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6)
러시아의 세계관 전쟁: 크림과 돈바스 침공, 유라시아 경제권 건설, 새로운 동맹 찾기, 브렉시트와 트럼프 지원까지.
“포스트모더니티 속에서 소위 진실이라는 것은 믿음의 문제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말을 믿는다. 그것이 진실을 정의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우리의 특별한 러시아식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알렉산드르 두긴
3기를 맞이한 푸틴 정부가 최초로 직면한 도전은, 비단 신유라시아주의 사상까지 가지 않더라도 러시아 민족주의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던 우크라이나에서 왔다. 서구와 러시아 사이에서의 정치적 분열로 오렌지 혁명 정부는 2010년 친러시아계 빅토르 야누코비치에게 정권을 넘겨준 상태였다. 동과 서의 정체성 갈등이 연이은 정권 교체로까지 이어지면서 우크라이나에서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든 러시아식 권위주의든 어느 쪽으로도 안정적 정국을 꾸릴 수 없게 되었다. 야누코비치는 푸틴식의 권위주의 체제를 우크라이나에도 수립하고자 했을지 모르나, 서구화를 추진했던 우크라이나를 다시 동쪽으로 선회하고자 하는 기도는 서부와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극심한 반감을 일으킬 따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맞이한 경제난은 야누코비치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2008년 금융위기와 뒤이은 유로존 위기 등으로 세계 경제가 대침체 국면에 접어들면서 우크라이나는 외부로부터 대규모 경제 원조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2010년 시점에서 우크라이나의 경제난은 해결이 불가능에 가까운 극심한 난제였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식 계획 경제를 독재자가 통솔하는 국가자본주의로 연착륙시킨 벨라루스와 카자흐스탄, 1990년대의 혼란을 딛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시스템을 재건한 러시아의 길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크라이나가 서구식 체제를 제대로 수립한 것도 아니었다. 동과 서로 갈려 정치적 권위가 실종된 상태에서 올리가르히들의 전횡이 21세기 들어서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인프라는 방치되었고, 국민들은 국경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있었고, AIDS가 창궐하는, 사실상의 ‘우크라이나판 옐친 시대’가 10년도 아니고 20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서유럽은 이런 상황을 해결해줄 수 없었다. 철의 장막이 무너진 이후 과거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소련 위성국들은 자본과 기술이 집적되어 있는 서유럽, 특히 독일의 투자를 대대적으로 흡수했다. 폴란드, 체코, 헝가리와 같은 국가들은 지리적 인접성의 수혜를 누리며 독일 경제권에 신속하게 편입될 수 있었다.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과거 제국들의 역사적 네트워크도 신속히 복원되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서유럽에서 지리적으로 접근하기 너무 멀었으며, 서유럽의 부유한 국가들과 공유하는 역사적 유대관계도 거의 없었다. 폴란드와 체코가 흡수하기도 바쁜 독일 자본이 2010년에 우크라이나에까지 돌아갈 리가 없었다. 우크라이나는 서유럽에서 자본을 받는 게 아니라, 반대로 서쪽으로 사람을 보내서 돈을 벌 수밖에 없었다. 폴란드와 체코 사람들이 독일, 프랑스, 영국으로 일하러 떠나면서 발생한 빈자리를 우크라이나인들이 메꾸었다. 반면 우크라이나에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인프라가 집중되어있는 동부 지역은 러시아와의 연계를 통해서 경제 활동을 이어갔다. 지리는 우크라이나가 어떤 방식의 정치경제 체제를 채택한다고 하더라도 단기간에 극복할 수 없는 물리적인 현실이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의 사실상 유일하다시피한 경제적 파트너인 러시아가 경제적 연결고리를 매개로 우크라이나에서의 정치적 우위까지 확보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2013년 말에 시작되어 2014년에 야누코비치 정권을 전복한 유로마이단 시위는 그런 점에서 우크라이나가 독립 후 20년을 쌓아온 모순이 폭발하는 순간이나 다름없었다. 야누코비치 정부는 당장의 경제난을 넘기기 위해서 긴급한 차관을 필요로 했었다. 하지만 당시 우크라이나에 별다른 이해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유럽 연합은 우크라이나의 심각한 부패를 익히 알았기 때문에, 납세자들의 돈을 아무 조건도 달지 않고 그냥 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유럽 측은 우크라이나가 차관을 신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사용할 것을 보증하는 경제 개혁을 요구했다. 방만한 공공 부문을 비롯한 소비에트 시대의 유산을 청산하고 내부의 법치와 외부의 투명한 감시를 가능하게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조건부 원조’는 서방 세계의 오랜 관행이었고, 유럽 연합은 내부의 그리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요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요구는 필연적으로 국내 유권자들의 출혈을 일정 기간 감수하라는 것이기도 했다. 장기적으로는 명확한 개선을 이룰 수 있을지는 몰라도(사실 IMF와 세계은행이 구조조정과 조건부 원조를 집행한 많은 사례를 보았을 때 이마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 기간 발생할 정치적 불만은 자국 정치인들로서는 단순히 참고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동과 서 사이에서 극렬한 분열을 마주하고 있어 안정적 권력 기반이 극히 취약했던 우크라이나로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유럽안을 사실상 받아들이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떠한 조건도 달지 않고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나선 러시아안은 훨씬 매력적인 것이었다. 정치 권력이 통제하는 천연자원을 수출해서 돈을 쌓은 푸틴은 원조를 제공할 때 서방과 달리 유권자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하물며 그 대상이 러시아인들이 형제민족이라 생각하는 우크라이나라면 러시아 국민들도 아무 불만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러시아안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안을 받을 때 발생하는 서부와 중부의 정치적 반발은 필연적이었다. 유럽 연합이 요구한 구조 개혁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일정 부분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나, 종국적으로 우크라이나가 유럽에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러한 개혁과 희생도 유럽에 받아들여지기 위한 마땅한 준비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러시아안을 받으면서 유럽이 요구하는 개혁을 이행하지 않겠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유럽 합류라는 꿈을 초기화하고, 다시 소비에트 연방이나 러시아 제국으로 들어가겠다는 선언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2011년 러시아의 반푸틴 시위가 좌절되고, 푸틴 3기가 시작되면서 러시아 인근 국가들의 청년 세대가 러시아에 대해 갖는 반감은 배가 된 상황이었다. 소련의 기억이 없는 청년층이 보기에 새로운 권위주의로 향하는 러시아는 자국의 모델로 삼아야 할 매력적인 국가가 절대 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푸틴은 유라시아 경제 연합을 비롯한 러시아 주도 지역 통합 프로젝트를 가동하면서 야심을 드러냈다.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자 진퇴양난에 빠진 야누코비치는 결국 푸틴의 손을 잡았고, 그 결과 야누코비치와 친러시아 동부 지역에 대한 서부와 중부의 민심이 폭발했다. ‘유럽 광장(유로마이단)’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전쟁에 가까운 싸움을 벌인 결과 야누코비치 정권은 축출되었다.
유로마이단은 푸틴으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색깔 혁명과 아랍 봉기로 서구에 대한 반감이 쌓일 대로 쌓인 푸틴은 유로마이단의 성공을 서구에서 러시아를 위협하기 위해 진행한 공작과 음모로 해석했다. 유로마이단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순수한’ 의지로 일어난 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설파하고 조국 러시아를 향한 반감을 확산시키는 서구 NGO, 정보 기관, 정부가 봉기를 부추겼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그 목적은 러시아를 다시 약화시키고, 러시아 인접국을 서구 자본과 미국 군사기지가 진출할 수 있는 전초기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서방의 공세에 아무 대응도 하지 않는다면 서방은 종국적으로 러시아의 팔다리를 잘라 러시아를 약화시킬 것이고, 러시아는 다시금 해체되어 서방에 완전히 종속적 위치로 떨어질 것이었다. 무엇보다 소련이 해체하면서 남기고 떠난 역외 러시아인들을 배신하는 일이 될 것이었다. 훗날 러시아가 보인 이런 격렬한 피해의식을 마주한 서방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로서는 러시아가 이 정도로 악의에 가득 차서 복수를 결심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서 완전히 이탈하여 유럽 연합으로 달려갈 조짐을 보이자 러시아 내부에서는 우크라이나에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가장 강경한 주장은 아예 우크라이나에 전쟁을 선포해서 우크라이나를 완전히 병합하거나 동부 우크라이나만이라도 러시아가 합병해야 한다는 수준까지 갔다. 이때는 이미 우크라이나를 바라보는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의 시각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원래 루시(동슬라브)의 한 형제인 우크라이나를 레닌이 억지로 민족으로 분리시키고, 서구의 대서양주의자들이 침입하여 그들을 완전히 러시아에서 떼어내려 한다는 서사였다. 우크라이나는 애초에 민족으로 존재한 적도 없는, 자체적 역사도 없는 ‘가짜 민족’이었다. 그들은 ‘대러시아’와 함께하는 ‘소러시아인’일 때 온전한 민족 공동체로서 마땅히 올바른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물론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에 대한 이런 시각을 아마 푸틴도 공유하고 있을 터였지만, 그의 행동은 내부 강경파들보다는 확실히 더 신중했다. 푸틴은 언제나 상대편이 수용할 수 있으리라 예상하는 선을 설정하고, 그 선 안에서 상대를 압박해가는 전통적인 러시아의 전술을 활용해왔다. 2006년 우크라이나 위기나 2008년 그루지야 위기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다만 2014년의 우크라이나에는 더 수위가 높은 행동이 필요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활용했다. 여기에는 아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독립 후 우크라이나에서는 정체성 모색의 일환으로 반러시아 민족주의 그룹이 크게 성장했는데, 이들은 스테판 반데라를 비롯하여 제2차세계대전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이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상징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유로마이단을 통해서 극우적 성향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주류로 빠르게 진출했고, 이들은 우크라이나 내부의 다양성을 지우는 방식으로 우크라이나가 겪는 정체성 혼란을 해결하고자 했다. 러시아인이 다수 거주하는 1954년에 흐루시초프에 의하여 우크라이나로 편입된 크림 반도와 동부의 돈바스 지역은 새로운 정부가 러시아 정체성 지우기 작업에 들어갈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어 사용자 집단에서 이런 여론이 형성되는 데는 러시아의 정보-심리 작전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러시아는 신유라시아주의 이념에 입각한 ‘루스키 미르(러시아 세계)’의 세계관을 우크라이나에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세계는 이미 대서양주의자와 세계주의자들, 그에 맞서는 유라시아주의자들로 나뉘고 있었고, 우크라이나는 마땅히 유라시아 세계에 들어와서 중차대한 역할을 맡아야 맞았다. 우크라이나가 서구에 넘어가는 것은 역사를 배반하는 일이며, 서부에서 흥기하는 신나치 세력에게 권력을 쥐어주는 일이었다. 러시아는 나치에 맞선다는 대조국전쟁의 기억과 서구에 맞서 전통을 수호한다는 신유라시아주의를 혼합한 세계관을 우크라이나에 주입하고자 했다. 많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어 사용자들이 러시아의 선전을 들으며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오직 양자택일만 가능하며, 양자택일을 해야할 때 선택할 대상은 러시아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러시아에 의해 수행된 프로파간다 전쟁은 푸틴의 군사 개입에 의한 크림 반도의 합병과 돈바스의 분리독립을 가능하게 할 밑작업이었다.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크림 합병과 돈바스의 유혈 갈등은 서구를 깜짝 놀라게 했다. 강대국이 무력을 동원해 기존의 국경을 변경하는 것은 역사의 종언 시대가 아니라 냉전 시대부터 사실상 불가능해진 일이었다. 푸틴은 이것이 무력 침공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어 사용자들의 자발적 의지라고 이야기했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에 무심했던 미국과 유럽 연합은 러시아가 유럽의 마당으로 성큼 들어오자 다급하게 대응에 나섰다. 러시아의 국내 산업에 중요한 자본재 수출, 러시아 기업들과 올리가르히들이 이용하는 금융, 에너지를 비롯한 국유 기업을 다방면으로 제재했고, 푸틴의 이너 써클이자 우크라이나에 관여하는 엘리트들이 입국 금지 조치를 받았다. 2014년의 제재는 2008년 세계 경제 위기에서 아직도 다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러시아 경제에 가한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를 매개하며 에너지를 수출하고, 자본재를 수입해 활발히 경제를 개선하고 있던 러시아의 기존 계획들이 줄줄이 무너졌고, 해외 자본은 러시아 투자를 극히 꺼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푸틴은 서방 농축산물 수입을 금지하는 맞대응에 나섰다. 러시아 시민들은 경기 침체와 자본 이탈, 물가 상승이라는 고충을 감내하면서 푸틴의 대전략에 따라가야 했다.
단적으로 말해서 경제 제재로는 러시아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첫째로 푸틴 정권의 지지 기반이 2010년대를 거치면서 크게 이동한 데 있었다. 2000년대에 푸틴은 옐친 시대의 혼란을 끝내며, 강한 러시아를 회복하고 서구와 연결된 중산층 그룹을 성장시키면서 압도적 지지를 누릴 수 있었다. 특히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새로운 중산층들, ‘P세대’로 불리는 포스트 소비에트 청년층들이 푸틴을 강력히 지지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고, 중산층들이 중요시하는 가치인 자유와 인권이 후퇴하고, 결정적으로 서구와 대립하게 되면서 신흥 중산층들의 지지는 꾸준히 이탈했다. 그러나 푸틴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바깥에 펼쳐져 있는, 나머지 드넓은 러시아에서 여전히 강력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제국의 자긍심을 살려주고 정치적, 문화적 자주성을 보호하는 지도자로서 푸틴을 지지한다. 서구자유민주주의를 불완전하게 따라하면서 이도 저도 아닌 불안정한 체제로 남느니, 아예 신유라시아주의를 통해서 더욱 열성적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런 지지층 변동 과정에서 중산층들이 푸틴에 대한 적극적 반대파로 돌아선 것도 아니었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경험은 체제를 함부로 바꾸었을 때 어떤 결과가 따라올지 모른다는 공포를 안겨주었다. ‘푸틴 이후’는 더 좋아질 수도 있었지만 상상보다 훨씬 더 안 좋아질 수 있었다. 명확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정치적 불안정을 유발하느니 현상이라도 유지할 수 있는 푸틴 체제의 지속에 수긍하며 사는 게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그마저도 견디지 못할 사람들은 러시아를 떠나기로 결심했는데, 크렘린 입장에서 그들은 어차피 조국의 배반자일 뿐이지 체제의 위협은 아니었다.
정권을 견고하게 만든 이 첫 번째 요인을 두고 서방은 오히려 큰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서방은 설령 경제 제재가 러시아를 굴복시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 러시아가 사회적 불만이 누적되고 고급 인재가 유출되면서 경제적 활력을 잃으면 러시아를 우리에 가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016년 12월에 버락 오바마가 러시아를 두고 한 말은 당시 서방 엘리트들이 러시아를 보는 전형적인 시각을 반영한다. “그들은 작고, 약한 나라입니다. 석유, 가스, 무기를 제외하고는 누군가 사고 싶은 물건을 만들지를 못합니다.” 어차피 서구의 에너지 수요와 서구의 기술, 생산, 금융에 의존하는 나라가 더 무엇을 하겠냐는 것이었다. 고백하자면 나도 당시에는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푸틴을 지켜주는 두 번째 방패가, 물 밑에서 준비되고 있었고, 이로 인하여 서구 국가들의 전망은 어긋나게 될 터였다. 그 방패는 동쪽에서 떠올랐다. 2013년에 중국에 시진핑 정부와 5기 지도부가 들어섰다. 시진핑은 서구와의 무역, 투자를 통해서 경제를 성장시키고, 이를 위해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기존의 정책 방향을 조정할 것을 천명했다. 새 지도부는 이제 중국은 연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수출 경제만큼이나 내륙 개발에도 몰두할 것이며, 그를 위해서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등 인접 지역을 중국과 연계된 거대한 경제권으로 엮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유라시아와 인도양에서 독자적인 권역을 구축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며, 설령 그것을 미국과 서방이 용인하지 않더라도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를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를 포괄하는 ‘일대일로’라고 정의했으며, 시진핑 정부의 가장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가 되었다.
러시아는 중국을 전통적으로 깔보았고, 이후에는 경계했던 오랜 역사가 있었다. 프리마코프가 ‘모스크바-베이징-뉴델리 삼각형’을 이야기했을 때도, 당초에 이것이 실현 가능한 개념이기는커녕 진지하지 않은 공상 취급을 받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제조업을 빠르게 성장시키고 있던 중국은 당시 서구와 일본 등지에서 유입되는 자본 투자와 그들의 소비 시장의 혜택을 받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도광양회 기조 하에서 전략적 경쟁을 불필요하게 감당하는 것은 어리석은 이야기였다. 1996년에 중국은 심지어 국가의 핵심 이익이라고 하는 대만 문제에서 한 발 물러서기까지 했었다. 반면 러시아는 소련 시절에 비하면 경제 규모는 한참 추락한 상태였으니, 협력을 통해 이익을 얻을 것도 없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중국과의 협력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소련 해체 이후 인구가 급속하게 유출된 극동 지역에 중국인들이 진출하여 극동을 황화(黃化)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특히 연해주가 원래 중국의 땅이었음을 생각하면 중국이 인적 구성을 재편하고 영토를 요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2000년대에 러시아가 가스와 기계를 매개로 유럽과 경제적으로 새롭게 통합되는 과정에서 극동은 사실상 의도적으로 방치되었었다. 많은 러시아 엘리트들은 베이징과 상하이보다는 프랑크푸르트나 파리가 훨씬 익숙한 공간이었다.
2014년이 되었을 때 이렇게 엇갈리던 양국의 이해 관계는 갑작스럽게 새로운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다. 일단 중국이 일본을 추월하고 제2의 경제 대국이 되면서, 자체적인 경제적 중력을 형성했다. 중국은 이제 서구의 자본과 소비 시장에 단순히 의존하는 국가가 아니라, 자체적으로 자본을 수출하고 자원을 필요로 하는 국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중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많이 갖고 있었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에서 중국으로 오는 파이프라인을 연결할 수 있다면, 해상에서 비싸게 에너지를 수입하는 것보다 훨씬 싸게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이는 시진핑 정부가 개발하고자 노력하는 내륙 지역에 더 높은 연결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한편 푸틴이 전략적으로 육성한 농업은 이제 세계 식량 시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오고 있었고, 러시아는 중국 중산층의 늘어만 가는 식량 수요에 대응한 안정적 공급처가 될 수 있었다.
거기에 중국도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해줄 수 있었다. 중국은 일대일로 정책을 통해 미국 패권 하에서 보장되는 단일 시장이 아니라 자신들이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지역 시장을 확보할 것을 사실상 선언했다. 중국의 도전은 미국을 불쾌하게 만들면서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부터 인도태평양 구상과 트럼프의 무역 전쟁에 이르는 미국의 연쇄적 대응을 촉발했다. 서방에 대항하는 지정학적 세력으로서 중국이 등장하면서, 중국은 러시아의 반서방 정책에 적극 동조하지는 않더라도, 러시아를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면서 서방의 포위망을 뚫는 파트너로 활용할 수 있었다. 중국의 합류로 러시아는 이제 러시아가 과거 소련 시대처럼 세계로부터 고립된 국가가 결코 아니고, 반대로 세계를 주무르려는 한 줌의 서방 국가들에 맞서는 나머지 세계의 투쟁에서 선두에 선 국가라고 선전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점차 기술적 수준을 높여오면서 독자적인 제조업 기반을 건설하고 있는 중국은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각종 제조업 상품들을 제공할 수 있는 대체 공급자로 성장할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설령 서방이 러시아의 산업 운영에 필요한 핵심적 기술과 상품을 끊는다 하더라도, 중국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면 러시아는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었다. 크림과 돈바스 사태를 계기로 2014년에는 지지부진하던 러시아와 중국의 가스 가격 협정이 타결되었고, ‘시베리아의 힘’이라 불리는 파이프라인이 2019년에 완공되어 작동에 들어갔다. 시베리아의 힘 완공은 단순한 파이프라인 완공을 넘어서 서방의 경제 제재에 맞서는 푸틴의 유라시아 요새 경제 건설이 완공되는 가장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2014년 이후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한 유라시아 통합은 단순히 양국 사이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중국과 러시아와 맞닿고 있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유럽 국가들까지, 사실상 간접적으로 유라시아 대륙 전체가 이에 조응했다. 2016년에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고 미국에는 고립주의 여론이 부상했고, 세계 경제가 여전히 대침체의 후유증 속에서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는 차에 유라시아는 세계화를 꾸준히 추진하고 안정적 경제 성장을 이끌고 있는 유일한 기관차였다. 그 기관차에 탑승하는 것은 경제를 발전시켜야만 했던 대다수 국가 지도자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선택지로 보였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안보적으로 러시아에 밀착하고, 중국으로 가는 자원 수출량을 늘렸으며, 중국은 신장의 호르고스와 카슈가르라는 내륙 아시아로 향하는 전진 기지를 건설했다. 연해 지역의 기업들이 중국 공산당의 전폭적 지지를 통해 신장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무역에 진출했고, 일대일로 사업은 온갖 잡음과 논란을 돌파하며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각종 인프라를 건설해냈다. 중국산 소비재들이 중앙아시아의 시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서구 소비시장에 비하면 수익성은 극히 미약했지만, 중국은 명제국과 청제국 시대부터 연해 지역의 자본 중심지로 하여금 내륙의 빈약한 물류망에 투자하도록 장려하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나라였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치 권력의 힘과 안보 논리였다. 2016년 이후에는 이란도 이 흐름에 합세하게 되었다. 동과 서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던 이란의 무게추는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으로 핵협상을 통한 서방으로의 복귀가 좌절되고 자국의 대서방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동쪽으로 급격하게 쏠리게 되었다. 자본 투자와 상품 공급을 필요로 하고 대신 수출할 수 있는 막대한 에너지를 지녔으며, 서방으로부터 독립된 자체적 공간과 네트워크를 가진 이란의 합류는 중국과 러시아에 장차적으로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서방 세계, 특히 유럽 연합과 나토를 두 축으로 하는 유라시아 서부도 중국-러시아의 유라시아 네트워크에 끌리고 있었다. 꾸준한 경제 성장을 이어가는 중국은 유럽으로서는 도저히 걷어찰 수 없는 시장이었고, 유럽산 기계나 장비에 대한 막대한 수요를 지닌 러시아의 존재도 거부할 수 없었다. 유라시아로의 합류는 유로존 위기를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하기 위한 독일의 노력이기도 했다. 유로존 위기 당시 독일은 자국의 자본을 통해서 남유럽 국가들을 구제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옵션을 선택하기를 거부했다. 양차세계대전에서 모두 패전한 1945년 이래로 독일에서는 지정학적 위상보다는 국내의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방향이 깨질 수 없는 합의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이 유로화를 통해서 나머지 유럽을 독일을 위한 수출 시장으로 만들고 있다는 비난을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독일 정부가 돈을 쓰지도 않고, 유로존을 그대로 두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독일 경제를 더욱 크게 성장시켜 유럽 전역으로 부를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유일한 선택지는 유라시아 경제권으로의 참여였다. 이제 거대한 소비 시장으로 부상하고 자체적인 산업 고도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중국은 자동차를 비롯한 각종 독일제 상품은 물론이고, 정밀 기계와 화학 등을 빨아들이는 최대의 무역 파트너가 되었다. 러시아산 천연가스는 원전과 석탄 발전을 모두 포기하고, 친환경 에너지 시대를 주도하겠다는 독일의 에너지 계획에 없어서는 안 될 원천이 되었다. 게다가 러시아는 크림 사태로 인한 경제 제재 이후 자국 제조업 부흥과 인프라 개선에 박차를 가하면서 역시 독일제나 프랑스제 자본재에 대한 수요를 늘리고 있었다. 이런 흐름이 계속된다면 곧 낙후된 중앙아시아까지 경제 성장의 물결이 도달할 것이었고, 그렇다면 중앙아시아도 마찬가지로 독일로 에너지를 공급하고 독일 상품을 사가는 지역이 될 터였다. 중국에서 출발하여 독일의 내륙항 뒤스부르크로 향하는 육상 물류는 아직은 빈약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그 잠재력은 충분히 기대할 가치가 있는 것이기도 했다. 독일의 배후지인 동유럽의 값싼 노동력, 계속 성장하는 중국 시장, 꾸준한 상품 고객이자 핵심 에너지 공급자인 러시아가 합쳐지면서 독일에는 경제적 차원의 유라시아 구상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늘어갔다.
독일의 행보는 유라시아로의 적극적 선회라기보다는 경제적 이익에 따라 행동한 소극적 참여에 가까웠다. 여전히 독일은 ‘규칙 기반 세계 질서’라는 자유주의의 이상에 강하게 동조하는 국가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미국 주도 하의 대중국 압박 정책에 동조하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유럽에서 독일 같은 소극적 참여 수준을 넘어서는, 유라시아로 적극적으로 합류하겠다고 선언한 국가들이 생겨났다는 데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 러시아와 비슷한 경로를 걸은 터키의 이탈은 가장 치명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나토 회원국이자 서방의 전통적 안보 협력국인 터키는 2013년을 기점으로 점점 서방 세계와 거리를 두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에르도안 정부는 강력한 시장주의 개혁을 통해서 터키 경제를 급속도로 발전시켰고, 각종 정치적 자유화 조치를 추진하면서 유럽 연합 가입이라는 터키의 오랜 숙원을 달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터키의 가입은 유럽 연합이 받아들일 수 있는 안이 아니었다. 인구 비례로 의석이 할당되는 유럽 의회에서 독일 인구에 버금가는, 계속 성장 중인 인구 대국인 터키의 유입은 기존 유럽 연합의 지도국들 입장에서 달가운 일이 될 수 없었다. 무슬림 인구가 유럽 연합으로 대대적으로 유입될 것도 9.11 테러 이후 유럽 시민들의 우려를 자극했다. 동유럽 국가들은 서유럽의 지원금을 둘러싼 경쟁자가 출현할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터키 입장에서는 터키보다 모든 지표가 부족한 불가리아와 루마니아가 유럽 연합에 가입했는데 터키가 가입할 수 없는 것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 연합은 스스로를 계몽주의의 이상을 추구하는 인류의 보편 프로젝트라고 선전하고 있었지만, 터키에서 그 선전은 결국 서구 기독교 세계만을 유럽으로 정의하는 위선의 가면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랍 봉기는 무슬림 국가의 새로운 모델로서 터키의 위상을 크게 늘렸고, 터키는 쿠르드인의 테러를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시리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지정학적 플레이어로서 새로운 위상을 획득했다. 반면에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유로존 위기로 허우적대는 유럽의 모습은 터키의 유럽 선망을 지우는 계기가 되었다. 터키의 미래는 이제 동쪽에 있었고, 동쪽에서 미래를 찾을 때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모델은 굳이 추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었다. 2013년에 이스탄불 게지 공원에서 발생한 시위를 철저하게 진압한 에르도안 정부는 그 자신이 안정화시켰던 터키의 민주주의를 뒤집고 권위주의로 방향을 선회했다.
에르도안의 터키는 2015년과 2016년을 거치면서 러시아와 밀월 관계를 구축하고 반서방 전선에 새롭게 합류했다. 2015년에 터키군이 러시아 공군 소속 전투기를 격추하여 양국 관계가 경색된 것을 생각했을 때 이는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시리아 내전에서 터키는 아사드에 대항하는 이슬람주의 반군 세력을 지원하고, 러시아와 이란은 아사드 정부를 지원하면서 시리아를 둘러싼 양국의 긴장 관계가 형성되어 있던 터였다. 하지만 이슬람주의 반군이 IS로 진화하고, 서방 세계의 지원을 받는 쿠르드 세력이 자치를 획득하면서, 터키는 시리아에서 차츰 출구 전략을 마련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2016년에 발발한 쿠데타 기도는 터키가 외교 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군 내부에서 에르도안의 장기 집권에 반감을 느끼는 이들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에르도안은 이 쿠데타가 종교 사상가이자 교육 운동가인 페툴라 귈렌의 추종자들의 소행이라고 비난했다. 에르도안은 서구화를 추진하던 집권 초기에는 귈렌이 주도하는 자유주의적 이슬람에 큰 호의를 보이며 그를 정치적 동맹으로 삼았으나, 에르도안 집권이 장기화되면서 둘의 관계는 금세 적대적으로 변했다. 귈렌은 터키에서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미국의 귈렌 수용은 에르도안이 미국에 대한 원한을 품게 만들었다. 한편 에르도안은 이미 권위주의를 향해 가고 있는 마당에 귈렌식의 자유주의적 이슬람을 굳이 들고 있어야 할 필요가 사라졌다.
이제 문제는 조금 앞서서 푸틴의 러시아가 고민했던 것처럼, 어떤 이념을 국가의 통치 정당성의 근원으로 삼는지가 되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추구했던 서구 지향 세속주의는 더는 소생할 가망이 없었다. 자유주의와 이슬람을 조화시키려 했던 집권 초의 귈렌 사상은 이제 체계적으로 지워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그렇다고 초국적 이슬람주의를 채택하는 것은 위험성도 컸고 민족주의 성향과 자부심이 강한 터키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편 푸틴이 친서방 자유주의 성향의 중산층에서 애국주의적 대중으로 지지 기반을 교체한 것처럼, 에르도안의 지지층에서도 마찬가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군부의 잦은 쿠데타와 이슬람 성향 보수주의자들을 모두 거부했던 서부 도시의 청년층들은, 민주주의, 세속적 생활과 양립하는 이슬람의 가치를 이야기했던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의 큰 지지 집단 중 하나였다. 하지만 2013년 게지 공원 시위는 이들이 에르도안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대신에 에르도안을 세계에서 터키의 높아진 위상에 걸맞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애국주의자들이 정의개발당의 새로운 핵심 지지층이 되었으며, 에르도안보다 더 국수주의 성향을 보여주는 민족주의행동당(MHP)과 정의개발당의 관계도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따라서 터키는 새로운 지지층의 열망과 에르도안의 권력을 모두 만족시켜줄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을 필요로하게 되었다. 터키 인근의 발칸과 중동에도 지정학적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어야 하고, 전통의 이름으로 자유주의가 제공하지 못하는 문화적 자긍심과 의미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하며, 권위주의 통치에 도움이 되고, 민족적 자부심을 충족할 수 있어야 했다. ‘신오스만주의’는 이를 위한 새로운 이념이었다.
1980년대에 터키 군부는 일찍이 좌파 사회주의자들의 도전을 막고자 이슬람주의와 제휴를 맺은 적이 있었다. 군부는 ‘튀르크-이슬람 종합’이라는 새로운 역사관을 발표했는데, 터키 민족은 고대부터 이슬람의 가치를 수행해왔고, 이슬람을 받아들인 뒤에는 이슬람을 수호해온 영웅적 민족이라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튀르크-이슬람 종합’은 에르도안 정부에서 오랜 기간 숙적이었던 케말주의자 군부 세력과 정의개발당의 이슬람주의 세력이 화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했다. 2016년 쿠데타는 귈렌주의자들의 음모라고 비난하면서, 군부와 정의개발당, 에르도안은 생각지도 못한 화해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귈렌을 싸고도는 미국과, 쿠데타 대응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서방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특히 시리아의 쿠르드를 자꾸 지원하는 데 분노를 느꼈다. 자유주의적 가치와 인권 등의 문제로 터키에 간섭하는 것도 이제는 따라줄 이유가 없으며, 튀르크-이슬람 종합에서 제시된 가치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했다. 그러면서 따라온 새로운 정치적 상상은 바로 ‘새로운 오스만 제국’이 되었다. ‘신오스만주의’는 발칸, 시리아, 이집트, 캅카스 등 오스만 제국이 과거 지배했던 지역에 터키가 마땅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정학적 구상이었다. 이는 튀르크 종족주의에 바탕을 둔 아타튀르크 시대의 투란주의와는 구분되는 것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문화적 동질감을 느끼기 힘든 ‘튀르크 공동체’보다도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감나고, 실제 사람들의 기억에 맞닿아 있는 실체였다. 터키에서는 유럽 연합의 말석에 끼느니 차라리 과거 오스만 제국의 강역에서 맹주가 되는 게 낫다는 여론이 크게 확산되었다.
터키의 이런 전환 과정에서 알렉산드르 두긴은 매우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당초 친서구 지향에 러시아의 전통적 영역이라 간주되는 중앙아시아의 신생 튀르크 공화국들을 ‘침범’하는 터키를 두긴은 그다지 좋게 보지 않고 있었다. 두긴은 터키가 자신의 올바른 문화적 정체성을 자각하고, 유럽 연합과 나토로부터 탈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터키 일각의 반서구주의자들과 많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터키 내 유라시아주의 그룹들을 에르도안 정부는 경계하고 감시하였으나, 에르도안 자신이 신오스만주의를 내걸고 유라시아로의 합류를 이야기하자 상황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두긴은 2016년 쿠데타 당시 터키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는 앞장서서 쿠데타를 귈렌주의자들의 책동이라고 비난했고, 터키의 유라시아주의 동료들과 함께 타국의 정치를 쥐락펴락하려는 서구에 맞서서 터키가 각성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두긴의 사상은 에르도안을 둘러싼 정치인과 지식인 집단의 주목을 받았고, 터키에서는 ‘유라시아’라는 개념을 활발히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순식간에 형성되었다. 게다가, 러시아군과 이란군이 터키군 내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쿠데타 기도가 있음을 에르도안에 사전에 전달했던 일은 2015년 전투기 격추 사건으로 경색된 양국 관계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터키는 서구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만큼 러시아와 이란과의 관계 개선과 협력이 좋은 일이 되리라 인식하게 되었다. 물론 터키는 여전히 나토 회원국이고, 유럽 연합 가입 신청을 철회하지 않고 있으며, 러시아와 이란, 중국에 모두 껄끄러운 문제들을 갖고 있다. 하지만 보스포러스라는 지정학적 요충지를 장악하고 있는, 중동으로 향하는 서방의 창이었던 터키가 유라시아에 상당 부분, 그것도 세계관 차원에서 기울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타격이었다.
이탈자는 유럽 연합 내부에서도 나왔다.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는 원래 1980년대 동유럽 혁명 당시에 소련의 후견을 받는 공산당 정권에 저항하는 청년 지도자였으나, 그는 2010년에 2기 집권을 시작하면서 푸틴과 에르도안의 길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오르반 역시 경제보다도 문화, 정체성, 공동체, 인구와 같은 의제를 내걸면서 헝가리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가 내세운 의제 중 가장 핵심적이었던 것은 인구 문제였다. 여성 교육과 취업 권장, 낙태 허용 등 다양한 여성 의제를 내걸었던 공산주의 시대에 동유럽 국가들은 모두 빠르게 저출생 단계에 진입했고, 이런 경향은 공산당 정권이 붕괴해도 역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무너진 철의 장막을 넘어 더 많은 소득과 기회를 잡고자 청년층이 서유럽으로 대거 이주했다. 때로 이런 이주의 물결은 중동부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던, 코스모폴리탄적인 독일어권 도시들의 연계를 회복하는 일로 받아들여졌다(물론 그 독일어 사용자들은 1945년 이래로 동유럽에서 모조리 사라졌지만). 하지만 언제든지 프랑크푸르트나 런던으로 떠날 수 있는, 고등 교육을 받은 부다페스트의 청년층과 소멸되어 가는 소도시, 노인만 남은 농촌을 지켜보는 부다페스트 바깥의 중장년층의 생각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후자의 이들은 철의 장막의 붕괴와 유럽 연합으로의 합류가 종국적으로는 헝가리 민족 문화, 헝가리어, 나아가 헝가리인 자체를 사멸하게 만드는 결말로 치닫지 않을까 우려했다.
부다페스트와 그 배후지의 지리적 분리와 문화적 이질성은 사실 수세기 이전부터 내려오는 동유럽의 강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는 물론이고 체코의 프라하나 폴란드의 바르샤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까지, 오늘날 세계 각지의 관광지를 끌어모으는 중심 도시는 언제나 범유럽적인 공간이었다. 독일인들과 유대인들의 네트워크는 독일에서 러시아 사이에 있는 모든 지역의 도시들을 연결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네트워크를 따라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일을 그다지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유럽적인 지적 세계의 일원으로서 공동의 언어를 말할 수 있었고, 그들 사이의 교류로 탄생한 지적 작업들은 수많은 사조를 형성했다. 그러나 이는 뒤집어 말하자면 동유럽의 코스모폴리탄 지식인들이 배후지, 특히 농촌 지역과는 그다지 연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난 대문호 프란츠 카프카는 체코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글을 썼다. 도시와 농촌의 지리적 단층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며 동유럽에 수많은 민족 국가가 탄생했을 때 엄청난 정치적 혼란과 유혈 사태를 만든 바가 있었다. 제국 권력이 비호하던 중부 유럽의 코스모폴리턴 도시들은 새로운 대중 사회에 참여하게 된, 동유럽 제민족들의 분노를 샀으며 이들은 민족 문화와 맞지 않는 이질적 요소를 제거하여 민족 공간을 정화하고자 한 사상인 파시즘에 강하게 이끌렸다.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에 많은 동유럽인들이 자발적으로 가담하였는데, 이는 오랜 기간 누적되어 온 지방과 농촌의 불만이 코스모폴리탄 도시민의 상징인 유대인을 향해 잔인하게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이 갈등은 소련에 의해 세워진 공산 정권 하에서 간신히 봉합되었는데, 제2차세계대전의 결과 거대한 인구 이동이 발생하여 영토 내의 민족 구성이 아주 동질적으로 바뀌었고, 공산당 정권이 그동안 주류에서 배제되어 온 지역과 농촌 출신의 인재들을 발탁하여 체제의 운영자로 키워냈기 때문이었다. 철의 장막의 붕괴와 유럽 연합으로의 합류는 동유럽 전역에서 공산당 체제 하에서 봉합되었던 도시와 농촌의 단층선을 다시 갈라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20여 년 간 누적되어 온 부다페스트 바깥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고 나선 것은 오르반이 강력한 지지를 얻을 수 있던 비결이었다. 부다페스트 인근의 소도시에서 태어난 오르반 자신부터가 중부 유럽의 식자층 네트워크에 속한 부다페스트의 다른 정치인들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그는 부다페스트의 자유주의적 시민들의 여론을 유럽 연합의 본부가 위치한 브뤼셀에 놀아난 의견이나 다름없다면서 비난했다. 오르반은 서유럽에 대한 평범한 헝가리인들, 나아가 동유럽 사람들의 불만과 실망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철의 장막이 무너질 때, 동유럽 사람들은 이제 서유럽과 함께 할 수 있다고 기뻐했지만 그들이 상상한 서유럽의 모습은 철의 장막이 세워질 무렵에 멈춰있었다.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보장하면서도, 문화는 여전히 보수적이고 전통적 가치에 따르는 사회가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동유럽 공산 정권에서 가장 첨예한 싸움은 무신론을 강제하는 공산 정권과 그에 반발하여 가톨릭 교회로 결집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서유럽은 종교적 삶에 이의를 걸지 않기 때문에 ‘좋은 사회’였다. 그러나 실제 서유럽과 20년 가까이 교류하면서, 철의 장막을 무너뜨렸던 그 사람들은 실제 서유럽이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과는 굉장히 다르다는 사실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68혁명을 겪고 청년층이 주도한 사회, 문화적 변화를 수십 년에 걸쳐서 통과한 서유럽에는 동유럽 사람들이 기대했던 신실한 교인들은 없었다. 대신에 페미니즘, 성소수자 권리, 이민 장려와 다문화주의 같은 의제들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이러한 의제들은 서유럽 안에서도 갈등을 일으킬 것이었지만, 동유럽은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제의 서유럽과 상상의 서유럽은 이미 전혀 다른 사회가 되었다는 진실에 맞닥뜨렸다. 명백히 서유럽이 주도하는 브뤼셀의 언어는, 자유주의적 가치와 권리의 수사에 부합하게끔 개별 국가들에게 여러 개혁 조치를 도입하라고 권고하고, 때로는 그러한 사회적, 문화적 개혁을 경제적 지원과 연계하여 요구했다. 이제는 중장년층이 된 과거 동유럽 혁명의 주역들이 보기에 이는 전혀 바라지 않았던, 몹시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오르반은 브뤼셀의 자유주의자들이 과거 헝가리의 사회와 문화에까지 마음대로 간섭했던 모스크바의 공산주의자들과 무엇이 다르냐고 불만을 토해냈다. 2010년대를 거치면서 오르반의 서사는 또 하나의 대안적 세계관을 구축할 수준에 올랐다. 과거 공산당 기관원들이 모스크바의 앞잡이였다면, 부다페스트의 자유주의적 시민들과 지식인들은 브뤼셀, 런던, 파리, 베를린 등지의 앞잡이였다. 성소수자 권리를 보장하라는 브뤼셀의 요구는 헝가리인들이 전통적 가치에 따라서 가정을 꾸리면 안 된다고 위협하는 일이었다. 2015년에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대규모 이주민 흐름이 발생하고, 이주, 난민, 다문화주의가 전유럽의 의제로 부상하자 오르반은 이민 수용과 다문화주의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엘리트들이 민족의 고유성을 지워버리려는 가장 나쁜 책동이라고 비난했다. 요컨대 청년층은 모두 서유럽으로 떠나고, 페미니즘과 성소수자 권리를 확산시켜 바람직한 가정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그렇게 헝가리인의 숫자가 줄어들게 되면 무슬림 이민자들에 의하여 국가가 완전히 장악당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민족의 소멸’에 이익을 얻을 이들은 브뤼셀을 위시한 서유럽의 엘리트들과, 그들의 꼭두각시이자 공모자들인 부다페스트의 자유주의자들 밖에 없었다. 지금 브뤼셀과 앞잡이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과거 헝가리를 지배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이나 소련 제국과 다를 바 없었다. 따라서 보통의 평범한 헝가리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권력을 지닌 지도자가 민족의 이익에 맞게 목소리를 내야만 했다. 푸틴의 이데올로그들은 헝가리인들의 반감을 거대한 서사와 세계관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르반이 반자유주의 수사를 강화할수록 자유주의적 청년층과 부다페스트의 지식인들이 더욱 빠른 속도로 서유럽으로 이탈했기 때문에, 오르반은 오히려 더욱 지지층을 단단하게 굳힐 수 있었다. 의회 다수당의 지위를 활용하여 오르반은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반자유주의, 권위주의적 제도 개편을 단행했다. 개별적인 개편은 유럽 연합의 다른 국가들에 존재하는 제도를 참조하면서 이루었지만, 그 개편들을 종합적으로 모아놓고 보니 오르반이 막강한 독재자로 부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오르반은 적극적으로 푸틴의 새로운 세계 구상을 지지하고, 중국의 부상을 긍정하면서 서방 세계의 지도자들과 사실상 결별했다. 특히 2014년 유로마이단과 크림 사태 이후 러시아가 서방에 문화 전쟁을 개시하면서, 헝가리는 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게 된다. 헝가리는 ‘전통적 가치’나 ‘기독교적 가치’에 걸맞는, 유럽의 올바른 모습을 헝가리가 구현하고 있다고 선전했고, 서유럽과 동유럽을 잇는 러시아의 극우 지식인 네트워크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난민 문제에서 같이 부담을 지라는 유럽 연합의 요구를 거부하고, 대학의 젠더 연구를 금지했으며, 인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헝가리만의 대안이 필요하다며 파격적인 출산 지원 정책을 도입했다. 부다페스트에서 서유럽을 바라보는 교육 받은 청년층이 보기에 이는 충격적인 역사의 퇴보였다. 하지만 오르반을 지지하는 다수의 헝가리인이 보기에 이는 그저 정상적인 ‘역사의 귀환’이었다.
헝가리는 역사의 종언이 벌어진 무대인 동유럽에서 다시 역사가 회귀한 가장 극적인 사례였지만, 유일한 사례는 아니었다. 폴란드에서도 야로스와프 카친스키와 안제이 두다가 이끄는 법과 정의당이 헝가리와 거의 흡사한 구도로 정권을 장악하고, 전통적 가치로의 회귀를 내걸며 브뤼셀 및 자유주의자들과 대립했다. 폴란드는 러시아의 오랜 지배에 따른 구원(舊怨)으로 인하여 헝가리처럼 서방 세계로부터의 이탈을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세계관 차원에서 그들이 서유럽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명확해졌다. 알렉산드르 두긴을 비롯한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자들은 폴란드가 러시아와 적대하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더라도, 유럽 연합이 내세우는 자유주의의 이상에 균열을 낼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며 미소를 지었다. 30년 전에 서유럽이 동유럽을 끌어안을 때만 해도, 유럽 프로젝트의 완결이라며 모두가 환희의 순간을 즐겼지만,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르게 형성된 그들의 역사와 정체성의 차이는 준비 없이 끌어안는다고 바로 없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관 전쟁에서 ‘대서양주의’를 향한 ‘유라시아주의’의 공세는 동유럽에서만 그칠 것이 아니었다. 서유럽은 동유럽을 서유럽처럼 만드는 데 실패했다. 모스크바의 목표는 반대로 서유럽을 동유럽처럼, 나아가 러시아처럼 만드는 이념적 공세에 나서는 것이 되었다. 모스크바 입장에서 이는 서방 국가들이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전세계의 보편 이념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각종 국제 기구와 NGO를 지원하는 일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크렘린은 러시아의 극우 이념과 유라시아주의자들에 동조하는 이들을 세계 각지에서 찾아내고, 그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다른 나라 국민들의 세계관을 바꾸고, 종국적으로 러시아에 우호적 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다. 러시아 사상의 전파자들은 러시아의 인접 국가들에서 서방이 색깔 혁명을 지원하고 독려했다면 러시아가 반대로 서방 국가들을 상대로 같은 활동을 벌이는 게 무슨 문제냐고 조롱했다. 크림 위기를 기점으로, 이즈보르스크 클럽의 참가자들은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나아가 서방 세계의 지도국인 미국을 향한 세계관 전쟁을 개시했다.
러시아는 서유럽과 북미에서 점점 세력을 키우고 있는 포퓰리스트들, 특히 우익 포퓰리스트들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다. 서방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파시즘 전통과 파시스트 사상가들에 러시아의 신유라시아주의는 새로운 지적 자극이 되어주었다. 물론 이념적으로 신유라시아주의나 ‘푸티니즘’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자유주의를 대체할 핵심적인 서사와 세계관만 장착한 채 자유주의 질서를 공격만 할 수 있으면 되는 문제였다. 서구 세계에서 포퓰리스트들은 세계화로 인해 발생한 경제적 불평등과, 세계 도시의 코스모폴리탄 엘리트들과 그 배후지 사람들 간에 커져가는 문화적 이질성을 양분으로 삼아 발흥할 수 있었다. 포퓰리스트들은 LA, 뉴욕, 런던, 파리의 엘리트들이 ‘민중의 이익’이 아닌 한줌 글로벌 엘리트들의 이익을 위해 대다수의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난했다. 세계화 경제는 탈산업화를 유발하여 다수의 중산층을 희생시켰고, 글로벌 엘리트들이 이익을 독식했다. 이민과 다문화주의 역시 글로벌 엘리트들의 배를 불리워주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자리를 위협했으며, 기독교에 근거하는 문화적 정체성을 뿌리 뽑으려는 일이었다. 성평등, 성소수자 권리를 추구하는 세계 도시의 지식인들과 자유주의 문화를 선호하는 청년층들은 적극적으로 사회를 파괴하는 적들이었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세계 도시의 글로벌 엘리트에 의하여 목소리가 소거되었던, 드넓은 영토의 평범한 다수가 깨어나야 했다. 이처럼 ‘대초기화’와 ‘대각성’으로 압축되는 두긴 사상의 흔적을 서구 포퓰리스트들의 언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때로는 이는 러시아와 연계된 극우 네트워크를 통한 직접적 영향이기도 했고, 때로는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수렴진화의 산물이기도 했다. 트럼프의 이데올로그로 주목받았던 스티브 배넌은 실제로 두긴의 지대한 영향을 받아 ‘미국판 신유라시아주의’를 만들어냈다. 그는 트럼프 당선 이후 영향력을 빠르게 상실했지만, ‘한줌도 안 되는 대서양과 태평양 해안 지대의 글로벌리스트들과, 전통의 가치를 지키는 광대한 북미 대륙의 영웅적 시민들’로 대표되는 배넌의 대립 구도는 신유라시아주의의 공간관과 거의 완벽하게 통한다고 할 수 있었다.
러시아는 특히 서유럽의 포퓰리스트들에 집중했다. 신유라시아주의 지정학에 따르면 이는 유럽을 발아래에 두는 대서양주의자들을 물리치고, 유럽을 다시금 유라시아 세계에 합류시키는 성전(聖戰)이었다. 조금 실용적인 차원에서는, 유럽회의주의가 강한 포퓰리스트들의 힘이 강해질수록 유럽 연합이 약화될 것을 기대한 전략이었다. 러시아로서는 개별 국가로 쪼개진 유럽 각국을 다루는 게, 집단으로 움직이는 유럽 연합을 다루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러시아의 정치적 분열 공세는 2014년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투표를 지원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프랑스의 마린 르펜이나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당’도 마찬가지 지원을 받았다. 물론 러시아의 지원을 받긴 했어도 이들 포퓰리스트들이 정치적으로 약진할 수 있던 이유는 이미 서유럽 사회에도 자유주의 엘리트들에 대한 불만이 꾸준히 쌓인 데 있었다.
2016년은 러시아의 세계관 전쟁이 중대한 승리를 이룬 상징적인 해였다. 이 해 대서양 세계를 대표하는 두 국가인 영국과 미국에서 정치적 격변이 발생했다. 영국에서는 유럽 연합을 탈퇴하는 브렉시트 투표가 있었고, 모두의 예상을 깨고 탈퇴파가 승리하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리라고 역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포퓰리스트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고, 트럼프는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의 주류 모두와 싸우기 시작했다. 이 정치적 격변의 배후에 러시아가 있다는 이야기가 곧이어 공공연히 논의되었다. 러시아는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SNS에 가짜뉴스와 정치적 선전을 살포하는 봇(bot)을 뿌렸고, 양국 유권자들은 러시아가 제시한 새로운 세계관에 차츰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세계관 전쟁을 어떻게 치러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진행한 바 있었다. 러시아는 ‘사실에 기반한 객관적 분석과 자유로운 토론을 통한 여론의 수렴’이라는 계몽주의 인식론의 기반을 허무는 게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각종 가짜뉴스를 뿌리고, 객관적 사실 대신에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대안적 진실’을 보여주면, 넘쳐나는 정보의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스마트폰과 SNS의 시대에서 자유로운 정보의 유통은 객관적 평가와 합리적 분석에 기반한 행동을 도출하기는커녕, 서로 다른 진실을 믿는 집단들의 영원한 부족 투쟁을 만들어버렸다. 그것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시대의 방편이었다. 따라서 서구 유권자들은 굳이 두긴의 신유라시아주의 같은 추상적인 이론을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서구 세계가 세계 도시의 글로벌 엘리트와 ‘진짜 애국자’인 ‘평범한 사람들’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 투쟁은 문화를 둘러싸고 이루어진다는 세계관을 수용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적과 동지의 구별이고, 세계 도시의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조국을 배신한 적일 뿐이다. 동지는 자신과 생각을 같이 하는 ‘애국자들’과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들이었다. 러시아의 사이버 전사들과 알고리즘들은 그런 정보를 사이버 세계에 무수히 살포했다.
푸틴이 거둔 쾌거는 2016년을 정점으로 다소 기세가 꺾인 듯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에서 벌어진 혼란은 대륙 유럽에서 유럽회의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트럼프는 미국의 견고한 주류 시스템(이스태블리시먼트)을 뚫지 못했고, 당초의 급진적 구호는 대부분 실현되지 못했으며, 끝내 재선에 실패했다.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가 행하는 정보-심리 작전과 상대국에 대한 세계관 및 프로파간다 전쟁을 연구하고 어떻게 하면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를 꾸준히 연구했다. 그러나 추가적인 ‘전과 확대’가 이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브렉시트와 트럼프는 서방 세계에 지워지지 않을 커다란 상흔을 남기는 일이었다. 세계 도시와 그 배후지의 문화, 정체성을 둘러싼 전쟁은 더욱 격렬해졌고, 합의를 이루는 일은 점차 어려워지고 있었다. 코로나19 창궐과 그에 따른 국가의 방역 정책, 사회적 갈등과 경제적 불안정의 확대, 인터넷 미디어에 더욱 몰입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분노와 불신의 확산이 모두 작용하여 서방 세계의 단합을 저해하고 행동력을 감퇴시켰다. 트럼프는 고립주의 수사를 구사하고 동맹과 싸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들 트럼프의 좌충우돌 외교에 질색했지만, 트럼프의 행동은 분명 유권자들, 특히 트럼프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유진영의 수호자이자 세계 경찰로서 미국의 역할에 긍정하던 유권자들도 이제는 ‘할 말은 해야만 하고’, ‘세계 질서를 지킨다고 미국의 이익을 저버리지 않는’ 지도자를 원하게 되었다. 세계 질서 유지를 위한 외부 개입에 대해 생각하는 기준점이 고립주의 방향으로 성큼 이동한 것이다.
2021년 여름에 일어난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함락은 크렘린이 행한 신유라시아주의 지정학과 세계관 전쟁이 거둔 또 다른 승리였다. 물론 러시아가 카불 함락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들은 자유주의 이념과 역사의 종언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로서, 탈냉전의 낙관론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에도 미국과 투쟁하고 있었다. 미국이 끝내 이들을 굴복시키지 못한 것은 자유주의자들로서는 뼈아픈 타격과 굴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카불 함락 이후 서구권 인터넷에서는 아프가니스탄에 남겨진 여성들의 인권을 걱정하는 글만큼이나 미국의 자유주의 정책이 아프가니스탄에 어떠한 긍정적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다며 자유주의자를 조롱하는 게시글이 쏟아졌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는 미국이 점점 유라시아에서 일어나는 각종 분쟁에 대응하는 데 지쳐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물론 고립주의는 독립부터 이어져 오는 뿌리 깊은 미국인들의 심성이었다. 하지만 양차대전과 냉전을 거치며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세계 질서를 수호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 국가라는 뿌리 깊은 의식도 갖게 되었다. 트럼프의 당선으로 무게추가 후자에 기울었는데, 이는 명백히 푸틴이 의도하고 지원한 것이었다. 푸틴 때문에만 가능한 일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여전히 세계 질서를 수호해야 한다고 믿으며 자유주의 이념에 대한 확신을 숨기지 않는 민주당의 바이든 행정부조차도 아프가니스탄을 포기했다는 것은 유라시아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미국이 철수할 수 있다는 우려, 혹은 기대를 심어줬다. 카불 함락에서 제일의 수혜자는 중국이었다. 중국은 자국의 핵심 파트너가 된 파키스탄을 통해서 탈레반 정부와 협상할 수 있었고, 자신이 구상하는 중앙아시아 물류망에 장기적으로 지리적 교차로인 아프가니스탄을 참여시킬 수 있게 되었다. 군사적으로는 러시아, 이란, 중국이 모두 큰 이익을 보았는데, 깊숙한 유라시아의 심장 지대에 위치한 삼국의 도시와 군사 기지들을 타격할 수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미군 기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사건은 미국이 새롭게 우방국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인도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가니 정부를 지원하면서 파키스탄과 중국의 남방 진출을 견제하고자 했던 인도는 자신들의 노력이 미군 철수와 함께 허망하게 물거품이 되는 것을 지켜보아만 했고, 미국과의 파트너십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푸틴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경 지대에 군대를 배치하면서 세계관 전쟁을 ‘진짜 전쟁’으로 확대시킬 준비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