, 그 민족이 열정(passionarnost’)을 지니고 활동할 때 흥기하고, 열정을 상실하면 쇠퇴한다고 보았다. 열정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화학적 에너지가 넘치는 상태로, 집단의 영광, 초월성, 현상의 급격한 변경 등을 추구하는 합리적이지 않아보이는 막강한 힘이었다. 한편, 각 민족은 더 상위의 초민족(superethnos)과 더 작은 개념인 하위민족(subethnos)의 관계를 통해서 위계적 시스템을 구성한다. 구밀료프는 동아시아의 정주민과 유목민, 유럽인과 무슬림, 아시아인으로 대표되는 초민족 간의 갈등과 교류의 역사를 이러한 열정의 부침으로 설명했다. 구밀료프에 따르면 러시아 역사는 칭기스칸의 몽골 제국으로부터 받은 제국적 기획, 통치술을 바탕으로, 러시아인들이 유라시아 공간에서 다양한 민족들이 공존하는 초민족 공동체를 만든 역사였다. 그는 몽골인과는 반대로 유대인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드러냈는데, 그들은 구밀료프의 이론에 따르면 어떠한 초민족체에 속하지 않고 기생하면서 민족 공동체를 파괴하는 ‘키메라’ 종족이기 때문이었다.
구밀료프의 저작들은 소련 당국과 공식적인 학술 공동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고, 비전문적이고 자의적이라고 무시 받았다. 특히 그의 역사 이론에서 핵심적 전제가 되는 지리결정론은 마르크스주의 역사 유물론과는 상극이나 다름없었다. 우주선을 통해 민족 활동의 생애주기를 설명하는 민족형성 이론은 과학적 언어의 외피를 둘러쓰고 있었지만, 실제 과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를 거치면서 그의 이론은 뒤늦게 러시아에서 각광받았고, 말년의 구밀료프는 러시아 지적 생태계의 일약 스타로 거듭날 수 있었다. 구밀료프는 1992년 사망한 이후에 더욱 큰 명망을 얻었는데, 이는 소련 해체로 러시아인들이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최후의 유라시아주의자’라 불리는 그의 이론은 소비에트 제국의 폐허를 마주한 일군의 러시아인들에게 채택되어 ‘신유라시아주의’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치 러시아 제국의 폐허를 마주했던 망명 지식인들이 유라시아주의를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신유라시아주의 사상가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강한 영향력을 지닌 이가 알렉산드르 두긴이다. 그는 소련이 해체되는 혼란기에 청년기를 보낸 그는 극우 운동가가 되었으며,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와 함께 민족볼셰비키당을 창립하여 활동하였다. 1990년대에 그는 파시스트 사상에 흠뻑 빠졌는데, “경계 없고 붉은 파시즘”이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그에게 영향을 끼친 주요한 사상가는 프랑스의 뉴라이트 사상가인 알랭 드 브누아(Alain de Benoist)였다. 1960년대 무렵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서유럽의 뉴라이트 운동은 그람시의 진지전 이론을 채용한 새로운 파시즘 운동이었다. 브누아를 비롯한 여러 뉴라이트 운동가들은 제2차세계대전의 패배로 유럽에서 자리 잡을 수 없게 된 파시즘 운동이 소생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지적, 문화적 진지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지식인과 대중의 세계관에 영향을 주어 파시스트 사회의 출현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브누아가 생각하기에 파시즘이 필요한 이유는 영국과 미국이 중심이 된 서구, 그리고 유대인 문화가 갖는 보편성과 일원성에 있었다. 브누아는 특정 지리적 범주의 유기적 공동체인 민족들의 문화야말로 존재론적으로 구분되는 실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지구 위의 여러 민족이 각자의 문화를 지키고 사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다양성’이었다. 이러한 다양성을 최초로 위협한 적은 기독교였다. 그가 보기에 기독교는 고대 만신전의 다양한 신을 없애고, 복수의 세계관을 야훼의 일신교로 평탄화하며 문화를 파괴한 주범이었다. 기독교를 계승한 계몽주의는 이 작업을 더욱 심화시켰고, 각 민족은 계몽주의를 받아들이며 스스로의 뿌리와 정체성을 해체하는 과정에 들어가고 있었다. 계몽주의의 보편성을 주창하는 ‘서구’의 기획이 지속된다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문화적 개념인 ‘유럽’은 사라지고 인류의 삶은 대대적 퇴보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전망이었다. 브누아는 이를 막기 위해서는 먼저 계몽주의의 기반인 기독교부터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이교주의를 추구했다. 정교회 민족주의자였던 두긴이 신이교주의까지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서구 계몽주의가 문화를 획일화하고 민족 공간을 해체한다는 그의 사상은 일찍이 1920년대의 유라시아주의자의 주장과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이에 더하여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두긴은 카를 슈미트, 율리우스 에볼라, 마르틴 하이데거, 헤겔과 플라톤을 오가는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 사실 이런 면모 때문에 그의 이론과 글은 상당히 추상적이고 현학적이어서 대중적인 기반을 갖추기 어려웠다. 두긴이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지정학’에 관한 글을 쓰면서부터였다. 하지만 두긴의 지정학은 서구 세계에 익숙한 지정학과는 결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매킨더와 스파이크먼이 체계화한 지정학은 세계를 하나의 전략적 단위로 보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유라시아를 심장지대와 주변지대로 나눈 뒤 어떻게 하면 서방 세계가 유라시아에서 우세를 놓지 않는지를 탐구하는 방법론이었다. 일반적으로 지정학은 지리, 역사, 인구, 자원 등을 바탕으로 국가의 행동을 예측하고자 하는데, 여기에는 기계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서구의 인식론적 전제가 깔려 있다. 이에 더하여 매킨더는 심장지대 세력인 러시아를 전제정의 대표주자, 주변지대 해상 세력인 영국을 민주정의 대표주자로 설정하여 민주주의 방어를 위해서 지정학이라는 도구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긴은 지정학 이론의 용어들을 차용한 뒤, 유라시아주의, 서유럽의 뉴라이트 사상, 구밀료프의 역사 이론을 혼합한 자신만의 지정학을 만들었다. 두긴은 구밀료프와 마찬가지로 지리적 공간과 각 민족, 문화권이 유기적인 통합체를 이룬다고 보았다. 민족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각자의 문명적 전통에 따라서 활동해야 한다. 전통의 내용은 말 그대로 ‘전통적’인 것이다. 두긴은 문명에서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합당한 위계 질서로 작동하는 ‘자연적 상태’에 따라 사람이 생활해야 한다고 보았다. 남성, 여성, 민중, 엘리트, 군인, 지식인 등의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능력과 역할에 맡게 공동체에 봉사해야 했고, 그 가치 기준은 각 문명권이 축적한 역사와 전통에 달린 것이었다. 그런 전통에 맞게 살아가는 길이 인간이 의미와 가치를 느끼면서 사는 길이었다. 이런 유기체적 공동체관은 헤르더로 대표되는 독일 낭만주의 사조, 다닐렙스키나 레온티예프의 슬라브주의, 구밀료프의 유라시아주의와 상통하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파시즘의 강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두긴은 유기체로서 민족이 살아가는 지리적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치의 지정학자 카를 하우스호퍼에게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우스호퍼의 이론은 게르만 민족을 위한 ‘레벤스라움(생활권)’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여 나치의 전쟁 수행에 근거가 되어준 바가 있었다. 이러한 공간 인식은 지리학의 태동기에 인문 지리에 많은 관심을 두고 공간을 신의 의지가 민족을 통해서 행사되는 장소로 보았던 독일 지리학자 카를 리터로 소급되는 관점이기도 했고, 주로 자연 지리에 천착하며 공간을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지리학의 아버지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관점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두긴에게 있어서 인간이 문명적 전통에 따라 온전한 삶을 사는 데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은 서구에서 전파하는 근대성이었다. 근대성은 모든 전통을 해체하고, 계량할 수 없는 가치를 화폐로 수량화하고 교환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게다가 성별의 구분, 올바른 남녀의 관계를 인위적으로 해체하고, 민족이 갖는 고유성을 여러 문화를 혼합시킴으로써 제거한다. 근대 서구 문명은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다른 비서구 사회를 무력으로 지배하고, 매판 세력을 육성하여 민족의 참된 모습을 타락시켰다. 두긴에게 있어서 소련의 해체는 단순한 강대국 지위의 상실이나 제국의 해체를 넘어서, 러시아를 약탈하고 전통과 문화를 오염시키는 ‘러시아 말살 작업’이나 다름없었다.
심장지대와 주변지대, 혹은 대륙과 해양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지정학의 공간 관념이 전통과 근대성에 관한 두긴의 문제의식에 더해졌다. 이는 ‘땅과 바다’를 일찍부터 이야기한 카를 슈미트의 사상을 수용한 것이기도 하고, 지리적 공간 속에서 각 민족이 특징적 문화를 형성한다는 구밀료프의 관점과 맞닿은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근대성의 파괴적 특질은 해양 세력이 갖는 본질적인 면모였다. 상업을 통해 힘을 쌓는 해양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당연히 다른 사회로 침투해 들어가 그 사회의 전통적 연결망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해양 상업 문명은 언제나 사치, 향락, 도덕적 타락, 다문화주의와 전통의 파괴 속에서 이익을 얻는 민족이다. 반대항에는 유라시아 대륙의 영웅적인 육상 세력들이 존재한다. 상업보다는 정치적 권력이 강력한 이들 민족은 화폐로 표준화할 수 없는 고유의 가치들이 있다고 믿으며, 대륙 여러 민족 간의 투쟁에서 승리하고자 위계질서와 영웅성을 숭상한다. 두긴에게 있어서 세계사는 타락한 해양 세력과 영웅적 육상 세력의 영원한 투쟁과 다름없다. 이는 자유의 바다와 압제의 대륙이라는 대립항을 설정한 매킨더의 구상을 뒤집은 것이기도 했다. 아테네는 타락한 해양 세력이며 스파르타는 영웅적 육상 세력이다. 카르타고는 타락한 해양 세력이고 로마는 영웅적 육상 세력이다. 이렇게 시대에 따라 이어지는 쟁투는 베네치아와 비잔티움, 영국, 네덜란드와 독일, 러시아, 미국과 소련으로 계승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웅적 육상 세력이 자신의 전통을 충실히 따를 때 인간성이 보존되었고, 타락한 해양 세력이 대륙 내부까지 침투해 들어올 때는 영적인 오염과 약탈이 이어졌다. 신유라시아주의자들은 소련의 해체가 해양 세력으로서 미국의 기도에 따른 재난이라고 보며, 이 사건을 베네치아에 의하여 무너진 비잔티움 제국에 비유한다(러시아는 비잔티움 제국을 계승했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온 국가이기도 하다).
두긴은 21세기에 들어서 해양 세력, 혹은 ‘세계주의자(글로벌리스트)’와 육상 세력, ‘유라시아주의자’의 묵시록적 대립이 발생할 것이라 내다보았다. 이는 두 가지 변화에서 기인한다. 첫째는 근대성이 아예 ‘포스트모던’의 단계로 진입함에 따라, 해양 세력의 힘이 더욱 더 파괴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젠더 이론, 다문화주의가 세계 각지에 확산되어 전통문화를 체계적으로 파괴하면, 최종적으로 발전한 과학기술이 인간의 생물학적 기반 자체에 개입하리라 보았다. 두긴은 각 문명과 민족이 갖고 있는 고유성과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세계주의자들의 이익과 편의에 따라서 모조리 삭제하려는 움직임을 ‘대초기화(Great Reset)’이라고 부른다. 그레이트 리셋이 이루어진 세상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도 없고, 기존에 알고 있던 모든 가치들은 전면적으로 부정당하며, 대중들은 세계주의 엘리트들의 노예나 다름없게 된다.
신유라시아주의자들은 성스러운 동방, 영웅적 육상 세력이 다시 깨어나고 있다는 데서 희망을 찾았다. 이란은 육상의 민족들이 깨어나 해양 세력과 근대성을 무찌른 사례 중 하나였다. 두긴은 유라시아에 자리한 각 초민족체들이 다시 각성하여 해양 세력을 몰아내고 각자의 문명적 공간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긴이 “지정학의 기초”와 같은 저서에서 주장한 국제정치와 전략에 관한 평론들은 실제 정교한 지정학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언어와 신화적 서사를 바탕에 두고 있었다. 그는 독일, 터키, 이란, 중국, 인도, 일본, 한국에 이르는 다양한 국가들을 논하며 러시아가 유라시아 공간에서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서 어떤 외교 전략을 구사해야 할지를 세세히 평했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유라시아 공간에서 러시아의 제국적 이익을 위한 구상이었던 두긴의 지정학은, ‘거대한 초기화’에 맞서 인간성을 사수하고자 하는 마니교적 투쟁의 지정학으로 점차 바뀌었다. 이를테면 중국을 강하게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두긴은 중국의 역할을 높이 사기 시작했다. 그는 영웅적 육상 세력들이 서구, 근대성, 해양 세력, 세계주의자들에 맞서서 연대하고 그들을 몰아낸 뒤에 ‘다극 세계’를 건설하자고 이야기했다. 두긴의 다극 세계는 단순히 초강대국 미국의 권력을 다른 나라들로 분산시키는 것을 넘어선다. 하나의 단일한 가치로서 근대성이 아니라, 복수의 전통이 각자의 공간에서 조화를 이루는 공간으로서 유라시아와 세계를 재조직한 것이 다극 세계인 것이다. 이런 다극 세계 건설에 참여하는 주체로 거듭나는 것을 그는 ‘대각성(Great Awakening)’이라 칭했다. 세계는 대초기화를 주창하는 사람들과 그에 맞서 대각성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투쟁이고, 이는 문명의 시원부터 시작되어 온 영원한 싸움이다.
글의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두긴의 사상이 푸틴의 정책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체계화한 사상이 이즈보르스크 클럽을 필두로 한 국수주의적 지식인 그룹에서 상당한 합의를 얻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두긴의 사상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를 보는 대안적 관점을 러시아의 권력 엘리트들에게 제공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세계는 개인으로 구성되고 세속적인 합리성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은 집단으로 존재하고 영성과 전통적 도덕을 따라야만 한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는 집단을 해체하고 영혼과 도덕을 타락시키는 해양 세력의 음모이자 러시아를 전복하고 파괴하려는 기도가 될 따름이다.
이러한 대안적 세계관은 단순히 러시아에만 통용되어 러시아 권위주의를 옹호하는 사상으로 기능하는 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두긴의 신유라시아주의는 서구에서 시작된 계몽주의와 근대성의 시각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을 총체적으로 뒤집는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회와 국가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2010년대에 러시아는 서구 민주주의라는 ‘대안적 세계관’으로 러시아의 ‘전통적 세계관’을 공격하려는 시도를 뒤집어서 반격에 나설 터였다. 그들은 먼저 ‘대각성’에 참여한 유라시아의 다른 영웅적 육상 세력의 탄탄한 연대를 구축할 것이었다. 러시아는 프리마코프가 처음 이야기한 ‘모스크바-베이징-뉴델리’의 전략 삼각형을 넘어서, 앙카라와 테헤란, 그 너머까지 이끄는 유라시아 대연합을 이끌어야 했다.
‘대각성’의 목표물은 인접한 아시아 국가들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러시아의 칼끝은 이제 서구를 향했다. 사상적 공격으로 사회를 내부에서 흔드는 것은 서구 자유주의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될 것이었다. 러시아의 ‘대안적 세계관’으로 서구의 ‘전통적 세계관’을 공격하고, ‘대각성’을 일으켜 서구 정부의 통치 정당성을 흔들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