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인상기 (3): <왕과 나>와 냉전 오리엔탈리즘

방콕 인상기 (3): <왕과 나>와 냉전 오리엔탈리즘

주말의 명화 <왕과 나>의 현장을 보다.

임명묵

파시즘의 유산이 어떤 방식으로 남아 있다고 한들 1945년 5월과 8월에 파시즘은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로서는 파산했다. 뉘른베르크와 도쿄에서 각각 열린 전범 재판은 파시즘을 인간성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했고, 이제 공식적으로 파시즘을 주장하는 이들은 지하 세계로 들어가 사실상의 컬트 집단으로만 이어지게 되었다. 세계사적 차원에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동맹으로 파시즘을 몰아낸 것은 계몽주의의 두 자식이 계몽주의의 그림자였던 낭만주의의 도전을 분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자연히 이제 남은 것은, 누가 계몽주의의 진정한 상속자인가를 둘러싼 투쟁이 되었다. 영미 연합군과 소련이 오랜 불신을 딛고 결성한 대동맹은 그 안에 내재해 있던 오해와 불신의 누적으로 붕괴했고, 1948년 즈음에 두 진영은 언제 동맹을 맺기라도 했냐는 듯이 곳곳에서 대립하고 있었다. 최초의 전선은 소련군이 진주한 동유럽과 미군이 진주한 서유럽 사이에 그어졌는데, 그 선은 처칠의 유명한 표현인 ‘철의 장막’으로 구체적인 이미지를 획득했다. 이제 완전한 지정학 전략가로 변신한 스탈린은 동유럽의 완충지대를 통해 서쪽에서 제기되는 위협을 사전에 막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동유럽에는 스탈린에 충실히 협조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정권이 들어섰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은 철의 장막 서쪽의 경제를 부흥시켜 공산주의자들의 침투를 막고자 했다.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의 전반적 그림은 바깥에서 보기에는 아주 명확하게 다가왔다. 소련은 러시아 제국을 계승하여 자신의 제국을 확대하고 동유럽 각국의 주권과 자유를 박탈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미국은 공산주의의 탈을 쓴 러시아 제국의 확대를 막고자 막대한 지원을 베푸는 나라로 여겨졌다. 이 구도는 스탈린의 지시로 시작된 1950년의 한국 전쟁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하지만 유럽 바깥에서 상황은 단순하지 않았다. 유럽 바깥의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 충돌하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그림보다는 더 복잡한 모습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20세기의 여명부터 시작되고 있던 비서구 민족들의 각성은 제2차세계대전을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19세기에 세계를 분할했던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이 동남아시아에서 아시아인의 제국인 일본에 허망하게 무너진 모습은 나머지 비서구 세계의 정치적 열망을 고무시켰다. 한편 총력전으로서 제2차세계대전은 제국들이 그동안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던 식민지의 인적, 물적 자원까지 총동원하게 만들었고, 근대성의 경험은 서구식 교육을 받은 소수 엘리트를 넘어서 대중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었다. 그 대중들이 유럽 제국의 지배를 거부하는 순간이 바로 식민 제국이 도미노처럼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인도네시아는 일본군 점령으로부터 해방됨과 동시에 네덜란드를 향한 독립 전쟁을 개시하면서 탈식민화의 포문을 열었다.

하지만 비서구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경영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자발적을 동참해줄 생각이 없었다.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반분하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사이에 이들의 국가적 자부심을 증명하는 것은 그들이 비서구 세계에 커다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제국은 자신들의 ‘문명화 사명’을 통해 식민지를 올바로 통치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언젠가 식민지의 자치, 나아가 독립까지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시간표를 정하는 것은 식민지인들의 의사가 아니라 제국의 의사여야 했다.

19세기식 제국을 약간만 수정하여 20세기에도 그대로 운영하고자 했던 영국과 프랑스의 청사진은 그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20세기의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 모두가 유럽 제국의 존속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은 필리핀을 중심으로 대양의 도서들에 자신만의 제국을 경영하고 있었고, 소련은 새로 획득한 동유럽뿐 아니라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계승한 캅카스와 중앙아시아에서 제국적 통치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결코 자신을 제국이라 규정하지는 않았고, 실제로도 그들의 ‘제국성’은 일반적 제국주의보다 훨씬 더 모호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제국과 식민지의 경계선을 철저히 그은 편이었다면,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이 그 경계선을 철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필리핀과 소련의 중앙아시아는 자신들의 개발 프로젝트가 아시아 사회에서도 보편적인 근대인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증거로 제시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통치는 더 ‘도덕적’이었다. 두 제국은 1945년 이후의 세계에서 유럽 식민 제국을 해체하고, 각 민족이 국가를 이루어 지구적 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합의를 이루었다. 유엔(United Nations)은 그렇게 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제국주의 질서 아래에 있던, 탈식민화의 흐름에 고무된 비서구인들이 보기에 미국과 소련은 결코 같은 종류의 국가가 아니었다. 비서구 사회에서 선교사와 기업을 통한 미국의 활동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던 유럽 제국의 활동과 흡사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소련은 혁명 직후부터 반제국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1920년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개최된 동방제민족회의에서 소련은 공산주의 운동이 단순히 발전된 산업 세계에서 노동자 혁명을 이끄는 것을 넘어서 피식민 민족들의 해방 운동도 지원할 것임을 선언했다. 이후 코민테른은 비서구 세계 각지의 공산당 세포를 건설하고, 요원을 파견하고, 현지 엘리트를 파견하는 중추가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탈식민화를 주도한 민족 엘리트들의 다수가 소련에 친화적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보기에 미국은 겉으로만 해방을 이야기했지, 유럽 제국으로부터 접수한 패권을 통해 제국주의를 온존시키는, 또 다른 제국주의 세력이었다. 반면 소련은 유럽 제국의 해체를 일관되게 주장해온 진실된 탈식민 세력이었다. 즉, 유럽에서 형성된 해방자로서 미국과 압제자로서 소련의 이미지는 비서구, 특히 아시아에서는 완전히 뒤집힌 모습이나 다름 없었다.

비서구에서 조성된 이런 태도는 탈식민 운동을 대하는 미국의 태도를 매우 모순되게 만들었다. 미국은 유럽 제국의 시대착오적 아집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탈식민 엘리트들이 독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섣불리 소련에 경도되어 공산 진영에 합류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다. 미국은 때로는 유럽 제국을 압박하고, 때로는 비서구의 좌익 혁명 활동을 억누르면서, 탈식민화를 ‘질서 있게’ 이끌어야만 했다. 이 과제에 대한 미국의 답변은 탈식민화 운동을 통한 소련의 팽창을 철저히 봉쇄하고, 그를 위한 반공 민족주의 엘리트들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 신세대 지도자들은 미국의 비전에 따라서 자국 사회에 근대화 프로젝트를 시작할 것이었다. 경제와 안보 면에서 성공적인 근대화는 소련으로의 경도를 막는 가장 중요한 예방주사였다.

하지만 미국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봉쇄 정책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소련의 방파제 역할을 할 국가들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중심으로 펼쳐진 네트워크에 긴밀히 연결되어야만 했다. 장막 건너편에 대한 강력한 봉쇄는 동시에 장막 이쪽에 대한 통합(integration) 정책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시아에서도 기본적으로 서유럽과 같은 정책이 추진되어야 마땅했다. 미국 자본이 적극적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시장에 들어가 호혜적인 무역 관계를 이루어야 했고, 관료들과 민간 전문가들이 파견되어 근대화 프로그램을 도와야 했다. 이것이 세계 혁명, 민족 해방 등 소련식 국제주의에 대응하는 미국식 국제주의의 방법론이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은 태평양 전쟁으로 증대된 아시아에 대한 관심,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전쟁으로 피부로 느끼게 된 소련의 위협, 미국이 필리핀의 경험을 확장하여 아시아에서 보편적 발전을 이끌 수 있을 것이라는 새로운 사명감 등을 결합하여 아시아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와 지원을 단행했다. 미국 당국자들은 미국의 힘과 질서가 만드는 세계시장과 그 위의 상호무역이 미국, 아시아, 나아가 전세계를 공동 번영으로 이끄는 길을 닦을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미국의 아시아, 나아가 비서구 정책을 유럽 정책과 같을 수 없게 만드는 게 있다면 그것은 생소함이었다. 태평양 전쟁의 여러 전장에 대한 인식은 늘었을지 몰라도, 아시아의 핵심 국가들의 지리, 인명, 역사 등에 대해서 미국인들은 여전히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300년에 걸친 이주와 교류의 역사로 고향이자 뿌리처럼 느끼는 유럽이 판이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아시아와 절대 같은 방식으로 인식될 수 없었다. 따라서 1950년대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아시아인들에게 미국 문화를 알리고, 미국인들에게 아시아를 친숙하게 만드는 문화 정책이었다. 미국의 당국자들은 일찍부터 소련이 예술을 대내외적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보며 소련을 모방할 필요성을 느꼈다. 미국은 자신들의 문화를 통해 아시아에 친근히 다가가기를 원했고, 미국인들이 아시아 문화를 존중하는 법을 익혀 현지인들의 분노를 사지 않기를 원했다.

물론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미국의 시각은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하고 있었다. 서구의 눈을 통한 동양 이미지의 형성과 그를 통한 권력의 재생산이라는 차원에서 새로운 해방적 제국인 미국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으며, 사실 반제국주의를 표방한 또 다른 제국인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새로운 ‘냉전 오리엔탈리즘’은 구 제국들의 오리엔탈리즘과는 분명히 차이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아시아인들이 결코 유럽과 동일해질 수 없으며,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위계는 사실상 영속적이라는 것을 핵심으로 했다. 즉, 19세기 제국주의를 특징 짓는 것은 분리였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냉전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와 비서구, 발전된 세계와 발전을 시작한 세계가 종국에는 하나로 합쳐질 것이라는 통합의 비전을 핵심으로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치와 경제만큼이나, 혹은 어쩌면 더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냉전기의 문화 교류였다.

러시아계 미국인인 율 브리너를 할리우드의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 <왕과 나>와 그 원작이 되는 뮤지컬은 1950년대 냉전 오리엔탈리즘이 어떤 식으로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내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뮤지컬은 19세기 당시 시암의 국왕인 라마 4세의 가정교사였던 애나 레오노웬스의 에세이를 원작으로 한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뮤지컬과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시암을 근대화할 필요성을 느낀 몽꿋 왕이 영국 가정교사인 애나를 부른다. 별채를 달라는 애나와 후궁원에 거하라는 왕은 시작부터 충돌하지만, 애나는 후궁들과 왕의 수많은 자녀들을 보고 그들에게 서양의 문화와 지식을 전파할 사명감을 느낀다. 서구 세력이 언제라도 시암을 집어삼킬 것을 두려워하는 몽꿋은 말마다 ‘과학적’임을 강조하고, 애나가 소개하는 서구 문화의 새로운 세계에 감명을 받지만 동시에 과거 익숙했던 문화와 단절하는 것에도 스트레스를 느낀다. 그러나 애나는 마치 이해심 많은 어머니처럼 시암의 왕과 대화하며 그를 차츰 변화시킨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율 브린너 생가. 몽골계 부랴트인의 피를 이어 받은 그는 러시아 내전기 프랑스를 거쳐 미국에 정착했고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전설적 배우가 되었다. 동상 기단에는 '연극과 영화의 왕'이라고 쓰여 있다. 이미지 출처: 본인 촬영

이야기는 시암을 호시탐탐 노리는 영국에게 시암이 충분히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주고자 사절단 앞에서 극을 올리며 절정으로 향한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시암의 버전으로 각색한 애나는 시암의 왕부터 노예제를 철폐해야 함을 역설한다. 사실 이는 애나가 안타깝게 여기는 버마 출신의 공녀, 텁팀을 염두에 두고 올린 극이기도 하다. 텁팀은 궁의 젊은 남성과 사랑에 빠져 있는 상태였지만, 왕의 노예이자 후궁으로서 둘은 이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애나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통해서 몽꿋도 변화시키고 텁팀에게도 자유, 그리고 올바른 가족 결합 형태인 일부일처제를 선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절단이 시암의 근대화 성과를 보고 감명 받고 돌아갔음에도, 왕은 애나의 극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긴장은 왕과 애나가 둘이서 남몰래 춤을 추면서 풀어지는데, 여기서 둘의 관계는 명백히 로맨틱한 감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텁팀이 궁에서 남자와 도주했다는 소식은 왕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왕과 애나의 관계는 파국으로 향한다. 애나는 그간 자신의 노력이 무용했음에 좌절하고 시암을 떠날 준비를 하지만, 왕이 애나와 관계를 끊고 식음을 전폐하다 못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애나는 즉시 왕에게로 달려간다. 왕은 애나와 작별하며 자신의 뒤를 이을 라마 5세, 출랄롱콘에게 시암 근대화의 사명을 완수하라고 다독이며 눈을 감는다.

<왕과 나>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댄스 장면.

1950년대 냉전 오리엔탈리즘의 맥락을 생각한다면 <왕과 나>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아주 명확하게 보인다. 전통적으로 뮤지컬은 로맨스를 통한 남녀의 결합과 가족의 탄생이라는 결말로 미국 문화의 ‘여성적’ 면모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애나는 시암이라는 자식을 가르치는 자애로운 어머니다. 애나는 영국인이지만, 작중에서 그가 시암에 가르치는 문화의 핵심 요소는 미국적인 것이다. 몽꿋의 모델은 링컨이 되어야 하고, 그를 계몽하기 위한 작품은 미국에서 노예제 철폐를 이끌어낸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다. 반면에 애나의 조국인 영국은 시암의 자발적 근대화라는 목표를 지닌 애나와 달리 시암에 대한 정복욕에 불타는 부정적 존재로 묘사된다. 출랄롱콘을 비롯하여 애나의 교육을 통해 재탄생한 아이들은 서구 근대성의 전달자로서 애나와 아시아 민족의 상징인 몽꿋을 부모로 둔 자녀들이자, 정력적인 젊은 아시아 지도자들을 상징한다. 즉, 그들은 근대화를 완수할 아시아의 미래 세대들이다. 즉, <왕과 나>는 정복, 군사 통치, 강압과 같은 ‘남성적 방식’이 아니라, 문화 교류와 상호 이해라는 ‘여성적 방삭’으로도 아시아의 근대화를 이끌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인 셈이다. 이는 소련이 아니라, 바로 미국이 진정한 국제주의적인 탈식민 세력이라는 함의도 품고 있다.

<왕과 나>는 이후 수십 년 간 반복해서 상영될 영화사의 고전이 되었다. 특히 미국에서 그 인기는 엄청나서, 사람들은 당시 태국의 왕이었던 푸미폰이 <왕과 나>의 몽꿋의 몇 대 손인지를 알아볼 정도였다. 미국과 시암의 구도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배경으로도 계속해서 변주되면서 <왕과 나>와 비슷한 작품이 양산되었다. <왕과 나>에 사용된 의상들은 태국 실크로 제작된 것이었는데, 뮤지컬과 영화를 통해 태국 실크가 서구 시장에서 유행하게 되면서 태국의 직물 산업 성장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방콕의 주요 관광지인 ‘짐 톰슨 저택’의 주인공, 짐 톰슨이 바로 태국의 전통적인 실크 양식을 서구 시장에 공급하고자 했던 이였다. 뮤지컬 각본가인 해머스타인은 <왕과 나> 이외에도 <남태평양> 등 아시아와 미국의 새로운 가족적 통합을 설파하는 작품을 제작했고, 냉전 오리엔탈리즘은 승승장구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왕과 나>의 효과가 오래 가지는 못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들면서 아시아, 특히 동남아시아를 지긋지긋한 공간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아시아에 대한 이전의 관심은 일본이 문화적 아우라를 내뿜는 1980년대에 가서야, 아주 제한적인 수준에서나 부활할 수 있었다. 태국에서는 시작부터 그 효과가 좋지 못했다. 국민의 존경을 받는 라마 4세가 고작 영국의 과부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왕실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 없었다. 영화는 태국에서 당연히 상영 금지되었으며, 혹시라도 영화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그 영화가 태국을 깔보는 시선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며 거부감을 내비쳤다. 미국 관광객들은 태국으로 향하기 전에 함부로 <왕과 나> 이야기를 꺼내지 않도록 교육받아야만 했다. 사실 실제 역사의 몽꿋 왕은 영국인 가졍교사와 로맨스를 나누기는커녕 과연 그가 서구인의 일방적 가르침을 통해 근대화된 인물이 맞기나 한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몽꿋의 동시대 사람이 작성한 그의 일대기는 이렇게 말한다.

‘몽꿋은 시암과 유럽의 문헌을 모두 섭렵하여 점성학에 박식했다. 태양과 모든 행성의 움직임을 매우 자세히 계산할 수 있었고, 일식과 월식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예측하여 그 누구도 그를 따라올 수 없었다. 그는 또한 ’이오끄랍피(지오그래피)‘도 잘 알고 있어서 태양과 별들을 정확하게 측정했다. 그는 줄곧 불교의 삼보(부처, 불법, 승가)에 충실했다.’

몽꿋은 시암의 전통적인 불교 세계관과 서구의 과학적 세계관을 모두 자신의 지식으로 흡수하여 내면에서 조화시킨 인물이었다. 그는 서구인들을 상대로 과학 지식의 합리성은 인정하지만 종교로서 기독교는 자의적인 것 아니냐는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고, 과학적 천문학의 우위를 보여주기 위해 본인이 직접 개기일식 시점을 계산하여 왕실 점성술사들의 콧대를 눌러버리기도 했다. 몽꿋의 사망 자체가 일식을 보러 가는 과정에서 말라리아에 걸렸기 때문임을 생각하면, 그는 애나가 묘사하고 이후의 각색 작가들이 생각하는 ‘카리스마 있고 열정에 찼지만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아시아 군주는 결코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사실 <왕과 나>가 상정한 청중은 태국인이나 여타 아시아인은 아니었다. 해머스타인이 상정한 청중은 아마 명백히 미국인이었을 것이다. 냉전과 탈식민화라는 새로운 시대 속에서, 넓은 세계를 상상하고 그 속에서 미국의 역할을 자각하도록 하는 것이 이 작품의 핵심적 기능이었다. 아시아인은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서구인(애나)의 작용을 수용하는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젠더 관계의 역전이라고까지 해석할 수도 있다. 계몽하는 애나는 남성적 존재고, 애나에 이끌리는 몽꿋은 여성적 존재다.

위의 내용은 크리스티나 클라인 교수의 책 Cold War Orientalism: Asia in the Middlebrow Imagination, 1945-1961에서 대부분의 내용을 참조했다. 평소에 명성만 듣던 율 브린너가, 냉전이라는 배경 속에서 아시아와 미국을 오가는 이런 시대의 흐름과 함께 했다는 것은 내게는 너무 신선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그 후 집에서 <왕과 나>를 전부 시청하고, 방콕에 가면 <왕과 나>에 등장한 몽꿋과 출랄롱콘의 동상을 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태국인들은 싫어할 일이겠지만 말이다.

방콕의 몽꿋 대왕 동상. 잘 보면 율 브린너와 닮은 것 같기도..? 이미지 출처: 본인 촬영
라마 5세 출랄롱꼰의 동상. 이미지 출처: 본인 촬영
두싯의 왕궁과 라마 5세 동상. 이미지 출처: 본인 촬영

뮤지컬이라는 장르, 음악을 통한 이미지의 형성과 아시아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왕과 나>에는 케이팝과 통하는 면이 있다. 물론 케이팝과 정반대되는 면도 많다. 그에 대한 내용을 쓰고 싶은데, 모스크바로 가야 하는 비행기편의 출발이 곧 다가와서 이만 줄여야 할 것 같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여력이 되면 밤에 관련 내용을 추가하도록 하겠다.

이 글은 방콕의 수완나품 공항, 인도의 벵갈루루 공항, 아랍 에미레이트의 두바이 공항, 그리고 인도양 상공에서 쓰였다.

작가와 대화를 시작하세요 (2건)
1 이달에 읽은
무료 콘텐츠의 수

유료구독을 하면 마음껏 편히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하시면 갯수 제한 없이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