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인상기 (2): 피분송크람과 태국 파시즘
방콕에서 보았던 파시즘의 흔적
방콕의 강남이라고 할 수 있는 수쿰빗 대로에 숙소를 잡고 거리를 둘러보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글로만 읽어 왔던 현장을 훨씬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수쿰빗은 도시화, 상업 팽창, 세계화 등이 빚어낸 에너지와 혼란, 모순이 응축된 곳인 것만 같았다. 하늘을 찌르는 호텔과 명품이 가득 쌓인 쇼핑몰을 태국의 부유한 중산층들과 동아시아, 중동, 유럽에서 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거닐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로는 말도 못 할 수준의 교통 체증과 소음이 계속 귀를 시끄럽게 했다. 건물 사이의 좁은 6차선 도로를 지나는 방콕의 자랑인 고가 전철, BTS(Bangkok Mass Transit System)는 마치 이 곳이 블레이드 러너나 아키라의 세계인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게 했다. 그리고 밑에서는 하루에 얼마를 받는지 알 수 없는 노무자들이 일회용기에 대충 올려진 국수를 먹고 있었고, 외부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들을 파는 노점상들이 식당과는 비교도 안 되게 저렴한 가격으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수쿰빗 대로변의 미래적이고 깔끔한 마천루들은 바로 옆의 골목에 펼쳐진 허름한,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오래된 건물들과 지나치게 잘 대비가 되었다.
세계화에 따른 자본과 관광객 유입은 미군이 만들어낸 환락의 도시를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 올리고 있었고, 많은 태국인들은 거기서 창출되는 부의 미미한 부분만을 공유할 따름이었다. 물론, 자신의 부와 매력을 아낌없이 드러낸다는 차원에서 수쿰빗이 발산하고 있는 혼란한 에너지는, 동아시아의 여러 도시가 가진 질서 잡힌 면모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표면적 엄숙주의로 꽁꽁 싸매고 있는 서울과는 다른 해방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래서 동북아시아인들이 코로나 이전에 그렇게 동남아시아를 오갔구나 싶었다.
물론 방콕은 거대한 도시고, 수쿰빗은 방콕에서도 가장 혼란과 격차가 극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일 따름이다. 차오프라야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왕실 유산이 즐비한 방콕의 고도(古都)는 여기가 그 혼란한 도시 한복판이 만나 싶을 정도로 고요하고 깔끔하게 정비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차오프라야강 연안 지역에도 시끌벅쩍한 거리가 있었으니, 방콕의 상징 중 하나가 된 여행자 거리인 카오산 로드였다. 사실 방콕 밖을 딱히 벗어날 생각도 없는 데다가 이미 다른 많은 거리처럼 관광지에 유흥가처럼 바뀌었다고 하니 큰 관심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방콕까지 왔는데 이건 보고 가야지’라는 매우 한국적인 여행 동기 덕택에 택시를 타고 방문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택시를 타고 가던 중 눈앞에 눈길을 사로잡는 장엄한 조형물이 하나 나타났다. 구글 지도를 켜서 확인해보니 이름이 ‘민주기념탑’이었다. 태국 같은 왕실 주도 국가에 무슨 민주주의를 기념한다는 것일까? 우선 기사에게 저 탑 근처에서 내려달라고 한 다음에 더 검색을 해보았다. 위키피디아에 바로 정보가 나왔다. 이 기념탑은 1939년에 건립되었는데, 1932년 태국의 군부 쿠데타로 기존의 절대 왕정이 입헌 왕정으로 바뀌게 된 것을 기념하는 조형물이었다. 내가 태국에 가기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던 지도자인 플렉 피분송크람의 작품이었다.
플렉 피분송크람, 혹은 줄여서 피분이라고도 부르는 총리는 좋든 싫든 현대 태국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다. 피분은 1932년 쿠데타를 주도하고 1938년에는 아예 총리에 취임하여 파시즘과 제2차세계대전으로 치닫고 있던 그 시기에 태국을 통치했다. 사실 피분 자체가 그 시대적 흐름에 적극적으로 편승하였던 사람이기도 했다. 피분은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결정적으로 일본의 아시아주의와 군국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파시즘 근대화 비전을 통해서 태국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피분의 유산은 이 나라의 이름에까지 깊게 남아 있다. 그는 전통 왕국의 이름이던 ‘시암’을 타이족의 근대 민족 국가인 ‘타이’로 바꾸었고, 타이족 고유의 문화를 장려한다는 명목으로 의식주 등 모든 문화에 개입하는 지침을 내렸다. 그중에서도 오늘날까지 가장 일상적 수준에서 남아있는 것이 바로 ‘타이식 볶음 국수’로 유명한 ‘팟타이’기도 하다.
내가 플렉 피분송크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1930년대라는 시대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 시기는 1870년대에 등장한 2차 산업혁명, 즉 전기와 화학으로 대표되는 신산업의 확산이 초래한 변화의 물결이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 조직화된 대규모 노동자 집단의 등장, 대중사회와 대중문화의 본격적 부상, 농촌 사회에 대한 국가 기구의 대대적 침투, 세계화의 중단과 블록 경제의 대두 등의 변화는 제1차세계대전과 그 전후에 이미 세계 각지의 상식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종래의 통치 방식과 이념은 이런 변화의 스트레스를 감내할 수 없었는데, 총력전이 촉발한 사회 혁명 운동과 그에 대한 반동은 모두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이념에 따라 사회를 설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련의 스탈린주의, 미국의 뉴딜 정책,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테크노-파시즘은 그중에서도 총력전에 대응할 필요성이 가장 높았던 제국들 사이에서 나온 답안이었다. 각 제국은 인접한 제국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차용할 것을 차용하면서 자신들만의 신체제를 건설했다.
물론 세계 패권을 놓고 싸우는 제국들만 이런 움직임에 주목한 게 아니었다. 식민지 민족들은 제국의 주류 민족은 아니었지만, 늘 제국의 틀 속에서 생각했었고, 그 엘리트들은 여러 제국들이 추진하는 정력적인 사회 개조 프로젝트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찾았다. 이런 움직임은 특히 전후에 탈식민화의 바람이 불며 수많은 신생 독립국들이 생겼을 때 본격적으로 폭발했다. 남한의 박정희나 소련의 김일성은 일본의 제국적 유산 속에서 각각 미국과 소련을 참조하여 총력전에 대응할 수 있는 근대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 지도자들이었다. 중국의 모택동은 소련 체제를 참조하되 군벌 전쟁, 항일 전쟁, 국공 내전에서 비롯된 자신의 경험으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지도자였다. 신생 독립국의 엘리트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과거의 지배자들만큼 부유하고 강력해질 수 있는지 항상 고민했고, 그 답은 지배자들의 모델을 따르거나, 지배자들의 경쟁자들의 모델을 따르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냉전기의 두 제국은 탈식민 국가들에게 자신들의 사회 개조 프로그램이라는 상품을 파는 판매업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소련 모델이 탈식민 국가들이 아주 매력적으로 보았던 모델이었다.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등 반둥의 용사들은 모두 어느 정도는 소련 모델을 채택했다. 물론 장기적 성공에 도달한 국가는 하나도 없었지만, 1930년대의 사회 개조 프로젝트들 중에서 스탈린식 모델이 갖는 아우라는 결과를 모르던 당시로서는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한편 미국식 판본이라고 할 수 있는 ‘근대화 이론’은 자신들이 발전을 향한 더 빠른 경로를 제시했다는 소련의 선전에 대응하여 미국에서 내놓은 경쟁 상품이었고, 터키, 이란, 태국, 필리핀, 남한 등 공산권과 대치하고 있는 권위주의 독재자들을 지원하는 근거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냉전기의 모습에만 집중하면 초기 냉전기의 많은 모습이 제2차세계대전기, 나아가 그 이전 1930년대에서 발원했다는 것을 놓칠 수 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미국과 소련이 개도국을 향해 벌이던 경쟁은 먼저 1930년대에 자신들끼리 벌인 경쟁이었다. 미국과 소련 모두 그 과정에서 축적한 경험을 외부 세계에 투사한 것이었다. 그리고 1930년대를 망각할 경우에는 이후 세계를 형성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친 다른 배역도 놓치게 된다. 바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와 구분되는 자신만의 세계 비전을 갖춘 이념인 파시즘이다.
파시즘을 어떻게 정의할지, 어떤 체제를 파시즘 체제라고 평할 수 있을지는 아직까지도 논쟁이 될 정도로 파시즘은 혼란스러운 개념이다. 그 논쟁을 여기서 다 따라가는 것은 무의미할테니 일단은 개인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편의적 정의를 먼저 제시하고자 한다. 파시즘은 기본적으로 ‘민족 유기체설과 사회진화론, 지도자 이론을 갖춘 대중동원 사상’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의 경험에 천착하여 제시되는 일반적인 파시즘 정의에 동의할 수가 없다. 이런 파시즘 연구는 기본적으로 어떻게 정당 운동이 대중의 자발적 동의 하에서 선거로 권력을 장악하고 전체주의 체제를 건설했냐는 질문에 집중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선거를 통한 파시스트의 집권이 서구인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발전된 유럽에서 어떻게 자발적인 야만이 등장했는가‘라는 질문을 필연적으로 제기했기 때문이다. 즉, 파시즘은 문명적 서구라는 자의식과 자기 규정에 본질적인 균열을 내는 사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에서는 같은 시기 일본을 대중의 자발적 움직임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파시즘이라 규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많다.
하지만 권력 장악 과정과 통치 과정, 비전이 굳이 ’이상적인 형태‘로 일치해야 하는가? 그렇게 따진다면 시민 혁명이 아닌 방식으로 성립된 자유주의 체제, 노동자와 농민의 봉기 이외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공산주의 체제는 모두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아닌 셈이다. 체제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지지가 있든 없든 간에 통치자들이 내세우는 비전과 실제 국가 권력과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일세를 풍미했던 극우 전체주의들을 관통하는 요소, 지구적 경험으로 적용할 수 있는 요소가 파시즘의 요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을 문장으로 정의하면 이렇다. ’세계는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민족과 영토(피와 땅)는 떼어 놓을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으며, 세계의 역사는 생존에 적합한 민족이 그렇지 못한 민족을 밀어내면서 확장한 경쟁의 역사다. 이 진화론적 민족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유기체의 건전성을 위한 민족의 정신, 신체적 각성이 필요하고, 민족의 총의를 집결시킨 지도자의 결정에 모두 일사불란하게 따라야만 한다.‘
파시즘의 사상과 세계관은 1945년에 그들이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연합을 이겨내지 못하고 처참하게 패배하면서 무너졌다. 그리고 전후에 파시스트들이 자행한 반인륜적 범죄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이제 파시스트라는 말은 어떠한 정치적 지향점을 의미하는 말에서 상대방에게 쓸 수 있는 가장 심한 욕설로 변했다. 하지만 파시즘을 따르던 사람들까지 전부 죽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이 맹위를 떨치던 지역에서는 전쟁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이 내걸었던 사회 개조 프로젝트의 기억을 긍정적인 것으로 추억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 길이 민족의 발전을 이끌 길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이들도 많았다. 한편 1930년대와 1940년대 파시스트 체제가 수립한 각종 사회 제도와 경제 관계들은 전후에도 상당 부분 계승되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 많다. 그런 면에서 남북한의 역사를 읽는 데도 일본 파시즘의 영향력을 추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유럽의 역사에서 나치즘과 파시즘의 영향력을 파악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한 일이듯 말이다.
태국의 사례가 중요한 것은, 당시 태국이 일본을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사실상 유일하다시피한 독립국이었기 때문이다. 즉, 주권 국가로서 태국은 1930년대에 자신만의 사회 개조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이는 식민지였던 한국이나 여타 동남아시아 국가와는 무척 다른 조건이었다. 그리고 1932년에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에 피분과 그의 동료들이 선택한 사상은 바로 파시즘이었다. 당시 일본의 세력권이 미치던 권역에서 독립국이라고 할 수 있었던 중국과 태국이 모두 파시즘 내지는 그와 유사한 우익 전체주의 사상을 깊이 받아들인 것은 우연이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거리에서 본 1939년의 민주기념탑의 ’민주‘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것은 왕실이 모든 걸 통제하는 시암 대신에 모든 타이족이 하나의 유기체로서 각성하여 진정한 민족의 주인이 되라는, 매우 파시즘적인 의미의 민주주의였다. 피분과 그의 동료인 프리디 파놈용, ’태국의 괴벨스‘를 맡은 루앙 위칫와타칸은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 중국 등 1930년대를 풍미하는 파시스트 정권들의 사례를 학습하고 태국의 맥락에 적용하고자 했다. 중국인을 ’아시아의 유대인‘이라 부르면서 태국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는 화교에 대한 탄압과 강력한 동화 정책을 실시한 것은 대표적인 예시였다. 그런 의미에서 팟타이는 일종의 혁명적인 ’파시스트 국수‘이기도 했다.
피분의 파시즘 정책은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급격한 변화와 계속해서 상호작용했다. 특히 그는 일본의 만주사변이나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처럼, 파시스트 국가들이 국제연맹 질서에 대해 가하는 도전에 큰 영감을 받았다. 태국은 19세기부터 영국과 프랑스 양측에 계속해서 영토를 할양하며 식민화를 피할 수 있었다. 서쪽의 버마 국경 지대, 남쪽의 말레이 국경 지대, 동쪽의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 지대는 모두 영광스러운 타이족의 영토였지만 이제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손에 들어간 실지(失地)였다. 물론 그 주민들은 종족이나 언어적으로 타이족과 다들 거리가 있었지만, 위칫와타칸을 비롯한 타이 민족주의 이데올로그들은 그들이 실질적으로는 ’대타이족‘의 범주에 들어간다며 실지 회복 운동을 정당화했다. 게다가 히틀러가 유럽에서 독일 민족의 실지를 회복할 수 있다면 태국인들이 그러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쿠데타 이후 개혁을 시작한 지 10년도 안 된 태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세력을 상대로 승리한다는 전망은 공상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1940년, 나치 독일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속도로 프랑스 본국을 점령하면서 갑작스럽게 현실적인 목표로 다가왔다. 본토라는 주인을 잃은 식민지 정도는, 나름의 근대화로 역량을 축적한 태국도 충분히 상대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1940년 여름 즈음부터 피분은 프랑스 식민 당국에 태국의 정당한 영토를 다시 반환하라는 요구를 제시했다. 물론 프랑스 당국은 아무리 본토가 빼앗겼어도 그들이 무시하는 아시아의 약소국의 말 따위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피분은 반프랑스 시위를 동원하여 여론을 조성했다. 피분은 ’동족과의 재결합을 매우 열망하는 타이인들의 운명에 대한 인도적 우려‘에 근거하여 프랑스에 가하는 도발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독일 특파원은 피분과 반프랑스 시위대를 보며 ’태국 민족의 정신적 각성‘을 목도했다고 썼다. 피분은 독일의 유럽 전쟁이 격화되면,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이 장차 동남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들을 접수하리라 전망하고 일본의 지원을 통해 프랑스와의 대결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추축국에 가입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도쿄에 타진하면서, 1941년 신년에 피분은 프랑스군의 도발에 반격한다는 명목으로 공세를 개시했다. 태국군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육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선전했다. 하지만 해군 전력의 격차를 극복하지 못한 태국 해군은 해전에서 참패했고, 이 시점에서 일본이 개입하여 중재안을 마련했다. 일본 입장에서는 태국뿐 아니라 이제 나치 독일의 종속국이 된 비시 프랑스와의 관계도 중요했고, 양측이 만족할 합의안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결국에 피분은 초기 요구치를 대폭 축소한 제한된 영토만을 돌려 받으라는 일본 측의 제안을 수용했다. 피분은 이 시기부터 일본이 표방하는 아시아주의의 진의를 의심하기 시작했지만, 어쨌든 아시아 국가가 유럽 제국주의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대단한 선전이 될 수 있었다. 방콕 시내 한 가운데에는 이 승리를 기념하는 거대한 승전 기념비가 건설되었고,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전쟁 이후 피분은 일본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기보다는, 오히려 상황에 맞춰가면서 대응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이 태도는 전후에 태국, 나아가 피분 자신도 생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일본은 남방작전을 통해 인도차이나 전역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면서, 태국에 어서 추축국에 합류하라고 촉구했다. 태국 영토를 영국령 말레이 반도와 버마로 향하는 진격로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피분은 태도를 바꾸어 엄정한 중립을 선언하였고, 진노한 도쿄 정부는 태국군을 공격하여 추축국 가입을 강제했다.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한 태국은 일본으로부터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아내기도 했는데, 구 시암 왕국에 속했던 영국령 식민지 영토들을 일정 부분 반환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일본이 승리하여 대동아공영권과 동아협동체의 이상이 작동하기 시작한다면, 태국이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의 가장 핵심적인 협력 국가로서 높은 지위를 얻어낼 것은 자명했다. 한편 일본군은 이 시기 태국 영토를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하면서 전시 인프라 건설을 비롯한 각종 동원을 실시했는데, 전쟁 포로들로 태국과 버마, 말레이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는 프로젝트가 대표적이었다. 이 철도는 건설에 동원된 포로들의 높은 사망률로 인해 ’죽음의 철도‘로 불리웠으며, 훗날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 ’콰이강의 다리‘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전세가 연합군 측으로 기울면서 피분은 서서히 일본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943년에 일본은 대동아회의를 개최하여 아시아 제민족이 일본의 도움을 통해 서구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선포했는데, 피분은 이 회의에 참석하기를 거부하여 일본의 분노를 샀다. 1944년에 추축국의 패색이 완전히 짙어지자 피분은 은퇴를 선언했고, 태국은 점차 파시즘적 기획을 취소하며 연합군으로 넘어갈 준비를 시작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에 선전포고한 태국은 명백한 추축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처리 과정에서 최소한의 조치만을 받은 채 생존할 수 있었다. 피분은 전범으로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오히려 전후에 친미파로 변신하여 1948년부터 1957년까지 다시 총리를 역임했다. 태국군은 한국 전쟁으로 파병되어 과거의 적인 연합군과 나란히 서서 한국 전쟁에서 공산군을 방어해낼 것이었다. 미국은 피분의 과거와 무관하게 그가 아시아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반공 지도자라는 데 흡족해했다. 피분은 이후 또 다른 쿠데타로 실각하였지만, 한때 자신의 동맹이었던 일본으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다시 수쿰빗의 혼란한 도로에서, 피분이 만들었다는 팟타이를 먹으면서 그 시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파시즘을 인류 최악의 범죄라고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피분송크람을 비롯한 20세기 중반의 아시아 지도자들에게 파시즘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사상이기도 했다. 특히 그것이 아시아 민족의 힘으로 서구를 몰아내자는 일본식 아시아주의와 결합한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일본과 함께 영국 제국주의자를 타도하자는 인도 국민군의 지도자, 수바스 찬드라 보스도 그런 인물이었다. 실제 일본군은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콧대 높은 백인 나으리들을 단박에 무찌른 해방군이자 영웅, 아시아인들의 자존심으로 환대 받았다. 일본군의 주둔과 가혹한 전쟁 물자 징발을 거치면서 그런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집힐 것이었지만, 백인 지배자들도 패배하고 꼴불견인 모습으로 주눅들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1945년 이후 아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엄청난 자신감의 원천이 되었다. 전시 동남아시아를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제국의 공간적 질서에 따라 재편하려 했던 움직임도 짧았지만 전후에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일본의 법학자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국체(國體) 개념을 동남아시아 엘리트들에게 전파시키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물며 이미 30년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던 한국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일본의 아시아주의와 대동아공영권의 이상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조선인들은 모병소로 향했고, 지식인들은 영국 동양 함대 격멸 같은 뉴스에 환호를 내지르고 자발적으로 시를 썼다. 그들이 과연 제국 질서에 순응하며 출세하고자 했던 기회주의자들이기만 했을까, 아니면 정말 진심으로 품고 있던 어떠한 신념과 사상에 따라서 행동했다면 어떨까. 심지어 이범석과 같은 독립운동가는 진심으로 나치즘에 감명 받기도 했었다.
역사의 경험은 파시즘이 단순히 광기에 휘둘린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다수, 그것도 고도로 훈련된 엘리트들에게도 신념을 부여해주는 매력적인 신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파시즘이 세계에서 파문당한 1945년 이후에도 파시즘 사상을 속에 품은 엘리트들은 승승장구했으며, 대대적인 성공까지 거두기도 했다. 아마 이것이 파시즘이 던지는 가장 어려운 질문일 것이다. 파시즘은 대체 인간의 어떠한 본성을 자극하기에 인간은 파시즘에 왜 그리 취약한가? 그리고 ’사악하다‘고 생각되는 사상이 부정할 수 없는 성취를 낸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평가해야만 할 것인가?
한편으로 추축국과 연합국 사이에서 복잡하게 오간 피분은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마찬가지 행보를 보이고 있는 오늘날의 태국 외교 또한 연상시킨다. 물론 중국계를 억압하고 태국 민족 정체성을 강조한 피분과 달리, 오늘날 태국 화예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비롯하여 자신들의 중국적 기원을 더 강조한다는 점은 큰 차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서구적 가치와 자유주의의 보편적 확장을 믿는 미국 정부와, 왕실, 군부, 불교가 주축이 된 보수적 전통주의자들의 헤게모니가 계속 위협 받고있는 태국 정부의 간극은 태국을 점차 ’아시아적 가치‘를 내세우는 중국과 밀착하도록 만들고 있다. 물론 아시아주의를 내세운 일본의 본질은 결국 자기 이익 추구라는 것을 깨달은 피분이 결정적 측면에서는 일본과 거리를 유지한 것처럼, 중국의 본질 또한 자기 이익 추구에 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 분명한 태국 엘리트층도 끝내 최종적으로 중국을 향하진 않을 것이다. 이 점은 ’중국 견제의 린치핀‘으로 여겨지는 베트남도 비슷하고, 큰 틀에서는 이 지역에서 가장 대국인 인도네시아도 다르지 않다. 부활하는 전통과 서구적 소비 문화가 계속해서 충돌하는 가운데, 동남아시아 각국과 지배 엘리트들은 자신의 이익에 맞춰서 미국과 중국, 일본과 인도 사이에서 현란한 외교적 기동을 구사하고자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