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의 강남이라고 할 수 있는 수쿰빗 대로에 숙소를 잡고 거리를 둘러보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글로만 읽어 왔던 현장을 훨씬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수쿰빗은 도시화, 상업 팽창, 세계화 등이 빚어낸 에너지와 혼란, 모순이 응축된 곳인 것만 같았다. 하늘을 찌르는 호텔과 명품이 가득 쌓인 쇼핑몰을 태국의 부유한 중산층들과 동아시아, 중동, 유럽에서 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거닐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로는 말도 못 할 수준의 교통 체증과 소음이 계속 귀를 시끄럽게 했다. 건물 사이의 좁은 6차선 도로를 지나는 방콕의 자랑인 고가 전철, BTS(Bangkok Mass Transit System)는 마치 이 곳이 블레이드 러너나 아키라의 세계인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게 했다. 그리고 밑에서는 하루에 얼마를 받는지 알 수 없는 노무자들이 일회용기에 대충 올려진 국수를 먹고 있었고, 외부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들을 파는 노점상들이 식당과는 비교도 안 되게 저렴한 가격으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수쿰빗 대로변의 미래적이고 깔끔한 마천루들은 바로 옆의 골목에 펼쳐진 허름한,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오래된 건물들과 지나치게 잘 대비가 되었다.

세계화에 따른 자본과 관광객 유입은 미군이 만들어낸 환락의 도시를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 올리고 있었고, 많은 태국인들은 거기서 창출되는 부의 미미한 부분만을 공유할 따름이었다. 물론, 자신의 부와 매력을 아낌없이 드러낸다는 차원에서 수쿰빗이 발산하고 있는 혼란한 에너지는, 동아시아의 여러 도시가 가진 질서 잡힌 면모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표면적 엄숙주의로 꽁꽁 싸매고 있는 서울과는 다른 해방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래서 동북아시아인들이 코로나 이전에 그렇게 동남아시아를 오갔구나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