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타통(関東打通) (1) - 하치오지, 가마쿠라

관동타통(関東打通) (1) - 하치오지, 가마쿠라

이틀 간의 짧은 관동 여행.

임명묵

왜 써야 하는 글은 안 쓰고 또 여행기냐... 하면 3월 3일에 개인적으로 팬질을 하는 이달의 소녀가 도쿄 콘서트를 열었기 때문이다.

해외까지 콘서트 보러 가는 게 정신 빠진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이 시점에서는 정말 이게 이달의 소녀가 여는 마지막 콘서트가 될 것이라 생각했고, 사실 전망이 갑작스럽게 달라진 지금에서도 11명/12명이 함께 여는 콘서트가 앞으로 열릴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인 상황이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걸 빌미로 동경에 다시 간 김에, 이번에도 2박 3일 일정을 잡고 이곳저곳 둘러보기로 했다.

콘서트 장소는 도쿄 서쪽 근교의 다치카와라는 곳이었다. 다치카와에서 하루 묵고 나니 이곳이 더 서쪽의 하치오지에 있는 쇼와 천황의 묘와 은근 가까운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쇼와 천황 릉은 언젠가는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엄두를 못 내고 있던 차. 다치카와까지 온 김에 보고 가기로 결정.

55분 시간 표시 되어 있는 쪽이 다치카와. 정말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쭉 뻗은 주오 본선은 언제나 신기하다. 물론 그렇다고 딱히 빠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만...

다카오 역에서 내려서 1km 정도 걸으면 쇼와 천황릉 입구를 볼 수 있다. 사실 원래는 다이쇼 천황 묘역으로 조성된 것 같고 그 이후에 쇼와 천황 묘까지 같이 조성하게 된 것 같다. 하늘을 찌르는 나무가 우거진 숲의 그늘로 들어가자 레이와 시대에서 헤이세이 시대를 건너 뛰고 단번에 쇼와 시대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묘역 안내판. 다이쇼/쇼와의 천황릉과 황후릉이 하나씩 놓여 있다.

쇼와 천황 릉은 무척이나 평온했지만 여러 감상이 안 들 수가 없는 공간이었다. 너무나도 평온하고 고요한 이 공간에 누워 있는 사람의 이름으로 수천만 명이 사망한 대전쟁이 벌어졌다는 게 다소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국가를 무릎 꿇리기 위해서 파멸적인 원자무기의 위력이 실험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히로히토라는 ‘아버지’ 밑의 사람들은, 그들이 아버지를 숭배했건 거부했건 간에 자신들의 나라의 역사를 계속해서 써나갔다. 그들이 써간 역사는 B-29 폭격기로 쑥대밭이 되었고, 해체된 제국에서 수백만의 사람이 피난민으로 물밀 듯이 쏟아지는 폐허가 고속철도와 마천루의 숲으로 재건되는 경제 기적의 시대로 기억되었다. 그리고, 1989년에 아버지가 죽자마자 아이들은 갈 길을 잃었다. 그들은 아이인 채로 나이만 먹어갈 따름이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내 눈 앞에 누워 있는 사람의 이름, 그리고 신체가 담고 있었다.

이 릉은 다이쇼 천황 다마릉이다. 쇼와 천황릉이 단이 낮아서 가까이서도 잘 보였다면 다마릉은 계단이 굉장히 높아서 저 먼 발치 밑에서야 릉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천황이 현인신으로서 국체의 상징이었던 1926년과 전후 민주주의 하에서 일본국의 상징으로 내려오게 된 1989년의 차이일까?

다마릉도 뒤로 하고 다음 행선지를 향해 떠나고자 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 분이 거목의 숲을 지나 쇼와 천황릉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의 추측일 뿐이었지만 그는 분명히 전쟁 이전을 살아 보았을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 할머니는 젊은 조선인 둘을 향해 환히 웃어보이며 “오하요”라는 인사를 보냈다.

이 인사를 듣자마자 무수한 질문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어떤 이유로 쇼와 천황의 릉에 들린 것일까? 그가 살아온 삶은 어떤 삶이었을까? 그에게 쇼와 천황,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쓰여진 쇼와 시대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일본어를 하지 못했기에 머리를 스치는 이 질문들을 입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우리는 쇼와의 공간을 벗어나서, 20세기를 지키는 거목들에 작별 인사를 보내고 다시 헤이세이로, 그리고 레이와로 향했다.

다카오 역 앞의 식당에서 장어 덮밥을 먹었는데 아주 맛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무려 가마쿠라.

50-60km 거리를 거의 2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주파해야 하는 푸짐한 대중교통 일정이었다. 이걸 막상 진짜로 해보고 나니, 지난 이틀 간 내 동선이 어이가 없었다. 도쿄에서 동쪽으로 한참 가야 나오는 나리타로 들어와서, 도쿄도를 돌파해 하치오지를 찍고, 다시 남쪽으로 가마쿠라까지 가다니... 이야말로 관동타통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짧은 여행기의 제목이 관동타통이 되었다.

가마쿠라로 가는 길은 그 유명한 에노시마 전철을 통해서 갔다. 한국 젊은 남녀가 꽤 보였는데 슬램덩크 얘기를 하는 것을 간간히 들을 수 있었다.

낡은 선풍기.. 정겨운 모습 혹은 답답한 모습.

그 유명한 에노시마 전철의 해안선 라인. 나는 슬램덩크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성지순례 느낌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명소를 직접 다닐 때의 느낌은 언제나 좋다.

에노시마 전철은 좁은 주택가를 실날처럼 통과하는 작은 전차가 주는 특유의 느낌 때문에 인기가 좋은 듯 했고, 직접 타보니까 왜 이게 그런 명성을 얻었는지도 실감이 갔다. 물론 전철가 옆에 사는 사람들의 소음 문제는 어떨런지도 조금 궁금해졌지만 말이다.

가마쿠라에 간 이유는 관동의 자랑이자 세계적 불교 문화 유산인 가마쿠라 대불을 보기 위함이었다. 가마쿠라 대불은 하세역에서 내리면 볼 수 있다.

대불을 보기 전에 가마쿠라 문학관이 있기에 잠시 들려 보았다. 근대 도쿄가 개발될 때, 가마쿠라는 전원주택이 많은 고급 주택가로서 개발되었고, 그 때문에 문인들도 여기서 많이 살았었다고. 원래는 1936년에 마에다 가문의 별장으로 세워진 곳인데, 훗날엔 문학관이 되었다. 미시마 유키오가 <봄의 눈>을 쓸 때 이 건물을 상상하며 썼다고 한다.

역시 일본은 따뜻한지 3월 초인데도 벌써 꽃이 피고 있었다.

드디어 보러 가는 가마쿠라 대불. 가마쿠라 대불은 고토쿠인(고덕원)에서 13세기에 걸립한 거대한 청동 불상이다.

인왕문을 지나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대불이 나오는 구조였는데, 대불을 마주하기 전에는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한 발을 더 내딛자 가마쿠라의 대불이 압도적인 크기로 나에게 다가왔다.

대불을 보자니 13세기의 승려와 장인들이 이 거대한 불상을 만들고자 얼마나 노력을 했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어머니 조국상을 볼 때도 그러했지만 이러한 거대한 기념비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게 해주고, 그렇게 초월적인 감각을 전해 준다는 점에서 너무나 소중한 듯 하다.

줄을 서면 내부로도 들어갈 수 있는데 길이 꽤 협소하다.

대불을 보고 나왔다. 원래 가마쿠라의 다른 관광지들도 조금 더 눈 여겨 본 게 있었는데 촉박한 일정을 고려하여 하세역 인근에서 볼 것만 좀 보고 가마쿠라에서는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간 곳은 하세데라.

가마쿠라 시대에 세워진 이 유서 깊은 사찰은 9.18m짜리 거대한 목조 관음상으로도 매우 유명하다. 안타깝게도 관광객 사진 촬영은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하세데라의 관음상,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깨끗한 절의 연못에는 큼지막한 잉어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가마쿠라를 떠나는 길. 기념품점에는 가마쿠라와 관련된 여러 과자를 팔고 있었는데, 확실히 무가 시대의 여러 역사적 상징들이 계속해서 기념품으로 재생산되는 것들이 흥미로웠다.

해는 뉘엇뉘엇 넘어가려 하고 있었고, 동에서 서로, 서에서 남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던 관동타통은 다시 동쪽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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