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完)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完)

새로운 역사는 '제국'의 역습과 세계관 전쟁이다.

임명묵

작금의 세계를 두고 냉전이 돌아왔다고, ‘신냉전의 시대’가 열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많다. 어쩌면 이런 시대 분위기 때문인지, 과거의 미소 냉전도 이전과 비해 더 많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냉전이 이미 끝난 역사적 사건이 되기도 했고, 냉전기 자체도 수십 년이나 지났기에 현대사의 연구 대상에 편입될 만큼 시간적 거리가 쌓이기도 했고, 오늘날의 ‘신냉전’에 주는 함의를 찾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지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냉전기에도, 탈냉전기에도, 그리고 냉전을 역사적으로 보기 시작한 지금에도 빠지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다. 바로 “냉전을 누가 시작했는가?”라는 주제다.

원래 냉전의 기원을 설명하는 서사는 건조한 설명보다는 원색적인 비난을 담은 책임론이 되는 경우가 잦았다. 냉전 직전까지만 해도 미국, 영국과 소련은 독일, 일본의 추축국에 맞서는 ‘대동맹’을 형성하면서 협력했었다.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은 포츠담과 얄타에서 모여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신세계 질서를 논했다. 그중에서도 스탈린과 루스벨트는 제국주의 식민지와 블록으로 나뉘어진 세계가 아니라, 모든 민족이 독립 국가를 이루고 국제연합의 틀 속에서 협력하는 이상이 이루어지는 세계를 만들자고 합의했다. 하지만 그 희망은 2년, 3년 만에 순식간에 무너지고 세계가 두 개로 쪼개졌다. 양대 초강대국의 경쟁과 대리전은 진영 안쪽에서 수많은 사람의 삶을 억압했고, 파괴했다. 무엇보다 냉전이 이전 강대국 경쟁과 구분되는 점은 인류가 자신을 멸망시킬 수 있는 핵미사일의 공포와 함께 살아가야 했다는 데 있었다. 대동맹의 희망을 냉전의 칼바람으로 바꾼 이가 과연 누구인지를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었고, 양쪽 초강대국은 서로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냉전의 승자이기도 했던 미국의 전통적 설명은 간명했다. 소련이 동유럽에서 벌인 행동들은 과거 러시아 제국의 영향권을 회복하고, 더욱 바깥으로 팽창하기 위한 야욕을 드러내는 증거였다. 여기에 이제는 스탈린주의라는 전체주의적 억압 기제까지 더해졌다. 특히 폴란드에서 스탈린이 벌인 일들은, 나치의 폴란드 침공이 제2차세계대전의 도화선이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간주되었다. 거기에 동유럽을 장악한 스탈린이 터키와 이란까지 위협하면서, 유라시아 전역의 공산주의 혁명을 선동하고 있었다. 미국의 전통적 시각에서 스탈린은 소비에트 제국을 최대로 팽창시키기 위해서 미국과 마지못해 협력한 ‘가면을 쓴’ 지도자였고,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제대로 속아 넘어간 인물이었다.

소련의 설명, 혹은 소련에 조금 더 온정적이었던 서방 진영의 수정주의적 설명은 완전히 반대의 접근을 시도했다. 그들은 우선 제2차세계대전의 주무대가 소련과 동유럽이었음을 이해하지 않으면 소련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독일과의 절멸 전쟁으로 국토가 완전히 파괴된 소련은 필연적으로 서쪽에서 다가오는 안보 위협에 대한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동유럽은 향후 다가올 위협에 대한 완충 지대로서 반드시 장악하고 넘어가야 하는 지역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한 독일 문제에서도, 스탈린의 목적은 독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내어 소련의 전후 복구에 활용하고 독일의 비무장화를 통해서 전쟁의 화근을 없애는 것이었지 독일의 공산화가 아니었다. 수정주의적 설명은 소련의 ‘사활적’ 이해가 걸린 동유럽을 제외하고 스탈린은 전후 질서 설계에서 서방 진영에 대체로 협력적으로 나왔는데, 세계를 단일 시장으로 통합하고 거느려야 했던 미국 자본주의의 이해관계와 미국인들 나름의 이데올로기와 신념이 스탈린이 다시 문을 걸어 잠그게 사실상 내몰았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는 정반대로 들리지만 상통하는 전제도 있다. 바로 미소 양국 중 하나에 책임을 물으면서 냉전이 사실상 필연적이었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전통주의에서는 러시아 역사에서 내려오는 소련의 공세적 속성과 자유로운 신세계 질서를 위한 미국의 선의(善意)를 강조한다. 수정주의에서는 미국 자본주의의 이해관계와 파괴적 전쟁을 거치고 자국 방어에 민감할 수밖에 없던 소련의 수세적 태도를 대비시킨다. 누구의 책임이 되었든 간에, 미국이나 소련의 본질적인 속성이 한쪽을 몰아붙여 냉전이라는 인류의 비극이 탄생했다는 서사를 공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책임론과 결부된 두 학설이 합의를 이루기는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많아지고 냉전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냉전의 기원에 관한 ‘후기 수정주의’가 등장했다. 먼저 후기 수정주의는 미소 양국의 결별을 운명으로 보지 않는다. 두 초강대국은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폭풍을 함께 헤쳐 나가면서 많은 유대관계를 쌓았고, 여러 분야에서 실제적 협력을 하고 있었고, 전후 세계의 이상에 관해서도 서로 상당히 많은 점을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모두 각자 나름의 공세적인 면과 수세적인 면을 갖고 있었다. 냉전이 한 쪽의 일방적 공세와 동맹 파기로 인해 벌어진 일일 수가 없다는 뜻이다.

후기 수정주의자들은 냉전의 기원에서 악의나 팽창욕보다는 상호 간의 서로 다른 세계관과 오해를 강조한다. 소련 공산주의가 자유를 위협을 위협할 것이라 보았던 미국, 제국주의적 속성이 있는 서방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포위할 것이라 보았던 소련은 각자 자신들이 수세적 입장에 있다고 인식했다. 수세에만 있을 수 없다는 판단으로 취한 행동은 상대방에 더 큰 공세로 인식되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상대방을 딱히 의식한 정책이 아닌 것이 상대편에 받아들여질 때는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소 양국의 협력을 계속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결국 과거 대동맹의 협력은 미국과 소련의 세계관 차이에서 비롯된 오해의 연속을 덮지 못했다. 미국은 식민 제국과 블록화를 끝내고 자유무역으로 세계를 통합하고자 했고, 소련은 그런 시도를 과거 패전국들을 부활시키고 동유럽에 대한 그들의 ‘정당한’ 점유를 위협하려는 것, 서방의 제국주의적 본성이 드러나는 것으로 여겼다. 소련은 식민 제국의 해체를 강력히 지지했고, 자국의 안보를 위해 얄타에서 합의한 동유럽의 완충지대화를 별 문제없이 안착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소련 블록으로의 편입 기도로 인식했다. 그들이 보기에 소련은 합리적 국익을 고려하며 행동하는 나라가 아니라 ‘동양적 전제정’의 야만성과 세계 혁명을 주창하는 볼셰비즘의 이데올로기가 움직이는 나라였다.

2022년의 우크라이나를 이야기하다 시계를 70년 넘게 돌려 냉전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냉전의 기원과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기원이 똑같다고 병치시키기 위함은 아니다. 서로 간의 오해가 누적되어서 전쟁이 발발했으니 양쪽 다 잘못이 있다는 양비론을 펼치려는 것도 아니다. 아직 이 전쟁은 냉전 기원의 ‘후기 수정주의’ 같은 작업으로 접근하기에는 너무나 현재 진행형인 사건이다. 극한의 정치적 대립인 전쟁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이야기는 한쪽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고 아군을 결집할 수 있는 그런 목소리다. 바로 그렇기에 서방에서는 러시아의 입장에 일정 부분 공감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고, 러시아에서는 푸틴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각종 위협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굳이 냉전 기원론에 관한 논쟁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때 함께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두 국가가 갈라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기원을 설명할 때에도 분명히 여러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이야기할 것은, 과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혹은 그 전부터 시작된 러시아와 서방의 불화가 과연 필연이었냐는 것이다. 물론, 전쟁의 당사자들은 당연하게도 이 갈등은 필연적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서방에서는 푸틴 정권이 들어선 이후 러시아에서는 권위주의 독재 정권을 유지할 필요가 생겼고, 독재자를 위협하는 서방 진영에 맞서기 시작했다는 서사를 공유하고 있다. 물론 푸틴 체제의 기원을 설명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전통적 방식대로 러시아 국가와 문명의 내재적 성격, ‘동양적 전제주의’, 피해망상, 팽창주의 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 온건한 측에서는 러시아 자체의 문제보다도 푸틴과 그 측근들이 지배하고 있는 크렘린, 나아가 러시아의 불평등한 통치 구조를 지적하는 데서 그치고자 한다. 하지만 어디로 귀인하든 이런 서사는 하나의 결론을 공유하고 있다. 적어도 푸틴이 들어선 이상, 그의 개인적 특성과 러시아 국가의 성격이 상호작용하여 러시아가 서방과 적대하는 것은 거의 필연에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가 여전히 과거 러시아 제국이나 소련 시절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태를 버리지 않았으니, 동유럽 국가들이 서방 세계에 손을 내미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위기는 러시아 자신의 생각이 만든 것이지 서구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편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소련을 해체시키고, 국가를 옐친 시절의 재난으로 몰아넣었으면서 러시아를 소생시키는 데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은 것은 서방 세력이었다. 그들은 나토를 더는 동쪽으로 확장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무시했고, 구소련 국가들을 친미적인 체제로 전환시켜 러시아의 자존심과 안보적 위기의식을 건드렸고, 종국적으로는 러시아의 심리적 한계선인 우크라이나마저 침범하면서 갈등을 증폭시켰다. 이 모든 것은 러시아를 깔보는 서구인들의 오만함과 팽창욕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었다. 러시아도 반대로 지금 서유럽이 겪고 있는 에너지난과 정치적 위기는,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했던 지도자들의 불장난에 따른 자업자득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같은 필연론은 서구와 러시아의 관계가 푸틴 시대에도 상당히 오랜 기간은 호혜적으로, 아주 안정적으로 작동했다는 사실을 놓친다. 2004년까지만 하더라도 서구와 러시아는 대다수 문제에서 협력하였다. 푸틴 2기 때는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 문제로 충돌하며 긴장감이 조성되기는 하였지만, 에너지, 자원, 시장, 기술 등을 매개로 한 서구와 러시아의 협력 기조 자체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심지어 이 당시에는 나토의 동진이 딱히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그루지야 전쟁은 나토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문제로 발생한 사안에 가까웠다.

본격적인 결별은 메드베데프 시기(2008-2012)에 일어났다. 이 시기에 세계적으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의 연쇄는 서구와 러시아 자체를 변화시켰으며, 양 진영의 관계도 뒤흔들게 되었다. 서브프라임 위기, 아랍 봉기로 인한 중동 권위주의 정권의 붕괴와 내전, 러시아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의 국력은 서구의 정치, 경제적 지배력을 약화시켰고, 그들이 가진 이념적 패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리비아에서 발생한 서구의 군사 개입과 권위주의 정권의 붕괴와 부족 세력의 난립은 비서구 국가들에 굉장한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 되었다. 그 결과 이 시기에 러시아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서구화’를 이야기하는 자유주의 세력의 위상이 급격하게 위축되었고, 서구에 맞서자는 대결주의 노선이 큰 힘을 얻게 되었다.

다른 국가들과 달리 특히 러시아와 중국에서 서구에 맞서자는 대결주의가 더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관의 영향이 컸다. 두 국가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제국’이다. 여기서 제국이라 함은 단순히 무력으로 누군가를 지배하는 강력한 권력을 비유적으로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제국사학자 프레데릭 쿠퍼는 제국의 본질은 ‘차이의 정치’에 있다고 이야기했다. 제국은 영토 내의 다양한 정체성을 통치 구조에 통합시킴과 동시에, 위계적으로 그들을 구별하는 권력이다. 고대 제국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국은 여전히 수많은 사람을 사로잡는 정치적 상상이며, 다양한 종족을 통합시켜 새로운 혁신과 창조를 가능하게 한 틀이자,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 구조 그 자체이기도 했다.

제국과 상충하는 힘은 국민 국가다. 제국이 ‘차이의 정치’를 추구한다면 국민 국가는 ‘동일성의 정치’를 추구한다. 국민 국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국가 모델은 단일민족국가다. 영토 안에 담긴 정체성은 하나일 때 가장 안정적이고, 구성원 간의 동질성에서 비롯되는 연대 의식이 국민 국가의 힘이 되어준다. 따라서 국민 국가는 구성원들의 이질성을 최소화하고, 동질화하는 힘을 국가 권력을 통해 밀어붙이려는 충동을 지닌다(적어도 과거에는 확실히 그랬다). 한편 국민 국가의 통치 원리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제국적 권력을 거부하고 인민 주권을 이야기하면서 대체로 현재 서구식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안정적인 원리로 자리 잡았다. 역사를 끝내고자 하는 계몽주의의 충동은, 모든 종류의 제국 권력을 해체해서 인민이 자신들이 원하는 동질적 정치체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선언으로 이어졌다.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에서 이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로 표현되었고, 공산주의적 계몽주의에서는 레닌의 반제국주의 혁명론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레닌의 후계자인 스탈린은 자신이 물려받은 국가가 제국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루지야인으로서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차르가 된 그는 소련의 제민족을 제국의 통치 시스템에 새로운 방식으로 포섭함과 동시에, 러시아가 소련의 통치 구조에서 갖는 지배력도 놓치지 않고자 했다. 소련은 각 가맹국들이 국민 국가의 형태를 취할 수 있게 해줌과 동시에 러시아가 주가 되는 제국적 통치 질서를 받아들이게 만든 혼합적 형태의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물론 스탈린 내지는 소련의 민족 정책 역시 통합과 구별 사이에서 항상 움직여야 했던 제국의 전통적 치국술의 연장에 있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소련 체제 내부의 경제적 활력이 저하되고, 러시아인들과 나머지 민족들 간의 갈등이 커지면서, 최종적으로 고르바초프가 공산당의 정치적 권위를 해체하면서 소비에트 제국은 급속한 와해로 치달았다.

소련은 평화롭게 제국을 해체하였으나, 애석하게도 그 이후에 펼쳐진 일은 그다지 장밋빛이 아니었다. 제국의 해체는 정치적 무질서, 민족 갈등, 경제적 연결망의 위축과 빈곤으로 이어졌다. 특히 러시아처럼 제도화된 행정 대신에 인적 관계를 바탕으로 한 가산제적 통치의 오랜 전통이 유지되는 국가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제국 해체의 유산일 수는 없었다. 1990년대에 잘못 설계된 민영화 정책들과, 올리가르히 및 옐친의 국가 사유화는 제국 문제와는 구별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바깥에 남겨진 러시아인의 문제와 북캅카스에서 이어지는 무슬림 민족들과의 분쟁은 2000년대에도 계속해서 러시아에 울려 퍼지면서, 제국의 해체는 끔찍한 재난이라는 인식을 강화시켰다. 잔인했던 제2차 체첸 전쟁을 통해 권력자로 발돋움한 푸틴은 스스로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관점을 지지했고, 사실 그 본인도 다른 많은 러시아인들처럼 실제로 ‘제국으로서 러시아’라는 관념을 믿고 있을 공산이 크다. 최근 러시아에서는 17세기 ‘동란의 시대’나 1917년 이후 펼쳐진 러시아 내전기를 주목하고 있는데, 국가의 분열과 재통합이라는 서사에 이들 시기가 영감을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은 여기에 더하여 중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은 러시아보다도 훨씬 긴 제국의 역사를 갖고 있었고, ‘왕조 순환’으로 특징 지어지는 분열과 통합의 주기가 중국의 역사적 서사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 분열기에 발생하는 끔찍한 재난은 중국에서도 통합과 안정이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가장 큰 가치일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게다가 어쨌든 중화인민공화국 체제의 직접적 전거가 되어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그 이후에 발생한 혼란은 중국 공산당에게 심각한 트라우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시진핑은 집권 후 고르바초프의 실수가 절대 중국에서 반복되면 안 된다고 강조했는데, 이는 공산당의 정치적 중심성을 지키고 중국의 제국적 질서가 흔들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아주 직접적인 의지 표명이었다. 그리고 2008년에서 2012년까지 서구에서, 러시아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중동에서 일어난 일들은, 서구가 자신들의 제국 질서를 위협하고 있으니 절대로 서구에 넘어가 제국을 스스로 해체하는 ‘고르바초프의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된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좋았다. 그 결과 대서방 온건파와 자유주의화를 지지하는 이들 대신에 대서방 강경파와 권위주의 강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러시아와 중국이 자신의 제국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방향으로 움직일수록, 주변 국가들은 경계를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의 역사는 제국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다양성과 안정이라는 두 목표를 모두 달성해내는 위업이지만, 피지배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자유의 억압으로 받아들여지기 좋기 때문이다(물론 제국 내부에서도 제국 질서의 비판자들이 있었고, 피지배자들 중에서도 제국 질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이들이 있었음을 놓쳐서는 안 되지만). 러시아의 경우, 다시금 강한 러시아를 외치고 러시아의 통합을 강조하는 것은 구소련 공화국들이나 과거 바르샤바 조약 소속국들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러시아가 자신의 제국적 세계관을 지키겠다고 외칠수록, 인접국들은 러시아 제국의 자장에 합류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 국민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질서, 즉 자유주의 질서의 우산 속으로 최대한 빨리 몸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토의 동진, 색깔 혁명, 유로마이단 시위는 전부는 아닐지라도 상당히 큰 부분에서는 그 결과 발생한 일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리석은 아마추어 정치인이 나토 가입이라는 모험을 저지르고, 나토가 러시아를 고려하지 않은채 압박 일변도로 동진하여’ 발생한 실수도 아니고, ‘멈출 수 없는 러시아 전제정의 광기’가 폭발한 사건도 아니다. 윤리적 가치판단을 일단 배제하고 본다면, 이 전쟁은 국민 국가의 세계관과 제국의 세계관을 지닌 채 협력을 하던 두 진영이, 역사적 기억에 따른 불신을 관리하지 못하고 충돌한 사건이다. 1990년대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러시아는 지금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강한 중앙집권형 제국과 그를 다스리는 역시 강력한 통치자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런 러시아를 바라보며 동유럽 국가들은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제공하는 방호벽 속으로 들어가고자 서쪽으로 움직였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를 불신할 여러 이유가 있는 동유럽 국가들이 나토와 유럽 연합 가입이라는 선택지를 택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제국적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는 러시아의 선택도, 그들의 세계관과 역사적 기억을 생각했을 때 일어날 개연성이 아주 높은 일이었다. 물론 제2차세계대전의 ‘대동맹’이 맺어졌던 것처럼, 서구와 러시아, 그리고 그 사이의 동유럽 국가들 간의 광범위한 협력도 분명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세계관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목표와 이해관계가 있었더라면 양 진영의 협력은 2010년대에도 계속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정치 지도자들의 선택, 거부할 수 없는 거시적 추세, 우연적 사건의 발발 등이 모두 맞물려 서구와 러시아는 결별했으며, 우크라이나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전쟁이라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 전쟁은 쉽사리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는 여름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군이 반격 역량을 보여주지 못한 채 소모되다가 전쟁이 러시아의 우위로 끝날 것으로 전망했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가을부터 대대적 반격에 나서면서 러시아를 몰아붙이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 역시 30만 명을 소집하는 부분동원령을 발동하여 전쟁을 더욱 큰 규모로 확대시키고 있다. 모든 전쟁이 그렇겠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 어떤 방식으로 흘러갈지 쉽사리 예상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생각 이상으로 장기전으로 흘러갈지도 모른다는 전망만 할 따름이다. 물론 소비에트 연방이 예상치 못하게 갑작스럽게 무너진 것처럼, 러시아도 자체적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역시 무너지고, 서구와 러시아의 대립은 허망하게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로서 그런 전망을 내비치는 것은 성급하다. 러시아는 소련처럼 비효율적 계획 경제를 운영하고 있지도 않다. 당시 서구는 압도적 기술 우위와 공급망 통제력을 자랑했지만, 이제 비서구 세계가 부상하고 유라시아 대륙의 통합이 가속화됨에 따라 러시아가 서구의 경제적 공세와 포위망을 우회해서 모색할 수 있는 생존 공간은 더욱 넓어졌다. 어쩌면 러시아는 이 전쟁을 기회로 자신이 주도할 수 있는 유라시아 연결망을 더욱 확장하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러시아는 여전히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시간표를 고려하며 서구와 거래를 지속하고자 하는 중국을 더욱 적극적으로 유라시아 경제권에 끌어들이고, 서유럽에게 대서양과 유라시아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하게 만들었다. 어찌되었든, 거대한 자원과 시장을 지니고 있는 유라시아 세력과, 기존 세계 질서의 주도권, 기술, 금융, 인적 자본을 끌어들이는 다양성 면에서 힘을 지니고 있는 서구 및 해양 세력의 분리는 이제 명실상부한 것이 되었다. 단극 세계 패권 속에서 단일 시장이 형성되고, 자원과 자본, 기술과 사람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시대는 점점 종막을 고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유라시아의 대균열을 이해할 때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세계관의 균열이다. 한쪽에서는 제국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이들, 전통이 부여하는 의미 체계를 지속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다. 다른 쪽에서는 모든 종류의 제국은 억압의 다른 표현이라고 일축하고, 개인의 자유 의지와 그에 따른 선택만큼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유라시아 세력의 핵심 국가인 이란에서는 히잡 문제를 둘러싼 대대적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격전지는 우크라이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반대로 가족의 가치와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총리가 파시스트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권력을 획득했다. 인도는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고려하며 중국에 맞서기 위해 미국과 손을 잡았지만, 그들 또한 무슬림 인구를 통제하기 위한 제국적 질서를 추구하며, 힌두교가 제시하는 의미 체계를 통해 사회를 규율하고자 한다. 세계관과 지정학이 교차하는 이 복잡한 전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우리의 시야는 계속해서 더 넓어져야만 한다.

지난 여름에 다녀온 볼가강은 나에게 다시 한 번 세계관을 확장시켜준 그런 ‘제국적 공간’이었다. 물론 제국적 공간을 다녀왔다고 해서 제국의 지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국의 비전과 상상력이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마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카잔에서는 새로운 모스크가 건설되고 있었고, 유라시아주의를 부활시킨 레프 구밀료프의 동상이 있었다. 타타르스탄의 무슬림 문화는 러시아 제국이라는 틀 속에서 부활했고, 그들은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이어주는 가교를 자임한다. 유럽 최서단의 불교 국가라는 칼미키야에서는 러시아와 칼미크인들의 애증의 역사를 보여주는 많은 증거들을 볼 수 있었다. 칼미크인들은 멀리 시베리아의 이웃 부랴트인과 함께 우크라이나로 달려가는 민족 가운데 하나다. 이들이 가난한 소수민족이라 떠밀려서 입대한 것일까? 아니면 이들도 제국 질서에 동조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전선에 나간 것일까?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후자의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도 금세 알 수 있다. 아스트라한의 숙소 근처에서는 볼가강 하구 카스피해의 건너편에서 온,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출신의 노동자들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다시금 복원되고 있는 유라시아 네트워크의 참여자들이다. 스탈린그라드의 ‘어머니 조국상’은 제국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합리주의보다는 낭만주의와 영웅주의에 의지할 필요가 있음을 웅변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침략자를 옹호하는 것’이라며 쉽사리 비난할 수도 있다. 다시금 강조하자면 이 모든 이야기는 윤리적 판단과는 별개의 문제다.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혹은 서방이나 중국을 윤리적으로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두 각자의 양심에 따라 달린 문제다. 그러나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세계가, 그것도 윤리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되지 않는 세계가 있다고 해서 그 실체를 알아보지 않고 비난하고, 그 실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라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닐 것이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이제 하나의 세계관이 모든 국가의 통치 원리로 작동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것이 역사의 종언이 말한 비전이었다. 하지만 2022년, 역사는 끝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세계관 투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계몽주의와 국민 국가의 비전을 이은 자들과, 낭만주의와 제국의 비전을 이은 자들이 세계 각지에서 부딪히고 있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합리적이지 않다고, 취약하다고,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부정하면 이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예전부터 서구인들은 중국인들도 자유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고 막연히 상상해왔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중국인들에게 자유가 절대적 가치 아니냐고 말한다면 그들은 자유를 어떻게 규정할지 물을 것이며, 그런 자유보다는 안정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자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역시나 안정, 그리고 전통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들의 말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거나 그것은 각자의 자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쨌든 서로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사람들끼리의 싸움은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며, 이 싸움판을 현명히 헤쳐나가는 길은 상대편도 자신들만의 관점과 서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 이해를 위해서라도 더 많은 사람이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여러 공간을 직접 보고, 그 공간 속의 사람과 소통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써온 글들이 독자들의 세계관을 넓히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었다면 큰 기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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