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인상기 (1)

방콕 인상기 (1)

러시아의 반대편에서

임명묵
“거기 지금 갈 수 있어요?”
라는 상투적인 질문을 들으면 역시 언제나 대비되어 있는 상투적인 대답이 나온다.
“그럼요. 푸틴이 비우호국 중 한국은 예외로 해줘서 입국이 자유롭습니다.”
어떻게 하다보니 서방국 중에서 러시아를 가장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국민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러시아 영공 활용이 안 되고 직항이 끊겼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고 얼마 뒤, 여행을 같이 떠나기로 한 동행 선생님께 여쭤보았다. 그 선생님은 당시 미국에 계셨다.
“거기서는 러시아 어떻게 들어가시려고요?”
“일단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거기서 뮌헨으로 갈아타서 바르샤바로 가고, 그 다음에 아르메니아 예레반 가서 모스크바로 들어갑니다.”
“아니 무슨 입국 과정이...”
“명묵씨도 러시아랑 통하는 제3국 거쳐서 들어가야 할텐데 어디로 들어가고 나올지 생각 해놓으셔야 돼요.”

그렇다면 어디를 통해서 러시아로 입국할 수 있을까! 일단 이 질문부터 난제였다.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을 경유해서 가면 어떨까? 그 사이에 그쪽 지역도 다시 좀 둘러볼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이미 가봤던 지역이고, 어차피 도시 한 군데만 주로 있을 거라서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에 러시아 올리가르히들이 두바이로 피신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생각해보니 두바이는 일찍부터 러시아를 인도양 세계와 연결해주는 주요 통로 중 하나였다. 두바이를 통해서 들어가는 게 낫겠다! 하지만 두바이는 서아시아 전공이 무색하게도 내 평소 관심사와는 아득히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두바이를 거쳐 모스크바로 들어가기 전에 중간 쯤에 위치한 무역풍 세계의 다른 도시 하나 정도는 보고 갈 수 있었으면 했다. 그렇게 해서 결정된 행선지는 바로 태국이었다.

너무 반대편 아닙니까?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지리적으로 본다면 태국은 러시아와는 단 하나도 관련이 없어 보이는 나라다. 유라시아 북서쪽에 자리한 거대한 대륙 국가인 러시아와 유라시아 남동쪽에서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한 태국 사이에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오히려 내게는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국을 한 번 구경해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익숙치 않았다고 해서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태국에 대한 내 본격적인 관심은 K-POP에 대한 관심과 함께 시작되었다. 케이팝이 한국, 중국, 일본으로 상징되는 동북아시아를 넘어 아시아 전반을 거머쥐는 산업으로 확장하는 데는 태국 출신 아이돌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블랙핑크의 멤버 리사는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네트워크를 통해 글로벌 스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사실 블랙핑크라는 그룹도 리사의 존재가 만들어낸 동남아시아 팬덤의 열렬한 지지를 통해 글로벌 그룹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태국에서 리사의 위상을 조사하면서 그가 단순히 동남아시아에서 등장한 한 명의 셀럽을 넘어서 동남아시아 지역 전반의 사회적 현실을 깨고 나온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중국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강력한 사회 상층부와 그 네트워크에서 배제된 사회 하층부의 대립과 긴장 관계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든 동남아시아 사회를 가로지르는 단층선이었다.

태국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반겨주는 K-POP. 오른쪽은 GOT7의 뱀뱀. 이미지 출처: 본인 촬영

2000년대 들어 태국에서는 그 단층선이 정치적인 분쟁으로 계속해서 분출했다. 주인공은 사업가 출신 포퓰리스트 정치인인 탁신 친나왓이었다. 2001년에 집권한 탁신은 국가 자체를 자신의 비즈니스로 사유화하면서 큰 반발에 직면하였다. 탁신은 중산층이 자신의 지지 세력에서 이탈하는 모양새를 보이자 북동부를 중심으로 한 빈농 집단을 새로운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 방콕 중산층과 빈농의 정치적 대립이 극심해질 위기에 처하자 태국의 권력 중추라고 할 수 있는 군부가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켰고, 탁신은 축출되고 말았다. 하지만 ‘레드셔츠’라고 불리우는 탁신파는 막강한 대중 동원력을 보여주면서 방콕을 비롯한 태국 곳곳에서 반탁신파인 ‘옐로셔츠’들과 충돌했다. 마침내 2011년에는 탁신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이 정권을 탈환했지만, 2014년에 프라윳 찬오차가 이끄는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렇게 탄생한 프라윳 정부는 8년째 장기 집권을 실시하고 있다.

탁신 친나왓, 세계화를 주창하는 기업인에서 포퓰리즘의 화신으로.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이 과정을 거치며 태국은 이념적 전선과 지정학적 전선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나라가 되었다. 탁신 집권 이전만 하더라도, 태국은 ‘역사의 종언’에서 명시된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는 나라로 인식되었다. 동북아시아에 비하면 그 속도가 느리지만, 이슬람 세계를 비롯한 다른 아시아 이웃들에 비하면 꽤나 양호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개혁적인 군주들이 근대화의 초석을 놓고, 군부 쿠데타로 다소 간의 엄혹한 세월을 보냈지만, 그 대신에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을 수 있었다. 마침내 1988년에는 ‘민주화 제3의 물결’에 올라타서 민주주의를 이루었고, 아시아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세계화에 참여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으니, 태국이 이웃한 동북아시아 국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은 매우 그럴듯한 시나리오였다. 경제 발전과 도시화, 중산층의 출현은 언제나 같은 길로 사회를 인도하지 않았던가.

물론 앞서 설명한 것처럼 태국의 역사는 결코 끝나는 방향을 향해 가지 않았다. 민주화 승리하고 세계화가 태국을 번영으로 이끌 것처럼 보이던 1990년대에도 태국은 이미 자체적인 사회 모순과 문화적, 종족적 갈등으로 끓고 있던 사회였다. 아시아 금융 위기는 그 갈등을 한 차원 더 끌어 올린 계기가 되었다. 물론 태국의 고유한 조건은 정권과 사회로 하여금 다른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하도록 만들었고, 거기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태국의 특수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태국이 다른 국가들과 가졌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전통주의가 정치적, 사회적 헤게모니를 상실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데 있다. 그러니 ‘종교의 부활’은 태국에서 사뭇 다른 양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부활하기에는 일단 태국에서는 종교가 죽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의 부활을 겪은 사회들은 독재 정권 차원에서 세속주의를 내걸거나(이슬람 세계, 소련), 자연스러운 사회 변동의 결과로 세속주의가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들이었다(서방 세계). 하지만 태국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극히 드물게도 식민화를 겪지 않은 덕택에, 왕조의 권위가 오랜 기간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전혀 다르게 흘러갈 수 있었다. 왕조의 드높은 권위는 당연히 왕조를 정당화해주는 종교, 즉 테라와다 불교의 권위와 연동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태국에서 왕조가 통치 정당성의 원천이 되는 동안 종교는 사회 전반에 개입하고 일상을 규율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보전할 수 있었다. 태국은 전통주의의 반격을 논하기에는 일단 전통주의가 크게 세력이 위축된 적이 없는 사회였다.

왓 아룬의 승려들. 이미지 출처: 본인 촬영
어딜 가나 존재하는 국왕 전하의 어진. 이미지 출처: 본인 촬영

물론 태국 경제의 발전, 도시화, 민주화, 방콕 중산층의 성장은 왕조와 승단의 지배력에 균열을 내는 힘이었다. 게다가 ‘종교의 부활’이 태국을 완전히 비껴간 것은 아니었다. 불교가 왕실과 정치권에 과하게 밀착하면서, 불교의 사회 지도력과 도덕적 권위는 갈수록 추락했고, 대중적 차원에서 불교는 불신과 냉소의 대상으로 점점 바뀌고 있었다. 한편 물밑에서는 제도권 불교의 지배력 아래에서 방치된 사회의 불만을 흡수하는 새로운 움직임도 시작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승려 롱파쿤(Luang Phor Koon)은 영혼의 구원 대신에 현세에서의 물질적 부를 보장해주는 것을 자신의 장기로 삼으면서, 초자연적 능력을 통해 자신을 따르는 신도를 전국적으로 확보했다. 그는 그렇게 확보한 신도 네트워크를 자신의 영험함이 깃든 기념품을 판매하는 데 활용했지만, 만약에 그가 정치화된 종교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활동을 했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지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편 남부 지역에서는 말레이인들을 중심으로 분출되는 정치적 이슬람주의와 분리주의 운동에 대응하여 불교 민족주의와 통치 정당성의 근원으로 불교에 대해 호소하는 움직임이 크게 늘기도 했다. 게다가 탁신을 둘러싼 옐로셔츠와 레드셔츠의 갈등은 태국 불교 내부에서도 격렬한 논쟁을 초래했고, 불교를 훨씬 더 정치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내세의 구원이 아닌 현세의 복을 주겠다는 혁신을 통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승려 롱파쿤. 어째서인지 익숙하긴 하다만...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이 격렬한 정치적 대립을 겪으면서 태국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이 설 자리가 사라졌다. 탁신과 그의 지지자들은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었으나, 탁신이 권력을 사유화하고 국가를 사업체처럼 운영하고자 하는 경향을 생각했을 때, 그의 안정적 집권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존의 정치 경제 질서에서 소외되었던 이들을 세계화와 발전의 논리를 통해 끌어들여 정치적 기반으로 삼는 일은 같은 시기 터키의 에르도안이 구사하는 기술이었다. 군부가 그런 시도를 차단하고자 했던 것도 똑같다. 다만 태국과 터키의 차이가 있다면, 터키에는 왕실이 없으며 군부는 종교를 적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한편 기업인 탁신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지만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는 경제적으로 좌파적 비전을 제시하면서 같은 일을 수행했다. 2000년대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안정적 자유민주제가 작동하기보다는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부상하며 기존 체제와 갈등을 빚는 국면에 진입했다.

기존에 태국에서 왕실과 군부의 연합, 즉 헤게모니를 지닌 전통주의자들과 싸우던 자유주의자들은 새로이 등장한 탁신식 포퓰리즘, 레드셔츠 운동에 공포와 거부감을 느꼈다. 그들은 동북부 지역의 빈농들과 그들의 지지를 받은 기업인이 다스리는 정부가 제대로 운영될 것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따라서 태국의 중산층들은 자신들의 피를 흘렸던 1970년대의 투쟁을 거쳐서, 1988년에 안착시켰던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선택지를 골랐다. 2006년 쿠데타, 2009년과 2010년의 방콕 전투, 2014년 쿠데타에 이르기까지 방콕 중산층은 옐로셔츠의 주역이 되어 태국의 기존 질서를 방어해냈다. 방콕 중산층들이 대단히 새로운 전통주의 이념에 감명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왕실과 군부가 주도하는 익숙한 전통주의가 알 수 없는 포퓰리즘보다는 낫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탁신을 둘러싼 갈등이 태국을 보수적 권위주의, 전통주의로 다시 밀어붙이면서, 서방의 자유 진영과 태국의 관계는 갑작스럽게 얼어붙었다. 태국은 원래 냉전기 반공의 보루로서, 버마의 민족적 사회주의 군부와 인도차이나의 공산주의를 가장 전면에서 방어하는 미국의 최고 우방국이었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유주의에 대한 이념적 도전이 사라지면서(정확히는 그랬던 것처럼 보이면서), 미국은 태국에도 더욱 높은 수준의 자유화와 민주화를 수용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이는 태국의 지배 엘리트 입장에서 보기에는 도를 넘는 간섭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의 입장에서 탁신과 레드셔츠는 선거라는 틀을 수용만 할 뿐이지 사실상 공산당만큼이나 위험한 존재였다. 태국 엘리트가 보기에 미국의 압박은 민주주의를 하면 모든 게 잘 풀릴 것이라 믿는 미국의 순진함의 산물이었다.

이념 전선에서 태국이 이탈할 조짐이 보이자, 지정학 전선이 갑작스럽게 밀고 내려왔다. 태국이 이제는 자유 선거를 아예 포기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었던 2014년을 기점으로, 태국에서 중국이 미국의 존재감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자신들은 이념적 지향과는 무관하게 오직 경제적 이해관계만을 따지는 실용주의자들이라며 태국 엘리트들에 접근했다. 태국 엘리트들은 이제 중국으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중국인들의 구매력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태국으로 물 밀 듯이 내려와 이 나라에 소중한 외화를 뿌렸고, 중국의 내륙 경제가 성장하면서 동남아시아와 인접한 지역과의 교류도 크게 확대되었다. 그 뒤 중국은 거절할 수 없게끔 얽힌 경제적 이해관계를 무기로 본격적으로 전략적인 접근을 하기 시작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통해 이미 중국과 강한 연계를 맺고 있는 라오스, 캄보디아, 버마를 중국의 서남부 경제 권역에 통합하고, 나아가 태국과 말레이시아까지 포함시키겠다는 비전이었다. 운남성의 곤명은 이제 남쪽 내륙으로 나가는 관문이 될 터였는데, 실제 곤명에서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까지 잇는 철도가 개통되는 순간은 그 작업이 현지 반발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2018년 프라윳 총리는 중국이 태국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라는, 냉전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중국의 철도 공세. 물론 계획과 완수는 별개의 문제다.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태국의 지정학적 선회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이 나라의 엘리트층을 구성하고 있는 화예, 즉 중국계들이었다. 태국은 왕조부터 중국계에서 출발한 나라였지만, 문화적으로 일찍부터 타이족에 동화되었다는 것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는 구분된다. 하지만 19세기 세계화가 진척되며 상품과 인력의 자유로운 교류가 시작되자, 중국에서 건너온 상인층, 이후 이주한 노동자들의 디아스포라는 태국 사회와 경제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들 또한 상당수는 타이어를 비롯한 태국의 정체성을 받아들였지만, 그들이 외모부터 확연히 구분되는 엘리트 계급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태국의 화예들은 탁신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정체성의 대결로까지 번지면서 자신의 중국적 기원을 새로이 각성했다. 특히 중국 대륙이 세계 시장과 문화에 통합되고, 중국 대륙의 경제적 규모가 거대해지면서, 동남아시아의 화교와 화예들은 자신들의 종족적 요소를 통해서 막대한 이득을 볼 수 있으며, 중국적 기원에 자부심을 느껴도 충분하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전의 탈식민화와 민족 국가 건설의 시기였던 20세기 후반에 동남아시아의 화예들은 경제적 이권을 독점한 대가로 정치적 탄압과 사회적 차별, 나아가 물리적 공격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언제든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들과 연계된 거대한 이웃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태국 화예들은 ‘평범한 태국인’의 정체성을 내세우며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치를 수행하는 레드셔츠에 대항하여, 중국계로서 자신들의 사회적, 문화적 결속력을 다지고, 보수적 전통주의 체제를 비호하는 중국과의 연계를 지지했다.

방콕의 차이나 타운. 이미지 출처: 본인 촬영
국수를 먹던 중 옆에서 들려오는 중화의 소리... 출처: 본인 촬영

물론 그렇다고 태국이 최근 보여준 보수적 전통주의로의 경도, 중국과의 전략적 밀착으로 태국이 완전히 어느 한쪽 진영에 넘어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최근 태국은 중국이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국경을 폐쇄한 것을 계기로 서방 진영과의 재결속에 힘을 쓰고 있으며, 동남아시아의 지정학적 중심을 상실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미국은 정치 면에서 전향적 태도를 보이며 태국 정부와 다시 우호 관계를 구축하고자 한다. 사실 태국이 서구와 아시아,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복잡하게 움직이는 그 모습 자체가 태국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 사회, 문화적 혼란과 그로 인해서만 나올 수 있는 새로운 창조성은 어찌 보면 태국만이 아니라 모든 아시아 국가들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식민화의 기억이 강렬한 한국에서는 태국 근대사를 ‘지혜로운 출랄롱콘 대왕’이 제국주의 열강인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유연한 외교, 소위 대나무 외교를 펼쳤기에 식민화를 피하고 주권을 지켰다는 서사를 중심으로 기억하곤 한다. 하지만 대나무 외교를 포함하여 태국 현대사에는 서구와 아시아, 전통과 현대 사이의 더 다채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기도 하다. 이번에 방콕에 머무르면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이야기들의 장소이기도 했다.

방콕, 전통과 현대 사이의 거대한 혼란을 품은 불평등의 도시. 이미지 출처: 본인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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